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호스텔로
커다란 반얀나무가 중앙에 있었다. 호스텔은 90년대 홍콩의 멘션이나 아파트처럼 기역자 복도가 있는 구조였다. 방금 짐을 끌고 걸어온 스트리트는 매섭게 내려쬐는 뙤약볕으로 눈을 뜰 수조차 없었는데 호스텔 마당에는 한기가 감돌았다.
등에 보라색 약을 바른, 몹시 마른 개 한마리가 바닥에 엎드린 채 졸고 있다.
내부가 노출된 물탱크에서 삐걱삐걱 기계 소리가 들려왔다. 깨진 타일 바닥. 계단으로 올라가는 문턱의 돌들이 죄다 부셔져 있다. 마당에는 넓은 잎사귀와 흰 꽃잎들이 흩어져 있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복도 난간 사이사이가 썩어있다.
어떤 영화의 장면 속에 들어온다면 이런 느낌일까.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카메라가 천천히 공간을 비추면…… 그늘 속에 모두가 졸고 있고,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로맨스나 코미디 장르를 기대하고 들어왔다면 잘못 온 것이겠지. 스릴러라면 꾸벅꾸벅 나른하게 졸고 있는 이들중 하나가 범인일지도 모른다. 고막을 긁듯이 물탱크에서 들려오는 끽끽 소리. 거기서 느껴지는 불길한 감정은 내 감정이 아니다. 소리로 운이나 불길함을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나의 기억 정보는 가끔 그냥 그렇게 스위치가 켜질 뿐임으로. 스릴러라도 땀을 식히는 바람이 불고 그늘 속에서는 모두가 졸게 된다.
호스텔 건물 내부와 외부의 분위기는 비슷했다. 어떤 숙소의 외관은 그럴싸한데 막상 안으로 들어가면 인테리어를 하다 만 듯한 느낌의 단칸방일 때가 있다. 해외 여행을 간다면 외국 호텔이 올려놓은 방 사진을 곧이 곧대로 믿어선 안된다! 누군가 ‘왜 그렇게까지 숙소에 신경을 써?’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뇌의 신경회로를 총동원해 숙소 선정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아니면 어떤 일이 닥쳐도 받아들일 수 있는 베짱과 여유가 있다던지…… 숙소 컨디션에 따라 여정의 흥망성쇠가 정해질 때도 있다. 같이 간 동행과의 관계가 그 몇 박 며칠이 마지막 밤일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을 자주 옆에서 목격했다.
숙소에 신중을 기하는 당신을 예민한 사람 취급하는 이가 있다고 해도 신경쓰지 말자. 그가 당신의 귀중한 여행 일정과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사건을 막거나 대신겪어주지 않는다. 잔잔한 기쁨이든 혹독한 절망이든. 모든 경험에 대한 대가는 그곳에 도착한 나 자신만이 치른다! 그것을 깨닫고 받아들이기까지 몇 번의 최악을 마주한지 모른다.
인도네시아 우붓 외곽의 에어비앤비에서 나는 그만 평정심을 잃었다. 화장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검은 물과 모래. 방에 들어온 수많은 벌레들과…… 어쩐지 온몸이 간지럽고…… 낮에 체크인할 때 짐만 풀고 나가느라 방 컨디션을 제대로 체크하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이 상황에 대해 에어비앤비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보지만 새벽 한시. 전화를 받지 않는다. 우두커니 서 있는 동안 온 신경이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다. 빠져나야해…… 여기서 하룻밤도 자고 싶지 않아. 부랴부랴 캐리어를 쌌다. 허둥대다 요가 매트를 두고 오고 말았다.(나중에 요가 매트를 다시 사려고 돌아다녀보니, 인도네시아에서 요가 매트는 정말로 비쌌다.)
그랩 택시를 부르고 밤하늘에 뜬 별들을 올려다 보았다. 한때 공부하고 나를 들뜨게 했던, 흙길을 달리는 동안 심장을 환희로 가득 채우던 별들이 낭만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의 실망스러운 행동을 목격하고 마음이 단숨에 식어버린 사람처럼. 불과 며칠전 이곳의 모든 것에서 풍요로운 아름다움만을 느꼈는데…… 별이 스러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맞아. 별은 그저 가스와 먼지로 되어있지. 마음은 어떻게 그토록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에 무작정 솟구치고, 이유를 다 알기 전에 차디차게 식어버리는 걸까.
스러져가는 별. 처한 상태에 따라 감정은 변한다. 물체나 공간이 그대로여도 감정은 변할 수 있다. 인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지만 때때로 쉽게 바뀌기도 한다. 인간 자체일 때가 있고 감정일 때도 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오면 생각한다. 저항할 필요 없다고. 누군가에게 찬사를 받거나 대단한 성취를 이뤘을 때가 아니라, 그저 그것을 받아들일 때마다 나는 자랐다. 그것이 두려움뿐인 삶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걸 깨달으며.
부정적인 감정이 미친 말처럼 나를 태우고 맹렬한 속도로 달려 어딘가에 나를 버려둔대도 그 진창에서 나는 눈감을 수 있다. 세상이, 가족이, 친구가, 연인이, 가했던 상처를 내려놓는다. 어린 날의 나는 감정에 충실했고 절박했으며 삶의 일희일비를 건너가는 길에 있었다. 그 길 위에 좋고 나쁨이 없음을 받아들이면 된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과거의 얼룩까지 들먹이기엔 해결할 일들이 남았다. 택시에 탄 스스로를 다독인다.
택시를 타고 전날 머문 숙소로 향했다. 가정집을 개조한 숙소 리셉션에는 사람이 없었다. 리셥션 뒤에 있는 방에서 곤히 잠든 직원을 깨워, 어제 내가 머문 방이 비어 있냐고 물었다.
방의 불을 켜고 배달 봉투를 뜯는다. 작은 플라스틱 상자에 겉이 검게 그을린 닭다리 하나와 쌀밥, 슬라이스 된 오이가 몇 개 들어있다. 아얌. 한국말로는 닭이다. 닭고기를 먹으며 삼발이라는 매콤한 양념을 밥에 비벼 먹는다. 인도네시아 친구에게 그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너네는 왜 아얌을 하나만 먹어?
-그럼 너네는 몇 개를 먹는데?
-우리는 한 사람당 아얌 12개를 먹어.
-믿을 수 없어!
우리는 일인당 치킨 한마리씩인데…… 그래서일까. 여기서 마주친 한국 남자들은 유럽인들처럼 느껴진다. 그 옆에 선 인도네시아 남자들은 갸냘프기 그지없다. 숙소 방 안에서 아직은 따듯한 아얌을 먹는다. 날아다니는 밥알을 삼킨다. 다 해결되었다. 아침이 올 것이다. 커튼을 친다.
할머니가 그랬지. 사막에 떨어져도 밥만 잘 먹으면 된다고. 얘는 사막에 내놔도 잘 살 애라고.
값비싼 경험을 상기하며 여행 일정의 많은 시간을 숙소를 고르는데 할애했다. 객실 외관은 볼품없고 초라해 보이는데 간혹 내부는 정갈하고 깔끔한 곳도 있다.
사람 손이 닿지 않는 곳도 청소가 되어있을 때가 있다. 그때 나는 눈을 감고 이 방을 청소하던 사람을 떠올린다. 침구를 털고 베개 커버를 씌우고 창문을 열어 창틀의 먼지를 털고…… 작은 이 방에서 머무는 누군가 편안하게, 아늑하게 쉬고 잠들 수 있길. 그런 마음이 전해지는 숙소를 만난 적도 있다.
친절하고 늘 미소로 대답해주던 가족들이 운영하던 치앙마이 올드타운의 작은 주택. 그 작은 주택의 이층을 맨발로 오를 때마다 삐그덕거리는 나무 바닥 소리…… 태국 푸켓에 있던 호스텔…… 일본의 섬마을 민박집. 닭장처럼 좁았던, 휴게실이 다다미방이던 일본의 게스트하우스. 코로나가 끝날 때쯤 그곳에서 이메일을 한 통을 받았었다. 와줘서 고마웠다고 당신을 잊지 않을 거라고. 소라 게스트하우스. 내가 선물한 볶은 김치로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었던 일본인 친구와 여자 사장님. 그들을 일본에서 다시 마주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 이탈리아 포지타노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호텔…… 연로했던 이탈리아 할아버지는 코로나를 잘 이겨내셨을까. 발리에서 머물렀던 홈스테이…… 아침이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무언가 끓이고 볶으며 아침을 준비하던, 이마에 밥풀을 붙이고 신에게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리던 홈스테이 가족들……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나지만 어쩐지 그들의 얼굴은 다 기억하고 있다. 힌두교에는 삼만삼천의 신이 있다고 한다. 발리에 있던, 아니 내가 이때까지 만난 따스한 존재들은 그 신들 중 하나는 아니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