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회

눈을 뜨면 물속이 펼쳐지고

눈을 뜨면 물속이 펼쳐지고

 

에어컨 바람을 쐬며 침대에 엎드려 보낸 지 삼 일 정도 지났다. 눈을 감으면 감긴 눈 앞으로 열대어들이 지나다녔다. 까맣고 작은 물고기들이 밧줄 주변을 빙빙 도는 것이 보였다. 눈을 감으면 머릿속은 곧 물속 풍경이 되었다. 약사는 일주일 동안 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그 시간은 물맛을 본 내게 너무 길었다. 몸의 열기가 대충 가라앉자 긴팔 긴바지 래쉬가드를 입고 물에 들어갔다. 물속에서 나는 춤도 추고 노래도 흥얼거렸다. 그때의 감정이란……

그저 너무 신났다. 어린 아이처럼 아무렇게나 물속에 입수했고 숨이 차면 수면 위로 올라와 숨을 내뱉었다. 생각도 필요 없고 두려움도 없는 자유. 물에서 처음 새로운 형태의 자유를 맛보았다.

 

사 미터, 오 미터 정도를 내려가니 귀가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찾아왔다. 너는 이퀄라이징을 해야 해. 선장님과 친구들이 열심히 내게 발살바라는 기술을 가르쳤다. 코를 잡고 입안의 바람을 귀 밖으로 보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지만 안 되는 일도 없다고 느껴졌다. 잠깐 다이빙의 핵심인 압력평형에 대해 설명하자면,

 

만약 압력평형을 하지 않고 수영장 바닥에 닿으려고 한다면 당신의 귀나 이마에 불편함이나 심지어는 통증을 느끼게 된다. 단지 일 미터 정도의 깊이일 뿐이라도 이 압력은 당신의 귀를 순식간에 상하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실제로 시도해보는 일은 좋지 않다.

 

수심이 깊어짐에 따라 압력은 높아진다. 수면의 기압은 대략 1bar이다. 물속으로 십 미터씩 내려갈 때마다 1bar씩 늘어난다. 따라서 깊이 십 미터의 압력은 이미 두 배가되어 2bar, 이십 미터의 주변 압력은 3bar 그리고 계속해서 늘어난다. 보일의 법칙에 따라 일정 온도에서 기체의 부피는 압력에 반비례한다.

 

압력평형 기술

우리가 물속으로 하강하는 동안 증가하는 주변 압력을 상쇄하는 몇 가지 기술이 있다. 가장 쉬운 기술은 마스크의 압력평형이다. 코를 통해 마스크로 공기를 부드럽게 내보낸다. 공기가 마스크로부터 빠져나가지 않게 압력평형을 하기에 충분한 양의 공기만 마스크로 내보낸다. 결국 당신은 폐에 가능한 많은 양의 공기를 유지하기 원한다. 중이와 부비강의 압력평형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발살바(Valsalva)와 프렌젤(Fren-zel) 기술이다.

 

발살바 기술

압력은 복부나 흉부의 움직임으로부터 온다.

 

프렌젤 기술

배가 완전히 부드럽게 유지되는 동안 오직 혀와 뺨의

움직임에서 발생된다.*

 

이후 나는 한국에서 아이다 라이센스 1, 2를 땄지만 프렌젤 기술을 완벽하게 구사하진 못해서 발살바 기술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발살바 기술로는 십 미터 이상 가기가 어려웠다. 꼬따오에 있는 동안 고막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계속 다이빙을 했다.

한번은 리우와 내가 다이빙을 하던 중 리우의 코에서 코피가 줄줄 흘렀다. , 너 코에서 피 나! 나 오늘 죽는 거 아니야? 코피를 닦으며 리우도 나도 바다 한복판에 둥둥 뜬 채로 깔깔대며 웃었다. 이후 리우는 홀로 수영을 하러 갔다가 입 주변을 해파리에 쏘인 적도 있었다. 입이 퉁퉁 부어오른 리우가 징징거리며 자신이 어떻게 해파리에 쏘였는지 식당에 돌아와 설명했다. 식당 아주머니는 웃으며 해파리에 쏘인 부위에 식초를 발라주었다. 오늘 죽을지도 모르는데 리우는 즐거워했다. 그것을 보는 나도 즐거웠다.

리우의 사건을 보며 철학적인 질문이 잠깐 떠오르다 잊혔다. 내게도 사건 사고는 있었다. 산호초에 긁혀 살이 찢기기도 했고 종아리에 갈고리가 박힌 적도 있었다. 침착하게 살을 파고 들어간 갈고리를 뽑아냈다. 물속에서는 이상하게 피가 흐르지 않는다. 수면 밖으로 나와 방수 밴드를 붙였다. 작은 일에 마음이 묶여 있기엔 하루하루 수많은 일이 벌어지고 밤이 찾아오고 아침이 찾아왔다. 아프면 약을 바르면 되고 시간이 걸리는 문제는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면 되었다.

 

 

그걸 이겨낼 힘이 자신에게 있다고

 

다이빙을 하면서 몸에 꽤 많은 상처가 생겼다. 왠지 그 상처들은 내가 도시에서 받은 상처들보다 나아 보였다. 바다에서 생긴 상처들은 우울한 에피소드를 남기지 않았다. 지금 여기 살아 있음을, 물속에서 피를 흘리고도 무사히 살아남았음을, 내 강인함을 증명하는 훈장 같았다.

그러나 나는 육지에서도 피를 흘리고도 무사했다. 육지에서도 피를 흘리거나 다치거나 멍들 일이 많았다. 한번은 호스텔 이층에서 이층 높이를 실감하지 못하고 뛰어내린 적이 있다. 그때 엉덩이를 뒤덮은 멍이 생겼는데 그때는 그 멍이 평생갈 것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병원을 찾으니 엉덩이 근육 덕분에 엉덩이뼈가 아작나진 않았다고 했다. 운동을 열심히 하길 잘했다. 그럼에도 노력한 시간들이 위험한 상황에 빠진 나를 그저 죽게 내버려두지 않은 것이다.

소설 연인에 나오는 주인공의 감정에 심취한 적이 있다. 조금 차갑고 어딘가 냉소적인 그 시선을 좋아했었다. 아니 그런 감정들이 나를 좋아했던 것일까. “답을 찾지 못하면 나를 미워할 건가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생존 전략을 아름답고 신비롭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현실에서 젖은 눈으로 누군가의 사랑을 갈구할 필요는 없었다. 소설적 환상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했다. 그때까지 나는 겁이 많고 소녀적 기질이 다분했는데 갑자기 그것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정신없이 노느라 지난 날 트라우마틱한 일들은 기억하려 해도 떠올려지지 않았다. 리처드 칼슨의 책 스톱 씽킹의 구절처럼.

 

제가 전통적인 치료 방법을 포기한내담자들을 상담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문제 중 하나는 새로운 트라우마를 발견할 때마다 그 내담자는 사실상 그걸 다시 새롭게 겪게 된다는 겁니다. 매번 하는 새로운 상담은 새로 추가된 문제의 진상을 알아내고 다시 또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에 수반되는 부정적인 느낌들을 분석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할수록 부정적인 느낌이 따라옵니다.

(……)

하지만 나의 부정적인 과거나 기억을 좀 더 많이 접함으로써 정말 전보다 마음의 문제가 나아질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궁극적으로 그 사람이 우울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합나디. 부정적인 감정을 마주해서는 점점 더 우울 속으로 빠지게 되지요. 생각을 계속해서는 우울을 극복할 수 잇는 내면의 힘이 생겨나기가 어렵습니다.**

 

내 심리 내면의 밑바닥 같은 걸 들여다볼 필요도 없고, 부정적인 감정들이 자멸하기를 애원하지 않아도 되었다. 심리 치료 같은 것도 필요 없었다.

 

그리 높지 않은 바위 절벽 아래로 파도가 흰 거품을 일으켰다.

시퍼런 물속의 깊이가 가늠되지 않았다. 저것은 삶일까. 죽음을 닮았을까.

스쳐지나가는 육지의 익숙한 생각들.

바위에 달라붙은 따개비를 조심조심 밟고 내려갔다. 마스크를 쓰고 스노클을 입에 물고 핀 풋포켓을 발에 끼웠다. 바위에 미끄러져 수영복 엉덩이가 다 찢어진 일도 있었다. 그 차림으로 집에 가는 동안 지나가는 서양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주목과 찬사를 받았는지…… 별로 부끄럽지도 않았다. 여기는 바다 근처니까. 숙소 거울에 비친 내 엉덩이를 보고 얼마나 크게 웃었는지 모른다.

몇 미터지? 출렁이는 시퍼런 물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심장이 뛰었다. 저기는 얼마나 깊을까. 오늘은 어떤 물고기를 볼 수 있지. 퇴근하는 거북이를 오늘 또 만날 수 있을까. 온몸이 태양에 새카맣게 익어가면서도 두 팔을 모아 물에 뛰어들었다. 나는 충만하고 행복했다.

나는 어떻게 나의 우울에서 문득 탈출할 수 있었을까. 우울한 감정을 언제부터 신경쓰지 않게 되었을까. 그 어느 날이 언제인지 정확하게 모르겠다. 식당에 앉아 국수를 먹을 때인지. 길리 골목에서 길을 잃던 순간이였는지……

실은 그저 내 우울한 기분에 관심이 없었다. 재미가 없었다. 물론 여전히 그런 기분이 찾아올 때도 있다. 그저 내가 우울하구나하고 알게 된다. 근데 이 감정에는 크게 가치가 없어 보이네. 그날의 감정을 택하는 게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부정적인 감정에는 날 변화시킬 힘이 없다. 나는 굳이 그 길로는 가고 싶지 않다. 한국인 없는 미지의 지역에 홀로 내던져지거나, 팔을 흔들면서 씩씩하게 걸어갈 수 있는 밤길. 무엇을 입고 있든 어떤 상태든 간에 바닷물에 뛰어들면 나는 미치고 위대해졌다. 몰입은 잠재된 나를 고양시켰고 위대하다라는 감정을 느끼게 했다.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의 예들은 하나하나 독특하긴 하지만, 공통분모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그 변화자체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토대로 한 게 아니라 갑자기 나타났다. 다시 말해 이 주제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의 양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나의 내담자 조지의 사례가 있다. 조지는 평생 특정 인종에 대한 편견을 느끼며 살아왔다. 그러다 갑자기 그는 뭔가를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난 정말 어리석었어요.” (……)

 

나도 이처럼 설명하기 힘든 의식의 변화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나는 평생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죽기보다 두려워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한다는 생각만 해도 땀이 났고, 실제로 기절한 적도 두 번이나 있다!

 

그러다 어느 날 한 학회에 참석해 친구들과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아무것도 두려워할 게 없다고 느꼈다. 정확히 왜 혹은 어떻게 그런 통찰을 얻게 됐는지 설명할 수 없고, 그저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만 말할 수 있다. 요즘도 나는 인원에 상관없이 사람들 앞에서 아주 편안하게 말할 수 있고, 자주 그렇게 하고 있다.

 

(……) 많은 내담자들이 삶을 보는 관점을 통째로 바꾼, 통찰력을 경험한 순간에 이와 유사한 고양감을 강력하게 느꼈다고 말했다. (……)***

 

마지막으로 갑작스러운 변화는 사실상 영원히 유지된다. 일단 변화가 일어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일은 없는 듯 보인다. 적어도 완전히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다. 예를 들어 내가 이제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는 일로 겁을 먹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게 어떤 느낌인지 기억하고 있으므로 그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마음은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내담자 조지는 이제는 피부색 때문에 상대가 싫다는 누군가의 말만 들어도 부끄러워한다. 이것이 바로 통찰의 본질이다. 그런 일이 한번 일어나면 그 순간부터 삶을 보는 관점은 완전히 달라진다.

 

물속의 나는 그랬다. 어떤 결론에 이르지 않아도, 바삐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않아도 되었다. 몸부림치며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만으로 죽음에 대한 갈망을 씻어낼 수 있었다. 지금 삶의 모습이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면 언제든 물로 뛰어들면 된다. 마음은 안정을 찾았다. 생전 가져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편하게 걷고 마시고 움직이며 많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어디에 머물러도 즐거운 마음이 생겨났다. 소중한 것들이 떠오르고 무엇이든 덤벼볼 의지가 생겼다. 내가 선택한 것에 가치가 있고 엉터리인 나를 그냥 믿어봐도 된다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염려…… 뿌연 시야가 가리고 있던 것들…… 다이빙을 하며 보이기 시작했다. 모래 회오리가 지나간 후 모습을 드러내는 산호밭처럼 알록달록한 산호들의 빛깔처럼 그토록 찾아다녔던 것들은 이미 내 안에 지닌 것들이었다.

 

 


 

올리 크리스텐,AIDA2 프리다이버 과정, 최선 옮김, 2017(개정판).

** 리처드 칼슨, 스톱 씽킹, 박산호 옮김, 2022, 윌북.

*** 같은 책.

다음주에 '연재를 마치며'가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