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미래
간혹 외부는 그럴싸한데 내부는 허름하거나 외부는 무너져가는데 깨끗한 내부를 가진 호텔들이 있다. 외국 도시 이곳저곳을 누비다보면 언제부터인가 건물 앞이 아니라 건물 뒤를 보게 된다.
엉켜 있는 전선 뭉치, 낙서, 알 수 없는 언어가 적힌 비닐봉지, 플라스틱, 캔 들이 쌓여 있는, 살아가는 곳의 다른 얼굴.
5성급 호텔과 리조트가 몰려 있는 번화가를 벗어난 로컬들이 사는 마을과 항구 골목은 종종 이런 얼굴을 가지고 있다. 깨끗하게 관리된 호텔이라도 뒷면은 대게 흉흉하고 기이하다. 제멋대로 자라고 있는 풀과 나무, 찌그러진 펩시 캔, 깨진 병 조각. 손질되지 않은, 어떤 손길도 영원히 닿을 것 같지 않은.
도시에서 멀리 떠나온 탓인지 이제 그것들이 더럽고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릴 적에 살던 동네는 공단 지역이었다. 폐타이어, 버려진 자전거, 찢어진 비닐과 쓰레기 더미들이 공터에 너부러져 있었다. 지금 떠올리니 공단 지역인지 부두를 끼고 있던 외갓집 근처의 풍경이었는지 희미하다. 바람 빠진 축구공을 차다 넘어지거나 호기심에 높은 곳을 올라가다 녹슨 못에 긁히기도 했다. 다리를 절거나 피를 흘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린 시절 나의 동네를 해매듯 동아시아의 여러 외곽을 찾아다녔다. 삶의 시작과 끝이 거기 있진 않을까. 그 영원 같은 장면을 계속 기억해내며.
도시와 바다를 넘나들며 자란 아이에게 이것은 본 적 있는 꿈. 생생한, 아무렇게나 피어났다 뽑혀나가는 에너지. 순리, 순환…… 그 이미지가 주는 감정은 아마 그동안 본 영화나 드라마에서 학습된 감정일 것이다. 무언가를 예감하듯 피어나는 풀이나 나무는 없어…… 중얼거리다 으스스한 뒷면으로 끌려들어간다.
오래된 스토리들이 종종 거기에 멈춰 서서 사색을 시작한다. 깨지고 망가진 것들, 왜 사랑으로 보였을까. 힘껏 매달리면 될 줄 았았다. 어린 날의 나는 고통의 방식으로 사랑을 배웠다.
누군가를 마음에 들이기 위해선 누군가를 마음에서 보내야 한다는 것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여름, 여름, 길가에는 온통 열대 나무와 매미 소리…… 겨울이 없는 곳에서 너는 배우게 될 것이라고.
한국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모든 게 끝난 것 같았지만
외국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모든 게 꿈틀거리고 펄럭였다.
멀어질수록
살던 방과 가족과 친구들과 익숙한 고통의 방식에서 멀어질수록.
여행을 오래 다니자 ‘나’라는 존재가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라는 존재가 깨지면서까지 지켜내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로맨스는 천국이나 구원처럼 느껴졌다. 천국에서 필요한 건 로맨스가 아니였고 천국에서 필요한 것 따위는 아무 것도 없었다.
오래된 스토리 안에서 두리번거리다보면 곧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길을 찾으면 된다. ‘길’에는 쓸모없이 많은 의미들이 붙어 있었다. 날벌레들 같은 환상을 떼버리자 내가 찾은 길로 가볍게 걸어갈 수 있었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면 현실이 밀려났다. 질문과 의심을 거두자 명쾌한 현실이 나를 기다렸다.
-넌 미래가 걱정되지 않아?
-응 아직 안왔잖아. 안 온 걸 어떻게 생각해?
친한 동생은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남자친구의 질문에 저렇게 답한 적이 있다고 들려주었다. 너는 똑똑하구나. 미래는 고작 그런 것인데 예전의 나는 지금 이 순간보다 미래를 염려하기에 바빴다.
-엄마는 왜 제게 모질었을까요?
-아마도 엄마는 살려고 한 게 아니였을까요
-그 사람이 살기 위해 한 행위가 저에게 피해를 줬다면요?
발리에서 만난 모녀의 엄마와 작은 섬의 카페에 앉아 저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마지막 질문은 하지 못했다. 난 여행중에 중요한 숙제를 털어내고 있었다. 아직도 엄마라는 말이 싫다…… 거기에 나의 생존과 애착 방식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아니 연결되어 있다 생각했다.
-관심에서 멀어지거나 나에게 해를 가하면 가족도 남이예요. 엄마랑 떨어져 사니까 어때요? 불안하죠? 다시 보살피고 돌봐줄 대상을 찾고 있진 않나요?
정신과 의사선생님의 말은 발리의 작은 섬에서도 자주 떠올랐다. 그가 내던지는 말은 늘 잔인하게 느껴졌다. 내가 했던 말들은 다 잊어요. 정신과 의사선생님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짜 미소를 보여주고 병원을 그만뒀다. 그와 상담하는 동안 정신적으로, 아니 몸 어딘가에 연결된 줄을 칼로 자르듯 끊어버렸다. 후련했다.
인간에겐 누구나 빈 곳이 있다. 완벽한 환경을 가졌다 해도 채워지지 않는 틈새가 있다. 그 틈은 사랑으로 채워야 한다. 일생 동안 단 몇 시간, 몇 분이라도 누군가 나를 돌봐주고 안아준 일이 있다면 삶의 풍파가 와도 그럭저럭 지나칠 수 있다.
어둠에 끌려다니던 시절이 있었고 병약했던 시절이 있었고 없는 에너지를 써서라도 나처럼 연약한 존재들을 끌어안으러 한 적도 있었다. 죄책감, 죄의식들을 거의 다 잊어가는 것 같다. 백지를 채워야 해서 괴로웠지만 백지여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가끔 판단하기 좋아하는 ‘나’가 튀어나와 멀쩡히 있는 ‘나’를 부정한다면 말해줄 것이다.
강하든 약하든 언제나 그랬듯 너를 사랑한다고
너는 의미 있는 길로 가고 있다고.
끝이 없는 일에 시달리지 않겠다고.
아직도 악몽을 꾸다 만다. 참담뿐인 시절이 꿈으로 흘러 들어온다. 거기서 벗어나려 크게 애쓰지 않는다. 창을 연다. 바람으로 계절을 맞출 수 있다. 나는 지금 한국에 있구나. 떠날 날을, 떠날 곳을 떠올린다. 돌아올 날이, 돌아올 수 있는 곳이 있다.
플라타너스 나무에 기대서 그 나무의 삶이 나의 삶 이후로도 계속될 것임을 느낄 때, 나는 직관적으로 내 존재가 어떠한 고정된 자기도 아니며 매우 생생하고 늘 변화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생명의 자연스러운 리듬에 소속감을 느낄 때, 분리되고 위협받는다는 환상은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크래커 금지
호스텔은 혼성 도미토리, 여자 도미토리, 개인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홍콩 호러영화에서 봤던 집 구조다. 남부 특유의 억양이 묻어나는, 영어에 능숙한 여자 사장님이 혼자 온 나를 반겨준다. 예약한 방은 네 명이 함께 쓰는 여자 도미토리다. 내게 배정된 자리는 이층 침대의 일층이었다. 층이라고 말하기에는 침대는 너무 작다. 손바닥 두개 만한 창과 손수건만한 커튼이 창을 가리고 있었다. 이미 누군가 지내고 있는 옆 침대 일층은 세면도구와 옷가지로 가득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사다리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검은색 브래지어가 걸려있다. 나의 침대도 금새 세면도구나 티셔츠로 가득해지겠지. 갑자기 나의 삼십 인치 캐리어가 작은 공간을 가득 채워버리는 것 같다.
머리맡과 다리 쪽은 세면도구와 옷으로 가득했다. 결계 속에서 아늑하고 고독했다.
가끔 이 공간(결계)은 해변을 끼고 있는 섬이나 오피스로 가득한 도시로 바뀌기도 했다. 사람을 잘 따르는 순하고 착한 개나 고양이가 가득한 동네이기도 했다.
세트장이 바뀌어도 결계와 머리맡과 다리 쪽 세면도구와 옷은 그대로다.
시공간이 달라져도 잠옷차림은 같았다. 쓰고 읽는 것을 반복하는 것도.
금지된 크래커를 입안에서 녹여 먹으면 오독오독 씹는 소리가 모두 잠든 밤에 조용히 퍼졌다.
에어팟을 끼고 주성치 영화를 본다. 〈파괴지왕〉. 주성치의 쿵푸 액션이 주류 상업영화로 편입되기 전 영화랄까. 그 정점이 〈쿵푸허슬〉이었다면 〈파괴지왕〉은 그의 초창기 세계관이 더 순진무구하게 드러난 영화기도 하다. 시작부터 유치함에 웃음이 터져나온다.
처음 보는 그의 젊은 얼굴, 저렇게 웃고, 누군가를 놀리고 마구 좋아해도 괜찮은 날들이 담긴.
가난한 배달원인 ‘하금은’은 우연히 난처한 상황에 빠진 ‘리’와 만난다. 본의 아니게 그녀를 돕게 되면서 동시에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겁쟁이처럼 보이는 그에게 그녀는 마음을 열지 않고, 하금은은 겁쟁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삼류 사기꾼 사부를 만나 쿵후 기술을 배우게 된다.
영화 속 그의 유일한 기술은 얻어터지고 밟혀도 오뚜기처럼 일어나는 것이다. 돈만 밝히는 스승 밑에서 전 재산을 수업료로 날리고 투지를 불태우는 남자. 무적의 쿵후 기술을 배우기 위한 그의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는 반드시 자신이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승리해야 한다. 그는 막강한 상대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그리고 금방 후회한다.
대결을 앞둔 그의 지옥 훈련은 의외로 평온하다. 스승과 다른 제자들과 노래방에서 신나게 춤추고 노래한다. 도란도란 훠궈도 먹지. 거위곱창, 돼지간어묵이랑 삶은 달걀도 잔뜩 넣어서. 돈만 밝히는 스승이 비책을 말한다.
“우린 한 달동안 잘 먹고 논다.”
주인공은 고양이 탈을 쓰거나 닭 분장을 하고 상대와 싸운다. 어쩐지 그는 승리할 것 같다. 그는 야비하고 상대에게 이상한 술수를 쓴다. 상대의 시선을 방해하고 가장 중요한 링 위에서 약하고 허약하기 이를 데 없다. 그의 필살기는 바보에게만 통할 것 같다. 게다가 별로 비장하지도 않고……
1회전에서 그는 등을 돌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엉터리 스승은 1회전이 끝나고 그에게 괜찮냐고 물어본다.
그는 무서워 죽겠다고 말한다.
이길 수 없을 땐,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을 땐 잘 피하면 된다. 피하지 못하면 그때 생각하면 된다. 2회전을 끝낸 그는 도저히 못하겠다고 스승에게 하소연한다. 안간힘으로 상대를 옭아매고 필사적으로 피하다 경기가 끝난다.
사람들의 야유에도 그는 만세를 외친다.
“살았다! 너무 행복해.”
마지막까지 싸우지 않고 어떤 것도 싸움으로 만들지 않는 것.
사부가 알려준 무적풍화륜은 그저 계속 굴러떨어지는 것이다. 운이 좋으면 죽지 않고. 자기를 죽이려던 상대에게 그는 말한다.
“이제 그만하고 쉬어.”
서로가 가진 것으로 문을 두들길 때
어떤 날은 적극적이였다가 어떤 날은 그 용기가 무색하게 방에 웅크려살았다. 도처의 더위에 지쳤지만 싱그러운 나무와 풀향이 가득했다. 그것들에 하나하나 코를 대보기도 했다. 흰 나비가 몸을 포개 앉기라도 하면 나비가 오래도록 머물기 바라며 가슴이 설렜다. 나무들 아래서 책을 읽거나 누군가 정성을 다해 내려준 커피 한잔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나른함이 밀려왔다. 작은 행복이 주는 소소한 기쁨을 새삼 되찾은 것 같았다.
그것은 언제나 나의 밑바닥에 있었다. 언제나 나의 밑바닥이 진흙탕이라고만 여겼다. 오래 전의 판단이 불쑥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기도 했다. 나의 밑바닥은 어떤 날은 말랑말랑하고 어떤 날은 찰랑찰랑했으며 어떤 날은 빛나고 있었다. 인간의 삶은 울퉁불퉁한 것이므로 어느 날은 그런 것이였다가 그런 것이 아니기도 한다. 쉽게 바뀌지 않기도 쉽게 바뀌기도 한다. 내가 어떤 파도를 만나느냐에 따라 내면이 어떤 동요를 일으키는지 그때 차분히 대응할 수 있는 것이 다만 나의 역량일테지.
다이빙을 제안한 건 리우였다.
-거기는 정말 예뻐! 바다가 너무 너무 예쁘다!
별다른 계획이 없었고 바다가 보고 싶었다. 수영은 못하지만 바다가 무섭진 않았다. 바다에서 나는 죽을 수도 있겠지. 수영을 못하니까. 하지만 나는 어디서든 죽을 수 있었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퐁네프다리 아래에서, 신이 깎아놓은 것 같은 절벽 위에서, 풍랑이 심하게 내려치는 바다 한복판 배 안에서.
익숙해지기 시작한 안락한 게스트하우스를 떠나(풍족하고 만족스러웠는데) 다시 험준한 길을 택해야 했다. 그렇게 에세이의 첫 구절의 배경으로 출발하게 된다.
* 타라 브랙, 『받아들임』, 심선수, 김정호 역, 불광출판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