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7물

7

 

눈을 뜨고 욕실 천장을 보고서야 둘희는 자신이 욕조 안에서 깜박 잠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반신이 잠겨 있는 물이 식어 어깨와 팔에 소름이 돋았다. 젖은 머리카락을 모아 물기를 짜내다가 둘희는 자신이 추위가 아니라 밖의 소리 때문에 깨어났다는 걸 알았다. 분명 서재 쪽에서 문소리가 들렸다. 둘희는 다급하게 손을 뻗어 욕조 선반에 올려둔 수건을 끌어당겼다. 욕실에서 나왔을 때 현관문 너머로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가요? 어디 가요?”

그다지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고서 둘희는 대답을 기다리듯 동작을 멈췄다. 자신이 뭘 입는지도 모른 채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집어 입고는 물이 뚝뚝 흐르는 머리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나가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사무실 문틈으로 보이던 불빛은 꺼져 있었다. 일층 주차장에도 강선생의 차는 없었다. 건물 밖으로 나가 칠흑 같은 어둠을 맞닥뜨리자 둘희는 막막함이 몰려왔다. 매서운 밤바람이 얼굴을 세게 후려쳤다. 머리카락이 삽시간에 얼어붙는 듯했고 가시밭을 뒹구는 것처럼 뺨과 목덜미가 따끔거렸다. 해변 근처 편의점은 모두 닫혀 있었다. 늦도록 폭죽을 터뜨리며 소란을 피우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둘희는 바다 쪽으로 뛰어갔다. 한기연이 이 새벽에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었다. 이렇게 느닷없이 혼자 나가 자신을 걱정시키는 한기연이 견딜 수 없이 미웠다. 맹렬하게 심장이 뛰자 더는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물이 차오르는 바다는 규칙적으로 긁는 소리를 내며 모래사장에 물자국을 남겼다. 캠핑촌 쪽에서 담뱃불이 빨갛게 일어났다 잦아드는 게 보였다.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안심되면서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 불안이 엄습했다. 둘희는 한기연이 위험에 처하는 게 싫었다. 밤바다를 활보하고 이마에 헤드 랜턴을 쓴 채 산길을 헤매는 것도 싫었다. 싫었다. 서늘한 바람 냄새를 잔뜩 묻히고 돌아와 잠든 자신의 귓가에 대고 야간 산책에 관해 말해줄 때. 자기야, 나 살쾡이 봤어. 눈이 얼마나 예쁜지 별 같았어.

둘희는 한기연이 단 한마디만 해주길 바랐다. 이 바닷가를 떠나고 싶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시선이 무섭고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한기연의 기행이 원망스러웠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시험하고 벌주는 한기연이 힘에 부쳤다.

“왜 이렇게……”

둘희가 숨을 몰아쉬었다. 뒤엉킨 감정으로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기연이 무릎을 덮는 긴 스웨터 차림으로 조개무덤을 향해 서 있었다. 실루엣만 보고도 둘희는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호리호리한 다리로 등과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서 있는 그 뒤태를 한눈에 발견할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내 가슴을 찢어놔요?”

둘희가 애원하듯 한기연을 바라봤다. 둘희는 추위에 떠는 자신을 한기연이 안쓰럽게 여기길 바랐지만, 한기연은 냉담한 얼굴로 둘희를 쳐다보다 이내 눈길을 돌렸다.

“아직도 모르겠어?”

한기연의 머리칼이 바다 쪽으로 흐트러졌다. 자신보다 어리고 경험이 모자란 연인을 깨우치려는 듯 한기연은 둘희의 시선을 붙잡아 공용주차장 쪽으로 이끌었다. 출연자가 타고 온 차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한기연은 그 진녹색 승용차에서 뭔가 나타나기라도 할 것처럼 흔들림 없이 그쪽을 응시했다. 둘희가 그곳으로 가려 하자 한기연이 손목을 붙잡았다. 한기연은 안경테 너머의 깊은 눈매로 둘희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풀거리는 귀밑머리 사이로 빨갛게 얼어붙은 귓바퀴가 보였다. 집에서 나오기 전 커피를 마셨는지 내쉬는 숨에서 진한 커피향이 났다.

“너무 조용해. 아무도 없어.”

한기연이 속삭였다. 그때 진녹색 차 뒤쪽에서 화살이 날아오듯 쨍하고 강한 빛이 쏟아졌다. 헤드라이트를 밝힌 검은색 승합차가 거칠게 앞으로 튀어나왔다.

한기연이 둘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두 여자가 서 있는 모래벌판 앞으로 검은 승합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한기연이 승합차 쪽으로 몸을 틀자 둘희는 어깨를 비틀어 한기연을 뿌리치고는 차도를 건너 공용주차장 쪽으로 갔다. 뒤엉킨 어망과 반쯤 뒤집힌 방수포, 그 안에 쌓여 있는 회백색 합금 패널, 견인 장치와 함께 서 있는 캐러밴, 한기 서린 아스팔트, 까끌까끌한 흙바닥, 곧이어 진녹색 자동차 앞에 섰을 때 둘희는 놀라 아래를 내려봤다. 날카로운 통증이 발바닥을 물어뜯었다. 깨진 소주병이 차 앞에 흩어져 있었다. 금세 발에서 피가 흘렀다. 둘희는 그제야 자신이 욕실 슬리퍼를 신고 집밖을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실리콘 슬리퍼 바닥에 뚫린 구멍으로 유리 파편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목뒤가 싸늘해지며 끔찍한 경련과 통증이 신경을 뒤흔들었다. 둘희는 신음을 삼키며 뒤를 돌아봤다. 검고 번쩍이는 승합차가 언덕의 경사면을 향해 가고 한기연은 모래톱을 가로질러 그 승합차를 쫓고 있었다. 크게 소리치면 들을 수 있는 거리였으나 둘희는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집밖에서, 누가 들을지 모르는 곳에서 한기연을 뭐라 불러야 할지 몰랐다. 대표님이나 이모 같은 단어를 떠올리자 더 극심한 고통에 눈물이 차올랐다. 다친 발을 약간 들어올리자 핏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상처 난 부위에서 무섭도록 맥박이 요동쳤다. 둘희는 절뚝이며 필사적으로 운전석 가까이 다가갔다.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안을 들여다봤으나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그곳의 유일한 빛은 공터 뒤편에 서 있는 조개구잇집 간판이었다. 전등 수명이 다했는지 하얗고 불그스름한 빛이 진녹색 자동차를 향해 깜박거렸다. 빛이 들어온 순간 뒷좌석에 사람이 웅크리고 있는 듯한 형상이 보였다. 둘희는 한쪽 발을 거의 끌다시피 하며 차 뒷문으로 갔다. 유리창을 두드리려고 손을 뻗었을 때 마치 안에서 사람이 열어주는 것처럼 미세하게 문이 둘희 쪽으로 움직였다. 둘희는 한기연을 돌아봤다. 언덕을 올라가고 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소나무가 우거진 비탈길은 가로등이 없어 해가 떨어지면 암흑이었다. 도망치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둘희는 양쪽 팔꿈치를 엇갈려 그러쥐었다. 오른발이 욱신거려 잇몸까지 시린 기분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터져나왔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짧은 망설임 끝에 둘희는 차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누가 머리카락을 확 잡아당기듯 둘희의 몸이 뒤로 휘청했다. 차 안에서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겼다. 그 지독한 냄새에 반사작용처럼 둘희의 상체가 뒤로 젖혀졌다. 깜박. 조개구잇집 간판 빛이 다시 켜졌다. 좌석 아래 구토한 흔적이 보였다. 채 소화되지 않은 밀가루 면과 파뿌리, 탁한 노란빛의 진액. 코를 찌르는 암모니아향에 둘희는 손등으로 코를 막았다. 오줌인지 쓰레기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오물 냄새에 속이 뒤집혔다. 둘희는 헛구역질하다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 냄새. 라이브 방송 때 코를 킁킁거리며 알아채려 했던 그 냄새. 둘희는 그 불길한 예감의 실체를 지금 마주하고 있었다. 정확히 이 광경을 암시하는 냄새였다. 깜박. 뒷좌석에 웅크린 그림자는 사람이 아닌 옷 무더기였다. 땀과 체취가 흰 더께가 되어 겨울 점퍼 위에 얼룩으로 남아 있었다. 둘희는 손으로 코와 입을 막으며 차문을 닫았다. 그러자 그 움직임에 반대편 문이 끼익 소리 내며 열렸다. 깜박.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문 너머 흙바닥에. 쓰러진 사람의 한쪽 손이 문틈에 끼어 있었고 그 손 때문에 차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고 있었다. 깜박. 남자의 뒤통수가 보였다. 얼굴을 흙바닥에 푹 떨구고 있는 모습. 깜박. 둘희는 사람을 찾았다. 사람이 필요했다. 깜박. 남은 에너지를 쥐어짜듯 간판 전구가 빠른 간격으로 점멸했다.

눈물이 흘렀다.

쓰고 시큼한 물이 입안에 솟구쳤다.

입술을 벌리자 역류한 딸기 조각이 위액과 함께 주르륵 흘러나왔다.

발가락 사이사이에 스며든 피가 끈적하고 거무스름하게 굳어갔다.

  

*

 

을주는 벽걸이 고리에 걸어놓은 자신의 겨울 점퍼를 보며 달고 짭조름한 버터구이 오징어를 질겅였다. 점퍼는 을주가 서울의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입었던 것이었다. 팔뚝과 등에 정유사 이름이 큼지막하게 찍혀 있긴 해도, 품이 크고 재질이 질겨서 을주는 버리지 않고 한겨울 작업용 점퍼로 입곤 했다.

콜라나 커피였으면 좋았을 텐데.

을주는 짙은 청록색 점퍼에 묻은 희끄무레한 얼룩을 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얼룩의 크기와 색이 좀 아쉬웠다. 토마토주스였다면, 까만 블랙커피였다면, 옷의 얼룩이 눈에 더 확 띄었을 것 같았다. 점퍼에 스민 흐릿한 자국은 편의점 앞에서 싸움이 붙었을 때 차를 타고 돌진하던 무리가 창밖으로 쌀음료를 들이부어 생긴 것이었다. 그 패거리는 담배를 벅벅 피워대면서도 몸에 좋다는 곡물음료를 마시는 모양이었다. 을주는 오복이가 물벼락을 맞을까봐 오른팔로 가드를 세운 채 달짝지근한 쌀음료 세례를 받았다. 보고 있던 고모부가 을주에게 뛰어오며 자동차 번호판을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었다. 을주는 휴일이 끝나면 경찰에 신고해 쓰레기 무단 투기로 그 패거리에게 벌점과 벌금을 먹일 계획이었다. 그리고 세탁비…… 을주는 점퍼의 까슬까슬한 방수천 재질이 못내 아쉬웠다.

“너도 줄까? 입이 좀 심심하지?”

을주는 발치에 엎드려 있는 오복이를 보며 말했다. 한 손에 든 오징어를 앞니로 물어뜯고서 을주는 전기장판 옆에 있는 오복이의 간식 통으로 손을 뻗었다. 뼈다귀 그림이 그려진 간식 통 안에서 쿠키 두 개를 꺼내 장판 아래로 기어가 오복이 앞에 손바닥을 펼쳤다.

아, 그거, 카드.

촉촉하고 까맣게 반짝이는 오복이의 코를 바라보던 을주는 오복이가 바닷가 산책 때 발견했던 카드가 떠올랐다. 을주는 허리를 펴고 손을 뻗어서 벽에 걸린 점퍼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짠 바다 내음이 조금 배어 있을 뿐 향냄새 같은 건 나지 않았고, 불에 그을린 자국도 없었다. 앞뒤가 코팅된 카드의 앞면에는 달의 상태와 물때가 적혀 있었다. 음력 11월 16일은 이틀 전이었고, 턱사리는 밀물이 턱까지 차오를 만큼 높다는 뜻이었다.

이 그림은 뭐지?

을주는 카드의 뒷면을 돌려봤다. 머리가 있고 눈이 달린, 다리는 마치 작은 벌레처럼 여러 갈래로 뻗어 나온 기묘한 형태의 그림이었다. 얼핏 보면 부적에 그려진 상형문자 같기도 했다. 을주는 카드에 하 하고 입김을 불어 이마에 찰싹 붙였다. 그 상태로 쿠션에 기대어 휴대전화로 부적을 검색해봤다. 부적은 괴황지라는 샛노란 종이에 붉은 염료로 그림을 그리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럼 타로인가? 타로카드?

을주는 인터넷에 뜬 부적 그림들을 클릭해보았다. 혹시나 지금 카드에 그려진 것과 비슷한 그림이 있을지도 몰랐다. 역마살부, 백호대살부, 관재구설부, 교통안전부…… 으응? 을주는 검지로 스크롤을 올려 다시 부적 이름을 봤다. 정말 교통안전부였다. 악몽부와 물놀이사고부, 화재예방부도 있었다. 온갖 악운을 방지하는 부적이 낯설면서도 단순한 도안으로 그려져 있어 시원스럽게 보였다. 재물복이나 합격, 승진을 바라는 부적도 많았다. 을주는 무릎걸음으로 방 한구석에 있는 전신 거울 앞으로 갔다. 거울에 비친 기이한 형상을 들여다보며 카드에 그려진 그림이 악운을 피하기 위한 것인지, 소원성취를 위한 것인지 가늠해봤다.

아닌가, 별 상관 없는 건가?

을주는 그 작은 카드 안에 옥녀산 삼층집의 비밀이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벌써 몇 달째 그 집에서 사주한 사람이 조개무덤 앞에서 정성을 들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믐이나 보름이 지난 다음날이면 벽처럼 솟은 붉은 바위 아래 뭔가를 태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을주도 오복이와 함께 산책할 때 가보면 안쪽으로 꺾인 암석의 군데군데가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편의점에 갈 때면 고모부는 주민들이 들려준 목격담을 을주에게 전해주었다. 새벽녘 간조에 해루질을 나가면 등산 모자를 깊이 내려쓴 구부정한 남자가 손짐을 가득 든 채 그 언덕집에서 내려와 쩌벅쩌벅 조개무덤을 가로질러간다고, 그걸 본 사람이 여럿이라고 했다. 식당을 하는 이모도 언덕집의 젊은 여자를 의심했다. 요사이 벌어지는 크고 작은 소동이 다 그 여자 때문이라고 근거 없는 추리를 이어갔다. 돌고래 펜션에서 어떤 정신 나간 손님이 침대에 똥을 싸고 간 것도 그 여자 탓이고, 편의점 앞에서 자꾸 싸움이 붙어 파출소 순경이 출동하는 것도 그 여자 탓이며, 근래 자주 보이는 시꺼먼 승합차도 그 여자와 관련된 게 명명백백한데, 나이든 영감탱이(듣기로 그 남자는 올 초부터 저 아랫동네 성당에 나오는 새 신자였다), 백날천날 쓰레빠 신고 오토바이 모는 정신 빠진 새끼(그 머스마는 께벗고 다니던 어린애 시절부터 고집 세기로 유명한 저 윗동네 어린이집 원장의 막내였다), 어디 저승사자를 만나고 오는 것처럼 죽상을 한 외지인들까지 수시로 그 집에 드나드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 언덕배기에서……

이모는 말을 멈추고는 수북하게 채 썬 도마 위 오이를 큰 통에 쓸어 담았다. 을주는 이모의 터무니없는 추측에 조목조목 반박하고 싶었으나 오이를 채 써는 이모의 현란한 칼 놀림에 입을 다물었다. 이모는 오른팔의 이두박근을 불끈거리며 거의 기계 톱날처럼 오이를 썰어댔다. 이모는 아무리 허황한 소문이라도 사람들이 그 뜬소문의 결론으로 말하는 가장 험악한 말은 차마 내뱉지 않았다. 여자의 음란함은 멀쩡한 음식을 두고 타박하는 것과 함께 이모가 손꼽는 크나큰 죄악이었다.

“씁, 또 그런다!”

거울을 보던 을주가 일순 표정을 바꾸며 소리쳤다.

“가렵지! 물에 들어가니까 가렵지!”

을주는 몸을 획 돌려 자기 발을 깨무는 오복이를 향해 콧등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마에 카드를 붙인 채 을주는 또 무릎으로 기어가 서랍장을 열었다. 개 발자국 그림이 그려진 천 파우치를 꺼내자 오복이는 마음이 상한 듯 발바닥을 안으로 감추고는 바닥에 턱을 대고 엎드렸다. 황토색 점을 찍은 듯한 양쪽 눈 위의 동그란 털 무늬가 위로 씰룩였다.

“개펄에 들어가시면 안 돼요. 거기 돌 있고 조개 있고, 에? 모래로만 다니세요, 에? 오복씨?”

을주가 연고를 손에 들고 오복이의 비위를 맞추듯 반질반질한 검은 등덜미를 손으로 간지럽혔다.

 

*

 

술에 취한 건지도 몰랐다. 만취해 곯아떨어져 정신을 잃은 건지도 몰랐다. 둘희는 그 남자의 상태를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가 호흡이나 맥박을 확인하는 건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장면이었다.

둘희는 손으로 벽을 짚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둘희가 걸어간 자리를 따라 백색 원목 마루에 피와 먼지가 뒤섞인 발자국이 찍혔다. 그 남자에게 다시 기회를 줬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출연자에게 따로 돈을 챙겨줬어야 했다. 강선생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강선생이라면. 하지만 둘희는 자기의 호의가 그 사람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존심, 아니, 그건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불을 켜고 옷방을 뒤졌는데도 휴대전화가 보이지 않았다.

“다쳤어? 무슨 일이야?”

한기연이 방안으로 들어와 둘희를 멈춰 세웠다. 정신없이 호주머니와 가방 속을 뒤지던 둘희가 맥이 탁 풀린 듯 주저앉았다.

“경찰…… 경찰에……”

둘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119, 병원, 아니 그보다 먼저 강선생에게 연락해야 했다. 강선생이 마지막까지 그 남자와 함께 있었으니까. 침착해야 했다. 둘희는 자기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듯 한기연을 올려다봤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둘희가 쉬고 탁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한기연은 아무 대꾸 없이 둘희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세웠다. 엄살 부리지 마. 나랑 사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았어?

“베인 거야? 찢어졌어?”

둘희는 다친 발을 절뚝이며 한기연의 손길에 따라 움직였다. 이상하게도 거실 창이 열려 있었다. 블라인드를 걷지도 않은 채 창을 열어놓아 바람이 불 때마다 땅, 따당 하는 플라스틱 마찰음이 울렸다. 겨울 바닷가의 한파가 집안으로 들이치고 있었다. 둘희는 돌덩이처럼 몸이 얼어붙어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흙바닥에 쓰러진 그 남자를 본 순간부터 추위나 통증의 감각이 마비된 것 같았다. 한기연이 둘희의 몸을 꽉 끌어안은 채 부축했다. 그 혼란 속에서도 둘희는 한기연과 그렇게 몸이 맞닿아 있다는 게 기뻤다. 휴대전화는 소파 쿠션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러나 그건 둘희의 것이 아니었다.

책상 서랍.

뒤늦게 습관이 떠오른 둘희가 자기의 아둔함을 탓하며 한기연의 어깨에 이마를 기울였다. 둘희의 휴대전화는 사무실 책상 서랍에 있을 것이었다. 라이브 방송 때마다 둘희는 늘 그래왔다.

“나 왜 이러고 있어요?”

경련으로 몸을 떨며 둘희가 용서를 구하듯 한기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사무실에 출연자를 남겨둬선 안 됐다. 모두 자신의 잘못이었다. 한기연은 그 사람이 바닷가를 완전히 떠났는지 확인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 것이었다. 한기연은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아는 한기연은 끝까지 곁에 남아 연인을 보호하는 사람이었다.

“괜찮아요. 우선 급하니까 전화부터……”

둘희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발을 들여다보는 한기연에게 말했다. 흙과 먼지로 뒤덮인 둘희의 발에서 아직도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한기연은 둘희를 소파에 앉힌 뒤 거즈와 소독약을 가지러 방으로 들어갔다. 둘희는 전원이 꺼진 한기연의 휴대전화를 쥐고서 세게 힘을 주었다. 손의 악력만으로 그 기계를 부서뜨릴 수 있다는 듯.

“나 내려갔다 올게요. 그러고 나서……”

다친 발을 세워 발끝으로 바닥을 디디며 둘희가 한기연에게 다가갔다. 그때 현관에서 검고 빠른 그림자가 둘희를 향해 덮쳐왔다. 몹시 차가운 물줄기가 이마를 지나쳐 왼쪽 뺨으로 세차게 떨어지는 듯했다. 동시에 누가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것처럼 뒤꿈치가 들리며 뒤로 넘어졌다. 둘희의 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등부터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슴뼈가 심하게 울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출연자는 여전히 셔츠 왼쪽에 ‘586’ 명찰을 달고 있었다.

손을 더럽혔다는 듯 그는 깨진 유리병을 다른 손으로 옮겨 쥐며 젖은 손을 바지춤에 닦았다. 지나치게 많은 감정을 억누른 탓에 그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이 취해야 할 다음 행동을 더듬거렸다. 둘희는 넥타이 매듭을 잡아당기는 그를 올려다봤다. 저 넥타이로 나를 묶으려는 걸까. 그는 푸른색 타이를 손바닥에 둘둘 감다가 방안에 또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둘희의 몸을 뛰어넘어 방으로 들어갔다. 둘희는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시선을 움직이다 이내 눈을 감았다. 따당 따당. 블라인드가 바람에 들썩이며 시끄럽게 소리를 냈다. 축축한 액체가 콧속에서 흘러나와 귓바퀴 안으로 고이는 게 느껴졌다.

 

호주, 호주로 갑시다! 하와이에서 미국, 유럽에서 아프리카, 아예 세계 여행으로 꿈을 넓힙시다. 연습 게임이 끝났으니 다시 물방개를 풀어 진짜 판돈을 걸어봅시다. 꽝은 없애버리죠. 숫자는 전부 백배로 해버립시다. 부끄럼 많은 우리 욕받이에게 진짜 제대로 된 욕값을 퍼부어줍시다!

 

물위에 뜬 종이처럼 팔다리가 서서히 녹는 듯했다. 나 때문이에요. 내가 약속을 어겼어요. 둘희는 한기연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을 달싹거릴 힘도 없이 정신이 아득하게 꺼져갔다. 아무리 부릅뜨려고 해도 눈꺼풀이 감기며 이루 말할 수 없는 무거운 잠이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