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 없는 스튜디오, 키친에서
유럽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카트에 담은 싸고 신선한 채소, 납작복숭아와 토마토, 곡물을 먹여 키운 소고기와 돼지고기가 짐승의 부산물 아니라 피난과 착취의 부산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신식민지의 서막은 모습과 모양을 달리할 뿐 예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다.
스튜디오라고 부를 수 없는 방에 사는 이들의 모습은 국경을 넘어온 난민들과 다르지 않다. 누군가 도파민에 취해 즐기고 쓰고 버리는 동안, 누군가는 뜨거운 주방 한켠에서 파티에 나갈 재료를 썰고 굽는다. 파리로 들끓는 쓰레기 더미를 나르고, 어둡고 캄캄한 방에서 대마를 키워야 한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도 못하고, 기관지가 나빠져가는 동료 옆에서 코카인 반죽을 열심히 빚어야 한다. 밤이면 쉬지도 죽지도 못하는 좁은 방에서 기절하듯 잠들어야 한다. 운이 나쁘면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밤도 있다. 기절하듯 잠든 그들에게 아침은 기절 후에 찾아온다. 부에서 밀려난 세계 젊은이들은 이런 방식의 삶으로 동기화된다.
내가 오가며 본 동남아 지역의 젊은이들은 저녁이면 대개 불빛 없는 골목 구석이나 층계 귀퉁이, 시멘트 벽이 노출된 방에 쭈그려앉아 있었다.
얼마나 낡았는지 가늠되지 않는 건물 천장. 기울어진 시멘트 벽돌.
철거중이거나 기둥만 남은 폐건물 어딘가.
비바람에 무너질 것만 같은 그곳에서 그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식당이나 숙소를 배회하다 어둠 속에 완전히 묻혀 있던 그들의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곤 했다.
친구처럼 보이는 몇몇이 각자 스마트폰에 열중하고 있다. 스마트폰 불빛 속 그들의 눈 코 입이 드러난다. 틱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숏폼이나 동영상을 시청하면서 낄낄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다 다시 자신의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수영장이 딸린 고급 빌라, 슈퍼카, 무언가로 성공한 유튜버가 찬 롤렉스…… 물론 이런 것들도 그들의 관심사겠지만 우스꽝스러운 해외 토픽, 자신의 나라에서 벌어진 사건과 사고, 최근 틱톡에서 유행하는 챌린지, 백만 팔로워를 가진 인플루언서의 브이로그…… 오히려 이런 것들이 그들이 하루종일 들여다보고 집중하는 주제들 같다.
그것을 바라보는 그들의 동공이 핸드폰 불빛 속에서 여러가지 빛을 띈다.
한국은 생활 수준이 일정치 이하로 내려가면 급격한 불우함에 시달려야 한다. 이곳의 가난은 불결함에서 태평하고 안간힘을 다하기보다, 우울이 안 보이는 이상한 형태로, 단순히 소유 자산의 빈약함 정도로만 보일 때가 있다. 가방에 든 게 없어서 슬픈 게 아니라, 가방이 없어도 두 손에 들 것만 있으면(두 손에 들 것이 없어도) 낡은 스쿠터를 몰고 친구를 만나러 간다.
그들의 지역에는 대개 가족과 친족이 모여 산다. 동네 어디를 가도 행복의 역치값이 비등한 친구들이 있다. 밤이면 문 닫힌 식당 테이블에 모여 독하고 싼, 휘발유 맛이 나는 양주 보틀을 나눠마신다. 누군가는 데이팅 어플리케이션에서 매칭된 이십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의 여자에게 비디오 콜을 걸고, 누군가는 빈랑을 씹거나 전자담배를 피운다. 누군가의 유튜브에서 몇 년간 히트친 edm 음악을 밤늦게까지 틀어놓는다. 중간중간 광고 때문에 음악이 끊긴다. 형들이 시답잖은 주제로 떠드는 동안 초등학생 아니 중학생일까, 형들 옆에서 피다만 담배에 도로 불을 붙이거나 삶은 콩줄기와 튀긴 돼지비계 과자를 집어먹는다.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플립플롭들이 나뒹군다.
나라에 큰 행사가 있으면 모두 참여하고 부모 세대가 알려준 신을 믿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올리며 전통을 교류하고 나누는 것이 그들에겐 어색한 일이 아니다.
안개가 자욱한 화산 아래서, 녹슨 판자로 가린 집 대문 앞에서. 주변 모두 가난하면 누가 더 가난한지 알 수 없다. 그럼 가난하지 않다. 그들에겐 먼 세계 이야기 같은 부보다 와이파이가 터지는 곳이 어딘지, 값싼 인터넷을 살 수 있는 곳이 어딘지가 더 중요해 보인다.
바나나튀김같은 트랜스지방으로 가득한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고, 스쿠터를 타고 하루종일 땡볕 아래를 돌아다닌다. 하루의 마지막은 어김없이 불빛 없는 담벼락에 기대어 친구들과 틱톡을 보고 담배를 피우고……(그래도 여기에는 우리가 잊은 공동체 문화라도 있지만.)
‘부에서 밀려난 세계의 젊은이들이 보안에 취약한 이 vpn으로 동기화된다’라고 쓰다가…… 그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잠시 생각이 멈춘다.
취약해 보이는 그들의 삶은 정말 취약한가? 우리는 놀랍고 뛰어난 기술적 진보와 풍요를 누리지만 뭔가 완벽하지 않다는 생각에 자주 머문다. ‘현재의 나’는 부족하며 더욱 나를 매섭게 채찍질해야 나태하지 않게 삶을 꾸려갈 수 있다고 믿는다.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그 다짐으로 오늘의 ‘강인한 나’는 조금의 약한 소리도 내뱉을 수 없다. 약간의 실수도, 약한 자신의 대한 용서도 불가능하다. ‘강인한 내’가 만든 딱딱한 가슴으로 숨어들어 필사적으로 감추어야하는 ‘약한 나’만이 남는다. ‘약한 나’의 욕구는 오래된 틈과 구멍뿐이라서 무엇으로 메꾸든 완벽하게 채워지지 않는다.
주인 없는 개떼, 개미, 거미줄은 도시에 없지만
정돈된 위생적인 방에 누워 어둠 속에서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연락할 만한 누군가를 찾는다. 때론 인스타그램 피드에서 핫한 동남아 여행지에서 비비드한 색감의 투피스를 입고 셀피를 올린 친구가 되기도, 데이팅 어플리케이션에서 라이크like를 눌러둔 선호하던 mbti 상대가 될 때도 있다. 한 커뮤니티에서 누군가 재밌다고 추천하던 웹툰이나 웹소설 1화를 읽고 끄기를 반복한다. 정말 이런 회귀물에 위로받는 사람이 있을까. 다른 어플리케이션을 열어 쇼핑을 하다 갑자기 생필품이 떨어진 것이 떠오른다. 생필품 리뷰를 읽다 ‘우리 가족들이 주로 이용하는’으로 시작되는 리뷰를 읽는다. 갑자기 당장 나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해야할 것 같다. 가벼운 만남이 주가 되는 데이팅 어플을 지우고 결혼을 주목적으로 하는 데이팅 어플을 깔고 거기에 어울리는 프로필을 만든다. 신혼부부 주택 대출도 알아보고 이직할 회사의 평판을 그 분야의 블라인드 커뮤니티에서 살피며……
실업급여를 받으면 한동안은 그걸로 버텨야 하는데 고양이 사료값과 모래값은 얼마나 오른 걸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왜 아직 끝나지 않는 것일까. 사료가 러시아 공항을 거쳐 올텐데. 회귀물의 주인공이라면 고양이 사료값과 모래값이 오르기 전에 쟁여놨을까. 아니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예측해 주식이나 비트코인을 사는 게 현명하겠지. 기껏 고양이 사료 사재기라니.
우리는 왜 최선을 다한 하루의 끝에서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는 걸까. 다른 사람들과 함께여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가 아니여도 불편하고 고독한가. 핸드폰 알림음이 울린다. 일단 아직은 누군가와 함께이고 싶은 이의 메세지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 핸드폰 불빛이 너무 환하다.
시멘트 벽이 노출된 방, 무너진 담벼락, 야외와 바로 이어진 폐건물에 모여 웃고 떠드는 젊은이들. 여기에 드러난 것들이 정말 빈곤과 허기가 맞을까. 적어도 이 순간 그들의 모습에서 우울증이나 자살 같은 키워드를 찾아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그들을 관찰하고 어울리는 동안 우울증, 절망, 사회에 대한 경멸 같은 것을 나 역시 잊고 지냈다.
그런 사안들은 이곳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답답한 슈트 차림으로 더위로 뭉개진 도로를 걷는 것만큼 어색하다.
그들은 정말 정신과 약을 먹지 않고 잠드는 것일까.
브링인beringin나무 넓다란 잎사귀가 햇빛 속에서 흔들린다. 졸피뎀이나 자나팜정…… 신경안정제를 먹지 않고 걱정과 고민 없이 깊이 잠들 수 있는 인류가 있기는 한 걸까. 종일 내리쬐는 햇빛 탓일까. 임윤찬이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나 조성진의 쇼스타코비치 따위는 모르고 정말 평생 마음의 안정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인가.
그런 것쯤은 평생 몰라도 살 수 있다. 예술과 삶에 대해 알지 않아도,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지와는 관련이 없다. 그것들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종종 그들 역시 나를 바라본다.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대화한다. 카페에서, 오토바이 위에서, 불 꺼진 식당에 나를 초대한다거나.
나는 비행기를 타본 적은 없어. 그리고 대도시까지 나가본 적도 없어. 차는 있지만 기름값이 많이 들거든. 나도 외국에 나가보고 싶다. 하지만 내가 외국으로 나가려면, 크루즈 스텝으로 일해서 바다를 통해 유럽 같은 곳을 갈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굳이 외국에 나가 떼돈을 벌고 싶지 않아. 아버지가 아프셔서 간호를 해야 해. 다니던 일을 때려칠 때도 있지…… 물론 이 친구는 여기서 벌써 사 년째 일하고 있지. 달리 대안이 없으면 쭉 그렇게 일하는 친구들도 있어. 뭐가 됐든 먹고 살 수는 있어. 무슨 일을 하냐고? 투어가 필요한 외국인들을 태우고 이곳저곳 다니기도 하고 서핑도 가르치고 스노클링을 하러 온 사람들을 배에 태우고 돌고래나 만타가오리를 만나러 가기도 해. 저녁에는 서핑숍을 정리하거나 오너의 아이들을 데리러 가기도 하지. 힘드냐고? 아니 나는 아직 너무 젊어. 전혀 힘들지 않아.
코로나 때는 정말 힘들었거든. 웹디자이너 일을 하던 친구가 코리안이 오지 않는 코리안 바비큐가게에서 주방일을 하다 가게가 문을 닫은 적도 있어. 코로나 때 나는 작은 섬으로 건너가 대용량 식용유를 소분해 로컬들에게 싸게 팔았어.
우리 가족은 총 여섯 명. 그중에서 세번째 여동생은 벌써 여자아이를 낳았지. 나는 지금의 가족과 친구들이 너무 좋아. 곧 우리 지역에서 가장 큰 페스티벌이 시작 돼. 세게르 해변에서 이걸 잡는 거야. 왓더퍽…… 이걸 잡아. 구글로 검색해봐. 목숨을 바쳐 왕국을 구한 공주를 기리는 거야. 이 시기에 이게 떠오르거든. 사삭 사람들은 이걸 그녀의 몸과 머리카락이라고 믿지. 여기선 이걸 무척 성스럽게 여겨. 성스럽게는 영어로 뭐더라. 여기서는 ‘냘레’라고 불러. 한국말로는 뭐라고 해? 지렁이, 갯지렁이.
raining!! 머리로 빗방울이 떨어지자 그들은 낄낄거리며 맨발로 건너편 도로로 뛰어갔다.
청결함과 더 많은 편의를 가진 한국의 선택지가 이들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깨끗한 기름에 튀긴 훗카이도식 돈카츠와 정갈한 식사 후, 후식처럼 따라오는 공허함. 그것이 더 좁은 선택지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