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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이 소설의 제목 ‘빅아이’는 말 그대로 큰 눈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블루핀, 옐로핀, 빅아이처럼 우리가 횟집에서 먹는 맛있는 참치들의 이름이기도 하지요. 바다에서 만나보니 빅아이 이놈은 정말 눈이 크더군요. 블루핀은 바다의 로또지만 너무 귀해서 잡기가 어렵고, 옐로우핀보다는 빅아이 가격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참치잡이 선원들은 내내 빅아이를 기다립니다. 저 역시 선원들 곁에서 하루종일 태평양의 파도를 쳐다보며 빅아이를 기다렸습니다. 편견과 무지와 에고로 가득차 있었던 저의 좁은 시야를 버리고 세상을 보는 큰 눈을 가지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입니다.


2017년 12월부터 2018년 5월까지 저는 태평양에서 참치잡이 원양어선을 탔었습니다. 참치잡이 원양어선이라는 것은 저 같은 얼치기가 함부로 탈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동원산업 김재철 회장님과 여러 관계자분들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다에서 제가 탔던 배의 선장님과 기관장님과 선원들에게 많은 민폐를 끼쳤습니다. 이 소설을 쓰며 가끔 바다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그 얼굴들을 떠올리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두 그립고 고맙습니다. 

 

국제노동기구에서 통계를 낸 이후로 원양어선 선원은 극한 직업 순위에서 단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준 적이 없습니다. 바다에는 천 가지의 죽을 이유가 있고, 한번 바다로 나가면 좁은 배 위에서 짧게는 일 년 길게는 삼 년씩 생활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기를 잡는 노동 강도와 노동 시간은 실제로 ‘극한’합니다. 한국전쟁 직후의 폐허 속에서 육칠십년대 원양어선 선원들은 경험도 기술도 없이 낡은 고물 배를 타고 태평양이나 대서양 혹은 북양이나 남빙양 같은 극한의 바다에서 독일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스무 배나 되는 외화를 벌어왔습니다. 달러가 금처럼 귀했던 시절 한때 원양어업은 대한민국 전체 수출의 이십 퍼센트를 담당하기도 했었지요. 수천 명의 원양어선 선원들이 그 바다에서 죽었습니다. 이 소설의 한 부분은 그들의 숭고한 죽음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원양어선은 주로 밤에 참치를 끌어올립니다. 열여섯 시간의 고된 노동 끝에 샤워를 끝내고 먹는 배의 아침식사 시간은 그래서 늘 뿌듯하고 빛나는 공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싱글벙글한 인도네시아 선원에게 제가 뭐가 그리 좋으냐고 물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선원이 서툰 한국말로 제게 말했습니다. “내가 돈을 벌면 가족이 행복하고, 가족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다.” 가족이 행복해서 자기가 행복한 삶. 타인이 행복해서 자기가 행복한 삶. 부끄럽게도 그 말이 언뜻 이해가 안 되어서 저는 처음에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원양어선을 타기 전의 저와 배에 내리고 난 후의 저는 어쩐지 조금 달라진 것 같습니다. 뭐 빅아이를 얻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쩐지 조금, 세상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뭐랄까, 저는 제가 살아왔던 지난 삶이 부끄럽습니다. 편안한 삶을 추구했고, 덜 일하고 많이 받으려 했으며, 적게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받으려고 했지요. 카발라에선 그것을 ‘부끄러움의 그릇’이라고 부릅니다. 자기가 벌어서 자기를 채우는 그릇, 혹은 타인이 자신의 그릇을 채워주기만을 바라는 마음을 뜻합니다. 카발라는 그런 방식으로 ‘부끄러움의 그릇’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받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는 사람이 더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저는 『캐비닛』 『설계자들』 『뜨거운 피』 같은 소설들을 썼습니다. 저는 그것을 역겨움 시리즈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이 소설들은 자기 자신을 경멸하고 또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역겨워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 시절 동안 자신을 경멸하고 제가 발 딛고 있는 세계에 분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 이 소설들의 주제라는 건 늘 일관된 것입니다.

“자신을 경멸하고, 또한 자신이 발 디딘 세계를 역겨워하는 존재는 어떻게 이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설계자들』의 킬러 래생은 다음 생을 기다리며 자살을 택하고, 『뜨거운 피』의 건달 희수는 이 냉혹한 세계를 견디기 위해 자신의 몸에서 뜨거운 피를 빼내고 차가운 피로 혈관을 채웁니다. 하지만 이 대답이 과연 옳은 것일까요? 이 소설 『빅아이』의 주인공은 수레라는 캐릭터입니다. 그의 할아버지가 ‘무거운 짐을 끌고 가야 하는 자’라는 뜻으로 수레라는 이름을 지었지요. 수레는 금광업으로 유명했던 친일파 구학진의 손자이며, 마귀 2호라는 별명을 가진 악독한 사채업자이고 또 영특한 밀수업자입니다. 특히 원양업에 빨대를 꽂아 선량한 선원들로부터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는 어용 투자자이기도 하지요. 수레 역시 래생처럼 세계를 역겨워하고 희수처럼 자신을 경멸합니다. 수레가 다른 주인공들과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자신과 세계에 대한 분노의 이유를 외부에서 찾지 않고 자신의 내부에서 찾고 있다는 것 정도일 겁니다. 수레는 자살을 하거나 자신의 몸을 파충류의 차가운 피로 바꾸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욕적인 삶의 방식을 견디며 이 분노와 역겨움이 대체 어디서 오는지 그 근원을 조심스레 바라보려고 합니다. 이 질문의 끝에, 이 소설의 끝에, 그리고 그가 두려움을 딛고 성큼성큼 걸어나갔던 그 바다의 끝에, 정말로 빅아이가 있다면 저는 참 행복할 것 같습니다. 


어느 영국 기자가 달라이 라마를 찾았을 때 그는 묻습니다. 

“엄청난 빈부 격차, 전쟁과 기아, 폭력과 살인으로 얼룩진 이 참혹한 세상을 보십시오. 어떻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대체 왜 이 모양인 것입니까?” 

그러자 달라이 라마가 농담처럼 환하게 웃으며 말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무지 때문입니다.”


2020년 3월

김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