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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섭과 나는 얼어붙은 저수지의 수면을 바라보다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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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섭과 나는 얼어붙은 저수지의 수면을 바라보다 일어났다.

오늘도 꿈을 꾸었나.

.

어떤 꿈을 꾸었나.

왜인지 엄마가, 다른 엄마였다. 남동생이 있었는데 엄마가 우리에게 너희는 내성적이고 개성이 없어서 좋다고 했어. 내 방안에서는 채소들을 키웠는데 그래서인지 방바닥엔 흙들이 여기저기, 그렇다고 온통 흙투성이인 건 아니었고. 또 방안에 여러 종류의 벌레들이 기어다니고 있었어. 아무래도 채소를 키우고 있었으니까 벌레도 있었겠지. 그 동네의 이름은 태촌이었던 것 같아.

태촌이라는 데 살았었나.

아니.

어딘가엔 있을 것 같은 이름.

많을 것 같은.

벌레들을 봤을 땐 어땠어.

아무렇지 않던데.

내성적이고 개성이 없어서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땐.

그때도 아무렇지 않던데.

다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닐 테고.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고말고, 대답했다.

벌레들 옆으로, 이부자리를 깔아야지 했어.

작은 돌들이 아그작아그작 밟히는 소리 외에는 사방이 고요한 밤길엔 우리 둘뿐이었다. 멀리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리기에 작게 따라 짖었다. 한번은 크게 짖어보기도 했는데, 가로등 근처에 갔을 때 앞서 걷던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

버스 정류장 쪽으로 나가 우동을 먹기로 했다. 멀리 불빛들이 보이자, 준섭이 머리에 장착하고 있던 헤드랜턴을 풀어 왼팔에 끼었다.

 

저녁 여섯시부터 새벽 두시까지 문을 여는 작은 우동집으로 들어갔다. 가끔 새벽 한시에도 가곤 하는 곳인데 기본 우동과 어묵우동, 즉석 짜장면과 짜장밥을 판다. 우동을 먹자고 해놓고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짜장 냄새를 맡곤 둘 다 짜장면을 주문했다. 주인이 쪽파를 띄운 어묵국물을 가져다주며 삼월인데도 아직 춥다고 말했다. 준섭이 혹시 소주가 먹고 싶은지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제 회식에서 말이야.

준섭이 소주를 주문한 뒤 말했다.

송부장님이 우셨다.

우셨나.

우는 어른은 오랜만에 봤거든.

아무래도 어른이니까.

처음은 아니지만 정말 오랜만에 봤거든. 아무튼 집에 와서 씻고 자려고 누웠는데 도통 잠이 오질 않더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준섭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사람들이 아이고, 부장님 좋은 날 왜 그러시냐고 하니까 부장님이 좋은 날이 아니라고, 너무 슬프다고 말했다.

술에 취해 있었나.

아니.

갑자기 헤어지게 되어서 그랬나.

갑자기여서.

준섭은 고개를 끄덕이며 짜장을 한 입 먹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먹었다. 좋은 날이지만 동시에 슬프기도 한 날이었구나 생각하며 짜장을 먹었다. 많은 날이 그런 순간들로 이루어진 것인가 하며 단무지를 안주로 남은 소주를 마저 먹고 밖으로 나왔는데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다.

봄눈이다

왠지 묘한 기분을 느끼면서 준섭과 왔던 길을 되돌아 집으로 갔다. 얼굴은 모르지만 이쪽 길로 접어든 걸 보니 길 끝에 위치한 아파트에 사는 것 같은 할머니도 준섭의 헤드랜턴 불빛과 같이 눈을 맞으며 걸었다.

우리집이 먼저 나올 텐데 어쩌지.

아파트 근처에 가면 밝으니까 괜찮을 거야.

우리는 랜턴이 비추는 빛 근처에 할머니가 있을 수 있도록 천천히 걸었다.

이만오천원 주고 샀는데 꽤 쓸모가 있네.

준섭이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눈을 떠 몸을 조금 뒤척인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의자 위로 올라가 두 팔을 들어 양 손바닥으로 천장을 밀어올렸다. 얼마 전, 책장 맨 위에 있는 먼지를 닦으려 의자 위로 올라갔다가 우연히 방안을 내려다봤는데 걸리버가 된 기분이었다. 걸리버가 되고 싶나. 엄마가 말했고 나는 아무래도 걸리버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시원한 느낌이 좋아 계속해서 천장을 밀어올렸다. 의외로 들면 들 수 있을 것만 같이, 내가 미는 만큼씩 밀렸다 내려오는 천장. 이러다 무너질 수도 있겠다 싶어 얼른 의자에서 내려왔다. 먼지를 닦으려고 했던 물티슈는 책장 위에 그대로 올려둔 채여서 한참을 찾았다.

천천히 물 한 잔을 마시고 독서실 아르바이트를 갔다. 일곱시부터 두 시간 정도 청소를 하는데 아홉시 출근인 총무 언니가 벌써 나와 있었다. 늘 입는 깔깔이를 입은 채였고 몹시 피곤해 보였다.

정인씨 내 문자를 못 봤나요.

나는 그제야 휴대전화를 열어보았다. 잠이 오질 않아 일찍 나왔으니 오늘 하루는 쉬어도 좋다는 이야기였다.

정인씨, 복도 없네요.

언니가 말했고

복이요.

내가 말했다.

들어가요.

언니가 말했다.

.

독서실에서 나와 상가 입구에 섰다. 상가 유리문에 시트지로 붙인 당구장 간판은 가장자리가 말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해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탈 때는 보지 못했는데 내릴 때 보니 곧 마을버스의 운행이 중단된다는 안내문이 뒷문에 붙어 있었다.

엄마는 이틀 전 만든 미역국을 데워 아침을 먹고 있었다. 나는 손을 씻고 멸치볶음을 넣고 김밥을 만들었다. 김만 있으면 뭐든 넣고 말면 되어서 자주 먹는다.

예전에 큰엄마도 매일 김밥을 싸 먹었어.

김밥이란 것은 번거롭다면 번거롭고 간단하다면 간단하다.

오늘은 특히 간단하네.

상하진 않겠지.

아직 쌀쌀하니까.

엄마가 곰곰이 생각하고는 말했다.

큰엄마는 어디서 무얼 하고 사나.

아무튼 예전엔 영등포에 살았어.

지금은 모르고.

지금은 잘 모르고.

고개를 돌려 밖을 보았는데 전날 내린 눈은 다 녹고 없었다. 내리면서도 녹고 있었던 듯, 다 녹고 없었다. 나는 영애 이모 몫까지 싼 김밥 도시락을 엄마의 손에 들려주었다. 엄마가 나가고 휴대전화를 열어보니 준섭으로부터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송부장님의 빈자리를 보니 그날은 슬픈 날인 게 맞았다]

[송부장님은 오늘은 기쁠지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게 답장을 썼다가 지웠다.

 

마트에 가는 길에 약국 앞에서 할머니가 파는 우엉을 사 집에 돌아왔더니 택배가 와 있었다. 며칠 전에 주문한 것이었다. 체중계가 십이만구천원인 것도 놀라운데 만천원으로 세일을 한다는 것도 놀라웠다. 휴대전화와 연결을 해서 건강 관리를 할 수도 있다는데 그런 것까진 안 할 생각이었다. 그 기능 때문에 십이만구천원일 텐데, 라며 준섭이 저녁에 체중을 재러 온다고 하였다. 나는 집을 청소하고 우엉 껍질을 벗기며 시간을 보냈다. 이만큼의 우엉이 천원이라니, 하고 놀랐을 때 우엉밭을 본 적이 있느냐고 우엉을 팔던 할머니가 물었다.

아뇨, 우엉밭은 아직.

사람들은 우엉을 많이 먹는데 우엉잎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할머니가 말했다. 나는 네, 그러고 보니, 대답을 했다. 집에 와서도 또 잊고 있다가 우엉을 손질한 뒤 새카매진 손끝으로 우엉잎을 찾아보았다. 손바닥보다도 훨씬 큰 잎이 나풀거리는 것이 낯설었다. 예전 같으면 우엉잎의 생김새 따위 모르면 어떤가 했겠지만 요즘은 그렇지가 않다. 아무래도 그렇다는 말이다.

체중을 재겠다며 영애 이모까지 우리집으로 퇴근을 했다. 모두 저녁식사를 하기 전에 재겠다고 하였다. 준섭이 74.4, 내가 75.5, 엄마가 73.3, 영애 이모가 78.8킬로그램이었다. 모두 비슷했는데, 모르는 새 살이 너무 많이 쪘다면서 이모가 조금 놀란 듯했다.

그런데, 전부 맨 뒷자리가 그 앞 숫자랑 같잖아

그래. 이상하네.

혹시 고장이 난 거 아니냐고 영애 이모가 말했다. 아니 내가 많이 나가서가 아니라, 가격도 그렇고 좀 이상하지 않느냐고. 일리가 있는 말이어서 우리는 한동안 체중계를 내려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나중에 다시 한번 재보기로 하고 식사 준비를 했다.

준섭이 파주까지 갔다 왔나?

.

단팥빵도 사왔네.

.

준섭이 파주에서 사온 두부전골을 냄비에 옮겨 담으며 엄마가 말했다. 매일 아침 직접 만든다는 손두부와 직접 재배한다는 버섯이 가득했다. 다같이 종종 가는 식당에서 포장해온 것이다.

종일 일하고 언제 또 거기까지 갔다 왔나, 피곤하게.

좋아하시잖아요.

영애 이모도 두부산초구이와 손두부를 접시에 옮겨 담으며 여긴 이 손두부를 찍어먹는 간장도 보통 간장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평범해 보이지만 먹어보면 그렇지가 않다고.

준섭과 나는 밥그릇에 밥을 푸고 수저를 놓았다. . 두부 모양만 봐도 직접 만든 건지 알 수 있다. 언뜻 보기엔 치즈 같기도 하고 말이야, 라고 이모가 정갈하게 담긴 두부를 보며 또 덧붙였다.

정인이랑 준섭이는 두부보다는 치즈가 좋지 않나.

둘 다 좋아요.

저도요.

티브이에서 보니까 가평 같은 데선 잣을 넣은 두부를 만들고 말이야.

아무래도 가평이니까.

잣맛은 별로 안 나지만 그걸 넣었다고 하면 왠지 더 좋잖아.

더 좋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 반찬으로 산촛잎을 많이 먹었다고 엄마가 말할 때 전골이 끓기 시작했고 그러자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둥그런 상에 둘러앉아 땀을 흘리며 두부전골을 먹었다.

매일 두부를 먹고 밥도 한 그릇 이상 먹는 사람 하나 없는데 왜 전부 살이 쪘을까.

영애 이모가 아무래도 뭔가가 의심스럽다고 말했더니 살 좀 쪄도 괜찮다고 준섭이 말했다.

쪄도 뭐, 별수 있나.

엄마가 말했다.

별수가 없나.

이모가 말했다.

별수가 있다는 거예요, 없다는 거예요

여기 누구 별수 있는 사람 있나.

엄마가 말했고 여러 사람이 자꾸 별수 있다 없다 하니까 어지럽다고 준섭이 말했다. 그럼 조금만 있다가 배드민턴이라도 쳐볼까요. 사람도 넷이고. 내가 말했더니 이모가 오늘은 왠지 피곤하다고 하였다. 배가 불러 단팥빵은 먹지 못하고 이모 손에 서너 개를 들려 보내려는데 사람이 하나니까 하나면 된다고 한사코 나머지를 내려놓았다. 이모는 세나가 기다린다며 서둘러 외투를 챙겨 일어났다. 세나는 올해 열아홉 살이 되었는데 세나의 담당 의사 말론 아직 몇 년은 더 살 수 있다고, 그때 티브이 프로그램에 나갈 준비를 하시면 된다 말했다고 한다. 준섭은 이모와 같이 일어났다. 지난번에 김치랑 호박죽도 얻어먹었고 여긴 길이 너무 외지니까 데려다준다는 것이었다.

오늘 호강하네.

이모가 말했고

마음이 편한 게 호강이다.

엄마가 말했다.

호강.

호강. 나는 설거지를 하며 혼자서 호강거려보았다. 오래된 연립의 창문 너머로 여기저기서 달그락달그락, 저녁 설거지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와 나는 단팥빵 하나를 나눠먹으며 반은 먹어도 되겠지, 이 집 단팥빵은 달지도 않은 데다 또 팥이라는 건 워낙 건강에도 좋고.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영애 이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방금 가놓고.

그래도 또 전화할 수 있는 거라고, 엄마가 말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산촛잎을 찾아보았다. 동글동글 매끈하니 귀여운 생김새였다. 엄마가 어릴 때 많이 먹었다는 것이 이거구나. 그런 생각을 잠깐 하고서 원래 쓰임새를 잃어버린 지 오래인 의자 위에 쌓인 옷들을 정리했다. 의자엔 내가 아무렇게나 벗어둔 두꺼운 겨울옷들이 동그랗게 쌓여 있었다.

집 주변도 전부 묘지인데 여기 또 묘가 있네.   

지난주에 집에 다녀간 언니의 말이었다.

어차피 내일 입을 거라서

매일 같은 것을 입나.

아니면 모레.

말장난을 한 것은 아니고 정말 내일이나 모레 입을 옷들이었다. 검은 니트와 회색 후드를 개어두었을 때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세나가 숨을 쉬지 않는다고, 같이 가보자는 것이었다. 엄마와 나는 옷을 갈아입고 택시를 불렀다. 나는 아직 서랍에 넣지 않은 검은 니트를 다시 입었다. 택시가 바로 잡히지 않아 일단은 버스가 다니는 길까지 걸어 나가자고 하였다. 깜깜한 늦겨울의 긴 길을 걸었다. 나는 계속 휴대전화를 보며 택시가 잡히는지 확인했다.

차가 있어야 하는구나.

엄마가 말했을 때 이모로부터 미안하다고, 안 와도 된다고 문자메시지가 왔다. 그리고 다시 아니, 천천히 오라고 메시지가 왔다. 키가 크고 마른 나무들이 양쪽으로 서 있었고 문득 바람이 소용돌이를 치며 돌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떠올랐던 낙엽들이 내려앉은 가로등 아래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준섭에게 전화가 왔지만 받지 못했고 버스정류장에 다다를 무렵 택시가 잡혔다. 이모가 울고 있을까, 하며 엄마를 보았더니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네 집 앞에 내리자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또 눈이다. 또 눈이 내리는구나. 눈이 자주 내리는 봄이다.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