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에게는 어떤 기준이 생겼다. “권해줄 만한 퀴어 만화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흔쾌히 추천할 수 있는 기준. 그건 ‘타가메 겐고로田亀源五郎’라는 이름이다. 그의 작품은 한국에 두 개가 출간됐다. 하나는 「아우의 남편」, 다른 하나는 「우리의 색채」다. 타가메 겐고로 이전의 나는 도무지 이성애자들에게 입문용으로 추천할 만한 퀴어 만화를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퀴어 만화’란 넓게 일본에서 시작된 BL물을 포함하는 장르로서, 거의 대부분의 알려진 작품들의 소재는 성적인
욕망이다. 이를테면 나는 이우인 작가의 「로맨스는 없다」가 한국 퀴어 만화의 어떤 미학을 만들어낸 역사적인
만화라고 생각하지만 ‘19세 미만 구독 불가’가 걸려있는
그 책을 당신의 얼굴 앞에 거두절미하고 내밀 수는 없다. 라가와 마리모羅川真里茂의 전설적인 「뉴욕 뉴욕」을
추천할 수도 있다만 그건 지나치게 멜로드라마틱한 선택이 될 것이다. 미국 동성결혼 법제화 시대 이전의
이야기라 조금 낡은 감이 있기도 하다.
「아우의 남편」은 두 남자의 이야기다.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 이혼한 뒤 어린 딸 카나를 홀로 키우고 있는 야이치에게 마이크라는 남자가 찾아온다. 캐나다인 마이크는 한 달 전 사고로 사망한 야이치의 쌍둥이 동생과 결혼한 사이라고 자신을 설명한다. 동생이 게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야이치는 어쩔 도리 없이 마이크를 집에 묵게 한다. 그리고 만화는 전형적인 일본인 남성이 동성애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서서히 벗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우의 남편」은 동성애자 남성이 쓴 이성애자 교육용 만화다. 만약 당신이 BL물의 오랜 팬이라면 동생을 잃은 비애를 극복한 두
남성이 자기도 모르게 사랑에 빠지는… 이라는 스토리를 지금 머릿속에서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죄송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는다.
「아우의 남편」은 ‘갭’에
대한 이야기다. 2015년 미국 동성결혼 법제화는 시대를 급격히 앞당겼다. 많은 국가들이 앞서 동성결혼을 법제화했지만 보수적인 미국이 그 시대적 물결을 받아들였다는 건 대단한 의미가
있다. 전 세계 미디어를 거의 장악하고 있는 미국의 정치가 바뀌는 순간 세계의 정치가 바뀐다. 넷플릭스를 켜면 LGBTQ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메인스트림 시리즈물들을
이제는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할리우드에서 더는 성적지향에 따른 캐릭터의 금기는 없다. 여기서 ‘갭’이 발생한다. 우리가 ‘서구’라고 말하는
국가들이 대부분 동성결혼을 법제화했다. 다음 차례? 당연히
동아시아다. 서구와 차이가 없는 부와 테크놀로지와 문화를 누리면서도 아직 ‘동성결혼’이라는 말조차 금기시되는 지역은 일본, 한국,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이 ‘갭’이 얼마나
많은 동아시아 성소수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지 알고 있다. OTT를 틀면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눈 앞에 펼쳐진다. 차별과 금기가 없는 사회다.
OTT를 끄고 집 밖으로 한 발짝 나가는 순간 그 사회는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차별금지법조차
제정하지 못하는 국가에서는 누구도 동성결혼 법제화를 먼저 이야기하지 못한다. 그것조차 아직 단계가 아니라고
여기는 탓이다. 「아우의 남편」은 타가메 겐고로가 일본 사회에(그리고
대단히 비슷한 한국 등 동아시아 사회에) 보내는 조언이다. LGBTQ
인권을 사회의 기본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동성결혼에 대한 진지한 논의도 이제는 할 때가 되었다는 조언. 그리고 서구와 동아시아 사이에 여전히 남아있는 마지막 사회적 ‘갭’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조언이다.
만약 당신이 타가메 겐고로의 오랜 팬이라면 지금까지 이 글을 읽으며 “어이
어이 겐고로는 그런 게 아니야”라고 내뱉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아니다. 2014년 9월
25일 「아우의 남편」을 만화잡지 <월간 액션>에 처음으로 연재하기 전의 겐고로는 이런 ‘이성애자 교육용 가족만화’를 그릴 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운, 아니다, 말해버리자. ‘게이
포르노그래피 만화’를 그리는 남자였다. 일찍이 커밍아웃한
그는 그래픽 디자인학과를 졸업한 뒤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1982년 게이 만화가로 데뷔했다. 그는 절대 메인스트림에 자신의 만화가 통할 리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오로지 일본 게이 잡지들을 대상으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타가메 겐고로 작품들의 사진은 이 글에 첨부할 수가 없다. 그가 관심
있는 주제는 언제나 배배 꼬이고 뒤틀린 육체적 욕망이다. 더욱 자세하게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대체로 사도마조히즘이라고
불리는 BDSM이다. 주인공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납치당하거나
세뇌당하며 수많은 남자들의 성적인 장난감이 된다. 자비는 없다. 모든
작품은 대부분 소리를 빼액 지르게 될 정도로 무시무시한 비극으로 끝난다. 화풍도 가냘픈 구석이 하나도
없다. 타가메 겐고로는 근육과 살과 털이 육중하게 몸을 감싸고 있는 남자들을 굵은 선으로 그린다. 나는 도쿄의 게이 구역인 신주쿠 니초메에 있는 작은 LGBTQ 서점에서
처음 타가메 겐고로 만화를 샀다. 비닐로 싸여 있었던 탓에 내용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표지가 근사해 보이는 단편집을 샀다. 호텔로 돌아간 나는 조심스레
비닐을 벗기고 책을 읽기 시작했고, 30분 뒤에는 저녁에 급히 먹은 싸구려 회전 스시가 역류하는 기분을
느끼며 완전히 나가떨어진 채 침대에 누워버렸다. 세상의 수많은 기괴한 BL물을 거의 다 읽어낸 내가 이렇게 표현한다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 대충 짐작은 가실 것이다.
지금 타가메 겐고로는 더는 숨겨진 그늘 속에 머무르지 않는 아티스트다. 서구에서
그는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게이 아트 창작가 중 한 명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는 몇몇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들과
콜라보레이션을 하기도 했다. 어쩌면 당신도 수염이 거뭇거뭇하게 난 근육질의 중년 남성 캐릭터가 무언가에
묶여있는 일러스트를 담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을 길거리에서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일본에서도 그는
이미 메인스트림이 인정하는 아티스트로 받아들여진다. 그가 유명해진 이유는 당연히 복합적이다. 섬세함과 호쾌함을 동시에 갖고 있는 아름다운 작풍 덕분을 먼저 꼽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나에게 타가메 겐고로는 끊임없이 일관된 미학만을 한결같이 밀어붙임으로써 예술가의 지위에 오른 남자로 여겨진다. 한 우물만 파라. 맨날 보는 그런 교훈이다.
타가메 겐고로가 「아우의 남편」을 그리게 된 이유는 명백하다. 게이
컬쳐는 오랫동안 언더그라운드에 머물렀다. 그것은 소수의 LGBTQ와
더 소수의 열린, 혹은 자신만의 어떤 취향을 가진 이성애자들 사이에서만 향유됐다. 그렇게 향유되던 게이 컬쳐는 조금씩 메인스트림 컬쳐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고 동성결혼의 시대와 함께 일순간에
오버그라운드로 올라섰다. 그런 시대의 흐름을 좀처럼 따르지 못하는 국가의 성소수자 예술가들은 일종의
정치적 의무감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타가메 겐고로는 <허핑턴포스트
재팬>과의 인터뷰에서 “이 작품 전면에 성소수자 인권을
내세우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게이를 그린다는 것은 성소수자를 가시화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아우의
남편」이 만화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치적 의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물론 나는 결코 한국에 번역되어 출간될 수 없을 타가메 겐고로의 과거를 여전히 사랑한다. 그것들은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누군가에게는 폭력적으로 느껴질 세계지만 아무런 가감 없이 인간 욕망의 가장 밑바닥까지 한올 한올 그려내고 싶다는 정념으로 가득하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아우의 남편」 이전 시대 작품들을 당신에게 열렬히 추천할 생각까지는 없다. 나는 그렇게 정치적으로 대담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타가메 겐고로의 모든 만화들이 한국에 출간될 수 있는 날이 진정으로 모든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가 됐다는 신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아우의 남편」과 겐고로의 ‘BL 노예물’이 동시에 서점에 꽂혀있는 순간은 마침내 한국 사회가 ‘다름’을 받아들였다는 극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그것까지 바라느냐고 묻는다면 물론 내 대답은 “그러면 일단 결혼부터 좀 합시다”가 될 것이 틀림없다만 말이다.
만약 당신에게 겐고로의 지난 작품들은 지나치게 성적이고 「아우의 남편」은 너무 교조적으로 느껴진다면 걱정할 필요
없다. 그의 새로운 작품 「우리의 색채」는 청소년 게이의 커밍아웃과 성장을 다루는 서정적인, 그러나 점점 멜로드라마틱해지고 있는 청춘물이다. 어쩐지 내가 보기에
이 만화는 지난 시절 겐고로의 미학을 「아우의 남편」보다는 조금 더 강렬하게, 그러나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상냥하게 펼쳐낼 것으로 보인다. 나는 두 개의 타가메 겐고로가 종잇장 속에서 부딪히는
순간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