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회

크리스마스를 맞아

준섭에게

 

크리스마스를 맞아 포인세티아를 샀어

좀 의외인가? 아니면 그럴 만하게 들릴까 모르겠어

장이 선 골목을 걷다가 사고 싶어서 샀지.

빨간 것이 꽃이고 파란 것이 잎일 것 같지만 둘 다 잎이고,

꽃은 그 안에 몽울져 있었어.

포인세티아는 해를 봐야 두 잎의 색이 선명해진다기에 창가에 놔두었는데

그만 깜빡하고 이틀을 보냈어.

조금 전에, 꼭 나물을 데친 것 같은 모양새로 변한 화분을 거실로 들여왔어.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거지.

종종 그러고도 살아난 화분들을 본 적이 있어서

물을 주고 기다려보려고 해.

살아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일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고 하고, 모레쯤엔 눈 예보가 있네.

이제 네가 없는 날들에 익숙해진 참이야.

진짜 익숙해진 건지 잠깐 그런 기분이 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차례 고비를 넘겼다는 찬미 언니의 아버지 소식을 들었다. 저녁에 따뜻한 음식을 같이 드시겠어요? 라고 물었더니 그럼 좋을 것 같아요, 라는 대답을 들었다. 나는 퇴근을 하고 이모네 미용실에서 언니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미용실에는 두 사람이 있었고 한 사람이 파마를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머리 위를 열 기계가 돌고 있었다.

어우, 이거 언제 끝나나. 배가 고픈데

짜장면이나 한 그릇씩 시켜먹을까요.

고구마나 먹고 이따가 집에 가서 밥들 먹어. 괜한 돈 쓰지 말고.

동치미 있는데.

그럼 얘기가 달라지지. 무조건 고구마지.

그게 저녁이야. 이제 많이 먹으면 체해.

이모와 손님 둘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무심하게 텔레비전을 보았다. 개항장의 이모저모를 찍은 다큐멘터리였다. 이모네 미용실이 있는 이 오래된 골목도 같은 프로그램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 우연히 그날 있던 손님들 중 반은 이미 텔레비전에 나온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무엇인가를 잘하거나 오래 해서, 혹은 우연히 어떤 식당에 갔다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고 했다. 프로그램이 끝나갈 무렵 간격을 두고 가게 안쪽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테이블 위에 있는 전단지를 집어들었다.

춤이나 배워볼까.

?

자이브, 룸바, 왈츠, 차차차, 삼바, 라틴, 모던, 탱고……

종류가 그렇게나 많아?

. 삼 개월 등록하면 십 프로 할인도 해주고.

차차차만 알겠다. 어딘데?

시장 안에. 인생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쓰여 있는데, 놓칠 거야?

이제 텔레비전에서는 눈 덮인 울릉도에서 스키를 타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 파마중인 아주머니가 고향이 울릉도라며 리모컨을 들어 볼륨을 높였다. 집중하여 보느라 앞으로 몸을 숙이는 바람에 열 기계에서 멀어지자 이모가 다시 몸을 만져주었다.

몇 살 때 온 거야?

열여섯.

어쩌다 여기까지 왔어

사람들 말 들을 거 하나 없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

중간이 전부 생략된 말이었지만 이모와 아주머니는 그 말이 맞는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오 분 안에 나간다는 언니의 메시지를 받고 미용실을 나왔다. 도서관으로 걸어가는 길. 늦게까지 문을 열고 있는 문구점 앞에서 한 아이가 혼자 뽑기를 하고 있었다. ! 일등! 일등! 아이는 이미 어둠이 내려 깜깜한 골목길에서 무거워 보이는 책가방을 멘 채로 뱅글뱅글 몸을 빠르게 돌리고 있었다. 자이브……? 룸바일까……? 춤에 대해선 전혀 모르지만.

아이가 빙글빙글 돌며 골목 끝으로 사라지고, 언니를 기다리며 뽑기를 했다. 꽝이었다. 나는 앞에 놓인 장난감들을 구경하다가 부메랑 하나를 샀다.

정인씨!

언니가 손을 흔들며 걸어왔고 가로등 아래서 만났다.

아버지는 이제 괜찮아요.

다행이에요.

오늘 왠지 혼자 밥 먹기가 싫었는데 고마워요, 정말.

우리는 버스정류장에 서서 무엇을 먹을지 고민했다. 사람들이 서서 어묵과 붕어빵을 먹고 있었고 길거리 어묵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었지만 치킨을 먹기로 했다.

따뜻한 걸 먹기로 해놓고 치킨이네요.

갓 튀긴 건 뜨겁기도 하잖아요.

그렇지만 국물이 없는데.

치킨 무 국물……

정인씨, 정인씨는 가끔 정말 재미없어요.

실없는 얘기라고 하기에도 부족했나요.

하하하. 미안해요, 풀이 죽으셨네. 어묵 하나 먹을까요.

.

미안하니까 내가 살게요.

우리는 어묵을 여섯 개씩 먹고 십오 분쯤 걸어 학창 시절에 자주 가던 치킨집에 갔다. 그 건물 지하에 목욕탕이 있어 목욕을 마치고 종종 치킨을 먹곤 했다고 언니가 말했다.

저는 목욕탕은 안 가봤어요.

그렇구나.

치킨집은 정말 많이 와봤고요.

하하. , 성규씨랑은 괜찮아요?

.

어떻게요?

그냥 서로 미안하다고……

만났어요?

아뇨. 메시지로요.

그렇군요.

계속 서로 미안하다고……

뭐가 그렇게 미안한 거예요?

모르겠어요, 저도.

푸핫. 뭐예요.

어묵을 많이 먹어서인지 둘이서 한 마리를 채 먹지 못하고 남은 것을 포장했다. 카운터에 메리골드 씨앗을 가져가라는 안내가 있었고 언니는 냅킨에 씨앗 몇 개를 챙겼다. 나는 남은 치킨을 들고 밤길을 걸으면서 언젠가 준섭과 걷던 길을 떠올렸다. 치킨 냄새를 맡고는 우리를 따라오던 한 마리의 개를 떠올렸고 자전거 바퀴가 우리 둘을 싣고 굴러가며 내던 소리를 떠올렸다.

얼굴을 씻은 후엔 작은 방에, 열 수 없도록 책장으로 막아놓은 서랍을 열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을 전부 꺼내고 책장을 밀어서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 있는 상자를 꺼내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나의 상자. 버린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다시는 열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상자를 열었어. 그리고 나는 그걸 다시 닫았다가 열기를 반복했다.

[나는 네가 아픈 게 마음에 걸려]

성규에게 그런 문자가 와 있었고 나는 다시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그 방에서 잠이 들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며칠 앞두고 유진씨가 귤 두 상자를 들고 가게로 찾아왔다. 유진씨는 먼저 퇴근한 사장님이 두고 간 인절미와 함께 녹차를 마셨고 나는 유진씨가 사온 귤을 집어 테이블에 얼마간 굴린 다음 까먹었다.

맛있네요.

그쵸.

정리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요?

그게요.

.

잘렸어요.

?

회사에서 잘렸어요.

갑자기요?

. 푸핫.

아니, 이렇게 갑자기요?

. 괜찮아요. 귤 마저 굴리세요.

이제 마음 편히 올 수 있는 건가요.

맞아요. 단골이 되어준다는 거 잊지 않았죠?

그럼요.

주변 상인분들이 좋은 사람 와서 다행이라고 환영해주셨어요.

좋은 사람이요?

. 저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닌데.

하하. 뭐예요.

, 오다가 까마귀 진짜 많이 봤어요.

맞아요. 요즘 까마귀 많아요.

유진씨는 짧게 자른 머리가 편하다고 말했고 나는 요즘 흰머리가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그러네요, 유진씨가 내 머리를 유심히 보며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괜찮아요.

, 그래 보여요.

조금, 웃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귤 한 상자를 들고 환희네로 갔다. 제주에 사는 지인이 귤 다섯 상자를 보내와서 주변 상인분들께 세 상자를 드리고서 두 상자는 이리로 들고 왔다는 것이었다.

국수 얻어먹은 보답을 이렇게 하게 되네요.

전 이리저리 얻어먹기만.

유진씨의 차를 타고 가면서 그런 얘기를 짧게 나눴다. 환희네 집 앞에 차를 대고 내렸다. 담장 위에 고양이 두 마리가 앉아 있었고 우리가 들어가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안녕, 들어갈게. 유진씨가 말했다. 작은 텃밭을 감싼 비닐 안에 가득했던 얼음이 녹고 목련나무엔 꽃봉오리가 맺혀 있었다. 할아버지가 요양원에 가신 뒤로 환희는 요즘 할머니에게 음식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환희가 한 밥과 김치찌개와 달걀말이를 먹었다. 이야, 달걀말이 크기 봐라. 환희 손 크네. 유진씨가 말했고 환희가 크고 맛있죠? 라고 말하며 웃었다. 얘가 밥을 할 줄 알아야 뭐라도 먹고 살지. 이제 나도 너무 늙어서…… 환희의 할머니가 그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 너무 잘하네요. 너무 맛있어요.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유진씨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신발가게를 할 거라는 얘길 하자 할머니는 한 번도 서울에 가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시구나, 내가 말할 때 순간 환희가 물이 가득 담긴 컵을 엎질렀으나 유진씨가 재빨리 닦았다. 괜찮아, 다 닦았어. 괜찮아. 환희가 고개를 끄덕였고, 밥상을 밀어둔 뒤엔작은 별이라는 노래를 배웠다며 우리 앞에서 그걸 불러주었다. 자장가잖아? 유진씨가 말했고 환희는 들어보세요, 제가 어제는 알파벳을 배웠거든요, 라고 말하며 그 노래에 알파벳을 넣어 다시 불러주었다.

잘 먹었어.

또 오세요.

그런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언니가 아이를 낳았다는 전화를 받고 부산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창밖으로 지도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나는 어디서 온 걸까, 모르겠지만 햇빛은 물길을 따라 반짝이고 있었거나 물길은 햇빛을 따라 반짝이고 있었다. 무언가가 반짝인다는 생각을 얼마 만에 한 걸까, 역시 모르겠지만 나는 문득 환희를 떠올렸다.

 

정인에게

 

그제, 네가 있는 곳에 많은 눈이 내렸나.

아침에 눈을 뜨면 습관적으로 일기예보를 확인해.

감기에 걸리지 않게 따뜻한 옷을 입고 따뜻한 것을 먹기를 바라지만

그 마음이 뭔지는 모르겠어.

네가 힘들어할 때 나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것도 잘 모르겠어.

대신, 우리는 모르겠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하는구나, 그걸 알게 되었어.

너까지 떠날까봐 너무 두려웠던 것 같아.

그래서 잡지도 못하고 보내지도 못하고, 나 혼자 이러고 있어.

그런 채로 살아왔고 이런 채로 살 것 같아.

무언가를 단언하는 게 너무나도 두렵지만.

 

비행기에서 내려 진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준섭의 메일을 읽었다. 하나둘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았고 버스 도착 시간을 확인한 뒤 편의점에서 우산을 투명한 비닐우산을 샀다. 우산을 사서 나왔을 때 비는 다시 그쳐 있었고 금세 다시 내리기 시작했지만 우산을 쓰고 걷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새로 산 우산을 뜯지 않고 그대로 든 채로 버스를 기다렸다.

 

우리는 언젠가 우리가 예전에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너무 예전이라 혹시 잊었을까. 아니면 애써 잊고 싶었던 걸까. 나는 문득 그런 것들이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우리는 또 모른다고 대답할지 모르고, 어쩌면 우리는 그 약속을 잊어야만 자유로워질지도 모르니까. 나는 우리가, 편안했으면 좋겠어. 네가, 많은 순간에 편안했으면. 지금 남은 마음은 그것뿐이라고, 진해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주에는 연재 후기가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