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아홉번째 질문: 지금도 덕질하고 계신가요?

요즘처럼 덕질에서 별 재미를 못 찾는 시기가 있었나. 나를 누구의 팬으로 소개할 수 있을지 고민해봤으나 떠오르는 건 모두 과거가 되어 버린 이름들뿐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오프라인 행사 규제가 2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상황과 별개로, 콘서트나 팬미팅에 찾아가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는 이가 없다.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말하기 조심스러워진 것도 맞지만, 고백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를 일 자체가 없다. 이렇게 된 지 좀 됐다. 영화 덕분에 ‘팬’을 주제로 글을 쓰거나 이야기 나누는 일을 많이 하게 되었는데 지금의 나는 덕후가 아니라니. 난 이제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된 걸까. 더 이상 덕질은 내게 재미를 주지 못하는 걸까. 그런데 왜 이렇게 매일매일이 바쁜 건지 모르겠다. 일하느라 바쁜 게 아니라, 볼 게 너무 많아서 바쁘다. 이상한 일이다. 덕질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모자라는 관심 정도의 수준에 그치는 것 같은데, 덕질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시간과 애정을 쏟고 있다. 그럼 이건 뭐란 말인가? 


2021년 12월 인디스페이스 특별상영 때의 일이다. 오픈채팅으로 질문을 받아 답하는 방식으로 GV를 하는 도중에 요즘에는 무엇을 좋아하냐는 메시지가 채팅창에 올라왔다. 그 순간, 입덕한 지 사흘 정도 된 배우 아야노 고의 이름을 외쳤다. 말이 끝나자마자 관객 분들이 술렁였다. “감독님 취향 소나무”라며……. 아무튼 그 당시의 나는 일본 TBS 드라마 〈MIU404〉를 다 보고 한참 동안 여운에 잠겨 있었다. 그동안 재밌게 본 일본 드라마 〈중쇄를 찍자!〉,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언내추럴〉을 집필한 작가 노기 아키코의 작품이라는 걸 알고 반가운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끔은 바보 같지만 야생의 감각을 가진 경시청 기동수사대 형사 ‘이부키 아이’를 좋아하게 됐다. 그의 본체가 바로 아야노 고. 그렇게 이부키를 향한 애정은 배우에게 옮겨 갔다. 각종 인터뷰와 일화를 찾아 읽을수록 배우라는 직업에 늘 성실하고 진중한 자세로 임하는 그에게 감탄하게 됐다. 매 작품마다 새로운 시도를 하고 전혀 다른 연기를 보여주는 게 존경스러울 정도다.


아야노 고는 20년 가까이 되는 활동 기간 동안에 휴식기를 거의 갖지 않았다. 심지어 최근에 들어서는 해마다 네다섯 편에 이르는 영화와 드라마를 공개했다. 작품 홍보를 위한 인터뷰나 방송 출연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떡밥이다. 그가 쉬지 않고 일한 만큼 나도 쉬지 않고 봐야 했다. 〈최고의 이혼〉, 〈사랑은 Deep하게〉, 〈신문기자〉, 〈코우노도리〉까지 멈추지 않고 봤지만 그가 출연한 작품의 10퍼센트도 되지 않았다. 어쩌다 이 아저씨를 좋아해서 아침에 눈 뜨고 밤에 잠들기까지 영화와 드라마만 보고 있게 된 걸까. 물론 좋은 점도 있다. 덕분에 일본어를 조금씩 알아듣기 시작해서 제대로 공부를 해 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으니. 그러나 넘치는 떡밥들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숨 쉬는 법을 까먹을 것 같아서 잠시 그와 멀어지기로 했다. 그러니 이건 덕질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 않을까? 쏟아지는 작품에 감사하지는 못할 망정 그게 버겁다고 몇 달 되지도 않아서 휴덕을 선언했으니. 어쩌면 나는 배우 아야노 고가 아니라 드라마 속 ‘이부키 아이’가 좋았던 걸지도 모른다. 


영화를 볼 때 느껴지는 약간의 부담감을 떨치는 방법을 찾지 못해서, 집에서는 드라마를 더욱 즐겨 보기 시작한 지 일 년이 넘었다. 최근 3개월 사이에는 드라마를 15편이나 보았고, 5편은 방영 중이라 매주 챙겨 보고 있다.  다양한 작품을 보면서 심신의 안정을 찾고 전투력을 다지고 더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멋진 배우들을 발견하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여기서 문제는, 무조건 시작한 자리에서 끝장을 봐야 하는 내 성격이다. 국내 방송사 미니시리즈가 12부작에서 16부작, 최근 OTT에서 제작하는 오리지널 시리즈는 6부작에서 10부작 가량 된다. 만약 모든 회차가 공개된 상태라면, 나는 그걸 앉은 자리에서 다 보거나 길어도 사흘 안에는 끝내야 직성이 풀린다. 뒷 내용이 궁금해서 어쩔 수 없이 다음 회차를 재생하게 될 때도 있지만, 재미 없다고 중얼거리면서 무의식적으로 다음 편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재미없는 드라마라도 단기간에 결말을 봐야 한다는 어떤 승부욕 같은 게 생기는 거다. 쓸데없는 집요함 때문에 잠도 잃고 건강도 잃었다. 정신없이 드라마를 보다가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서 매일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것도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 나름의 규칙을 만들었다. 집에서 밥을 먹을 때만 보는 드라마라는 뜻으로 ‘밥드’를 정해두고 하루에 한 회차씩만 보기로 한 것이다. 나와의 약속이었다면 금방이라도 깨버렸겠지만, 언니와의 의리가 걸린 문제라 그럴 수 없었다. 한 사람이 다음 회차를 먼저 보는 순간, 다시는 그 드라마를 함께 즐길 수 없게 되는 것이니 아무리 보고싶어도 참아야 했다. 그렇게 지금까지 수많은 드라마가 우리의 밥상을 거쳐 갔다. 〈별에서 온 그대〉, 〈괴물〉, 〈미치지 않고서야〉, 〈그레이 아나토미〉, 〈7인의 비서〉, 〈내 남자의 여자〉, 〈소년 심판〉 등 다 나열하기엔 어려울 만큼 다양했다. 그중에는 JTBC 드라마 〈구경이〉도 있었다. 이영애, 김혜준, 김해숙, 곽선영. 좋아하는 배우들이 모두 비중 있는 역할로 등장하는 것도 모자라 충격적일 만큼 멋있었다. 술과 게임에 절여진 탐정 이영애를 어디서 또 볼 수 있을까? 해사한 웃음으로 무장한 살인마 김혜준은 또 어떻고! 〈구경이〉의 아쉬운 점이라곤 딱 하나였다. 겨우 12부작이라는 것. 


그래서 찾았다. 이영애 언니를 오래오래 볼 수 있는 54부작 드라마. 〈대장금〉이다. 어째서 이야기가 그렇게 전개되나 싶겠지만, 놀랍게도 사실이다. 어릴 적에 드라마의 주제곡 ‘오나라’를 따라 부른 기억은 있는데 드라마의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아서 다시 보기로 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스스로 무덤을 판 셈이 되었다. 〈대장금〉은 등장인물들 앞에 놓인 문제가 매일 예상 불가능한 형태로 바뀌어서 궁금증을 멈출 수가 없는 드라마였다. 어제까진 예쁨 받던 장금이가 오늘은 궁에서 쫓겨나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나게 음식을 만들던 장금이가 갑자기 미각을 잃어버린다. 한 회차가 끝나는 지점도 대단히 절묘해서 화면이 멈춘 후 늘 정겹게만 느껴지던 주제곡인 ‘오나라’가 울려 퍼지는 순간 얄밉다는 생각까지 든다. 


어째 조용히 넘어가는 법이 없는 서장금의 나날은 보고 있던 화면을 절대로 끌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54부작 드라마를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보는 것은 내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밥 먹는 시간에만 천천히 보겠다고 언니와 약속하지 않았더라면 ‘54시간 동안 쉬지 않고 드라마 보기 챌린지’같은 무모한 도전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대장금〉이 우리의 ‘밥드’가 되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을 아끼는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언니 몰래 먼저 보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시 볼까 싶기도 하지만, 〈대장금〉이 내게 주는 긴장감과 재미를 가능하면 오래도록 누리고 싶다. 어쩌면 쉽게 넘어설 수 없는 시간의 장벽을 가진 〈대장금〉 덕분에 다가올 행복을 소분하는 법을 배운 것 같다. 마지막 회까지 다 보면 꼭 한국민속촌에 놀러가야지. 


아무래도 지금의 나는 드라마 덕후인 것 같다. 쓰면서 생각해보니 거의 중독 수준이다. 그런데 왜 내가 드덕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을까. 자기 자신을 ‘팬’이라고 칭하는 데에 대단한 이력이 필요치 않다는 걸 알면서도 왜 이렇게 조심스러워지는지 모르겠다. 이전의 덕질과 비교했을 때 미약하다면 사소한 관심 정도로 선을 긋게 되는 것 역시 알 수 없는 마음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엔 크고 작음이 없다. 요즘의 내게 가장 즐거운 시간을 선물하는 건 드라마다.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하는 일도 드라마를 보는 것이다. 사실 누구보다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면서 덕질에서 재미를 못 느낀다고 생각한 내 자신이 우습다. 그러니까 나는 드라마를 덕질하는 중이다. 스스로를 드라마의 팬이라고 인정하니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진다. 걸그룹과 배우들, 웹툰, 영화, 문구류, 특정 브랜드 등을 향한 관심, 아니 덕심에 대해서도 할 얘기가 무궁무진하게 남았는데.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이 작품은 매주 목요일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