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고운 모래는 아름답고 그 위엔 어느 밤 두 청년이 짐승처럼 뒹군 역사가 없을 것이다.



일요일


걸려온 전화는 일단 받고 봐야 한다. 받지 못하면 언제나 아쉬운 건 이쪽이다. 어딜 가나 그렇겠지만 많은 일이 인맥이라든지, 구두 약속 같은 애매한 것을 통해 성사되는 이쪽 업계에서는 더 그랬다. 일 잘하는 사람이 곧 연락을 잘하는 사람이다. 더 잘하는 사람은 술 잘 먹는 사람, 박은 기라면 기고 잘하라면 더 잘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박이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 회신한 건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월요일이었다. 이틀 동안 그는 요 두어 달간 그랬듯 낮에는 기원에 숨어들고 밤이 되면 기어나왔다. 당구장이나 나이트에 갈 수도 있었지만 아는 얼굴은 박을 심란하게 했다. 찻집의 음악은 느끼했고 음울한 극장의 어둠 속에서 서로를 더듬는 것은 피곤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침묵과 몰입이었다. 그러기에 가장 적당한 장소는 기원이었다. 

구도심의 낡은 건물과 건물 사이에 긴 빨랫줄이 걸려 있었다. 누군가 걷는 걸 잊은 낡은 운동화 한 짝이 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박은 곰팡내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사층으로 올라가 기원의 문을 열자 시멘트 깊숙이 밴 담배 냄새가 풍겼다. 그는 눈이 마주친 원장에게 고개를 까딱하고 오천원짜리 지폐를 건넸다. 둘의 짧은 승부는 싱겁게 끝났다. 기반보다 창밖을 더 자주 바라보는 박에게 원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은 담배를 물고 원장에게도 한 대 건넸다. 원장은 연기를 뿜다가 옆 테이블에서 승부중인 두 사람 곁으로 가버렸다. 박은 기보를 뒤적이다가, 열린 창 너머로 맞은편 건물 안을 오가는 사람들을 보다가, 신문을 펼쳤다. 정오 뉴스가 시작되자 원장이 텔레비전 소리를 높였다. 집중해서 보았지만 오늘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당연했다. 그가 말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요셉의 일을 알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총탄이 쏘아지고 난 뒤 정적 속에서 수풀 뒤에 죽은 새가 있길 바라는지 단지 지친 새를 발견하길 바라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기다렸다.

필요할 때야 떠벌거릴 줄 알았지만 사실 박은 말하는 일에 상당히 피로감을 느끼는 성격이었다. 이곳에서야 잘 보일 사람도 없으니 그가 입을 여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 그와 대화를 나누는 단 한 사람이 있었다. 기원의 모두가 무시하는 중년 남자였다. 매일 오후 한시면 기원에 들어오는 그 남자는 마른 행주처럼 처량했다. 그 시간에 오는 사람들이야 전부 사정이 비슷했지만, 그는 유독 패배자의 기운을 숨기지 않아 바둑돌 뒤에 숨어 자기 삶을 잊고 싶어하는 남자들을 곤욕스럽게 했다. 말하자면 그는 걸어다니는 거울로서 이 기원에 등장했다. 하지만 그 거울이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다린 듯 빳빳한 새 지폐로 가득찬 지갑을 꺼낼 때 남자들은 스스로와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들처럼 당황했다. 그 안에서 젊은 아내의 사진이 드러날 땐 더 그랬다.

존경의 눈빛을 보내기에도 늦은 터라 그들은 남자를 무시하기로 결심했다. 그건 아주 쉬웠다. 남자에겐 아주 추잡스러운 버릇이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음식물을 씹다 뱉는 버릇이었다. 박이 처음으로 입을 연 것도 왜 그러냐고 묻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불안해서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버지도 큰아버지도 작은아버지도, 그의 집안 남자들은 모두 쉰 살이 되기 전에 죽었다. 그는 쉰을 두 해 남기고 있었고, 자기의 사인은 위암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었다. 의사가 멀쩡하다고 해도 믿지 않았다.

먹는 것을 조절해야 한다는 강박이 그 기이한 습관을 만들었다. 남자는 목구멍으로 무언가 넘어가는 걸 견디지 못했다. 그런 동시에 그는 무언가를 입에 넣지 않으면 불안함을 느꼈다. 지나치게 깨문 탓에 그의 손톱은 평범한 사람들의 반절쯤 됐고 문둥이처럼 너덜너덜했다. 그가 끊임없이 해바라기 씨 껍질을 퉤퉤거리며 다리를 덜덜 떠는 모습은 천박했다. 그러나 입을 열면 낮은 목소리의 우아한 서울 토박이 말씨가 미끄러져 나왔다. 가난한 어머니 역을 하는 얼굴이 반질반질한 배우나 자기가 평창동 사모님이라는 환상에 빠진 달동네의 애청자처럼, 둘 중 하나는 가짜인 게 분명할 정도로 상반되는 요소가 그의 육체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한시가 되자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왔다. 그의 몸에선 언제나 그랬듯 마른침 냄새와 근처 헌책방의 낡은 책 냄새가 났다. 남자는 말없이 박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느린 속도로 침착하게 수를 두는 편인데 그날따라 공격적이었다. 박은 그 모든 걸 다 받아줬다. 그리고 천천히 흐름을 늦췄다. 세 판째에 남자의 마음이 가라앉는 게 눈에 보였고 다섯 판을 두자 저녁이 되었다. 남자의 발밑이 벗겨진 껍질과 침 범벅이 된 채 으깨진 해바라기 씨로 흥건했다. 가시지요.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박은 자리에서 일어나 원장에게 눈인사를 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둘이 향한 곳은 전부 방으로 된 고급 중식당이었다. 사사롭고 추잡스러운 대화를 나누기에도, 국운을 건 대화를 나누기에도 어울리는 그곳은 남자의 단골집이었다. 처음 이곳에 온 날 남자는 누가 안내를 하기도 전에 스스로 빈방을 찾아 들어갔다. 별다른 주문을 하지 않았는데도 종업원들은 엉덩이를 붙이기가 무섭게 부지런히 음식을 날랐고 마지막엔 빈 양동이 하나를 남자 앞에 두었다. 그가 부잣집 아이처럼 목에 냅킨을 끼우며 말했다.

“중국인들이 왜 기름진 음식을 먹고도 건강한지 아십니까? 모두 뜨거운 차를 마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남자는 식사를 시작했고, 씹은 음식을 양동이에 뱉었다. 목으로 넘어가는 건 차와 이 사이에 낀 음식물 찌꺼기가 전부였다. 역겹다면 역겨운 풍경이었지만 박은 그보다 흥미가 더 컸다. 밥값 역시 남자의 두툼한 지갑에서 나왔으니 식사를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두 달이 다 되어가는 동안 그들은 매일 중국 음식을 함께 먹었다. 소주를 마신 다음엔 맥주를 마셨고 그다음엔 배갈을 마셨고 맥주와 배갈을 섞어 마셨다. 남자는 차만 마시고 술은 입에 머금었다 뱉었다. 꽤 약한지 그것만으로도 금방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렇다고 흐트러지거나 말이 많아지진 않았고 딱 한 번 박의 가슴에 얼굴을 비빈 게 전부였다. 그후론 두 번 다시 어린 짐승처럼 교태를 부리는 일은 없었다. 점잖은 침묵 속에서 먹고 마시고 뱉고 헤어지는 게 전부였다.

일요일 저녁 구도심 번화가는 한산했다. 가정이 있는 사람은 집으로 들어가고, 젊은이들은 강남 같은 신도심으로 몰릴 시간이었다. 어쩌면 그마저 상상일 뿐일지도 모른다. 박은 진짜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잊었다. 종업원들이 라디오를 틀어뒀는지 주방에서 매염방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날따라 사람이 적어 유독 썰렁했다. 두 사람은 먹고 마시고 뱉었다. 그건 평소와 같았지만 진수성찬을 다 먹어갈 무렵 남자가 새콤한 소스에 볶은 탕수육을 우물대다 갑자기 엎드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박이 묻자 남자가 말했다.

“나는 오늘 죽습니다.”

“예?”

“나는 오늘 저녁 죽습니다. 그런 예감이…… 아니, 미래가 보입니다.”

듣고 보니 식탁에 앉기 전부터 남자의 입술이 이상하게 거무튀튀했던 게 생각났다. 짜장면을 먹고 남은 자국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게 아닐 수도 있었다. 남자의 등이 가늘게 떨리더니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박이 말했다.

“아저씨, 힘내세요. 병에 진다는 건 괜찮은 마무리입니다.”

울음이 뒤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젊고 건강한 육체를 가졌습니다. 원한다면 먹고 싶은 건 전부 먹고 질릴 때까지 사랑을 나눌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내겐 모든 일이 끝입니다. 오늘이, 오늘밤이 마지막입니다.”

사랑을 나눈다니…… 자주 몽상에 빠지는 소녀 같은 표현이었다. 닭살이 돋았지만 박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최악의 죽음을 맞을 겁니다.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남자가 부스스한 머리를 들었다. 박은 불퉁하다고 해도 좋을 감정 없는 말투로 덧붙였다.

“정말입니다. 나는 사람을 하나 죽였습니다. 어저께 시체를 찾았다는 전화가 온 모양인데 겁이 나 받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이 거리엔 나를 찾는 형사들이 돌아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잠시 뒤, 아니 금방이라도 형사들이 이 방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손목에 차가운 수갑을 채울지 모릅니다. 아니, 실은 아까부터 손목이 차서 견딜 수 없습니다. 술이 피를 타고 흐르다가 멈춰 역류하는 느낌이 듭니다. 보세요. 색이 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보라색입니다. 내 손은.”

남자가 말없이 박의 얼굴을 봤다. 박은 덧붙였다.

“나는 약한 것이 싫습니다. 따라서 여자와 노동자와 피부가 검은 사람이 싫습니다. 월요일 아침 병원에 줄을 서서 앓는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싫습니다. 도시 바깥에 사는 사람이 싫고 노인은 나의 미래를, 어린애는 나의 과거를 보여주기에 싫습니다.

그러나 부잣집의 아름다운 어린애는 다릅니다. 나와는 정반대의 미래가 펼쳐질 그런 어린애를 나는 싫어하지 않습니다. 다만 증오할 뿐입니다. 그런 증오가…… 그애를 볼 때면 치솟았습니다. 그래서 구린내가 풀풀 나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내 손에 피를 묻히긴 싫어 가장 비겁한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박은 떠드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그의 입에서 웃음이 실실 나왔다.

“존재만으로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을 아십니까?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 나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그런 사람을 아십니까? 그 소년이 그랬습니다. 그애는 나를 친형처럼 따랐지만 나는 그애를 속였습니다. 나는 그애에게 자살 소동극을 벌이자고 했습니다. 수면제와 번개탄을 주며 이걸로 죽기까진 다섯 시간이 걸린다고, 약을 먹고 잠들어 있으면 내가 시간을 맞춰 깨워주겠다고 했습니다. 차 안에선 더 빨리 죽는다는 걸 알면서요. 그애는 죽을 때까지 자기가 죽는다는 걸 알지 못했을 겁니다. 게다가 일부러 늦게 간 보람도 없이 이미 차는 물에 떠내려갔는지 없더군요. 황토물에 떠내려오는 쓰레기들만 보다가 돌아왔습니다.” 

남자는 여전히 얼굴이 시뻘건 채, 그러나 술이 깬 듯한 얼굴로 허리를 세웠다. 남자의 숨이 거칠어지는가 싶더니 테이블 위에 있던 그의 손이 덥석 박의 앞섶을 잡았다. 박은 남자의 환희로 번들거리는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무리입니다.” 

“……”

“아니요.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애를 만난 이후 줄곧 불구입니다. 아마 그애의 시체를 보기 전까진 계속해서 그럴 겁니다.”

“……”

“드시죠.”

박이 두어 점 남은 고기를 앞접시에 쌓아줬지만 남자는 입을 대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구겨진 양복을 털털 털며 먼저 일어나겠다고 웅얼거렸다. 방을 나간 남자가 계산하는 소리가 들렸다. 박은 앉은자리에서 그대로 배갈을 목안으로 흘려넣었다. 숨을 후 불면 그대로 불이 뿜어져나올 것 같았다. 그는 휘발유나 파란 가스로 가득 채워진 것 같은 가슴에 더, 더 술을 부어넣었다. 예감은 점점 강렬해졌고 웃음이 났다. 기분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작게 속삭였다. 요셉은 죽었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크기였다. 배에 힘을 주고 조금 더 크게 외쳤다. 요셉은 죽었다. 요셉은 죽었다!

기분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기 직전 박은 사장과 통화를 했다. 잘되어가냐는 물음에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난항을 겪고 있다고 했다. 뭐가 그리 문제냐는 말에 박은 눙쳤다. 원래 일할 때 예민해지는 거 아시잖습니까. 사장은 혀를 찼지만 더 대꾸하지 않았다. 이 두 달간 기획사의 기반을 세운 남자 가수가 마약으로 구속되고, 공들여 키운 여배우는 유부남과의 불륜으로 언론의 뭇매를 맞았다. 잠잠해질 만하자 이번엔 여배우가 밀애 현장에서 찍은 사진이 유출되는 바람에 요즘 사장은 정신이 없었다. 사장에겐 요셉이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렇다면 박에게는? 박에게 요셉은 어떤 존재인 걸까?


밖으로 나오자 술이 깼다. 그는 휴대전화를 들고 가까운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누군가 콜라라도 쏟았는지 끈적한 단내가 났다. 그는 어제의 그 번호를 찾아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지역은 강원도. 전화가 걸려온 곳은 응랑파출소였다. 응랑이라니. 낯선 지명에 박은 고개를 갸웃했다. 들어보지 못한 곳이었다. 매니저 생활을 하면서 안 가본 데가 없었지만 그곳은 예외였다. 새로 생긴 행정구역인 걸까? 때마침 근처 노점에서 파는 지도책이 눈에 띄었다. 그는 담배 한 갑을 사고 노점 앞에 선 채로 지도책을 펼쳤다. 응랑. 응랑. 지도에서 위치를 확인하고 박은 곧장 납득했다. 거긴 작전을 벌이기로 약속한 곳에서 새끼손톱의 폭만큼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북한과 가까운 바닷가 마을. 특산품은 오징어, 염교. 오징어야 동해 어디든 유명했지만, 한국에서 염교를 재배한다는 건 낯설었다. 설명을 읽어보니 일본 돗토리현과 과거에 왕래가 잦았고, 그래서 일본 요리도 전파되었다고 했다. 지금도 가끔 난파선이 떠내려온다는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뉴스에서 몇 번 지명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근처의 최전방에서 근무했다던 친구의 얼굴도 떠올랐다.

박은 기억의 실마리를 손에 쥔 채 눈을 감고 응랑이라는 거대한 미로로 발을 디뎠다. 가장 안쪽엔 아무도 얼굴을 보지 못한 괴물이 살고 있다는 그 안으로.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바다가 가까워졌다. 거친 파도. 모래사장. 원을 그리는 새들. 박은 미로의 중심에 도달했다. 그곳에 젖은 등을 드러내고 엎드린 괴물이 있었다. 박은 손을 뻗어 축축한 그것을 뒤집었다. 그러자 요셉의 얼굴이 나타났다. 

박은 지도책을 덮고 마침 다가오던 택시에 올라탔다. 청량리역에 도착한 것이 22시 50분. 마지막 기차가 출발하기 십 분 전이었다. 재빨리 표를 끊고 달려 열차에 올라탄 그를 창백한 빛이 찔렀다. 박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눈을 반쯤 감고 통로를 걸었다. 휘청대며 도착한 그의 자리는 조금 뜨악한 얼굴로 그를 올려보는 일가족 세 명 사이에 있었다. 의자를 마주보게 돌려둔 좌석에서 엄마와 아들은 창가에, 딸은 엄마의 옆에 앉아 있었다. 박은 다른 좌석에 앉을까 망설이다가 아들과 나란히, 그리고 딸과 마주 앉았다. 그들 눈에 박은 어떻게 보일까? 문득 그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정장은 멀쑥했으나 술냄새가 났고 요 이틀간 잠을 설쳐 흰자위엔 끓인 동태 알처럼 실핏줄이 곤두서 있었다. 박은 출발도 전에 벌써 삶은 달걀을 도로록 굴리듯 깨뜨려서 우물대는 소녀에게 웃음 띤 얼굴로 물었다.

“네가 누나니?”

“동생이에요.”

익숙한 듯 시큰둥한 반응이 돌아와 민망했다. 차라리 계속해서 무관심으로 구는 게 나을 뻔했다고 생각하며 그는 눈을 돌렸다. 읽을거리가 없나 싶어 선반을 살폈지만 버려진 신문 쪼가리 한 장 없었다.

열차가 출발했다. 오 분도 지나지 않아 물도 없이 꾸역꾸역 배를 채운 소년 소녀는 잠이 들었다. 여자는 턱을 괸 채 피곤한 얼굴로 검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가족 같다. 그는 눈을 감고 천장에 매달린 하나의 시선이 되어 마주앉은 넷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어느 지구, 20세기가 끝나가는 여름에 박승태는 이렇게 아내와 두 아이와 모여 앉아 새벽 기차를 탈 것이다. 목표는 바닷가의 고향집. 늙고 가난한 어머니는 밤을 새워 내려온 아이들을 위해 갓 지은 쌀밥과 바위에서 덕덕 긁어낸 해초와 바다 생선이 들어간 국을 내줄 테다. 배부르게 먹고 한숨 자고 일어난 그는 아이들을 찾아 어린 시절 그가 놀던 해변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맨발의 아내와 애들을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지켜본다. 고운 모래는 아름답고 그 위엔 어느 밤 두 청년이 짐승처럼 뒹군 역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박승태는 죽은 사람을 찾으러 내려가는 길이었고, 그건 그가 다른 지구로 가지 않는 한 바꿀 수 없는 사실이었다.

눈을 떠보니 맞은편의 여자는 졸고 있었다. 여자의 버릇없는 아들이 잠결에 박의 무릎 위에 가는 다리를 얹어두고 있었다. 파란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허벅지엔 뼈처럼 날카로운 모양의 대퇴직근이 고스란히 보였다. 박은 엉거주춤 일어나 그걸 두 손가락 끄트머리로 들어 의자 위로 내팽개쳤다. 아이는 완전히 잠에 든 건 아니었는지 아직 박의 체온이 남아 있는 빈 의자에 옳다구나 하는 얼굴로 기분좋게 두 다리를 쭉 뻗었다. 박은 어이가 없어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찼다. 애새끼만의 특권이다. 버릇없고 몸이 작은 것은.

화장실에 갔다가 식당 칸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박과 같은 잠의 세계의 추방자 몇이 조금씩 거리를 두고 서서 창밖을 바라보며 캔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박도 그 옆에 동참했다. 냉기가 몰려오는 창가에 바투 붙어 그들이 보고 있는 걸 보려고 했지만 박의 눈에 비친 건 유리에 비친 자기 자신의 얼굴뿐이었다. 박은 어둠의 한 점을 노려보며 맥주를 홀짝였다. 매일 조금씩 줄어들게 된 사내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사내는 매일 아침 침대에서 내려와 설 적에 조금씩 천장이 높아지는 걸 기분 탓이라 여겼지만 옷이 흘러내리고 신발이 헐떡이자 자신이 줄어든다는 걸 받아들였다. 그는 연인이 떠날까 두려워했지만 연인은 괜찮다고 했다. 크기가 줄어든다고 마음이 줄어드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사내는 점점 더 작아졌고, 계속 작아져서 엄지손가락만큼 줄어든 어느 밤, 잠든 여자의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가 영영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열 달 뒤 여자는 사내아이를 낳는다. 

이야기 속에서 여자가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박은 여자가 아주 기뻐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는 여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였다. 여자는 작아진 남자를 인형처럼 갖고 놀았을 것이다. 손가락만한 옷을 만들어 입히고, 티슈를 덮어주고, 밥풀로 주먹밥을 만들어주고. 끝내 남자가 자신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들어가는 걸 알면서도 잠든 체했을 것이다. 그리고 태어난 아이를 기르며 누구보다 행복한 일생을 보냈을 것이다. 

그렇게 태어나면 좋았을 거라고, 박은 늘 생각했다. 아버지를 품고 나온 아이를 어머니는 얼마나 사랑했을까? 연인이자 아들인 아이를? 그러나 박의 모친은 정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박은 개만도 못한 존재였고 박은 늘 사랑에 조갈 났다. 마른 목에 물을 쏟아붓기 위해 평생을 헤맸지만 이젠 사장조차 박이 애초 연예인이 되기 위해 회사에 들어왔다는 걸 잊은 듯했다.

그래서 요셉이 싫은 거라고, 박은 생각했다. 그와 자신은 출발은 같았다. 그러나 요셉은 끊임없는 손길을 받아 작고 아름다운 분재가 되었고 자신은 손쓸 수 없이 마구 뒤틀렸다. 박은 아무도 가지고 놀지 않는 인형이었다. 요셉은 뺨이 무수한 키스로 닳아 망가진 인형. 그래서 아름다워. 그래서 죽이고 싶었다고, 실은 낯선 번호의 부재중전화가 남기 전부터 줄곧 요셉이 죽었다는 연락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박은 그제야 인정했다.


기관차를 교체하는 사이 열차가 정차했다. 박은 사람들을 따라 뛰어내리듯 열차에서 내려 뜨끈한 국수를 사 먹었다. 김을 듬뿍 뿌려 혀가 씁쓸할 정도로 간간하게 느껴지는 국수를 국물까지 다 마시는 데 삼 분도 안 걸렸다. 금방 기분 나쁜 포만감이 밀려왔지만 그보다 담배 한 대를 못 피우는 데 더 곤욕을 느끼며 박은 자리로 돌아와 눈을 감았다. 물렁한 어린애 다리가 미끄러졌다가 다시 슬그머니 올라오는 걸 밀치고, 다시 밀치기를 반복하다가 깜빡 잠이 든 그는 스피커를 통과한 기관사의 목소리에 놀라 눈을 뜨고서야 자신이 추락하듯 깊고 짧은 잠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늘은 희뿌옇게 밝아 있었고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바다가 보였다. 가볍게 들뜬 맘에 주위를 둘러봤지만 함께 앉아 있던 가족은 중간에 내렸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빈자리에 덜렁 떨어져 있는 자기 손바닥을 바지에 머쓱하게 문지른 뒤 열차에서 내렸다.

짠바람이 불었다. 가벼운 현기증이 일어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서서 박은 생각했다. 바다다. 응랑에 대한 박의 첫인상은 그게 전부였다. 플랫폼 곳곳엔 그곳을 관광특구로 소개하는 홍보물이 붙어 있었지만 주민들의 소원에 불과한 듯 오징어가 촉완을 엄지손가락처럼 세운 패널 뒤로 보이는 하늘은 전시처럼 암울했다.

박은 귀대하는 군인들 틈에 뒤섞여 역사 밖으로 나갔다. 광장에 서자 자다 깬 지 얼마 안 된 탓에 눈이 시었다. 그가 멍청히 서서 눈만 껌뻑이는 동안 그와 뒤섞여 내린 군인 중 대부분은 아침 손님을 받기 시작한 해장국집으로 빨려들듯 사라졌다. 그러나 박의 뱃속에선 불어터진 국수가 뱀처럼 뒤틀리고 있었기에 뭘 먹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박은 토기를 꾹 참고 광장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낡은 시계탑을 봤다. 여섯시 반. 이른 시간이었다. 파출소야 이십사 시간 문을 열지만 아직 시체를 볼 자신은 없었다. 그렇다고 갈 곳이 있지도 않았고 방향 없는 산책을 하기도 싫었다. 그는 불이 꺼진 다방 간판을 올려다보다가 올라오는 신물을 삼키며 하는 수 없이 택시를 잡으러 발을 뗐다. 그런 그의 앞에 누군가가 섰다.

박은 한동안 넋이 나가고 말았다. 두꺼운 분장에 익숙한 그였지만 이렇게 낯선 장소에서 연극배우같이 차려입은 인물을 만나니 시공간이 뒤틀린 느낌이었다. 그러나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중년의 여성은 박이 놀랐든 말든 그를 향해 길게 붙인 속눈썹을 깜빡이며 말했다.

“오빠 찾으러 왔구나?”

“……”

“근데 안 된다야. 너는 못한다.”

순간 울컥했지만 여자를 쫓아낸 건 박이 아니라 이 날씨에도 선 캡을 쓰고 있는 초로의 여자였다. 이년! 저리 가, 쉭쉭! 이 사이로 바람소리를 내며 손을 내젓는 모양새가 인간이라기보다 날짐승을 쫓아내는 듯했다. 아직은 사람을 무서워할 줄 아는 갈매기가 후두둑 날아올랐다. 선 캡을 쓴 여자가 발을 쿵쿵 구르더니 아양 떠는 표정으로 박을 올려다보고는 팔짱을 꼈다.

“오빠, 아침부터 재수 옴 붙을 뻔했다야.” 

박은 무시하려다가 그냥 웃었다.

“고마워요, 이모.”

“고마우면 우리집으로 와. 싸게 해줄게.”

여자가 옆구리에 전단지를 찔러넣었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옷을 입은 늙은 여자 몇이 광장을 맴도는 게 보였다. 귀대 직전의 군인이나 낚시를 마치고 돌아온 어부들을 노리는 듯했다. 박은 무시하려다 호기심에 물었다.

“이모 부지런하시네. 아가씨들이 벌써 나왔어요?”

“이 짓에 낮밤이 어딨댜. 우리 애들이 젤 괜찮어. 대학생도 있고. 오빠가 원하면 싸게 해줄게.”

“얼만데요?”

여자가 손가락을 폈다. 박은 코웃음을 칠 뻔한 걸 참았다. 몸을 사고파는 것보다 이렇게 헐값인 게 더 불법 아닌가? 그는 질병을 부르는 가격을 말하고 있는 중년 여자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감싸쥐며 문득 생각나 물었다.

“이모, 아가씨 말고 총각은 없어요?”

엉? 되물었지만 구겨진 인상으로 봐선 그의 말을 알아들은 눈치였다. 박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저 일 있어서 온 거라, 다음에 갈게요, 이모.”

그는 부드럽게 여자의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 공중전화로 걸어가서 열 자리 숫자를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그리 오래가지 않아 졸린 목소리의 남자가 응답했다.

“예, 응랑파출소입니다.”

“전화가 왔습니다.”

“예?”

“며칠 전에 전화가 왔는데 받질 못했어요. 금요일 저녁에요.” 

아. 수화기 밖에서 짧은 말소리가 오간 후 종이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통화로 되돌아온 남자가 피로 때문인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예, 저, 그, 차가 발견되어가지고 연락을 드렸네요. 뉴 그랜저인데, 가만있어보자 번호가……”

“맞습니다.”

“예?”

“뉴 그랜저 맞아요. 제 찹니다.”

아, 경찰이 길게 말꼬리를 늘이더니 답답할 정도로 느긋한 속도로 말했다.

“그거를, 그, 누가 훔쳐 타가지고 전화를 드렸어요.”

“안에 사람은 없었습니까?”

“예? 사람요?” 경찰이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사람이…… 없으니까 훔쳐 탔겠지요?”

“……”

“……저, 그, 산장 주인분 아니십니까?”

“예?”

“그 댁 앞에서 끌고 왔다는데요. 그, 훔친 애들이. 대학생들인데, 걔들이 끌고 왔다는데요.”

“아……” 이번엔 박이 말을 끌었다. “차는 제 차 맞는데, 아내가 빌려갔습니다. 친구들이랑 모임을 한다고요.”

“그러면 그쪽으로 연락드리는 게 빠를까요?”

“아니요. 저도 지금 응랑입니다. 그런데 그, 이른 시간이라 아내에게 연락하기가 좀 그렇군요. 아침잠이 많거든요. 혹시 산장 주소 좀 알 수 있을까요?”

“그, 주소만 가지곤 찾기 어려우실 텐데. 길이 복잡해서. 오시면 간단히 지도 한 장 그려드릴게요.”

“일단은 서로 가면 됩니까?”

“예, 오세요. 지금은 어디십니까?”

“여기 기차역입니다.”

“아, 그러면 버스 기다리지 말고 택시 타고 오시면 금방입니다. 요금도 기본요금밖에 안 나옵니다.”

“예. 감사합니다.”

박은 전화를 끊고 한동안 그대로 있다가 다시 역 앞 광장으로 갔다. 선 캡 쓴 여자는 버려진 식탁의자를 죽 늘어세워둔 광장 바깥 벽에 비슷한 차림의 여자들과 앉아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지만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훅 풍긴 설탕 단내에 간신히 잠재운 토기가 올라왔다. 그러나 박은 침을 꾹 삼키고 한때 여자들을 사로잡았던 살인 미소를 장전했다. 그러나 입을 열기도 전에 여자가 선수 쳤다.

“안 해.”

“예?”

박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지만 여자는 태연하게 말했다.

“우리 애들은 뒤로 그 짓 안 한다야.”

“이모,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

그러나 여자는 대꾸도 않고 혼자 중얼거렸다. 별스럽기도 하다야. 물렁한 보지 냅두고 딱딱한 걸……

이번엔 박이 여자의 팔짱을 꼈다.

“우리 이모가 서울 농담을 모르는구나. 이래서 관광특구 되겠어요? 가요, 이모. 이쁜 아가씨로 부탁해.”

“……”

“싫으면 다른 이모랑 가고.” 

그러자 초로의 여자가 주변 여자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종이컵을 구기며 일어났다. 아직도 불만이라는 듯 우물대는 여자의 혼잣말을 들으며, 박은 비둘기 대신 갈매기가 퍼덕이는 광장을 지나 껍질도 안 벗긴 애새끼들이 아다를 뗐을 성병의 온상으로 발을 디뎠다. 

박이 미운털이 박힌 손님이긴 했다.

초로의 여자가 그를 데리고 간 곳은 가겟방이 아니라 살림방이었다. 초로의 여자가 문을 세차게 열고 손님 왔다고 소리를 지르자 살냄새와 밥냄새와 담배 냄새가 밴 이불 위에서 여자 하나가 굼지럭대며 일어났다. 밤을 새우고 잠시 쉬려는 참이었는지 얼굴엔 화장기가 남아 있었다. 한 시간 반이야. 초로의 여자가 말하고 방문을 잠갔다. 여자는 당황한 듯했지만 침착하게 고개를 숙였다. 박은 가까이 다가가 흐릿한 빛에 기대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밉지도 곱지도 않은 바닷가 사람. 그러나 여자였다. 바람과 소금기가 그를 망치기도, 기르기도 해서 적당히 신비감이 있었다. 반쯤 지워진 화장 아래로 세월이 드러나 있었다. 하여간 노인네. 그는 뻔뻔하게 대학생 운운한 초로의 여자를 떠올리며 웃었다. 여자는 무언가 잘못된 걸 눈치챘는지 조금 기가 죽은 태도를 보였다. 이런 점은 바다 사람 같지 않네. 박은 수줍은 건지 말수가 적은 건지 알기 어려운 여자의 무릎에 냅다 누우며 물었다.

“누난 몇 살이야?”

우물쭈물하는 여자에게 박이 빠르게 말했다.

“아냐. 솔직하게 말해도 돼. 나, 연상이 취향이니까.”

그러자 여자가 손가락을 펼쳤다.

“스물다섯……”

내가 소경으로 보이나. 그런 생각에 피식 웃다가 박은 문득 여자의 발음이 독특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디 사람?”

“……”

“응? 누나 어디 사람?”

그러자 여자가 말했다.

“베트남……”

“아아, 그렇구나. 누나. 따뜻한 데서 왔네. 거긴 좋지? 겨울도 없고.”

“예에……”

“거기 여자들은 어때? 다 누나처럼 이뻐?”

박은 킬킬 웃으며 천천히 여자의 엉덩이를 만졌다. 여자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뒤트는 걸 보고 심술궂은 마음이 들어 물었다.

“아까 이모가 그러는데 뒤로는 안 된대. 진짜야, 누나? 응? 진짜 안 돼?”

여자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박은 웃었다.

“씨발 년.”

“……”

“농담이야. 나 그냥 쉬러 온 거야. 피곤해서. 나, 머리만 좀 만져줄래? 이렇게.”

그는 여자의 손을 쥐어 자기 머리에 얹었다. 부드러운 손이 정수리에서 뺨으로 움직였다. 퀴퀴한 곰팡내와 싸구려 방향제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팠지만 한편으론 평온했다. 그는 눈을 감고 오후의 일을 시뮬레이션했다. 정오의 지끈거리는 태양 아래 그는 광장에 서 있다. 손을 흔들어 주변에 꼬이는 갈매기들을 떨친 뒤 택시를 타고 파출소에 간다. 애들이 훔쳐 탔다던 차에 올라타 그게 버려져 있었다는 산장으로 간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하지만 박은 문을 두드리고 말한다. 요셉. 나야. 대꾸가 없다. 그러나 문에 귀를 대자 몰아쉬는 숨소리가 들린다. 박은 핍홀에 눈을 갖다댄다. 모조리 캄캄하다. 그러나 박은 그 너머에서 겁에 질린 사슴 같은 눈동자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박은 눈을 번쩍 떴다. 입을 벌린 채 손만 기계적으로 움직이며 소리 죽인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여자가 놀라 그를 내려다보았다.

“누나아, 그 새끼가 살아 있어.” 

“예?”

“그 개새끼가 살아 있다고.”

박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빠르게 부풀어오르는 기쁨에 일그러진 얼굴을 여자의 가랑이에 묻었다. 여자의 상체가 뒤로 젖혀졌다. 슬립 아래로 머리통을 집어넣은 박의 몸부림은 꼭 기어들어가려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