5회

1물

1

 

 오래된 기억일수록 더 자주 마음속으로 되뇌게 되므로

기억이라기보다 이야기에 가깝게 된다.*

 

<더없이 오래 사는 따개비>는 구십 분이 조금 넘는 흑백영화다. 한여름의 오후, 둘희는 큰 기대 없이 극장의 지하 상영관에서 한기연 감독의 영화를 봤다. 영화 속 배경은 황량한 겨울 바다였고, 젊은 연인은 모래밭을 걷거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둘만의 작별 의식을 치렀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둘희는 자기도 모르게 팔을 어루만졌다. 스크린에 비친 장면들이 둘희의 살갗에 흠집을 남기고 간 것 같았다. 어떤 힘이 둘희의 손목을 꽉 붙들고서 깊은 물까지 이끌고 갔다가 홀연히 사라져버린 기분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둘희는 가슴 한편이 무척 시리고 쓸쓸했지만, 동시에 모노톤으로 펼쳐진 한적한 해변에서 뜨겁고 숨가쁜 고립을 깊이 체험한 듯했다. 심장박동마저 영화의 리듬에 따라 뛰고 있는 것 같았다.

극장을 나왔을 때 밖은 여전히 습하고 무더웠다. 발가락 모양대로 밑창에 땀자국이 생긴 라탄 슬리퍼를 신고서 둘희는 하염없이 도시를 걸었다. 감상을 나눌 동행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도 그렇게 혼자 영화의 여운에 빠져 있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눈에 비치는 도심의 풍경이 전과 달리 가깝고 친숙하게 느껴졌다. 양산을 쓴 여자들과 검은 먼지를 내뿜으며 지나가는 오토바이, 난삽한 상점 간판들까지. 모두 생생하게 여름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세상은 여지없이 잔혹하면서도 모자람 없이 따뜻했다. 한기연의 영화가 그 모순된 진실을 일깨워주었다. 영화 속 겨울의 성근 빛줄기와 몽상에 잠긴 듯한 연인의 표정, 별천지가 된 밤바다와 방죽을 따라 내달리는 아이. 둘희는 그 아이가 저지르는 장난이 끔찍했지만, 아이를 뒤틀리고 사악한 존재로만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둘희는 누구라도 그 영화에 관해 정교한 언어로 정성스럽게 설명해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런 이미지와 그런 정서를 만들어낸 한기연이란 사람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싶었다.

 

한기연  월출이란 단어에서 시작했어요. 일출의 반대말은 일몰이 아니라 월출인 거죠. 그걸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일출과 월출’이란 파트가 떠올랐어요. 그런 게 또 뭐가 있을까요? 쉬운 반대어 말고요. 무(無)나 비(非) 같은 단어는 금지하고, 그러니까 의미와 무의미, 선형과 비선형, 이렇게 쉬운 쪽 말고, 어려워도 대칭이 되는 다른 말을 끝까지 찾아보는 거죠. 가령 노화라는 말은 있는데 유화라는 말은 없죠. 하지만 저는 몸이 늙어가는 것처럼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은 어려지고 있다고 느껴요.

기자  <배부른 구름>이란 장편 데뷔작이 바로 그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거죠?

 

둘희는 한기연의 인터뷰가 실린 영화 잡지에 투명 포스트잇을 붙여 표시했다. <배부른 구름>, 찾아봐야 할 영화였다.

 

기자  어찌 보면 익숙한 ‘구도와 역구도’ 문법인데요. 동시에 감독님의 영화에선 영화의 매끄러운 편집 기법을 비트는 이른바 ‘오즈적인 응시’도 느껴집니다.

한기연  오즈 야스지로…… 저는 잘 몰라요. 제가 찍고 싶은 건 밀물과 썰물이었어요. 어떤 리듬이었어요.

기자  왜죠? 왜 그런 대칭 구조에 끌렸나요? 끌렸다는 말이 맞을까요?

 

둘희는 인터뷰에 드러나지 않은 한기연의 ‘쉼표’를 느꼈다. 침묵하고 고민하며 알맞은 단어를 고르는 한기연의 시간. 그 시간을 함께하듯 둘희는 반질반질한 잡지 페이지에서 눈을 떼고 도서관의 널찍한 창유리를 바라봤다. 한기연이 쓰는 단어들을 마치 새알처럼 가슴에 품고 어감을 음미했다.

 

한기연  어릴 때부터 저는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지구가 돌고 있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어쩌다 나는 이 빙글빙글 도는 지구에 올라탄 걸까.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다.

기자  감독님의 그런 의문이 영화 속 아이 캐릭터를 만드는 데 영향을 끼쳤을까요?

 

둘희는 잡지에 실린 영화 속 아이의 스틸 컷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까맣고 숱이 빼곡한 속눈썹과 흉터가 가득한 무릎, 작은 손톱 사이사이에 낀 때, 아이가 자기의 분신처럼 들고 다니는 단단하고 납작한 쇠붙이.

영화에서 아이는 갯바위에 달라붙은 따개비를 떼어 아버지의 줄칼로 껍데기를 갈았다. 추위에 고부라지는 손에 입김을 불어가며 마치 지루한 노동을 해치우는 사람처럼 성실하게 따개비를 고문했다. 아이는 암석의 굴곡에 맞춰 껍데기 모양을 만들어간 따개비의 노력과 시간을 일부러 망가뜨렸다. 스을 스을 스을, 아이가 따개비의 외투강을 갈아대면 따개비는 집처럼 안락하게 붙어 있던 바위에 다시는 안착할 수 없었다. 곤욕스럽고 혼란스러운 몸뚱이가 되어 한동안 바닷물을 둥둥 떠다녀야 했다. 영화에서 그 아이가 만들어내는 철과 석회질의 마찰음이 배경음악처럼 불편하게 흘렀다.

마모, 닳아 해지는 느낌.

몇 안 되는 상영관을 찾아 그 영화를 두번째로 봤을 때, 둘희는 손톱자국처럼 자신의 피부에 아로새겨진 감각이 영화 속 ‘갈아대는 사운드’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아이가 조각품을 다듬듯 따개비를 손에 쥐고 껍데기 표면을 밋밋하게 만들 때, 화면에선 정오의 태양이 강하게 내리쬐었다. 어느 날엔 맹렬하게 바람이 불며 바다의 파고가 높이 솟아올랐고, 아이와 같은 해변에 머무는 젊은 연인은 뺨이 얼어붙은 채 모래사장을 걸으며 둘만의 발자국을 남겼다. 아이는 해쓱한 얼굴의 그 연인을 바라보며 그들의 보폭에 맞춰 스을 스을 스을 따개비의 껍데기를 갈았다. 같은 바닷가에서 연인은 자취를 남기려 했고, 아이는 이미 새겨진 흔적을 없앴다. 그 모순된 운동이 망쳐버린 데칼코마니처럼 한 공간에 공존해 있었다.

파괴자이자

창조자

영화를 세번째로 보고 난 뒤 둘희는 영화의 구조에 그렇게 이름을 붙였고, 자기의 해석이 한기연의 ‘대칭어 규칙’을 어기지 않은 것에 흐뭇해했다. 아이의 행위에 명칭을 붙이고서야 둘희는 그 영화의 후반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가 마을 사람들에게 연인에 관한 이야기를 꾸며내 말하는 장면. 아이는 아무 이유 없이 따개비를 못살게 굴었던 것처럼, 아무 대가 없이 연인의 모습을 아름답게 지어냈다.

그래, 어쩌면 그건 태도야.

둘희는 영화 제목의 ‘더없이’라는 부사가 왜 그토록 자신의 마음을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영화는 한없는 너그러움을 요구했다. 마치 바다처럼. 인간으로선 불가능한 깊이와 넓이를 집요하게 바라고 있었다.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든, 사건의 진실이 무엇이든, 그 사건의 인과와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이전에, 그것들 모두 이 세계의 누락될 수 없는 진실이란 걸 우선 받아들이자고 영화는 고집스럽게 주장하고 있었다. 그건 강인함일까? 이 영화는 나 같은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싶은 걸까? 골똘히 되짚어볼수록 둘희는 한기연이란 존재가 멀어지고 투명해지는 것 같았다.

 

진행자  영화에 직접 출연하셨죠? 비중이 큰 배역으로 연기를 하셨는데.

한기연  묵찌빠에서 제가 졌어요. 조감독과 저, 둘 중 한 명이 출연하기로 했는데, 제가 졌죠. 제작비가 모자랐어요.

진행자  배우로 출연하면서 의치를 끼셨어요. 그 이유와 과정에 관해 들려주세요.

한기연  다른 얼굴이 필요했어요. 다른 말투도. 제 표정이 아니었으면 했고, 제가 말하는 방식을 영화에 넣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려면 연기를 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저는 훈련을 거친 배우가 아니니까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스태프들이랑 고민하다 누가 입에 의치를 끼우면 어떻겠냐고 했고, 해보니까 괜찮았어요.

진행자  <배부른 구름>과 <더없이 오래 사는 따개비>는 후반부에 말 그대로 스토리가 무너져내립니다. 파괴하려고 일부러 쌓은 성처럼요.

한기연  성이 아니라 오두막이라도 정말 무너뜨릴 수 있었다면 안 그랬을 거예요.

진행자  오두막이요?

한기연  영화에서 뭘 부수고 태우려면 돈이 들잖아요. 십 분간 폭우를 내리게 하려면 얼마나 많은 제작비가 필요한지 알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어요. 제가 무너뜨릴 수 있는 건 스토리뿐이라는 걸 깨달았죠. 누군가의 말, 혹은 의식이요. 내면으로 들어갈수록 돈이 덜 들어요.

진행자  이 영화를 호평한 심사위원은 한기연 감독의 가장 큰 매력은 고전적이고 문학적인 아이러니라고 했습니다. 따개비를 괴롭히던 아이가 나중에 마을 사람들에게 연인을 위해 그럴싸한 거짓말을 꾸며내는 장면을 그 예로 꼽았는데요. 영화의 시선은 인물들에게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어 언뜻 차가워 보이지만, 그 거리를 통해 한 인간의 모순과 세계의 양면성을 우리가 얼마나 수용할 수 있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한기연  (고개를 저으며) 차가운 거로 하죠.

진행자  아, 그냥 차가운 거로.

한기연  의미를 찾을 거면 하나만.

진행자  왜요? 왜 하나만?

한기연  하나도 벅차요. 저는 좀 어지러워요.

진행자  어지러우세요? 영화에 관한 해석이?

한기연  해석은 해석의 길이 있죠. 그건 자유롭게 나름대로. 그런데 제가 그 해석에 이러쿵저러쿵 덧붙이는 건……

진행자  부담스러우시죠?

한기연  역겨워요.

진행자  (웃음) 솔직하시네요. 영화 마지막에 빛이 떠오르잖아요. 그 빛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이 한 명씩 아주 타이트하게 나오고요. 그 장면은 어떻게 찍게 된 건가요?

한기연  다 같이 일광욕, 그게 신에 대한 설명이었어요. 환하게 해가 비치는 날을 골라 다 같이 해바라기처럼 볕을 쬐자고 했죠. 저랑 스태프들도 다 같이.

진행자  그게 영화의 엔딩이죠. 원래는 따개비가 물살에 흘러가는 장면이 마지막 신이었는데, 편집하면서 바꾸셨다고 들었어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한기연  그게 보기에 더 나았어요. 더 불편하고. 제가 모르는 부분이 있었어요.

진행자  모르는 부분이요? 영화 끝까지 연인에 관한 오해가 밝혀지지 않는 것과 연관이 있나요?

한기연  오해는 밝혀졌다고 생각해요. 관객들이 이미 그게 오해라는 걸 알았잖아요. 그것도 밝혀진 거죠. 저는 영화 안에서든 밖에서든, 오해를 오해로 내버려둘 수 없었어요. 뭐라도 이야기의 굴곡을 만들어야 했죠. 만들면서 이게 내 한계구나 싶었어요.

 

인터뷰를 진행한 평론가는 ‘어떤 질문이든 반걸음 물러서서 무심하게 답했던 태도와 달리 한기연 감독은 자기의 한계를 말하는 부분에선 힘있는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라고 썼다. 영화 속 배경이 바닷가인 것과 관련해 ‘감독 자신의 실제 유년 시절이 반영되어 있느냐’는 질문에도 한기연은 자신이 살던 항구와 그 바닷가는 전혀 느낌이 다르다고 했다. 만약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담으려면 바다가 아니라 기름냄새 가득한 공장지대로 가야 할 거라고.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는 질문에도 한기연은 자를 대고 선을 긋듯 아닌 것은 아니라고 답했다. 한기연의 이런 태도는 그뒤에 터진 모 정치인과의 스캔들에서도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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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사건이 벌어지려면 몇 개월의 시간이 더 흘러야 했다. 그동안 둘희는 한기연 감독의 인터뷰와 단편영화들을 찾아보며 자신의 우상을 향한 동경의 마음을 키워갔다. 한기연의 기사가 실린 신문이나 잡지를 살 때면 둘희는 펜을 쥐고 기사 속 자극적인 표현들에 취소 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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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감독이었던 한기연은 <더없이 오래 사는 따개비>가 유럽 영화제에서 연달아 상을 수상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공학도 출신에 뒤늦은 감독 데뷔, 계단 위에 올라선 듯한 큰 키와 좀처럼 웃지 않는 한기연의 태도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둘희는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한기연에 관한 정보를 찾아 자신이 만든 인터넷 사이트에 차곡차곡 모았다.

 

투 디렉터 한(two_Director_Han)

 

둘희는 사이트 주소에 자기의 이름 중 한 글자인 ‘둘(two)’을 문지기처럼 세워 놓았다. 웹의 도메인만 보면 자칫 ‘두 명의 감독’이라는 오해를 줄 수 있었지만, 둘희는 오해를 감수하고 ‘to’ 대신 ‘two’를 붙였다.

사이트의 대문 화면은 영화의 첫 장면이었다. <더없이 오래 사는 따개비>는 서서히 물이 차오르는 바닷가를 비추며 시작했다. 그 영화를 다섯번째로 봤을 때야 둘희는 오프닝 장면에서 물이 육지로 차오르는 게 아니라 먼바다로 빠져나가는 중이란 걸 알아챘다. 썰물이었어요, 그렇죠? 훗날 둘희가 한기연의 무릎을 베고 누워 그렇게 물었을 때 한기연은 연인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없이 웃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카메라 앞에서는, 쉽게 보여주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 미소만으로 둘희는 대답을 들은 것만큼 충만했으나 한편으론 그 물때를 정확하게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물이 빠져나가는 바다에서 익사하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에 첫 장면과 대칭되는 후반부 장면에서 연인 중 한 명이 바다로 걸어들어가는 장면은 죽음을 암시하는 게 아니었다. 그 여자는 죽지 않았다. 그건 따개비가 물살에 떠밀려가는 장면의 의미와 비슷했다. 따개비는 아이가 줄칼로 망쳐놓은 자기의 껍데기를 지고서 다시금 몸을 기댈 수 있는 바위를 찾아 떠난다.

 

한기연  최초로 바다로 나간 사람들을 상상했어요. 뗏목을 만들어 무역풍을 타고 먼바다로 나갔던 사람들. 아마 십만 년 전이나 그보다 더 오래전일 수도 있겠죠. 그들은 얼마쯤 가면 땅이 나올 거라 믿었을 거예요. 그들이 봤던 거대한 강이나 호수처럼, 바다에도 끝이 있을 거라 짐작했겠죠. 하지만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에 점점 당황했을 테고, 물과 식량이 떨어져서 나중에는 두려움에 떨었을 거예요. 제발 벽이 있기를 바라며. 벽 말이에요. 더는 갈 수 없는 벽, 한계, 끝. 그걸 바랐을 거예요. 끝이 없다는 두려움. 저는 죽음이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더없이 오래 사는 따개비’라는 제목이 시적이라는 기자의 말에 한기연은 이렇게 답했다. 자신은 시를 잘 모르지만, 바다를 오래 보고 있으면 아득한 어지러움이 이는데,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다고. 시를 쓰는 마음도 어쩌면 그와 비슷할지 모르겠다고. 둘희는 한기연의 말들을 자기가 만든 팬 사이트에 옮겨 적었다.

바다의 벽, 축복인 죽음.

아직 스무번째 생일도 지나지 않은 둘희에겐 모호하고 난해한 말이었지만, 그렇기에 온전히 그 세계에 푹 빠져 있을 수 있었다. 머리와 가슴이 깊은 만족으로 채워지며 멀리 있는 한기연과 ‘느낌’으로 공명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러서야 둘희는 그때 한기연이란 존재가 자신에게 성년과 미성년의 경계를 넘게 했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 술을 마신 날, 처음 성 경험을 한 날, 난생처음으로 집을 나와 홀로 밤을 지새운 날,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장미꽃이나 향수를 선물받는 것으로 사람들은 성년의 순간을 자각하거나 기념했다. 둘희가 넘어선 성년의 경계에는 한기연이라는 이정표가 있었다. 한기연의 말과 생각들에 이끌리며 둘희는 한기연을 기준으로 자기의 생에 ‘이전’과 ‘이후’의 단락을 만들어갔다. 어쩌면 꼭 한기연이라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픈 청춘의 들뜬 마음이 그 대상을 찾아낸 건지도 몰랐다. 둘희는 그런 식으로 한기연을 향한 자기의 순정을 의심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둘희는 그전까지 아이돌이나 연예인에게 열광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다른 예술가나 그들이 만든 창작품을 고르게 감상하는 취향도 그때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시기였다. 둘희의 애정은 오직 한기연만을 향해 있었다. 한기연이라는 존재가 마치 지구의 중력처럼 둘희를 끌어당겼다. 둘희는 한기연의 힘과 한기연의 세계를 더 가까이 느끼고 싶었다. 왜 그런 장면을, 왜 그런 인물을 영화에서 만들었는지, 어째서 그게 자신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지 둘희는 알고 싶었다. 열병이라면 뜨겁게 앓고 싶었고 호기심이나 치기일 뿐이라 해도 그 타오르는 불길에 힘입어 한기연이 있는 곳까지 가보고 싶었다. 벽, 한계, 십만 년,

어지러움.

다 알 것 같았다. 한기연이 좋아하는 것과 한기연이 말하지 않는 것, 그녀의 안과 밖을 이루는 단어와 감각들을 하나하나 손에 쥐고 싶었다. 이미 수없이 만지고 문질러본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대체 다 알 것 같은 이 마음은 무엇일까?

 

경로 이탈이 제 삶의 모토죠.

 

한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한기연은 비교적 늦은 나이에 영화를 시작한 자신의 이력에 관해 그렇게 말했다. 둘희는 유명 소설가라는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자신의 우상을 질투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가령 영향받은 감독에 대해 이야기하며 소설가는 무척 의아하다는 듯 “타르콥스키를 몰랐다고요?”라고 되물었다. 한기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네, 그런 감독은 몰랐어요. 어릴 때부터 제가 좋아한 영화는 <슈퍼맨>이나 <배트맨>처럼 선악이 분명한 영웅 서사였어요”라고 답했다. 둘희는 그 대담 내용을 속기사처럼 받아 적은 다음 ‘투 디렉터 한’에 올렸다.

 

꼴불견  학교 영화 동아리에서 영화를 처음 찍었다고 했는데?

한기연  영화를 찍었다기보다 짐을 날랐죠. 기숙사 룸메이트가 영화를 찍는다고 해서 며칠 도와줬어요. 그런데 나중에 엔딩 크레디트에 제 이름이 있는 걸 보고 뭐랄까, 영화 하는 사람들의 공기랄까.

꼴불견  (말을 자르며) 자기 이름이 들어가서 좋았나보죠?

한기연  그건 좀 낯부끄러웠어요. 의아하기도 했고. 죽어서 제 이름이 적힌 비석을 보면 그런 기분일 것 같았는데,

꼴불견  죽음을 체험하는 듯한?

한기연  (잠시 생각) 그럴지도요. 하지만 그렇게 거창할 필요는 없죠, 영화라는 게.

꼴불견  한기연 감독의 스타일을 보면 드라마틱한 설정과 대비되는 절제미가 있는 반면에, 스토리상의 비약이 크고 작위적이라는 평도 있어요. 어떻게 생각해요?

한기연  드라마틱은…… 드라마는 흘러가는 거죠. 저는 그 흐름이 한 방향만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동시에 진행되는 다른 방향이 있고, 그걸 우리가 다 알아챌 수는 없죠. 저는 그 보이지 않는 흐름을 좇고 싶은데,

꼴불견  어려워요, 한감독님 말은. 듣다보면 추상적이라 헤매게 돼요.

한기연  헤매고 있으니까요. 저는 헤매고 있어요. 그게 제가 느끼는 드라마예요. 작위성이나 비약은, 그건 영화가 흘러가는 속도나 과정과 관련되는데, 저한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가령 카프카의 소설을 보면 (진행자를 보며 잠시 멈춘다)

꼴불견  말씀하세요.

한기연  카프카의 어떤 소설을 보면 단 몇 걸음 만에 목적지에 도달해요. ‘나는 산책에 나섰다. 단 두 걸음 만에 벌써 묘지에 와 있었다.’ (입가를 어루만지며) 저는 그 두 걸음을 알고 싶은 거죠.

꼴불견  이미 수없이 들은 질문일 텐데, 그래도 할게요. 영화를 흑백으로 찍은 이유가 뭔가요?

한기연  저는 색을 몰라요.

꼴불견  모른다?

한기연  색채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힘들어요. 그러니까, 대상이 반사하는 빛이 바로 그 대상의 색이 된다니 (고개를 흔든다) 속는 것 같아요.

꼴불견  흑백은 색이 아닌가요?

한기연  그건 음영이죠.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최소 조건이니까. 흰 종이에 흰색으로 글씨를 쓸 수는 없잖아요?

꼴불견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로 만든다는 말이 있는데, 어떠세요, 본인도 그러세요?

한기연  어디에 나온 말이죠?

꼴불견  제가 쓴 소설이요. (웃음)

한기연  (웃지 않음)

꼴불견  감독님의 연애는 어땠나요?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비밀스러웠나요?

한기연  (씹기)

꼴불견  좀 들려주시죠. 가볍게라도.

한기연  (물 마시며 계속 씹기)

꼴불견  영화 내용이 두 여성의 동성 연애 이야기인데, 감독님의 자전적 요소가 들어갔을까요? 남성과의 관계는 없으셨어요?

한기연  무슨 그따위 질문을.

 

대화를 옮겨 적으며 둘희는 그 프로그램을 처음 본 순간처럼 분노와 통쾌함을 동시에 느꼈다. 게으르고 무례한 질문을 솔직함이라 착각하는 소설가의 태도에 화가 났고, 진행자의 경력과 위압감에 주눅들지 않고 시원스레 불쾌감을 표현하는 한기연의 반응에 짜릿함을 느꼈다. 하지만 한기연과 그 소설가는 서로의 괴팍한 성미를 알아보았고, 일정 부분 상대의 그런 면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생방송으로 진행되는데다 질문의 절반 정도는 즉흥으로 던지겠다는 진행자의 제안을 한기연이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니까.

한기연은 왜 이목이 쏠리는 금요일 밤 공중파 채널에 나간 것일까.

소설가의 추측대로 독립영화가 아닌 큰 규모의 영화를 찍을 만한 대중적 기반을 만들기 위해? 그게 아니라면, 자신을 늘 한계 상황까지 몰아붙이는 한기연 본인의 가학적 성향 때문에?

 

한기연  대중이란 말은 어딘가 흐리터분해요. 그보다 제게는 관계란 말이 더 와닿아요. 저는 제 분수를 알아요. 제가 맺을 수 있는 관계는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만큼이에요. (양손을 모아 가슴에 올린 채) 원경 말고 버스트 숏으로.

꼴불견  관객은요, 관객은 감독님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하는 건가요?

 

둘희의 의문은 이후에 한기연을 직접 만나고, 그녀와 연인 사이가 된 뒤에도 쉽게 풀리지 않았다. 왜 한기연은 진심으로 즐기지도 못하면서 충분한 안전장치도 없이 언론과 미디어에 자기를 노출한 것일까. 인터뷰에서 역겹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한기연의 태도나 ‘동성 연애’가 아닌 ‘동성애’가 더 알맞은 표현이라고 교정해주는 인터뷰이를 앞에 두고 끝까지 자기의 말버릇을 고치지 않는 소설가의 교활함은 이제 막 성인이 된 둘희로선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어른의 세계였다. 하지만 적어도 한기연을 향한 물음들은 둘희에게 더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둘희는 한기연이 말하는 관계, 그러니까 한기연의 카메라 안에 담기는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었다.

 

꼴불견  이제껏 영화 현장에서 갈등이 꽤 많았다고 들었는데.

 

이 질문은 한기연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몇몇 촬영 현장에 스태프로 참여한 일을 묻고 있었다. 그즈음 인터넷 게시판에 한기연에 관한 소문이 올라왔다. 한마디로 한기연은 같이 작업하기에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평이었다. 모가 난 성격에 촬영장의 위계질서에 반발하는 골칫덩이, 자기 걸 만드는 데 좋을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의 작업에는 분란만 일으키는 이기주의자.

그러나 그런 말들조차 둘희에겐 자신의 우상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꼴불견  어때요, 지금 본인에게 쏟아지는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한기연  작가님은 그 질문을 제게 하실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누군가는 한기연이란 인물의 삶을 거칠게 요약하면 ‘중단’과 ‘도약’이란 단어가 남을 거라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영화감독으로 주목받기 전까지 한기연의 삶은 과속방지턱을 마주한 자동차처럼 무언가에 걸려 주춤해야 했다. 어느 사진 전문 잡지에 실린 한기연의 에세이에는 그녀의 십대 시절 이야기가 짤막하게 담겨 있었다. 한기연은 뚜렷한 원인을 알 수 없는 만성 통증(어느 부위인지는 정확하게 적혀 있지 않았다)에 시달리다 고등학교를 그만두었고, 그뒤로 몇 년간 책에 둘러싸여 자기의 네 평짜리 방에 고립되어 살았다. 검정고시를 치른 뒤 대학에 들어갔으나 첫 학기를 마치기 전에 다시 입시를 준비해 학교를 옮겼고, 두번째 대학에서도 학과를 바꾸며 진로를 고민했다. 방황과 시행착오는 한기연이 서른이 되기까지 이어졌다.

유명 수입 가구 회사에서 사 년간 일한 것이 한기연의 인생에 있어 가장 평범해 보이는 시기였다. 어느 영화 팬이 한기연의 회사원 시절 사보를 인터넷에 올려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둘희는 그 기사 속 단발머리 여자를 보고 작은 충격을 받았다. 빛바랜 사진에는 최연소 팀장으로 승진한 한기연 사원의 방긋 웃는 얼굴이 실려 있었다. 영화감독 한기연과는 다른, 앳되고 화사한 표정이었다. 기사 내용은 특별할 게 없었다. 신사업 개발과 아이템 확보를 위해 밤낮없이 일하고 있다는 상투적인 문구들. 그런데도 둘희는 그 기사를 한 줄 한 줄 자기의 팬 사이트에 옮겨 적으며 서른셋의 한기연을 소중하게 수집했다.

서른셋, 그건 어떤 나이일까?

그 나이는 둘희로선 알 길 없는 미래의 연령이었으나 한기연에게는 이미 오래전에 흘러간 과거였다. 둘희는 그 시기의 한기연을 만나고 싶었다. 그 여자의 과거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대체 이 밑도 끝도 없는 갈망은 무엇일까.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는 당찬 여성 팀장’이란 캡션 위에서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한기연, 초고속 승진이란 타이틀로 사보에 실린 그 여자의 미소에서 둘희는 왜 저릿한 슬픔을 느끼는 것일까. 그 망상과 착각은 어째서 야릇한 흥분으로 바뀌어 둘희를 휘청이게 만드는 걸까. 둘희는 서른셋의 한기연과 몸을 섞고 싶었다. 그 여자가 바라는 것과 그 여자가 감추는 것, 그 여자가 헌신하는 직장생활과 하루하루 자기의 힘을 소진하며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삶과 점점 더 멀어지는 현실. 그 시절 그 여자의 고민과 망설임을 자신이 들어주고 헤아려주고 싶었다.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따금 둘희는 한기연이 만들어간 생의 이력을 떠올리며 자신의 삶을 그 곁에 나란히 놓아봤다.

스무 살의 한기연, 그때의 한기연과 비교하면 지금 나는 얼마나 보잘것없을까.

스물넷의 한기연, 그녀라면 어땠을까.

스물아홉, 서른, 서른셋, 그리고 그 이듬해의 한기연. 나도 그때의 한기연처럼 과감하게 모험할 수 있을까. 직장을 그만두고 전혀 다른 분야에 도전하기 위해 유학길에 오를 수 있을까. 그때가 되면 나에게도 버릴 만한 무언가가 생기게 될까. 서른아홉, 마흔, 마흔하나, 나를 처음 만났을 때의 한기연. 내가 마흔일 때 나도 한기연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 압도적일 수 있을까.

그 습관은 한기연과 연인 사이가 된 뒤에도 줄곧 이어졌다. 시간이 흘러 둘희는 자신이 앞당겨 짐작해보던 나이들을 지나 어느덧 서른셋의 생일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둘희가 몇 살이건, 한기연과 둘희 사이에는 언제나 이십 년의 간극이 놓여 있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둘희가 연하의 위치에서 한기연을 바라보던 것에 더해 이제는 연상인 그녀의 시점에서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시선을 강박적으로 되짚어볼수록 둘희는 자신을 향한 한기연의 감정을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때 한기연은 다 놓아버리기 위해 둘희를 사랑했는지도 몰랐다. 자기의 어리석은 감정을 끝내기 위해 더 바보 같고 한심해 보이는 또다른 감정에 불을 지핀 것이리라. 선둘희여서가 아니라, 우리의 관계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한기연이 본래 그런 사람이어서. 다 놓아버리고 싶은 나약한 인간이어서. 그런 사람 앞에 때마침 애정을 갈구하는 자신이 나타나 그 손을 잡아준 것뿐이라고.

둘희는 불안과 열등감에서 튀어나온 칼날을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를 향해 휘둘렀다. 한기연은 자기 영화에 관한 해석조차 버거워하던 사람이니까. 어긋나고 삐걱거릴 줄 뻔히 알면서도 무례한 사람과 마주앉아 공개적인 대화를 시도하는 무모한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그런 한기연이 택한 사람이 누구이건, 결국 그 결정과 책임은 오로지 한기연 본인의 몫이라고.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둘희는 ‘권’을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 존재가 불쑥 튀어나와 둘희 자신에 대한 한기연의 마음을 의심하고 판단하게 했다. 둘희는 한기연의 삶에 들러붙은 그 불경한 존재를 ‘권’이라고 불렀다. 둘희는 권의 모든 것이 불쾌했다. 백 퍼센트 불쾌하기만 했다. 권과 가까이 지내는 것은 한기연이 자기의 삶과 영화를 모독하는 짓이었다.

늙고 간사하고 우악스러운 여자.

둘희는 권을 표현하는 부정적인 형용사를 얼마든지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수식어를 하나로 압축한다면, 권에게는 ‘탁한 인간’이란 표현이 알맞았다. 탁한 공기, 탁한 물, 탁하고 더러워진 인간성. 둘희는 한기연에게 새겨진 권에 관한 모든 것을 깨끗이 없애고 싶었다. 줄칼로 갈아버리고 싶었다. 다 끝나버린 첫사랑에 집착하는 건 추한 짓이었다.                 

 


* 이 구절은 제이미 워드의 『인지신경과학 입문』(이동훈·김학진·이도준·조수현 옮김, 시그마프레스, 2017)의 235쪽에 나오는 문장을 변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