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회

아무도 죽지 마라

인구 십일만의 작은 도시 A는 구도심의 끝부터 신도심의 끝까지 차로 이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배출해낸 영화나, 그마저도 떠올리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집단 성폭행 사건 정도가 전부인 곳이었다. 화재가 발생한 요양병원이 있었던 거리의 이름은 ‘전도연 거리’였다.


십일만 명 중 서른아홉 명이 한꺼번에 죽었다. 이런 것을 숫자로 얘기하면 죽음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아서 얼굴들을 찬찬히 다 들여다보고 이름을 다 발음해보아야 했다. A시에 도착하자마자 분향소로 갔다. 몇몇 얼굴은 지금도 아른거린다. 하지만 곧 잊힐 것이다. 그런 것은 불가항력이다.


도시의 장례식장이 모자랐다. 시내에 장례식장은 다섯 곳뿐이었다. 며칠 동안이나 빈소를 마련하지 못하고 안치실에 보관된 경우도 있었다. 먼저 취재를 나와 있던 선발대가 서울로 돌아가고 L과 나만 A시에 남았다. L과 나의 역할은 자연스레 두 가지로 나뉘었다. L이 사고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는 기사를 썼고, 사연은 내가 맡았다. 발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이어졌다. 심경을 설명하는 말들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말을 잇지 못했다, 흐느꼈다, 울먹였다, 비통해했다,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등등등. 내가 수많은 글들로부터 보고 배운 문장이 이렇게 쓰이는 것이 적절한 일인지 허무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연 없는 삶이 없으니 사연 없는 죽음도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팔십 년의 삶을 갑자기 이해할 수 있지 않듯, 죽음도 한 시간쯤 장례식장 주변에서 서성거렸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오늘 마주친 죽음 중 가장 ‘기삿거리’가 될 만한 것을 선택해야 했다. 가장 기구한 사연을 선별해 기사의 리드로 쓰고 나면 내가 용서받을 수 없는 무례를 범한 것 같은 자책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런 환멸도 곧 피로와 함께 잠겨들었다. 오늘의 발인이 끝나면, 내일은 또다시 내일의 발인이 있었다. A시의 날씨는 서울보다 푹했지만, 혼자 쓰는 여인숙 방은 휑뎅그렁했다. 나는 서걱거리는 여인숙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이곳으로 도망쳐 왔던 영화 속 전도연을 떠올렸다. 실은 여기도 도망쳐 올 만한 곳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어차피 돌아가실 날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아니었느냐고. 귀한 목숨 덜 귀한 목숨 없다지만, 아이들이 속수무책으로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것보다야 조금 덜 슬퍼해도 되는 것 아니겠느냐고. 슬픔은 곧 잊힐 것이라고. 그런 댓글들을 찬찬히 봤다. 식당의 옆자리 사람들은 돈 얘기를 했다. 보상금이 팔천만원씩 돌아갈 것이고, 성금 모인 것을 따지자면 최소한 일억씩은 남은 가족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어르신들 돌아가신 것은 안타깝지만, 마지막에 자식들에게 좋은 일 해주신 것 아니겠느냐고. 그 얘기를 들으며 나는 돼지수육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노려봤다. 선배가 돼지국밥의 원조는 부산이 아니라 A시라면서 내 쪽으로 수육을 밀어주었다. 돼지에서 풍겨오는 잡내에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되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입을 씻으면서 귀도 함께 씻었다.


플라스틱이나 스티로폼이 타면서 나오는 일산화탄소는 마시면 수십 분 이내에 죽음에 이르고, 나치가 유대인 학살에 사용했다는 사이안화수소 가스는 수 분 이내에 죽음에 이르게 한다. "어머니 시체를 받아들고 보니 치아와 콧구멍 속까지 모두 새까맣더라. 마지막이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던 유족의 말을 받아 적었다. 오래 살았다고 해서 고통 앞에서 태연해질 리는 없었다. 죽음의 고통만큼은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었다. 그런 댓글을 쓰는 사람들도, 나도, 아무도 태연하게 죽음을 마주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할아버지도 그랬을 것이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아흔을 못 채운 여든아홉 살 12월 어느 날에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가 죽기 직전, 그가 바닥에 흘린 오줌을 닦아내면서 이제 오줌에서 냄새도 나지 않을 정도로 할아버지가 투명해진 것을 알았다. 할아버지는 네가 누구냐 자꾸 다그쳐 물었다. 할아버지, 소범이요. 한도수 윤광현의 딸 소범이요. 할아버지가 지은 이름이잖아요, 해도 도통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러다 무의식 속에서 헤엄치는 어느 새벽에는 이름들을 불렀다. 영채야! 광현아! 할멈! 할멈! 깜빡. 그러다 정신이 그치고. 깜빡, 다시 돌아온다. 나는 이어졌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이름들의 잔상 가운데서 교복을 떠올렸다. 할아버지가 사준 내 중학교, 고등학교 교복들이 옷장 구석에서 삭아가고 있을 것이었다.


죽기 전에는 배 안의 똥을 다 비워내느라 검은 똥을 싼다고 했다. 흐릿해진 의식 너머로도 식욕만은 건재했던 할아버지가 며칠 전부터는 음식이 도통 맛이 없다 했다. 슬슬 곡기를 끊더니 배 안의 마지막 똥을 다 싸고 갔다. 병상을 지키던 아빠가 아버지, 하고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사위 중 아빠를 유독 싫어했다. 대차고 호방하던 할아버지 성격에 말수가 적고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위는 영 비위에 안 맞았을 것이다. 그래도 죽기 전 육 개월간 손발을 닦아주고, 죽을 떠먹여주고, 말동무가 되어주고, 임종을 지키게 될 사람이 그 사위라는 건 미워할 때는 몰랐을 것이다. 어느 날은 도수야, 하고 불렀다가 또 어느 날은 도수씨, 하고 사위를 부르게 될 것을 몰랐을 것이다. 아빠는 할아버지가 애교도 있고 카리스마도 있고 귀엽기도 하고 멋있기도 한 사람 같다며 웃었다.


염을 하던 장례 지도사가 수의에 끼워진 노잣돈을 빼서 손주들에게 나눠줬다. 이 돈은 태울 수 없는 돈이에요. 할아버지가 주는 마지막 용돈이니까 받으세요. 대학을 졸업하고 광주로 내려와 집에서 빈둥대고 있을 때 할아버지가 오만원을 건넸다. 이 돈으로 나가 친구랑 맛있는 것 사 먹거라. 내가 명절마다 혹은 특별할 것 없는 어떤 날들마다 할아버지에게 받아온 용돈만 해도 기백은 될 것이다. 그 돈으로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책도 사 읽고 했을 것이다. 그 돈으로 사 읽은 책들이 나의 일부분을 구성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장례 지도사가 건넨 만원을 받아 상복 주머니에 챙겨넣으며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의 얼굴을 봤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다리에 틀니 없이 합죽이가 된 입을 오므린 채 관에 누워 있는 핏기 없는 윤길남씨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찬찬히 살펴보았다. 주름 사이사이에 끼인 팔십구 년의 세월을 상상해보려 했지만, 여전히 충분히 알 수 없었다.


죽음은 이토록 빈번하고 도처에 즐비했다.


마지막 발인 기사를 쓰고 서울로 올라오기 직전, 데스킹을 끝낸 차장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고생했는데, 형식이 내내 똑같구나. 앞으로는 좀더 다양하게 써보렴. 나는 어떻게 하면 죽음을 ‘새롭고’ ‘다양하게’ 써낼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사연’에 도대체 무슨 효용이 있느냐고 선배에게 묻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이성보다는 감성에 동하게 되어 있어서, 내가 쓴 어떤 문장들 때문에 각종 구조적 문제를 곰곰이 들여다볼 마음이 생기기도 했을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죽음을 막지는 못해도 그 정도면 사연의 효용은 다한 것이라고 선배는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였다.


부고를 연달아 쓰게 되는 날엔 이 직업이 결국 타인의 죽음을 기록하는 일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전 생애에 걸쳐 남긴 발자취를 허겁지겁 요약하는 일. 그래서 죽지 마라, 아무도 죽지 마라, 하고 ‘[사망]’ 속보가 뜰 때마다 주문처럼 외었다. 목숨이 아까워서라기보단 그 사연 속으로 또 뛰어들 생각을 하면 아득해져서 그랬다.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되는 죽음이 너무 많았다.


얼마 전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조현철 배우가 소감을 발표하던 중에 투병중인 아버지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빠가 조금만 눈을 돌리면 마당 창밖으로  빨간 꽃이 보이잖아. 그거 할머니야. 할머니가 거기 있으니까 아빠가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죽음이라는 게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냥 단순히 존재 양식의 변화인 거잖아. 작년 한 해 동안 내 첫 장편영화였던 <너와 나>라는 작품을 찍으면서 나는 분명히 세월호 아이들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 (……) 나는 이들이 분명히 죽은 뒤에도 여기 있다고 믿어. 그러니까 아빠 무서워하지 말고. 마지막 시간 아름답게 잘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죽음이 단지 존재 양식의 변화일 뿐이고, 저 꽃 하나하나가 한때 존재였던 이들이라면. 그러면 내 일은 결국 죽음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기록하는 일이 될 것이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될 테니까. 그러면, 이토록 즐비하고 빈번한 죽음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

6월 5일 연재를 마치며가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