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회

조금만 더 가면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재즈 펍이 나오는데

부킷빈땅, 도망가는 길


쿠알라룸푸르의 중심가. 센트럴역 근처였다. 하루만 자고 떠나는 일정이어서 지하철과 가까운 숙소를 잡았다. 숙소는 의심이 들 정도로 저렴했다. 구글 평점도 나쁘지 않았다(의심이 들면 의심을 했어야 하는데…… 이후엔 어떤 유혹에도 구글 평점 4 미만 숙소를 예약하는 일은 없었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하다고 생각할 때였던가. 그래야 마음에 영 내키지 않는 곳에 이르러도 심드렁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호텔은 웹사이트에 나와 있는 대로 지하철역 바로 앞이었다. 센트럴역은 생각보다 번화했다. 텍스가 두번이나 붙는 고급 딤섬 레스토랑이 입점해 있었고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도 눈에 띄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자마자 작은 호텔 입구가 나왔다.

체크인을 도와주는 호텔 직원은 집안에 우환이 있는지 미간에 주름이 잡힌 채로 여권을 복사하고 숙박 일정을 재차 물었다. 표정도 말투도 딱딱했다. 숙박비와 더불어 그들의 월급도 저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숙박 가격에 서비스는 포함되있지 않은 것 같다. 나의 종교는 친절이므로…… 나는 그저 미소를 지었다.

 

밖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객실 수가 꽤 많은 것 같았다. a동, b동 이런 식으로 여러 동이 있는 형태였다. 내 객실이 있는 건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데 직원 한 명이 넉살 좋은 웃음을 보이며 달려와서 캐리어 옮기는 것을 도왔다. 혼자 온 여자 손님에게 궁금한 점이 너무 많았다. 낯선 곳에서 과한 친절을 받으면 어떻게 리액션을 해야 할지 잘 모르던 때였다. 나도 같이 친절하면 되겠지…… 그렇게 자꾸 넘겨짚곤 했다.

캐리어를 옮겨주고 콘센트를 꽂는 방법까지 알려준 직원 아저씨는 한국을 좋아한다고 말하더니 셀카를 같이 찍자며 자기 핸드폰을 내밀었다.

 

미안해요. 나는 지금 너무 지치고 피곤해서 사진을 같이 찍을 수 없어요.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면 그렇게 거절할 수 있었을까. 어쩔 수 없이 불안한 마음으로 같이 셀카 몇 장을 찍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내 뺨에 자기 얼굴을 붙이고 연신 사진을 찍었다. 그것은 친절이 아니라 치근덕거림이였다! 계속 대화를 이어나가려는 그를 마침내 피곤하다는 말로 방에서 내쫓을 수 있었다. 그가 내 방 호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찜찜했다. 비상시를 대비해 과일 칼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방 컨디션부터 체크했다. 창문이 없었다. 창문이 없다면 감옥이 아닌가. 한숨을 내쉬고 리셉션으로 내려갔다. 다시 집에 우환이 있고 월급이 적은 듯한 불친절한 직원에게 창문이 있는 방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창은 있지만 차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 괜찮겠니?

그의 애정 없는 경고는 사실이었다. 바꾼 방에는 창이 있었다. 창을 열면 바로 고가도로가 흉물스럽게 모습을 나타냈고 그 아래 엄청난 양의 승용차, 버스, 오토바이가 어마어마한 소음과 매연을 내뿜으며 달리고 있었다. 매연과 먼지로 벌써 코와 목이 간지러웠다. 그래, 도시란 원래 이런 풍경이지. 방을 바꾼 보람도 없이 창문을 닫고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잠을 청했다. 하루면 된다. 딱 하루만 여기서 머물면 돼. 방 컨디션이나 소음 같은 건 자고 나면 별로 거슬리지 않을 거야.

방 컨디션이 의심스러운 숙소에 머물게 되면 되도록 천장이나 바닥 구석은 쳐다보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구석에는 내가 두려워하는 무언가가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사람의 손이 한 번도 닿지 않은 구석. 단순히 공사를 하고 남은 시멘트 가루나 먼지가 쌓여 있을 테지만, 혼자 있는 동안 나의 상상력은 본 적 없는 두려움을 만들어낸다. 오래된 기름처럼 엉겨붙은 무언가가 저 구석에 있을 것만 같다. 나를 지켜보는 눈동자가 있으면 어쩌지. 확인할 수 없는 그런 구석들이 내겐 심연 같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는 나는 그 구석을 바라보는 것을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틈은 틈이고 구석은 그저 구석이다. 거기선 어떤 것도 발화하지 않는다. 울렁이는 두려움을 그렇게 다독이곤 했다.

 

갑자기 객실이 드릴 소리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귀마개를 껴보았지만 소음과 진동을 귀마개를 뚫고 고막에 전해.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던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여행을 하며 처음 느껴보는 짜증과 분노였다. 견딜 수 없었다. 이 상황을 도저히 어떤 방법으로도 견딜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이것이 말레이시아 여행의 기본 값임을…… 먼저 말레이시아에 도착한 친구의 상태가 괴팍해진 걸 쉬이 넘겨서는 안됐는데……). 고요한 침대에 누워 열리다만 창으로 들어오던 바람. 이런 바람은 뭐라고 부르지. 바람과 함께 햇살이 눈이 부시도록 들어오던 평범한 여행지에서의 일상이 그리웠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아서 평화롭던, 그래서 가끔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 언덕이나 산길을 달리곤 했던 날들…… 비에 젖은 나무들과 흙냄새……

어떤 급작스러운 상황에 이제는 어느 정도 맷집이 생겼다고 여겼는데 삶이란 이런 것인가. 무언가를 이겨내면 새로운 무언가가 찾아오고, 그걸 이길 만한 능력을 기르면 다시 그 능력을 깨부술 상황이 온다. 그래서 항상 일정 능력치가 있어야 한다. 월등히 우수하지 않아도 작은 시련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지 않을 능력치이 꼭 필요한 것이다.

 

침착하게 짐을 쌌다. 이 공간에는 마음에 드는 것이 전혀 없었다. 침대 시트의 수상한 얼룩들, 화장실 냄새,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 액자, 답답한 분위기가 더해져서…… 가성비가 좋다며 좋은 평점과 리뷰를 남긴 한국인들이 원망스러웠다. 이제 김철수나 용용이나 그런 이름들이 남긴 리뷰는 믿지 않기로 했다. 방에 들어온 지 두세 시간이 흘렀을까. 캐리어를 싸고 내려가 리셉션에 체크아웃을 요청했다. 퉁명스러운 얼굴을 한 직원은 이유를 묻지 않고 키를 받았다. 환불을 요청하며 언쟁을 벌일 수도 있었지만 그저 빨리 여길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랩 택시를 잡았다. 호텔 위치를 정확히 찾지 못해 빙빙 돌고 있는 택시 기사와 통화를 했다. 이런 내ㅓ느 상황을 가까이서 힐끗힐끗 보면서도 직원은 도와주지 않았다. 랍비가 와도 그녀는도 돕지 않을 것이다. 이 호텔에 대해 어떤 불만 가득한 리뷰를 쓸지 떠올렸다.

 

도로변에서 그랩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고가도로 아래, 인도인이나 방글라데시인으로 보이는 남자들 무리가 시커먼 눈길로 캐리어 손잡이를 붙잡고 서 있는 나를 훑어봤다.

 

가게 천장에 매달린 라면, 절인 망고, 인스턴트 커피, 담배, 중국산 보조 배터리와 이어폰, 조악한 전자기기를 파는 거리의 상인들. 나는 나체로 거리에 서 있는 심정이 된다. 어둑하고 차가운 강 한가운데 건너편 기슭으로 건너가야 하는 사람처럼 몸도 마음도 얼어붙는다. 가게 테이블에 올려둔 과일에 꼬이는 날벌레나 개미떼처럼 시선들이 내 몸과 얼굴에 집요하게 들러붙는다. 먹다만 사과처럼 속살이 갈변되는 것 같다. 그들은 눈이 마주쳐도 웃지 않는다. 능글맞은 미소를 슬쩍 지어 보일 뿐. 그 시선 끝에는 뭐가 있는 걸까. 검은 눈동자들의 시선에서 무심히 지나가고 싶었다. 아니 무탈하게. 작은 아시아 여자를 집요하게 따라오는 눈동자들. 밀림 한복판을 지나가는 다른 초식동물처럼 덤덤히 그 순간을 지나칠 수 있다면.

 

검은 눈동자들은 침묵 같았다. 내가 애써 쳐다보지 않으려 했던 방의 구석 같았다. 어떤 반응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내 존재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떨어지지 않는…… 이런 일은 유독 말레이시아에서 많았다.

―무슬림 국가에서는 여자가 히잡을 쓰지 않으면 나를 터치해도 된다는 뜻이래.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중국인 여자애가 한 말이 떠올랐다.

간신히 그랩 택시 기사님을 만났다. 나는 처음으로 여기 와서 기쁜 어조로 나이스투미츄라는 인사를 건넸다. 다 끝났어. 택시에 올라타자 혼란했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창문을 열어 내가 지옥의 소굴에서 빠져나왔음을 확인했다. 좋은 선택을 할 수 없을 때도 있다. 그 선택을 한 나를 탓하거나 환경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선택지륻은 자주 바뀌고 무한하지 않다. 무언가를 되도록 미워하지 말자. 그 약속을 나는 지켰다. 깊은 질문은 멈추기로 했다.

오늘은 나를 위해 좋은 곳에서 자자. 해결됐다. 뒤를 돌아보는 일은 불필요해. 내게 좋을 것이 없어. 그렇게 중얼거리자 마음은 더 편해졌다.

 

하지만 그런 강력한 자기 암시에도 말레이시아에서의 내 여행길은 고행 그 자체였다. 히잡 너머로 보내오는 날카로운 시선들 밤낮 가리지 않은 남자들의 시커면 시선들은 셰속되었다. 워킹홀리데이 일정 때문에 말레이시아에 한 달 동안 체류중인 친구를 도우러 갔다 나도 그 지옥에 갇혀버렸다. 망할 말레이시아.

이곳 사람들의 짜증이 묻어나는 말투와 화난 얼굴은 매일 겪고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인간을 피해 여행을 왔는데…… 훗날 나는 지옥에서 겪은, 아니 말레이시아에서 겪은 한 걸음도 뗄 수 없는 살인적인 무더위와 무례한 사람들과의 마주침에 대해 적게 되리라.

 

 

조금만 더 가면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재즈 펍이 나오는데


유럽 여행중에 자주 겪었던, 면전에서 휘파람을 불거나 babb, babb하며 어떻게 해서든 내 주의를 끌려는 목소리들이 나았는지도 모른다. 그땐 찾아오는 모든 것을 시련이라고 부르기에는 괜찮은 보상이 많았다.

 

치앙마이에서 있었던 일이다. 구글 지도를 보며 어두운 골목을 걷고 있었다. 치앙마이 게스트하우스에서 새로 사귄 한국인 친구들과 재즈 펍에서 만나기로 했다. 막다른 골목이 나오자 길을 잘못 들어섰음을 깨달았다. 돌아가려는 순간 삐쩍 마른 대여섯 마리의 개들이 나를 둘러싸고 송곳니를 드러냈다. 개들에게 물려 여기서 죽겠구나. 불현듯 소설 『향수』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숨을 내쉬지 않고 슬금슬금 벽으로 붙어서 이동했다. 속으로 되뇌었다. 착한 개들아 나는 너희들을 해치지 않아. 체취나 소리 어떤 걸로도 개들의 이목을 끌지 않으려 노력하며 움직였다. 간신히 그들의 관심이 내게서 멀어지고 있을 쯤 골목으로 오토바이 한 대가 들어왔다. 환한 라이트 때문에 눈이 아팠다. 그는 오토바이를 멈추더니 내게 말을 걸었다. 괜찮다면 너의 라인 아이디를 알려줄래?

 

이상한 날이지. 막다른 골목에는 개떼가 있고 겨우 빠져나오자 낯선 남자가 길을 막고 서 있다. 저 개들은 물지 않아. 너는 너무 아름다워. 내게 라인 아이디를 알려줘. 나는 어디로 빠져나갈 수 있을까.

구글 맵은 목적지까지 걸어서 1분이 남았다고 안내했다. 조금만 더 가면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재즈 펍이 나오는데, 약속 장소가 나오는데. 그때 그에게 어떤 대답을 했는지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한국에 남자친구가 있어. 번호를 알려줄 수 없어 미안해. 아마 그렇게 말하곤 길을 막고 선 그에게서 벗어나 재즈 펍의 환한 불빛 속으로 정신 없이 뛰어갔던 것 같다. 먼저 온 친구들은 동그란 나무의자에 앉아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그러니까. 누가 연주하는 거야 지금? 등과 엉덩이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레게 머리를 한 흑인 여자가 눈을 감고 노래를 시작했다. 재즈 펍의 실내와 실외는 잘 구분되지 않았다. 블루스인가.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말소리와 음악에 개떼와 낯선 남자의 갑작스러운 등장 같은 건 금새 잊혀졌다. 치앙마이에 있는 동안 겪은 가장 큰 위기라고 느꼈는데 이렇게 쉽게 진정되다니. 극도의 불안도 잠깐이구나. 내가 외국에서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그저 잠깐 이는 감정에 지나지 않는구나. 보컬의 목소리에는 슬픔, 기쁨, 체념,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그녀의 노래에 겁에 질려 있던 감정들이 새떼처럼 어디론가 날아갔다. 들떴다. 시련과 안도가 순식간에 발생하고 뒤집어질 수 있구나. 그날은 친구들과 어디를 가도 신났다. 길거리 수챗구멍으로 수백 마리의 갈색 바퀴벌레가 들어가는 것을 빤히 보기도 했다. 무섭고 기이했다.

―외국인들은 마약을 많이 한대! 우리에게도 건네면 어쩌지?

기우였다. 우리는 마약을 한 것보다도 더 취한 사람들처럼 놀았다. 당시 치앙마이에는 마약을 하는 외국인이 없었다. 우리는 구시가지 술집과 클럽을 돌아다니며 자유를 만끽했다. 다 혼자 온 여자들이였다. 여럿이 되자 우리는 용감해졌다. 외국인들 눈에는 오히려 우리가 마약을 한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선데이마켓에서 산 얇고 시원한 원피스를 입고 올드타운을 누비던 밤. 클럽 노래는 올드했고 잘생긴 웨스턴 남자들도 보이지 않았지만 다리가 풀릴 때까지 춤을 추었던 그 밤은 무모하고 즐거웠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