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사고 이탈tanngentiality의 즐거움

사고 이탈tanngentiality의 즐거움

 

버스와 페리. 예약 사이트 페이지를 유심히 지켜보다 Accept 버튼을 누른다. 모든 선택지를 서치하고 분석해도 결정은 늘 어렵다. 가성비-행복으로 이어지는 루틴을 쫓아야 하기 때문이다. 도전하는 길 위에서 원하고 욕망하는 것들을 얻어야 한다. 이래야 행복해질 수 있고 저래야 행복해질 수 있는 조건들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이제 그 행복의 조건이 내가 만든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삶에 답이 있다고 생각하면 편안할 수 없다. 성공이든 실패든 그냥 내 본성을 믿으면 된다. 그것을 믿는다면 경험으로 갈 수 있다.

 

그냥 그렇게 무언가를 찾으면 된다.

 

‘어? 좋네 한번 가볼까? 재밌겠다.’ 삶을 이리저리 분주하게 끌고 다닌 건 완벽한 계획이나 확신이 아니라 그저 이런 생각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복잡한 사람이 아니였다. 하나의 경험에 한정되기를 좋아하지 않고 어디엔가 더 변화무쌍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상상 속에서 가슴이 뛰는 유형에 가까웠다. 이 사실을 뒤늦게 인지했다. 자극을 추구하는 성향은 대단히 높고, 위험에 대한 회피도는 낮으며 큰 이득을 얻지 못하더라도 설령 손해를 보더라도 반드시 호기심을 충족해야 하는 유형에 속한다는 것을.

 

인간은 세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해 세상의 모형을 만든다. 모형을 세우는 작업은 어떤 면에서 ‘잠재화 억제’와 비슷하다. 모형에는 설계자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소만 포함된다. 디테일은 과감히 생략된다. 단순한 모형은 세상을 보다 쉽게 파악하게 해준다. 그후 필요에 따라 응용하기도 좋다. 이 모형 구축 작업은 인간의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활동이다. 우리가 생활하는 동안 뇌는 알아서 이 작업을 수행하고 새롭게 입수되는 정보를 참고해 모형을 업데이트한다.

우리는 이 모형을 통해서 경험을 추론하고 보편타당한 규칙을 만든다. 그렇게 해서 전에 겪어보지 못한 상황을 미리 예측하고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페라리를 처음 봤을 때 이 금속덩어리의 용도가 사람을 태우고 이동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이유다. 샅샅이 뜯어보거나 특별한 검사를 할 필요는 없다.(……)

모형은 많은 선택지 가운데 딱 하나만 선택해야 할 때 특히 유용하다.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가상으로 체험해보고 가장 나은 것을 고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장 워싱턴 DC에서 뉴욕으로 가야 한다면 방법은 여러 가지다. 기차를 탈 수도, 버스를 탈 수도, 비행기를 탈 수도 있다.(……) 우리는 각 옵션을 택했을 때의 시나리오를 상상해보고 어떤 교통수단이 가장 빠르고, 편하고, 편리할까를 고민한다. 그런 다음 상상 속 체험을 바탕으로 현실의 결정을 내린다. 이 과정을 ‘정신 시간여행mental time travel’이라고 한다. 상상력을 동원해 다양한 미래 상황에 나 자신을 투영하고 정신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이를 토대로 내게 필요한 자원, 즉 넓은 좌석, 저렴한 표, 혹은 짧은 이동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면 된다.

 

정신 시간여행은 도파민 시스템이 보유한 강력한 무기 중 하나다. 도파민 회로는 이 기전을 통해 마치 실제로 그곳에 가 있는 것처럼 미래를 체험하게 한다. 그런데 정신 시간여행을 위해서는 모형이 필요하다. 정신 시간여행은 기본적으로 아직 경험하지 못한 상황을 예측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식기세척기를 새로 사면 내 일상이 어떻게 달라질까?(……) 뇌 입장에서는 모든 선택의 상황이 그저 모형을 활용해 처리해야 하는 도파민의 일거리일 뿐이다(……) 인간 생의 모든 다음 단계가 정신 시간여행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일어선 나의 도파민은 그동안 만든 모형을 방해하며 속삭인다. 더 재미있는 걸 해볼까? 이런 행태는 정신질환적 관점에서 일컫는 ‘돌출salience’의 개념과 닮아 있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탐험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애써 구분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판별력에 쓸 힘을 도파민에게 모두 줘버렸기 때문이다. 이미 신이 난 나의 도파민 회로는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고 다시 똥과 된장을 어떻게 섞어서 찍어먹을 수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똥과 된장을 찍어먹는 것이 낭비라는 것을 알지만, 기존 모형을 토대로 좋은 방법을 획득하는 것에 이미 흥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삶과 일상에서 일일이 판별해야하는 대상이 너무 많았기에, 판별력을 기르는 것조차 버거웠는지도 모른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어떻게 다녔던 걸까. 강의실 딱딱한 의자에 꼼짝없이 앉아 대학 강의를 듣던 나는 지금도 그 의자가 전기 고문 의자였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자주 군부독재 시절에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대학생들을 떠올리곤 했다. 내 권태로움이 그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였지만 학교 분수대에 누워 어떤 식으로든 삶이 끝나기만을 바랐다. 봄이면 바람에 실려오는 아카시아향을 맡다 창가로 뛰어내리고 다시 무수히 뛰어내리는 상상을 했다. 그때의 알 수 없는 분노, 견딜 수 없는 무기력함. 이제야 설명할 수 있을까.

 

해마의 뉴런들은 학교라는 단어가 입력되면 위험경보기처럼 격렬하게 작동한다. 즉시 탈주-이탈이라는 의미로 연결짓는다. 여행지에서 만난 친구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으며 그의 결혼과 남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적이 있었다. “남편은 체육 교사예요.” 나는 순간 흠칫 놀랐다. 주된 주제는 그게 아니였는데, 학교라는 단어도 없었는데 뇌 신경망이 합선된 느낌이였다.

 

 

공항 폐쇄

 

넘쳐나는 도파민은 에너지 소모를 몰랐다. 기괴한 의지력으로 분출되는 도파민과 에너지로 쏘다닌 여정이 짦은 삶을 이루었다. 그 여정에서 장점을 찾아보자면 성공적인 여행에 대한 기대가 없었기에 실패를 하더라도 다시 어떤 여정이든 이어갈 수 있었다. ‘뭐 어때? 해보지 않았으면 실패도 몰랐을 거야.’

 

거기서 나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자주 털어낼 수 있었고 잘 털고 나아가는 일이 내가 가진 크고 쓸모있는 무기처럼 느껴졌다. 뭐 내내 감정적으로만 움직인 것도 아니였다. 도파민으로만 움직이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으므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새로이 인내와 인고의 시간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곧바로 깨달았다. 새로 배울 것이 생겼다니! 비행기가 지연된 동안이나 긴 경유의 시간동안 북적이는, 북적이지 않는 공항 한복판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명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게 명상이라고 정확히 말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고 긴장이 풀렸고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순간이였다.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면 다시 그 순간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이것이 여행중에 내가 배운 기술이였다.

 

그 기술에도 막막한 사건 사고는 시도때도 없이 찾아왔다. 공항에 도착해 숙소가 있는 지역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공항 게이트 문이 열리자마자 엄청난 폭우가 나를 맞이했다. 새벽 두시였다. 어떤 나라에서도 안전한 시간이 아니였다. 생존모드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우버나 그랩을 타고 푹신한 베드가 있는 호텔로 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여행객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지만 공항은 사실상 폐쇄되었다. 폭우에 오가지도 못한 채 함께 공항에 고립된 택시 드라이버들이 핸드폰을 들고, 장대비로 물바다가 된 메인 거리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며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인종 국적 상관없이 삼삼오오 모여 아이디어를 짜기 시작했다. 한 택시 드라이버가 다가와 평소 택시비의 몇 배가 넘는 금액을 제시했다. 그 돈으로 비를 뚫고 지옥으로 가자는 뜻이였다. 내가 가야할 곳은 구불구불한 산길을 거쳐 한 시간을 넘게 차로 달려야 하는 곳이였다. 가격을 들은 사람들은 고개부터 저었다. 그는 이런 위기, 아니 이런 피크타임을 노리는 프로인지도 몰랐다. 비라는 것은 언젠간 멈출 텐데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사람들은 불안에 사로잡혀 그 단순한 사실을 잊은 듯 했다. 나 역시 물로 가득찬 공항 게이트 도로쪽을 서성이며 상황을 살피다 결국 포기한 채 공항 의자에 드러누웠다. 무엇보다 배가 몹시 고팠다. 그때 근처를 함께 서성이던 중국인 남자애가 다가왔다. 키가 작고 마른 체격에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사실 지금 기억으로는 중국인이였는지 중국계 외국인이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싱가폴에 있는 IT업체에서 근무하거나 펀드매니저 같은 일을 하면 저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은 이미지였다. 그가 나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나는 그저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 그가 짐을 맡아줄테니 먹을 것을 사와도 괜찮다고 했다. 앉은 자리에서 사온 빵을 해치웠다. 다른 외국인들 눈에 우리는 아시안 커플처럼 보였을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선하고 친절했다. 나랑 비슷한 체격 탓인지, 희디흰 피부 탓인지 그렇게 유해해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번갈아 짐을 지키고 화장실을 다녀오며,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택시들을 기다렸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어떤 해결책도 보이지 않자 그가 물었다. “같이 근처 호텔에서 자는 건 어때? 물론 너에게 어떤 것도 하지 않을 거야.”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왜 그토록 무서웠을까. 좋은 대안 대신 nothing, anything, something…… 그런 단어들이 입속에 맴돌았다. 그의 호의가 일순간 불편해졌다. 싱가폴에 사는 중국인 아니 호텔비를 지불한 낯선 남자를 따라간다면 그곳이야말로 지옥이겠지. 배가 고프고 잠이 쏟아졌다. “아냐 괜찮아 가고 싶으면 너나 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주 간단한 영어로 대답했던 것 같다. 지금와서 돌아보면 귀여운 해프닝이었다. 나는 그저 기사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관찰하며 그들의 신변을 주시했다. 그럼에도 자꾸 무언가를 제안하는 중국인 남자애에게 행선지가 다른 것을 빌미삼아 그에게 안녕을 고했다. “우리는 각자 간다!” 그는 이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하면 폐쇄된 공항을 빠져나갈 수 있는지 거기에만 신경을 쏟았다.

 

어디선가 도로의 물이 빠지고 있다고 설명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서너 명의 인도인으로 보이는 여자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녀들과 돈을 조금씩 모아 벤을 구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몇 명의 사람들이 합류해 벤을 가진 드라이버와 딜을 했다. 다시 나가본 공항 게이트는 정말 홍수가 난 듯(정말 홍수가 났지만) 빗물에 잠겨 있었고, 뿌리채 뽑혀나간 야자수들이 물에 둥둥 떠다녔다. 확실히 비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생존모드의 나는 예감했다. 갈 수 있다. 벤을 타자마자 몇몇은 잠이 들었다. 구불구불 좁고 미끄러운 산길이였다. 드라이버는 가끔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폭우만을 바라보며 난리통에 서성이던 나와 지금 벤에 몸을 싣은 내가 잘 구분되지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 나무 그림자뿐이였다. 한 시간 넘게 달리는 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순서대로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말할 수 없는 고단함이 밀려왔다.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점점 나의 호스텔 간판이 보이는 것 같았다. 캡쳐해둔 호스텔 이름을 수차례 확인했다. 호스텔 간판 조명이 환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폐쇄된 공항에서 서성일 때 신을 불렀던가. 모든 것이 은총으로 느껴졌다. 커다란 캐리어를 질질 끌고 호스텔 문을 열었다. 호스텔의 천장은 높고 에어컨은 시원했다. 새벽이었는데 리셉션에 직원들이 앉아 있었다. 너 여기 어떻게 온거야? 직원은 당황한 모습으로 체크인을 해줬다. 젖은 머리칼을 티셔츠로 털어내며 말했다. 벤을 타고 왔어. 나는 원한다. 깨끗한 방을. 만나서 반가워.

 

 


 

* 대니얼 Z. 리버먼, 마이클 E. 롱, 『도파민형 인간』, 최가영 옮김, 2019, 쌤앤파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