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
매미들이 싼 오줌을 맞는다. 미스트처럼 사방으로 흩뿌려져 내리는, 맑고 투명한 방울들, 고개를 들면 하늘에 핀 커다란 잎사귀들. 오토바이 위에서 눈을 감는다.
캐리어를 싸기 시작한다. 이번에 떠날 곳은 다이버들의 성지로 불리는 섬이다.
하늘길로 간다면 비행기를 두 번 타고 한 번은 배를 타야 한다. 육로로 온다면 슬리핑 기차나 나이트 버스를 타고 와야 한다. 육로의 도심에 도착해서도 외곽으로 들어가 배를 한번 더 타야 한다.
꼬는 태국어로 섬, 따오는 거북이라는 뜻이다.
“꼬따오의 지형은 거북이를 닮았어. 오후 네다섯시 무렵 거북이들이 섬의 특정 포인트로 몰려오지. 꼬따오에가본 적 있는 리우가 꼬따오에 대해 설명했다. 우리는 수많은 서양인들 틈에 끼여 크지도 작지도 않은 페리에 몸을 실었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풍랑에 배가 널뛰기하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좌석 사이 복도에 구토하다 잠든 서양인 가족들이 보였다. 대여섯살 아이가 견디기에는 너무 가혹한 환경이 아닐까. 아이는 이렇게 힘들게 바다를 건너왔단 것을 어른이 되어 기억할까. 트라우마로 남진 않을까. 심지어 옆에는 곯아떨어진 골드리트리버 한 마리도 있었다. 먼 유럽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일까. 저 아이와 개는.
아이 부모의 조상은 고대 로마군이나 게르만족일 것이다. 그들이 문득 미국 드라마 〈스파타쿠스〉에서 지독한 전투를 치루고 전사한 검투사들처럼 보였다. 그들이 겪었을 험난한 루트를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 역시 구토가 시작될 것 같았다. 좁은 계단으로 뛰어가 페리 삼층으로 향했다. 페리 삼층은 전부 오픈되어 있었다. 오픈된 바닥은 파도 때문에 기울어져 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정말 집채만한 파도가 페리를 내동댕이칠 것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어쩜 그토록 겁이 없었을까. 두렵지 않았을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이 글을 쓰면서도 그때의 내가 신기하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의자에 누웠다. 야외가 실내보다 숨쉬기가 나았다. 멀미가 날 것 같으면 누워 있는 편이 좋다던 유튜브 영상이 떠올랐다.
비바람을 맞자 울렁거리는 위장에 쏠렸던 주의력이 분산되기 시작했다. 빗줄기 탓에 눈을 뜰 수 없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 상황은 자유에 대한 것일까. 탈주에 대한 것일까.
그래도 돼요
-여행이나 다이빙. 하고 싶어서 하시는 거잖아요?
-그렇죠. 하지만…… 때로는 정말 내가 원하는 게 맞는지 정확하지 않을 때가 있어요. 이걸 왜 하고 있는지. 흔들릴 때가 있어요. 선생님. 답을 찾지 못하면 나를 미워하는 패턴으로 휩쓸려가요. 그게 아마 제겐 익숙하고 편한 거겠죠. 오랫동안 그래 왔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 익숙함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요. 그 패턴엔 분명 자기혐오가 남아있어요. 이제 그럴 필요가 없을 뿐이에요.
-아무래도 명료해지면 명쾌해지죠. 그래도 너무 잘하시고 있어요.
심리 상담 선생님의 칭찬을 받을 때마다 이게 맞나 싶으면서도 그래도 한 걸음, 원하던 어른의 모습과 닮아가고 있단 생각에 기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의심이 들더라도 잘해왔다고 기뻐해도 된다.
풍랑을 지나
놀고먹으러 가는 길마저 지난하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올곧게 사는 건 무엇인지. 네 페이지 정도로만 정리된다면, 정답이 있어서 그것만 외우고 다닌다면 세상의 규율 사이에서 헤맬 일이 없었을까.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김주환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인생에 정답 같은 건 없다고……
어지러웠던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냥 가자…… 내가 가는 것도 아니고 페리가 자기 루틴대로 갈 뿐이다. 골몰한 시간들이 무색해지도록 페리는 세차게 요동쳤다. 앞으로 삶을 풍랑이나 파도에 비유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한편으론 이토록 흔들리고 요동치며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도 들면서) 눈코입으로 빗줄기가 흘러들어왔다.
진실 같은 건 없고 진짜 나를 찾는 일도 부질없으며 지금 눈을 뜰 수도 몸을 가눌 수도 없는 이 상황만이 진짜 현실이다. 거대한 일이 닥치는 순간 어떻게 해결할지만 떠올리면 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편안한가? 신나고 후련할까. 배가 언제 전복될지도 모르는데.
몸에 긴장을 풀자 좌석에서 굴러떨어졌다. 꼬는 태국어로 섬, 따오는 바다…… 아니 거북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좌석에 다시 누웠다.
섬에 도착하자 폭풍우가 언제 왔었냐는 듯 젖은 땅과 해가 쨍쨍한 맑은 하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두에 발을 디디자 서양인들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부둣가를 지나자 작은 골목과 상점들이 보였다. 그곳은 마치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 나오는 이스탄불의 좁은 뒷골목을 떠올리게 했다. 상점에 걸려있던 술탄이 그려진 양탄자 같은 것들 때문인지 모르겠다. 유럽에 갔었지만 이곳이야 말로 내가 생각하던 유럽 혹은 아랍 같은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 활기가 넘치는 가운데 신비로웠다.
태국에 갔을 때 나는 잠만 잤다. 평생 잔 적 없는 사람처럼 해가 뜨기 시작할 때부터 창밖으로 밤이 올 때까지 잤다. 싱글룸에서, 스탠다드룸에서, 어떤 달에는 도미토리에서 끝없고 깊은 잠을 잤다. 깨어나 두리번거리면 아무도 없었다. 원한다면 하루종일 누구와도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면서 생활할 수 있었다. 차와 오토바이들이 지나가는 사거리 한복판에서 멍하게 서서 내가 회복되고 있음을 느꼈다. 서울이란 도시에서 늘 바쁘고 아팠다. 블라인드를 올려 창밖의 어둠을 확인한 후 라탄으로 짠 크로스백을 메고 지갑과 핸드폰만 챙겨나왔다. 어디로 갈지, 뭘 먹을지. 아무 계획도 없고 몽롱했다. 태양이 사라진지 오래일 텐데 바닥에는 열기가 남아 있었다.
태국에 머물던 때는 주로 날씨가 극악무도하게 더울 때였다. 무더위가 극에 달할수록 관광객은 줄어들고 숙박비와 비행기 티켓값은 저렴해진다. 정신의 안정을 위해 불길을 택해야 했다. 어둠이 드리워져야만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일사병으로 두 번 쓰러진 후 더위의 위엄을 실감했다. 길거리와 골목을 쏘다다니며 재밌는 것만 보고 맛있는 것만 먹었다.
돼지내장, 피쉬볼 고명이 올라간 국수를 파는 식당에 자주 갔다. 그 식당을 무척 좋아해서 식당 옆 호스텔을 숙소로 잡곤 했다. 양이 적어 늘 두 그릇씩 먹었다. 오전의 무더위를 피해 숙소에 웅크려있다가 저녁이면 블루스 바나 가까운 펍에 들려 맥주를 홀짝였다. 블루스 바에서 알게 된 밴드가 있었는데 그 밴드의 연주를 무척 좋아해서 그들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곤 했다.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키가 작고 마르고 콧수염이 있던…… 나이가 가늠이 되지 않던 보컬이 있었는데. 그의 노래를 들으며 바 구석에서 눈물을 흘리던 것이 생각난다.
그 시절. 돼지내장, 피쉬볼 고명이 들어간 천오백원짜리 에그누들과 나밖에 없는 펍에서 미소를 지으며 연주해주던 이들이 있어 의미 없는 삶에서 간신히 멀어질 수 있었다.
펄펄 끓고 있는 스테인리스 통. 허름한 야외 식당.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쌀국수를 기다리는 동안 골목 하수구에서 흘러나오는 지린내가 코를 찔렀다. 오토바이들이 휙휙 지나다니고 가끔 매캐한 연기가 얼굴을 덮었다. 하루는 삶은 닭고기를 얹은 라이스를 하루는 누들을 먹었다. 테이블 아래로 바퀴벌레가 지나다녔다. 친구나 커플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점심이나 저녁시간에 모여들었다. 야외 포장마차 같은 곳에서 같은 메뉴를 먹으며 외로웠던 나는 이 식당에서 소속감을 느꼈던 것 같다.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나도 어쩌면 이들과 연결되어있다는 느낌. 이 순간에.
시즌마다 휘황찬란하게 치장한 루이비통 디올 불가리 매장들 그리고 육교만 건너면 얼음에 담긴 조각 과일을 파는 노점상들과 인도 한구석에서 맨발로 앉아 구걸하는 모녀들…… 쇼핑몰 타워는 몇 년 후면 하늘에 닿을 기세로 언제나 공사중이다. 관광객들이 펑펑 쓰는 달러는 왜 노동하는 이들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관광 대국으로 정점을 찍은, 체계적인 시스템을 견고하게 구축해낸 이 나라에 무언가 드문드문 빠져있는 것 같다.
붉은수화개미의 먹이 찾기 관행을 연구하는 신경과학자 대니얼 프리드먼은 언젠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은 감각적으로 풍부하지만 인과적으로는 빈약해요.” *
친구를 따라
숙소에 짐을 풀고 얼마간 섬을 둘러보며 쉬었다. 꿈처럼 아름다운 곳이였다.
리우를 따라 다이빙을 하러 바다로 가는 롱테일 보트에 몸을 실었다. 이 여정은 퍼블릭 스노클링 투어라고 불리는데 이층짜리 커다란 배에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을 태우고 바다의 여러 스노클링 포인트에 내려주는 투어다. 예전에도 말레이시아에서 스노클링을 한 적이 있는데 알록달록한 열대어들이 무서워서 발버둥쳤던 기억이 난다. 물이 무서웠다.
리우는 먼저 물에서 수영인지 몸부림인지 난리중인 서양인들을 틈을 뚫고 물속으로 내려갔다. 리우는 어린 시절부터 꽤 길고 깊은 강에서 수영을 했다고 했다. 태국의 강이라면 흙탕물인데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민물고기들이 살텐데…… 그때마다 낚시꾼들이 ‘너 죽어 수영하지마’라고 말하며 말렸다고 한다. 그런 곳에서 매일 수영을 했으니 리우에게 이런 잔잔한 바다는 우스웠을지도 모른다. 천방지축 리우는 지치지도 않고 다이빙을 했다. 너도 해봐!
처음 스노클링 목적으로 바다에 갔을 땐 모든 게 무서웠는데 갑자기 아래 보이는 컴컴한 수심이 무섭지 않았다. 내 두려움이 사라진 것을 선장이자 가이드였던 친절한 태국 아저씨가 느꼈던 걸까. 갑자기 내 곁으로 다가와 나의 고개를 아래로 처박았다.
그렇게 헤드퍼스트를 배웠다.
물속에 고개를 거꾸로 처박는 기분은 물속에 들어갈 때마다 생각난다. 당황했지만 본 적 없는 세계의 문을 머리통으로 밀고 들어간 느낌이었다. 그때 느낀 신비로움, 깊고 아늑했다. 나는 그 감각에 전율했다.
즐거움이 짧고 자주 오지 않는 것이라면 환희의 기억은 어떤 순간에도 찾아올 수 있다. 덕다이빙에 성공한 날, 아마 가장 겁없이 하루종일 무방비로 다이빙을 했던 것 같다. 다이빙의 기본인 이퀄라이징 기술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한 채로. 그저 신났다. 내가 이런 동작으로 이 정도 깊이에 갈 수 있구나. 본능적으로 숨을 참게 되고 본능적으로 숨이 턱 끊어질 것 같았다. 고막이 찢어지는 느낌을 받았을 때 고막이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가 잠깐 들었다. 그러나 이미 외국에 있다는 불안 탓에 새로운 자극은 도파민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 광란의 다이빙을 한 후, 온몸에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다. 특히 등과 허벅지 뒤쪽은 심각했다. 섬의 약국을 들락날락거렸고 끝내 병원에 기웃댔지만 전문가들은 모두 같은 말을 반복했다. 시원한 곳에서 물에 닿지 말고 누워 있어야 해. 알로에 겔을 바르고 말야.
호스텔의 누군가가 내게 ‘늦지 않았다. 네가 약사가 되기에는’라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차가운 알로에 겔을 온몸에 치덕치덕 바른 채 등이 따가워 엎드려 잠들던 나날들. 그럼에도 다이빙은 나의 꿈이 되었다.
* 애나 렘키,『도파민네이션』, 김두완 옮김, 흐름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