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회

가끔은 영원히 남의 손에 잃을 바에야 내 손으로 사지를 찢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야.



마룻바닥에서 미희는 눈을 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불을 켜지 않은 산장이 어두컴컴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숙취에는 익숙했지만, 두피가 마치 타박상을 입은 것처럼 울리는 감각은 낯설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더듬다가 정말로 머리 오른쪽이 동그랗게 부풀어 있다는 걸 알았다. 손을 뗐는데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아마 쓰러지면서 부딪힌 듯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미희는 자신이 구토를 하고 그 위에 잠들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토사물이 말라붙은 상태를 봐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그는 뻣뻣한 머리를 굴리면서 상황 파악을 하려 애썼다. 술이 잘못된 걸까? 다들 괜찮은 걸까?

그는 두 다리를 휘청거리며 소파의 등받이를 잡고 일어났다. 발에 무언가 채어 내려다보니 나미가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그는 허리를 숙이는 대신 발로 나미의 옆구리를 아프지 않을 정도로 찼다.

“나미씨.”

“……”

“나미씨, 일어나봐요.”

나미가 낮은 신음을 내더니 눈을 깜빡였다. 멍한 눈동자를 보니 그 역시 미희처럼 지금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나미는 침이 말라붙은 뺨을 문지르며 몸을 일으키더니 갑자기 왈칵 먹은 걸 토했다. 미희는 그의 등을 성의 없이 두들기고는 얼굴을 닦는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었는지 기억나요?”

“아니요. 그냥 술을 마시고, 그리고…… 잠이 들었던 거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요?”

그 말에 미희도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거실을 살폈다. 그리고 조여오는 두통 속에서도 희애와 안나가 없다는 사실에 놀라 짧게 비명을 질렀다. 나미는 그의 반응에 놀라지도 않고 멍청히 한곳만 보고 있었다. 미희의 시선도 그를 따랐다. 이곳에 온 이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열려 있지 않았고, 그래선 안 될 방문에 틈이 벌어져 있었다. 미희는 자기도 모르게 빨려들듯 그 문 앞에 섰다. 손가락에 힘을 주어 짧게 밀었을 뿐인데 문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밀렸다. 다른 세계로 향하는 문이 열린 듯 어지러운 현기증 속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붉은 카펫 위에 앉아 있는 듯한 희애의 모습이었다. 침대에 한 손을 올리고 그 위에 머리를 기대 엎드린 자세는 병간호를 하다 지쳐 잠든 듯 했다. 그러나 희애가 감은 눈을 뜰 일은 없었다. 바닥을 향해 늘어져 있는 다른 쪽 손목에 난 상처와 흰 벽에 장식처럼 흩뿌려진 붉은 점들이 그 증거였다. 마룻바닥을 끈적하게 적시며 방문 앞까지 흘러내려와 있는 피가 증거였다.

그다음으론 마룻바닥에 난 큼직한 구멍이 보였다. 안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두 사람 다 그게 지하실로 향하는 통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안나는 아마 여길 통해 이 산장에서 빠져나갔을 것이다. 도대체, 이런 게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처음 산장에 도착해 요셉을 어디에 둬야 하느냐고 묻자 안나는 이 방을 가리켰다. 그땐 너무 지쳐 있어 안나의 말에 따랐지만, 거실과 바투 붙어 있는 이 방을 고른 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내내 하고 있었다. 설마 그때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걸까? 우리를 따돌리고 요셉과 단둘이 도망칠 그날을?

그러나 안나의 계획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준비된 것이든, 반쪽짜리 성공인 건 분명했다. 그 증거가 저기, 침대 옆에 있었다. 미희는 차마 그 앞에 다가갈 수 없었다. 그는 뻣뻣하게 굳은 채로 방문 앞에 서 있기만 했다. 나미가 그런 미희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듯 밀어내고는 피의 카펫 위로 들어섰다. 발이 포도를 밟은 것처럼, 비둘기의 부리처럼 붉어졌다. 태연해 보였지만 그 역시 긴장되었는지 시트를 걷는 손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얇은 천이 걷혔다. 진실이 드러났고 두 사람은 희애가 죽은 이유를, 안나가 저 혼자 도망친 이유를 보고야 말았다. 

한 아이를 자신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여자가 둘 있었다. 현명한 재판관이 도무지 답을 가릴 수 없으니 아이를 반으로 잘라 나눠 가지라고 하자 한 여자는 그러자고 했고, 다른 여자는 울며 제 아이가 아니라고 했다. 친모가 아이를 해칠 리가 없다. 그렇게 말하며 재판관은 우는 여자에게 아이를 안겼다. 하지만 말이지, 가끔은 영원히 남의 손에 잃을 바에야 내 손으로 사지를 찢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야. 그렇지 않을까?

요셉의 가슴에 박힌 칼날을 보며 미희는 여기서 그런 일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구도 뽑을 수 없게, 단단히 고정된 칼은 요셉의 일부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작 요셉은 생명과 고통을 함께 두고 간 듯 전에 없이 평온한 표정이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깨끗한 얼굴. 가는 속눈썹이 더이상 떨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볕을 받아 주근깨가 늘어나는 일도. 젖은 입술에서 노래가 새어나오는 일도. 

나미가 천천히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토사물과 피가 묻은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미희는 나미가 희미하게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을 뜬 그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나미가 문득 시트 밖으로 나온 요셉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짧게 머뭇거리더니 그 손에 입을 맞추고 요셉의 가슴에 얹었다. 처음 그랬던 것처럼 머리끝까지 시트를 덮어주었다.

“다 끝났군요.”

나미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여즉 잠이 덜 깨 휘청이면서도 부엌을 향해 또박또박 걸어갔다. 미희는 그가 얼굴을 씻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뒤, 미희의 곁에 온 건 죽은 순경의 총을 들고 있는 나미였다. 그는 입을 떡 벌린 미희의 앞에서, 처음 보는 수줍음 타는 얼굴로 웃었다. 

“죽으려고 했는데요. 요셉이랑 좀더 같이 있고 싶어서요.”

“……”

“썩기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될 수 있으면 오래 있고 싶은데.”

그 이상할 정도로 천진한 미소에 미희가 자기도 모르게 쏘아붙였다.

“어떻게 그래요?”

“뭐가요?”

“어떻게 그렇게……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우리는 운명이라고. 요셉을 뺀 나머지는 나에게 거추장스러울 뿐이에요.”

그놈의 운명. 지치지도 않고 여태 그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입에서 저절로 허탈한 웃음소리가 나왔다. 그걸 보고 나미도 호응하듯 웃고는 덧붙였다.

“나 부탁할 게 하나 있어요.”

“뭔데요?”

“요셉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 될 수 있는 한 오래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여기 들어오지 못하게 해줘요.”

“그걸 내가 어떻게 해요? 무슨 힘으로요?”

“내 인질이 되어주면 돼요.”

“인질요?”

“세게 묶진 않을게요. 그냥 잡힌 척하고 있어줘요. 그러면 내가 당신을 해칠까봐 경찰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할 거예요.”

미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여길 나가봤자 할일이 없었다.

“그러면 나도 부탁 하나 할게요.”

“뭔데요?”

“마지막 총알은 날 줘요.”

그게 뭘 의미하는지 나미는 아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계약을 마치자 미희는 갑자기 헛웃음이 났다. 분명 시작은 그랬는데, 터져나온 웃음은 긴 여운을 남기며 눈물이 흐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나미가 빈 자루를 가져다 복면을 만드는 동안 미희는 밧줄을 얼기설기 묶은 가짜 포박을 만들었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그래봤자 문 앞으로 소파를 밀어두고 이층에 있던 의자 몇 개를 더 가져와 쌓아두는 정도였다. 먹을 걸 준비하거나 물을 받지는 않았다. 어차피 오래지 않아 끝날 거라는 걸 둘 다 알고 있었으니까. 그게 아쉽다거나 하진 않았다. 나미는 몰라도 미희는 더이상 뭘 기다리는 게 지겨웠다. 

벽에 걸려 있던 오래된 사냥 도구들도 손질했다. 장식으로만 쓰던 엽총 여섯 정을 늘어놓고, 총알까지 채워넣자 처음으로 가슴이 둥둥 뛰었다. 배수진을 친 반란군 같았다. 이게 무슨 싸움인지, 누구와 무엇 때문에 싸우는 건지 알지 못한다는 점만 빼면 그랬다.

남아 있던 밥을 뭉쳐 주먹밥을 해 먹었다. 해가 떨어지자 다시 잠이 쏟아졌다. 생각보다 기다림이 더 길어져, 두 사람은 번갈아 거실에 나와 보초를 서기로 했다. 미희가 나미에게 먼저 쉬라고 하자 나미가 말없이 일어나 손님방으로 향했다. 문이 닫힌 뒤 벽을 타고 희미하게 속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희는 연인의 밀회를 엿듣지 않기 위해 라디오를 가져왔다. 잔잔한 피아노 반주 위로 또다시 일본인 남자의 웅얼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미희는 이번에도 해독 불가능할 것을 알면서, 꼭 먼바다에서 들리듯 노이즈가 섞인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라디오는 방송이 끝난 채 지지직대고 있었다. 전원을 끄자 사방이 고요했다. 무언가 평소와 달랐다. 미희는 몸을 일으켜 발코니 창을 열었다. 조심스레 손을 뻗었지만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았다. 두 달 만인가? 비가 그친 밤하늘은 처음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미희는 그중 유독 크고 밝은 별 하나를 응시했다. 그것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먼 하늘에서부터 푸른빛이 밀려오다 옅은 잿빛으로 물들더니, 다시 한두 방울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언덕 아래에서 올라오던 그림자가 주차된 순경의 차 앞에서 멈췄다. 어느새 거실로 나온 나미가 창밖으로 고개를 뺐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총을 한 발 쏘았다. 으악! 하는 짧은 비명을 내지른 한 남자가 넘어져 몇 번을 구르더니 언덕 아래로 내달려갔다. 나미가 총을 내리며 말했다.

“곧 올 거예요.”

그 말대로 머잖아 산골짜기에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작은 빛들이 해안의 오징어잡이 배가 육지로 다가오듯 증식했다. 팍, 하고 무언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창가에서 몸을 숨겨 벽을 등에 댔다. 귀로 찢어질 듯한 소음이 파고들었다. 잠시 뒤 확성기를 통과하며 뭉개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찰이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갈게요. 나미가 속삭이더니 얼굴에 복면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팔이 뒤로 묶인 미희를 창가로 내보냈다. 미희는 창을 꿰뚫고 들어오는 태양의 파편 같은 빛을 맞았다. 겁이 난 것도 아니었는데, 도로 한가운데 굳은 채 헤드라이트를 맞는 짐승처럼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나미가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자 웃음이 났다. 간신히 이를 깨물고 침울한 표정을 짓는 그의 머릿속에 시체가 축축한 갈색 흙 속에서 썩어 양분이 되는 과정이 그려졌다. 찌꺼기가 된 자신의 몸 위로 푸른 싹이 트는 장면을 상상하며 미희는 처음으로 자기의 쓸모를 증명받은 기분을 느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미희는 생각했다. 곧 있으면 살아 있다는 걸 견디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유쾌했다. 좋았다.


총을 몇 발 쏘고, 다시 유리창 뒤로 숨길 반복하자 날이 밝았다. 지난밤 조그만 주먹밥 하나를 먹고 쭉 공복 상태였지만 아무도 배가 고프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물만 마시며 빈속으로 있으니 정신이 훨씬 명료하게 느껴졌다. 코끝에 맴도는 희미한 탄환 냄새, 지면에 부딪히는 빗소리, 경찰들의 웅성거림, 그들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끈끈한 열기, 젖은 흙 냄새, 땅 밑에 숨어 있는 벌레의 꿈틀거림, 멀리서 새가 날개를 퍼득대는 소리, 무거운 구름이 밀려오는 움직임까지 모든 게 느껴졌다. 살아 있다는 감각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오전 여덟시 십분에 나미는 현관 계단으로 올라오려는 경찰관을 향해 죽은 순경에게서 빌린 리볼버를 쏘았다. 공포탄이었다. 그러나 격발로 인한 가스 압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는지, 경찰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뒤로 한동안 잠잠하다가 무장해제를 한 젊은 여경 하나가 두 손바닥을 올려 보인 채 와서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그는 묻지도 않은 자기의 고된 삶에 대해 늘어놓으며 나이는 얼마나 되었는지, 가족은 있는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이는 건지 물었다. 그러나 나미는 무시했다. 딱 한 번, 말을 해야 들어주지 않겠냐는 간청에 이렇게 답했을 뿐이다. 그냥 여길 떠나지 않고 싶을 뿐이라고. 그때의 여기가 요셉의 곁이라는 걸 미희는 단박에 알았지만, 경찰은 나미가 무단 점거한 집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그 일은 훗날 희애가 산장 소유자의 가정부로 일했고, 미희와 나미는 각각 강남의 카페 종업원과 고아에 둘 다 중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여자 깡패들의 소동극, 일각에선 정치적 액션으로 읽히는 근거가 되었다. 모든 건 사랑에서 비롯했다는 나미의 근원적인 자백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오전 열시 십오분에 다시 창가로 접근해오는 경찰을 향해 나미가 실탄을 쏘았다. 이번에도 맞진 않았지만 종아리를 스친 탄알은 옷을 찢고 화상을 남겼다. 경찰들이 다시 물러갔다. 나미는 상체를 빼고 하늘을 향해 연달아 세 발의 경고사격을 했다. 가진 탄환이 많다고 뽐내려는 제스처였지만, 이제 쓸 수 있는 건 단 한 발뿐이었다. 나미는 아무 말 없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미희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 물었다.

“몇 발 남았어요?”

수사적 질문이란 걸 알았을 테지만 나미는 친절히 대꾸했다.

“한 발이요.”

“이제 끝이네.”

그 말에 나미가 군말 없이 리볼버를 건넸다. 미희는 씨익 웃고 벌떡 일어났다. 손에 총을 쥔 그림자가 창에 반사되자 그를 나미라고 착각한 경찰이 다시 한번 확성기를 들어 외쳤다.

“원하는 게 뭐냐!”

그 질문에 미희는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건 말이지……

그는 창문 앞에 연극적인 발걸음으로 다가가 섰다. 넓게 펼쳐진 하늘, 구불구불 산등성이, 바보 같은 표정의 경찰들을 보고 미희는 생각했다.

그딴 게 있을 리가 있냐?

그러나 미희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었다. 활짝 웃고는 자기 머리를 향해 총을 겨눴다.

높은 가지에서 새가 날아갔다.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미희의 몸이 쓰러지는 것을 신호로 경찰이 전술적 해결에 돌입했다. 물대포가 쏘아지고 오래된, 아름다운, 먼 나라에서 똑 떨어진 것 같은 나무 산장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창이 깨지고 비와 뒤섞인 물줄기가 두 사람의 머리와 어깨를 적셨다. 나미는 갈라져 뿜어지는 물줄기가 거인의 손가락 같다고 느꼈다. 문득 한날한시에 죽은 자신의 부모가 부러웠다. 하지만 곧 누군가 자신을 꺼내 머리통을 물어뜯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요셉의 뒤를 따라 영원한 왕국으로 갈 것이다. 그러나

……

……

……

……

씨팔. 왜 안 와?


*


문을 부수고 들어간 기동대가 본 건 흠뻑 젖은 채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나미와 아직 미약한 숨을 쉬고 있는 미희였습니다. 일부는 재빨리 미희를 가까운 병원으로 옮겼고, 일부는 나미를 제압했습니다. 저항할 거라고 여겨졌지만 나미는 팔이 뒤로 꺾이는데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순순히 지시를 따랐습니다. 훈련받은 이들은 재빨리 모든 방을 수색했습니다. 흰 천을 덮은 가구들, 가루눈 같은 먼지가 흩날리는 방안에선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여기서 뭘 하던 걸까? 무엇 때문에 경찰을 상대로 대치하고, 무엇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던 걸까?

의문이 들 무렵 기동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막내가 문득 거실 가까이에 있는 문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화장실, 옷장, 심지어 아무도 존재를 알지 못했을 법한 부엌 바닥 아래 반 층짜리 창고까지 뒤지는 동안 어째서인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방이었습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곳에 있는데 어떻게 아무도 열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의심을 품은 막내가 문손잡이에 손을 올리자 그때까지 얌전히 있던 나미가 발광하듯 비명을 질렀습니다. 저기다. 저기에 뭔가 있다. 확신이 든 경찰들이 비명소리를 배경 삼아 잠겨 있던 방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았습니다.

피로 가득한 방이었습니다. 분노에 찬 사람들이 내건 귀족의 목처럼 우아한 박제가 사방을 둘러싼 그 작고 붉은 광장에서 죽은 여자가 침입자들을 막듯 침상에 몸을 기대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보이는 침대 위에서 누군가는 잘린 목을 보았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벌거벗은 옆구리에 구멍이 난 시체를, 또 누군가는 벌어진 가슴이 텅 빈 시체 옆에 쪼글쪼글하게 말라비틀어진 잿빛 심장이 무명천에 싸여 있는 걸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용감한 경찰이 뚜벅뚜벅 걸어가 시트를 걷어내고 본 건 정교한 인형이었습니다. 뭐야. 모두에게서 조용한 한숨이 터져나왔습니다. 고작 이런 가짜 때문에 이 난리가 난 걸까?

의문도 잠시, 그들은 나미가 환각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알려진 대로 그들이 먹고 마신 버섯 탓이었습니다. 조금 횡설수설했지만 나미가 하는 말의 일부는 진실을 담보하고 있어, 그 증언을 바탕으로 경찰은 도망쳤다는 한 명의 공범을 쫓아 개를 풀었습니다. 그렇게 첩첩산중을 이틀간 수색한 끝에 땅굴에서 저체온증으로 죽어가던 안나가 발견되고 사건은 일단락됐습니다.

나중에 듣길, 안나는 처음 살인이 일어난 시점에서 이미 소년과 함께 북으로 넘어갈 계획을 짰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계획을 세우기도 전 두번째 살인과 다툼이 일어나자, 무슨 수를 써도 좋으니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합니다. 기억을 잃은 소년에게 실은 자신이 그의 어머니이니 함께 도망가자고 설득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쥐약과 수면제를 듬뿍 탄 술을 마시고도 동료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근래에 나온 건 만성형이라 보통 사람이 먹어 죽을 성질의 것이 아닌데, 더는 쥐약을 쓸 일 없는 사모님이 먼 옛날의 기억만 가지고 헛발질을 한 셈이지요. 시간을 벌기 위해 칼을 꽂은 인형을 둔 것까지 그의 입장에선 옳은 선택이었고요. 그 탓에 희애가 자살하는 사고가 있었지만 만약 그래두지 않았다면 옛 동료들은 그를 쫓아 산을 헤맸을 테니까요. 땅굴에서 잠시 눈을 붙인 사이 소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긴 했지만요.

미희는 곧장 병원으로 옮겨진 덕에 극적으로 치료에 성공해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아름다운 얼굴은 알아볼 수 없게 망가진 다음이었습니다. 그가 잃은 걸 사람들은 아까워했지만, 그는 거기에 딱히 절망하진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권총 자살의 높은 치사율에서 배제된 자신의 운에 절망했습니다. 결국 미희는 두 달이 지난 어느 새벽에야 술에 취해 졸고 있던 경찰관 몰래 병실을 나서 병원 옥상에서 떨어지고 난 뒤에야 간신히 안식에 들 수 있었습니다. 미희의 자살은 훗날 그를 감시했던 경찰이 본보기로 강등되고, 그 처분을 부당하다고 여긴 경찰이 위기를 기회로 삼으라는 친척 형의 충동질로 퇴직 후 사업을 시작한 뒤 일가족 동반자살사건으로까지 이어지는 불행의 씨앗이 되었습니다만, 그걸로 미희를 탓할 수는 없다, 고 나는 생각합니다. 죽은 자가 미래를 내다볼 순 없으니까요. 그리고 누군가가 그를 벌하지 않아도, 그의 삶은 충분히 불행했기 때문이지요.


여기까지의 일을 정말 기이하다고 여기실 줄 압니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이상하게 여기는 건 요셉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소년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세요? 현실세계에도요? 암만 사랑의 힘이 세다고는 하지만 정말로 두 달 동안 화장실 수발을 들어주면서도 깨지지 않는 환상이 존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내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된 건 그들이 요셉을 납치한 당일, 그 저수지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모순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들이 했던 대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저수지로 내려가보았습니다. 걸음이 꽤 빠른 편인데도,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니라서 도착까지 삼십 분 이상이 걸렸습니다. 게다가 거기서 요셉의 차를 찾아야 했고, 늦은 밤 작은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서 걸었으니 시간은 배로 걸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차에서 번개탄으로 죽는 데는 빠르면 십여 분이 걸린다고 하더군요. 이상하지요? 그들은 분명 유리를 깨고 가는 숨을 내쉬는 요셉을 구했다고 하는데요.

이 물리적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몇 가지 시뮬레이션을 했습니다. 요셉이 번개탄에 제대로 불을 붙이지 않은 걸까? 창을 단단히 막았다고 하지만 어딘가로 공기가 새어나간 게 아닐까? 그렇게 뻗어나간 망상은 결국 이런 곳까지 도달했습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요셉은 죽어 있었던 게 아닐까? 그 충격을 잊기 위해 여자들이 버섯 따위론 설명할 수 없는 집단적인 환각을 만들어냈고, 죽은 그의 몸에 멋대로 만든 영혼을 덧씌워 그들의 안에서 부활시킨 게 아닐까? 그렇다면 시체와 사랑하고 살았다는 말이냐, 는 질문이 날아오겠지만 사실은 인간보다 시체 쪽이 훨씬 견디기 쉽다, 는 게 나의 지론입니다. 그들은 변하지 않잖아요. 이미 죽었으므로 순결할 수 있죠. 게다가 썩어가는 시체를 다루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닙니다. 안나가 요셉의 몸을 계속해서 닦아냈다는 걸 떠올려보세요. 그리고 그걸 물이 아닌 알코올로 닦아냈다고요. 안나로선 단순히 요셉의 육체와 접촉하기 위해 반복한 일이었지만, 부지불식간에 시체에 박테리아가 번식하는 걸 막아 시랍화하는 결과를 낳지 않았을까 하는 거죠. 엉뚱한 소리만은 아닙니다. 실제로 말끔히 보존된 시체가 그걸 돌봐주던 사람의 죽음이나 체포 따위로 발견되는 사례가 국내에도 몇 건 있거든요. 아마 저멀리 보이는 수많은 창들 중 하나엔 죽은 연인과 조용한 밀회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두터운 커튼이 내려진 닫힌 방.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영원한 미스터리잖아요.

하지만 그들은 분명 요셉이 살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비록 미약한 환각 상태에 빠져, 단체로 두 달 동안 계속해서 비가 내린다고 생각하며, 뙤약볕에 우비를 뒤집어쓰고 뻘뻘 흐르는 땀을 들이친 비라고 생각하며, 양산도 아닌 우산으로 해를 가린 채, 장을 보러 다닐 때를 제외하곤 그 산장에만 갇혀 지냈지만 그래도 요셉을 쓰다듬은 것, 그의 입에 수프를 떠넣어주고 더러워진 시트를 갈고 빨았던 건 모조리 진실이라고 항변했습니다. 그리고 늘 진실에 대해 생각하려고 애쓰는 나는, 고민 끝에 여자들의 말이 옳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틀렸다면 땅굴의 맨바닥에서 추위에 떨며 몸을 웅크리고 잠든 안나의 곁을, 시체가 뚜벅뚜벅 걸어나가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되니까요.

어쨌든 죽은 둘을 제외한 나미와 안나는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요셉이야 오간 데를 몰라도 지하 냉동고에 담긴 두 구의 시체는 떠나지 않고 얌전히 그 자리에 있었으므로 마땅히 징역을 살게 되었습니다. 모두 심신미약인데다 여러 복잡한 상황이 얽혀 있어 재판이 길어질 거라 했지만, 예상외로 결론은 쉽게 내려졌습니다. 나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안나는 십오 년의 장기수로 복역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정신병이 감형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안나는 수감생활의 삼분의 일을 채우자마자 조용히 특사로 풀려난 뒤 외국으로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야기의 시점에서는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로, 선고가 내려진 20세기 말 성탄 전야에 여자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차분히 받아들였을지도, 더할 나위 없이 깊은 절망에 빠졌을지도 모르지만, 시간은 흘러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끝나고, 또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밀레니엄의 문이, 희망찬 미래가 폭죽과 보신각에 모인 인파들의 환호성으로 열렸고, 그렇게 지난 세기는 시체 애호가가 아니면 추억하지 않는 과거가 되었습니다.

이쯤 되면 내가 이 모든 이야기를 어디서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이건 한 여자의 편지를 통해 내게 전해졌습니다. 그 여자는 수감 전 검사에서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것, 그애를 낳아 교도소의 철창 안에서 열여덟 달 동안 기른 것에 대해선 한 줄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가 밖으로 나간 뒤 자라난 과정에 대해, 밥은 잘 먹는지, 낯은 가리지 않는지, 말은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묻지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고 그저 한 소년과, 그와 있었던 일에 대해서만 지겹도록 썼습니다. 여자는 어떤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편지의 수신자가 이것을 찢거나 태우거나 변기에 콰르르 흘려보내며 멜랑콜리와 분노에 젖는 일 없이 영원한 기억의 전당에 올려놓으리라는 확신. 나는 그게 미워 몇 번은 편지를 없애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했고, 모든 건 여자가 원하는 대로 되었습니다. 비참하게도. 나의 어머니의 뜻대로.

네. 여러분. 제가 당신들이 사랑하는 요셉의 하나뿐인 아이입니다.

믿지 않는 것도 당연합니다. 나 역시 내가 어떻게 신문이나 티브이의 저열한 관심을 피해갔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아마 아무도 믿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거겠죠. 혹은 죽은 자에게 강간 피해자라는 치명적인 꼬리표를 붙일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했거나요. 그러나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듭니다. 수십 번은 반복되었을 행위에서 아버지도 한 번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을까요? 어쨌든 전후의 사정을 보았을 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제외하고도 산장의 여자들과 관계를 맺은 건―부디 화내지 말고 들어주세요. 나는 여자의 순결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한심한 남자처럼 아버지를 탓하려는 게 아니니까요―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니까요. 손발이 묶인 채로 별다른 유희도 없이 지내던 그에게 여자들과의 만남은, 몽마라고 착각할지언정 내심 기다리던 순간이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아무리 지루했다고 해도 그런 엉망인 여자들과 관계를 맺었다는 게 나로서는 이상하게 생각됩니다. 정서적으로도 그렇지만 육체적으로도요. 아무리 생물학적 요인이 있다고 해도 어떻게 그 여자들을 보고 사랑을 느낄 수 있었을까? 여자는 잠자리에서 비교적 연기에 능숙하지만, 남자들은 자기 신체를 다루는 것에 더 서툴지 않나요? 게다가 아버지처럼 유년기와 소년기에 크나큰 충격을 받은 남자에게는 말하자면, 일종의 불능과도 같은 기질이 있는 법이잖아요. 지나치게 일찍 어른의 세상에 노출된 조숙하고 우울한 어린 소년들이 커서 사내 구실을 하려고 들 적에, 여자의 살냄새가 되레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그들의 피를 식히는 게 드문 일도 아니고요.

그러던 어젯밤, 나는 이곳에 오기 위해 뒤늦게 아버지의 젊은 시절 영상을 보다가 답을 얻었습니다. 

마지막 콘서트 영상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아버지는 조금 긴장한 듯했지만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고, 이젠 그를 잊었을 여자들도 생생했습니다. 아버지는 방긋방긋 웃으며 최선을 다해 춤을 췄지만, 솔직하게 말해 잘 만든 공연은 아니었던 탓에 잠이 쏟아질 정도로 지루했습니다. 돈을 아껴 날려 지은 세트들은 화도 나지 않을 정도로 허접했고, 너저분한 의상은 걸레짝 같았습니다. 그렇게 조금 소리를 줄인 채, 검은 화면에 비치는 내 얼굴이나 관찰하며 턱을 괴고 산만한 망상에 빠져 있는데, 문득 한 여자가 무대 위로 올라오는 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무슨 일인고 싶어 되감아보니, 아버지와 사진을 찍는 이벤트가 있었고 그는 영광의 당첨자라고 했습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잡고 소리를 키웠습니다.

스물은 넘겼을까요. 객석을 나오는 순간부터 줄곧 아버지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눈물만 흘리는 여자를 눈에 띄는 얼굴이라곤 할 수 없었습니다. 매일 전철의 같은 칸에서 마주치고도 매번 잊을 사람처럼 평범했습니다. 그러나 뺨을 적시며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는 그 순간 그에게선 사람의 시선을 잡아당기는 드라마틱한 힘이 느껴졌습니다. 말하자면 아버지를 보지 않음으로써, 그는 모두가 그를 바라보게 하고 있었습니다.

진행자가 몇 번이고 말을 걸었지만 여자는 그저 울기만 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우스갯소리를 하는 진행자. 객석의 수런거림. 카메라는 다시 아버지의 얼굴을 찍었습니다. 조금 젖어 반짝이는 머리칼. 달아오른 홍조와 젖은 눈두덩이. 아버지는 끝내 그를 바라보지 않는 여자를 보며 어색하게 웃다가 입을 꾹 다문 채 객석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를 맞이한 수많은 빛. 

별과 같이 매혹적이고 개구리알처럼 끈적하고 징그러운 수많은 점들. 

그걸 보던 아버지의 얼굴에 동정과, 쓸쓸함과, 미약한 애정, 필멸하는 생명체에 대한 기묘한 슬픔이 떠오른 걸 보고 순간 나는 깨달았습니다. 저 여자들과 반대로 아버지에겐 자기 육체가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아버지는 아무것도 아닌, 어차피 썩어 없어질 몸뚱이를 오로지 자기의 살로만 주린 배를 채우고, 자기 피로만 목을 축일 수 있는 불쌍한 여인들에게 나눠주기로 결심했던 거구나. 그걸 깨달은 순간 나는 커다란 빛 속에 안긴 듯 아주 평온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성인이었습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기로 하고 모두를 사랑하기로 한 성소년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피를 하나도 남기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아니요. 분명 유전적으로 우리는 부녀가 맞습니다. 그런 하찮은 차원이 아닌 더 큰 문제에 대해 얘기하는 겁니다. 나는 오로지 어머니만의 딸입니다. 아니, 실은 어머니의 분신에 가깝습니다. 보면 아시잖아요. 당신들 눈앞의 나를. 못났지요? 아버지와 하나도 닮지 않았지요? 이따금 길에서 어머니 또래의 사람들이 내 얼굴을 빤히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혼자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아는구나. 자기가 누굴 보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분명 내게서 누군가를 보는구나 하구요. 물론 그 누군가는 어머니지요. 딱히 좋은 일은 아닙니다. 어머니는 박색이었으니까요. 이렇게 못난 여자와 누가 아이를 낳는 모험을 하겠냐, 납치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을 정도로요.

어머니는 지난해 돌아가셨습니다. 암이었고, 발견되었을 땐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내게 보낸 편지엔 신비주의 책에서 베껴 적은 듯한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의 경험담이 적혀 있었습니다. 강, 혹은 꽃밭. 사람에 따라 공간은 다르지만 평온하고, 안도감이 들고, 아주 순수한 빛에 감싸안긴 느낌은 모두에게 공통적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아래 어머니는 어느 밤, 자신도 비슷한 장소에 갔던 일을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물소리가 졸졸 들리고, 잔디밭 위로는 부드러운 햇살이 내려앉은 강가였습니다. 손 틈새로 녹아드는 빛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곁엔 보얗게 아름다운 요셉이 누워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쟁반 위에 놓인 푸른 포도를 요셉의 입에 넣었습니다. 주먹만한 알갱이를 하나씩 하나씩. 꾸역꾸역 입에 알갱이를 집어넣다가 어머니는 문득 요셉의 뺨에 눈물이 한 방울 흐르는 걸 보았습니다. 그걸 보고 꿈에서 깨어 이렇게 적었습니다.


요셉. 드디어 만났어.

하지만 거기서도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니?


나 역시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그 꽃밭으로 갈 테지요. 그 생각을 하면 정말 다행이라고, 내가 이렇게 어머니만의 자식으로 태어나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아이가 죽는다면 어머니는 슬퍼 까무라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