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겁나 특이하네. 어떻게 거기로 갔지?”

“겁나 특이하네. 어떻게 거기로 갔지?”

격한 감정으로 귀와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오른 시후가 물방개를 뒤집어봤다. 방송이 끝나자 시후는 얼굴에 쓴 스타킹을 찢듯이 벗겨내고는 원형 게임판 안에 손을 넣어 물방개를 집어들었다.

“개구리 먹던 놈인가?”

시후의 말에 둘희가 돌아봤다.

“개구리 줬습니까?”

강선생은 남은 소주와 잔을 들고 출연자에게 다가갔다. 난데없이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던 출연자는 카메라가 꺼지자 분수대의 물줄기처럼 무너지듯 벽에 등을 대고 앉았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강선생이 든 소주병을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눈치였다. 강선생이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의 말을 건네자 시후가 물방개를 손에 든 채 자기의 컴퓨터 앞으로 걸어가 음악을 틀었다. 빠른 비트의 영어 랩이 큰 볼륨으로 흘러나왔다. 둘희는 전기선을 둥글게 감으며 곁눈으로 출연자를 지켜봤다. 만약 그가 돌발 행동을 하더라도 강선생이 그를 막을 것이다. 시후도 있으니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시후는 출연자가 내뿜는 절망감이 자신을 위협하는 걸 보고만 있지 않았다. 부르튼 입술에 침을 묻히며 이제 가셔야 한다고 시후가 퉁명스럽게 내뱉자 출연자는 마지못해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어지러운 듯 엉거주춤 서서 한쪽 눈을 찌푸린 채 숨을 가다듬었다.

“술이 깰 때까지 제가 이쪽 선생님이랑 같이 있다가 가면 어떨까요.”

이마에 흘러내린 은발을 한쪽으로 쓸어넘기며 강선생이 말했다. 둘희는 강선생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오른쪽 뺨에 스타킹의 망사 자국이 남아 있었다.

“대표님께 여쭤보겠습니다.”

둘희가 자기의 책상이 있는 벽 너머 곁방으로 갔다. 촬영 전부터 강선생은 출연자에게 위 보호 음료를 건네며 그를 챙겼다. 그 음료를 받아들며 출연자가 비밀을 털어놓듯 강선생에게 속삭였다. 실은 제가 위암 수술을 받아서 많이 못 먹어요. 그 말에 자리에 앉아 있던 시후가 껑 하고 혀 굴리는 소리를 크게 냈다. 둘희는 수술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매운 파김치를 먹어야 하는 이번 방송에 저 사람을 섭외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자기 병력을 방송에서 말했더라면 나았을 텐데. 둘희는 메신저에 접속해 자판을 두들겼다. 속으로만 감정을 삭이는 출연자의 성향이 물방개 로또에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근거 없는 추측이었으나 그렇게라도 자신의 책임을 덜고 싶었다. ×0이라니, 둘희는 물방개가 왜 기어이 수초를 헤치고 거기로 헤엄쳐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출연자가 왜 처음 잡았던 물방개를 놓아주고 몸집이 크고 힘이 센 다른 물방개를 건져냈는지, 강선생은 왜 여기에 남아 있겠다고 하는 건지, 이 악몽 같은 시간을 왜 더 연장하려고 하는지, 둘희는 그 마음들을 헤아리고 싶지 않았다.

“두 시간 정도면 되겠습니까? 열시까지는 정리해주십시오.”

둘희가 말하자 강선생이 소리 없이 웃는 표정을 지으며 고맙다는 표시를 내보였다. 출연자는 강선생이 건넨 유리컵을 두 손으로 받치고 있다가 꿀꺽이는 소리를 크게 내며 물을 마셨다. 실내는 여전히 싸늘했음에도 그의 흰색 셔츠 겨드랑이에는 땀 얼룩이 흥건했다.

“이력서에 병력은 없었습니까?”

자동 센서로 하나씩 불이 켜지는 계단을 내려가며 둘희가 물었다. 둘희는 자신이 검토했던 출연자의 이력서를 머릿속으로 되짚어보고 있었다. 이제껏 어떤 출연자도 방송이 끝난 뒤 사무실에 남아 있지 않았다. 언제나 출연자를 가장 먼저 사무실에서 내보낸 뒤 강선생과 시후가 정리를 끝내면, 둘희가 마지막으로 문단속을 마쳤다. 그런데 그 규칙을 깨도 되는 걸까?

“없었어요. 그리고 암처럼 흔한 건 방송중에 말해봤자 별 반응도 없어요.”

시후가 바이크의 열쇠고리를 검지에 걸고서 짤랑거렸다. 그러고는 콧방울에 난 여드름 흉터를 뜯으며 덧붙였다. 출연자가 물방개를 집어던지기라도 하면 재물 손괴죄로 고소하면 되니 걱정하지 말라고. 시후 방식의 위안이었다.

“타실래요?”

시후가 자신의 바이크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둘희는 대꾸하지 않은 채 건물 일층 주차장에 세워둔 파란색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리고 시후를 돌아보지 않고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눈 녹은 내리막길이 얇은 은박지처럼 빛났다.

“메리 크리스마스!”

브레이크를 잡으며 조심스럽게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둘희에게 시후가 소리쳤다. 석유처럼 새까만 시후의 헬멧이 이차선 도로를 지나 북쪽 길로 빠르게 멀어졌다. 둘희는 남쪽 해안가로 방향을 틀어 모래사장이 펼쳐진 길을 따라갔다. 바다는 잔잔했고 모래톱은 눈 내린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이 황색으로 가지런히 펼쳐져 있었다. 길 맞은편 공영주차장에서 편의점 사장과 조개구잇집 직원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앞치마를 한 채 쪼그려앉은 조개구잇집 직원이 둘희를 보자 꽁초 불을 검지로 탁탁 튕겨 꺼뜨렸다. 그게 무슨 신호라도 되는 듯 편의점 사장이 고개를 돌려 둘희를 보고는 군기침하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둘희는 멀리 캠핑촌에 켜진 흰색 줄 조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자전거 바퀴가 흙길을 내달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최대한 빠르게 번화가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주차장에 세워진 빛바랜 진녹색 자동차를 보고 순간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연자가 타고 온 자동차였다. 어깨 패드가 달린 밤색 울 코트를 갖춰 입은 그는 약속 시간보다 두 시간 일찍 도착해 공용주차장에 차를 대고 오르막길을 걸어왔다. 회사 건물 일층에도 주차장이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승용차에게 바닷바람을 쐬게 해준다며 모래벌판 앞 공터에 차를 세웠다. 바닷바람이라 말하고 그는 웃었다. 자기가 던진 농담에 자기가 먼저 웃어버리는, 농담한 후에 흐르는 짧은 정적과 긴장을 어색해하는 사람이었다. 둘희는 방송이 끝나기 전 그가 꼭 하고 싶다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청춘들, 힘냅시다!

 

자전거 속력을 높이자 맞바람이 가슴을 떠밀었다. 그쳤던 진눈깨비가 다시 스티로폼 가루처럼 작고 가볍게 흩날렸다. 찬바람이 귓바퀴를 세게 할퀴고 지나갔다. 둘희는 펜션과 호텔이 늘어선 좁은 사잇길로 자전거를 몰았다. 야트막한 비탈길을 따라 큰 식당이 몇 개 있었지만, 길 양쪽에 늘어선 벽돌 건물은 대부분 이 지역에서 오래 살아온 주민들의 집이었다. 낮은 담벼락에 백조 모양의 화분이 줄지어 있는 곳을 지날 때 둘희는 골목에 나와 있는 노인과 마주쳤다. 노인은 둘희를 보자 마당 안으로 들어가 철제 대문을 소리 나게 닫았다. 둘희는 가루눈에 젖어 반짝거리는 아스팔트길을 지나갔다. 바다뷰, 석양빛, 돌고래 등의 이름이 붙은 숙박업소들을 차례로 스쳐갔다. 건물 입구마다 발을 씻는 야외 수돗가가 마련돼 있었고, 여름 휴가철이면 피서객들이 그곳에서 허리를 굽히고 서서 모래가 묻은 슬리퍼와 발을 씻었다. 둘희는 쓰레기 수거함 앞에서 분리수거를 하는 판타지아 펜션 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사장은 소리 나게 페트병을 우그러뜨리며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둘희를 눈으로 좇았다.

 

욕먹을 만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가?

 

큰 도로로 나오자 조도가 높은 가로등 빛이 펼쳐졌다. 성탄절 이브라 그런지 카페나 작은 상점들은 늦은 시간인데도 여전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 둘희는 페달에 발을 얹은 채 사차선 도로의 양쪽을 살폈다. 상행선 방향에서 멀리 덤프트럭의 헤드라이트가 보였다. 하행선 쪽에서도 여러 대의 차가 줄지어 오고 있었다. 건널목은 그리 멀지 않았다. 그런데도 둘희는 달려오는 차들의 속력을 머릿속으로 어림잡으며 상체를 숙인 채 빠르게 도로를 가로질렀다. 자동차 경적이 길고 사납게 울렸다. 그 굉음이 구정물처럼 둘희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반성합니다. 도와주십시오. 다시 잘 살겠습니다.

 

케이크 가게에 가려면 도로를 따라 공항 방면으로 가야 했다. 버스 정류장 세 개의 거리였다. 둘희는 추위에 오그라드는 손으로 핸들을 꽉 붙잡고서 속력을 높였다. 해풍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갗을 긁어대는 찻길의 바람이 둘희의 뺨과 목덜미를 후려쳤다. 그 통증이 좋아 둘희는 턱을 치켜들었다.

 

기회를 주신다면 다시 잘 살고 싶습니다.

 

빵집에 들러 예약한 케이크를 들고나오며 둘희는 희박한 확률에 관해 생각했다. 희박한 숫자, 희박한 가능성, 희박한…… 세차게 날개를 퍼덕이다 최대한 몸을 날렵하게 움츠려 기류를 타는 새처럼 둘희는 엉덩이를 든 채 힘껏 페달을 굴리다 내리막길에 다다라 발을 멈추고 가속도가 주는 위험을 만끽했다.

진녹색 승용차는 그대로 서 있었다.

앞유리에 가루눈을 뒤집어쓴 채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둘희는 자전거를 끌며 언덕을 올랐다. 밤의 해변은 차고 황량했고, 멀리 캠핑촌의 전구들이 뿌옇게 번져 보였다. 조개구잇집에서 새우와 대합을 불에 굽는 냄새가 풍겨왔다. 편의점 앞 나무 테이블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컵라면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둘희는 경사면 끝까지 올라 자전거 짐받이 위에 끈으로 고정해둔 케이크 상자를 꺼내들고서 바다 쪽을 향해 자란 곰솔 앞에 섰다. 몇 시간 전에 출연자는 이곳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그는 좋은 각도를 찾는다며 휴대전화를 쥐고서 한동안 언덕 주변을 서성였다. 그렇게 찍은 사진을 애들 단톡방에 올리겠다며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둘희에게 했다. 위를 완전히 없애서 이제 위암 걱정은 없다고도 했고, 혹여나 그 말이 농담인 걸 모를까봐 자신이 먼저 웃어 보였다. 그는 말을 썩 잘했다. 익살스런 당나귀 그림이 그려진 후드 집업을 입은 시후에겐 그렇게만 입고 춥지 않으냐고 물었고, 강선생에겐 형님이라 부르며 낚싯배를 타고 먼바다로 나가 도다리를 잡던 자신의 옛이야기를 길게 했다. 그는 자식들에게 방송 출연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하려고 했으나 번번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만약 애들이 보게 된다면 아버지가 살려고 얼마나 애쓰는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살려고 얼마나 애쓰는지. 그는 호주로 가족여행을 갈 수 있을 정도의 돈을 원했다. 둘희는 그에게 돈이 생기면 먼저 임플란트 시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방개가…… 왜 그랬을까요.”

그는 이해하고 납득하고 싶어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까지 심하게 말하는지 그 경멸의 감정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에게 인생이란 자신의 것이나 타인의 것이나 놀잇감이나 스트레스 풀이용 게임이 아니었다. 그가 이메일로 길게 적어 내려간 ‘나의 인생 이야기’에는 그가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둘희는 강선생이 출력해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놓은 그 글을 여러 번 읽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머릿속에 그릴 수 있을 만큼 글은 구체적이고 장황했다. 그는 어느 때부터인가 멸칭이 되어버린 586이란 호칭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아버지, 가장의 책임, 청년의 꿈, 성실한 노력 같은 단어를 불신하지도 않았다. 그는 국가 대항전 스포츠 경기가 열리면 조국을 응원했으나 상대가 약팀이면 상대의 선전도 함께 바랐다. 정치 시사 프로에 나오는 사람들이 ‘나라님’이나 ‘백성’ 같은 단어를 쓰면 시대착오적이라 싫었고, 짧은 머리에 정장을 갖춰 입은 엘리트 여성이 티브이에 나와 조리 있게 말하는 걸 볼 때면 자신의 딸들이 꼭 저렇게 컸으면 하고 바랐다.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으나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으면 여전히 가슴 한쪽이 찌르르하며 서글퍼졌다.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각오하고 있었고, 자주 왕래하진 못하지만 형과 여동생들의 안녕을 진심으로 바랐다. 그는 자신의 전 부인과 처가 식구들을 겪어본 경험으로 특정 성씨가 고집이 세다는 속설을 은연중에 믿었다. 그러나 특정 지역을 비하하는 건 매우 몰상식하다고 여겼고, 동업자의 배신에 대해서는 배신한 사람을 욕해야지, 신뢰하고 마음을 연 사람을 한심하다고 욕하는 태도는 책임 추궁의 방향이 한참이나 잘못된 거라 생각했다. 그는 어떤 일이건 전후 사정이 있고 그렇기에 해결해나갈 방법도 있다고 믿었다. 그는 맥락 없이 튀어나오는 여자의 가슴 크기 얘기나 외모를 비하하는 말들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는 무작위의 악담 속에서 말의 앞뒤를 가늠하려 노력했다. 성 기능 저하 같은 시답지 않은 얘기는 친구들과 소줏집에 둘러앉아 주고받는 한때의 안줏거리일 뿐 이제 그런 식의 쾌락이 황혼기를 앞둔 자기에게 그다지 큰 만족을 줄 수 없다고 여겼다. 둘희는 그가 인터뷰에서 하는 말을 들으며 관광버스를 타고 온 중년남성들이 조개구잇집 야외 테이블에 앉아 손가락을 동그랗게 모은 채 성행위를 흉내내며 낄낄대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둘희는 그들을 경멸했던가.

회사 사무실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둘희는 이층 사무실 문 앞에 서서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흰 빛을 바라봤다. 둘희는 강선생이 출연자들에게 ‘선생님’이란 호칭을 붙이는 게 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새 자신도 강선생을 따라 그렇게 부르고 있었고, 강선생이 캣맘을 ‘캣어머님’이라고 부를 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둘희는 강선생을 신뢰했으나 한 번도 자신이 삼층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둘희가 언제나 사무실에서 맨 나중에 나가는 이유도 자신이 위층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직원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선정적인 말이 난무하는 환경에서 일하는 만큼, 둘희는 더욱 삼가는 태도로 직원들을 대했고 자신의 사생활이 드러나지 않도록 신경썼다.

둘희는 발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올랐다. 오늘 자신이 어긴 규칙을 떠올리며 그게 강선생 때문인지, 아니면 시후 탓인지 분별해봤다. 희박한 확률, 희박한 가능성, 희박한 수치. 둘희는 시후가 물방개들을 그 희박함 쪽으로 길들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방개들에게 먹이를 제때 주았고, 이따금 죽은 개구리의 몸통을 잘라 수조에 던져주며 먹이를 두고 경쟁시켰다.

“저는 이 버러지들이 언젠가 날 거라고 믿어요.”

시후는 물방개들이 나오지 못하게 수조 뚜껑을 닫아놓으면서도 그 곤충들이 언젠가 탈출에 성공해 건물 밖으로 훨훨 날아가길 바랐다. 몸집이 큰 물방개들을 건져내 훈련을 시키듯 벽이나 바닥을 빠르게 기어가게 했고, 수초를 헤치고 나가도록 먹이로 유도했다. 볼펜심으로 구멍을 뚫은 봉투에 물방개를 담아 한두 마리씩 회사 밖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이래야 안 처맞고 사는 거구나.”

지난가을 시후는 회사 대표에게 받은 이메일을 확인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시후는 수염 자국으로 거무스름한 코밑을 어루만지며 대표의 경고성 이메일을 한 줄 한 줄 되짚어 읽었다. 언제나 푸석하게 몇 가닥 솟아 있는 머리카락을 검지로 꼬아 잡아당기며 인터넷에 횡령이나 재물 손괴죄 같은 단어를 검색해봤다. 그런 다음 자기가 쓰는 ‘버러지’라는 말은 국어사전에도 나오는 낱말이니 문제없다는 메일을 대표에게 보냈다. 시후는 대표님을 진짜 존경하고, 진짜 배우고 싶고, 대표님 같은 분과 일하게 되어 진짜 정말 영광이라고 답신을 썼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시후는 대표처럼 자기 재물의 손괴 여부를 빠삭하게 꿰고 있어야 부자가 되는 거라고 말했다. 그는 밤마다 대표가 사무실로 내려와 물방개 숫자를 세어본다고 짐작했고, 자신이 수조 관리를 얼마나 깨끗하게 하고 있는지 대표는 다 알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바다가 보이는 삼층 건물의 소유주, 온라인 스트리밍 방송사의 대표이면서도 직원과 말 한마디 섞지 않고 일하는 경영 스타일, 물방개 로또라는 희대의 병맛 게임을 만든 둘희의 이모인 대표가 자기의 이상형이라고 했다.

“저는 한 번 갔다 왔어도 상관없어요.”

시후는 둘희에게 대표가 참석하는 회식을 정기적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여러 번 건의했다.

 

*

 

“저 왔어요. 밖이 시끄럽죠?”

둘희는 밝은 목소리를 꾸며내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신발장 위에 케이크 상자를 올려놓고 구두를 벗으며 깨끗한 타일 바닥을 내려다봤다.

잠시 집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해변에서 터뜨리는 폭죽 소리가 집안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케이크 사왔어요. 오늘 어땠어요?”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호랑가시나무 잎과 빨간 열매가 둥글게 그려진 종이 상자를 식탁 위로 옮기며 둘희가 말했다. 욕실로 들어가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 동안 둘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살폈다. 조각난 이쑤시개를 잘못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심하게 따끔거렸다.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어떻게 거기로 갔는지.”

둘희는 불을 켜지 않은 채 흰색 패브릭 벽지를 손끝으로 쓸며 방으로 들어가 옷을 벗었다. 긴장과 스트레스로 명치부터 아랫배까지 격통이 밀려왔다. 간신히 코듀로이 셔츠에서 팔을 빼낸 다음 어깨 아래로 전신 속옷을 내릴 때 문득 방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뭐라고요?”

속옷을 배꼽 아래로 내리다 멈칫하며 둘희가 문밖에 대고 말했다. 블라인드 줄을 잡아당기는 소리가 들릴 뿐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뒤이어 문소리가 났고, 거실 쪽에서 불이 켜졌다. 천장등이 아닌 살구색 스탠드 조명이었다.

“안경이…… 어디로 갔지.”

낮지도 높지도 않은 톤으로 혼자 수수께끼를 풀듯 한기연이 나지막이 내뱉었다. 큼지막한 흰 티셔츠에 얇은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은 한기연이 머리카락을 집게 핀으로 틀어올리며 둘희가 있는 방 앞을 지나쳐갔다. 둘희는 옷을 마저 벗고서 알몸인 채로 얼마간 서 있었다. 방 한구석에 무슨 글자라도 적혀 있는 듯 멍하니 어두운 곳을 응시하며 머리에 고정된 가발의 똑딱이 단추를 풀었다. 짧은 커트 머리의 가발이 바닥에 떨어졌다. 둘희는 벌거벗은 그 상태로 방을 나갔다. 차라리 한기연이 알아차리길 바라며.

“내 잘못은 아니지만, 그 사람이 나를 보던 눈빛이……”

둘희가 상자에서 케이크를 꺼냈다. 윤기가 흐르는 신선한 딸기가 빼곡하게 올라간 초콜릿케이크였다. 등뒤에서 한기연의 시선이 느껴졌다. 둘희는 한기연의 눈에 비칠 자신의 나체를 상상하며 케이크 위에 장식된 딸기를 집어 연달아 입안에 넣었다. 시고 물컹한 딸기를 우물거리며 수납장 쪽으로 걸어가 샴페인 잔 두 개를 한 손에 쥔 다음 와인 셀러 앞에 서서 병목을 돌려가며 병에 붙은 라벨을 살폈다.

“안 추워?”

“음악 틀까요?”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이 서로에게 물었다. 둘희는 식탁 의자에 걸쳐 있는 목욕 가운을 집어들었고, 한기연은 거실 탁상에 올려놓은 빔 프로젝터를 켰다. 한기연이 리모컨을 누르자 맞은편 벽에 설치된 새하얀 스크린이 천천히 아래로 펼쳐졌다.

“꽝이 아니었으면 나도 허락하지 않았을 거예요.”

둘희가 목욕 가운의 도톰한 끈을 허리에 동여매며 말했다. 한기연은 난시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뜨며 흰 장막을 향해 버튼을 눌렀다. 한기연의 여윈 팔과 손목이 강한 빔 조명을 맞아 더 창백해 보였다.

“자기야, 그런 표현 쓰지 마. 무슨 애들 게임 같잖아. 직원들 앞에선 더 조심해.”

한기연의 부드러운 꾸짖음에 둘희는 순간 귓속이 먹먹했다. 그런 식으로 한기연은 규칙을 어긴 둘희를 질책했다. 강선생이 출연자와 사무실에 남아 있겠다고 했을 때 둘희는 한기연에게 승낙을 구하지 않았다. 한기연은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게 뻔했다.

“그럼 술 마신 사람한테 운전하고 가라고 해요?”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쏘아붙인 둘희는 자신이 한기연에게 화를 냈다는 게 믿기지 않아 곧장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러고도 동요하는 마음을 어찌할 바 몰라 케이크 크림 속으로 손가락을 쑤셔넣었다. 차고 끈적한 초콜릿 크림의 감촉이 검지를 에워쌌다. 갈고리로 긁어내듯 둘희는 손가락을 구부리며 케이크의 귀퉁이를 허물었다. 한기연은 백열 광선이 어른거리는 스크린 앞에 서서 리모컨 위에 튀어나온 작은 고무 버튼을 눌렀다. 스크린 양쪽에 세워놓은 스피커에서 느리고 울적한 멜로디의 트럼펫 연주가 나오다 보사노바풍의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연주가 끊기고 귀에 익은 영화 배경음악이 조금 높은 볼륨으로 재생되었다. 그러나 다시 울리기 시작한 해변의 폭죽 소리에 실내의 모든 사운드가 지워졌다.

“뭘 저렇게 과시하고 싶은 거야? 대체 왜 저래?”

한기연이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리모컨을 소파 위로 툭 던지고는 자기의 서재로 들어갔다. 바다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집의 안쪽 공간이었다. 둘희는 손에 엉겨붙은 크림을 목욕 가운에 아무렇게나 닦아냈다. 그런 다음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딱딱한 막대를 만지작거렸다. 그대로 있구나. 검은 펜으로 날짜와 시간을 써놓은 임신 테스트기였다. 오늘 밤 둘희는 모든 걸 털어놓을 생각이었다.

 

욕먹을 만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가?

 

우스운 질문이었다. 사람들이 욕하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한기연은 애초에 그 질문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둘희는 한기연이 보여줬던 과거의 모습을 하나씩 머릿속으로 되감으며 주머니 속 임신 테스트기 가장자리로 손톱 주변 살을 꾹꾹 눌렀다. 한기연은 다른 사람의 평가나 말 따위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언론이 떠들썩하게 공격하고, 익명의 사람들이 인터넷 게시판에서 그녀의 삶과 이력을 난도질해도 한기연은 자기의 말을 취소하지 않았다. 섣불리 사과하지도,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다. 속으로는 겁먹었을지 몰라도 공식적으로는 끝까지 태연하고 당당했다. 한기연은 자신의 불안을 숨길 줄 알았고, 그 불안이 예기치 않은 순간에 굴종적인 태도로 튀어나올지 몰라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혼자 지냈다. 한기연은 고립이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기연이 두려워하는 건 다른 것이었다. 한기연이 두려워하는 것은, 한기연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 집은 왜 도무지 따뜻해지지 않는 걸까.

 

둘희는 거실 벽에 붙은 보일러 컨트롤러 앞으로 갔다. 종일 억눌렀던 불안과 압박감이 그제야 오한으로 몰려왔다. 계기판 버튼을 연속으로 누르며 온도의 숫자를 높여가던 둘희는 뭔가 떠오른 듯 식탁으로 걸어갔다. 약병이 들어 있는 등나무 바구니 안에 한기연의 안경이 놓여 있었다. 둘희는 그 갈색 테 안경을 손에 쥐고 현관으로 뛰듯이 걸어가 자기가 벗어놓은 검은 구두를 밟고 섰다. 신발 안에 발을 꿰어 넣을 틈도 없이 찍찍찍 구두를 끌며 은색 광택이 나는 단단한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계단 난간에 배를 대고서 허리를 숙여 이층 사무실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몇시지? 둘희는 자신은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출연자는 애걸하는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말 돈이 필요했다면 간절하게 매달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게임을 한 판 더 할 수도 있었다. 어차피 오늘은 규칙을 어기는 날이니까. 둘희는 자신이 결코 몰인정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