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봉지를 들고 엽의 집을 나섰다. 사위가 어둑해진 골목을 걸었다. 부러 기숙사 근처까지 가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 응원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면도기를 광고하는 스크린과 색색의 네온사인들, 유행가가 흘러나오는 식당, 도시의 풍경과 시간은 나와 무관한 일처럼 느껴졌다. 봉지를 어딘가에 버리고 싶었지만 어느샌가 기숙사에 도착했다. 방문을 열었는데 현이 보이지 않아 문자를 보냈다. 현은 16강전 진출 기념으로 오늘 저녁 점호는 생략한다는 공지 사항을 전했다. 사감은 없고 기숙사 옥상에서 형들과 있으니 바로 올라오라는 말과 함께.
옥상에는 현과 형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휴대용 가스버너 위에 양철 냄비가 올려져 있었다. 빈 소주병과 컵라면 용기, 과자 봉지도 보였다. 구운 고기 냄새가 났다.
이렇게 먹으면 맛있어.
생고기에 고추장을 덕지덕지 발라 그대로 냄비에 넣고 주걱으로 휘저었다. 고기가 쪼그라들수록 냄비 바닥이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그거 뭐야?
누군가가 내 봉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상황을 파악하느라 대답이 늦어지자,
뭘 그렇게 삐대. 거기 서 있어.
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고, 현이 눈짓으로 다급하게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형은 내 얼굴 앞까지 다가와 말했다.
배에 힘을, 이렇게 줘.
무슨 말인지 이해할 새도 없이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입에서 침이 길게 늘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시.
배에 힘을 주자 형은 또 얼굴을 때렸다. 나는 봉지를 열며 이건 사과라고 말했다. 현이 벌떡 일어나 봉지를 받았고 화장실에서 함께 씻어 오겠다며 형을 말렸다. 삼층에 있는 화장실로 가는 동안 현은 입을 열지 않았다. 혀를 움직여보자 볼 안쪽이 터진 것 같았다. 화장실 안과 밖에 누가 있는지 확인한 뒤 문을 닫은 현은,
개새끼네.
나는 그가 욕하는 걸 처음 들어봤고 그것만으로도 어떤 위안이 됐다.
첫 방학을 목전에 둔 교실은 결석하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정규 수업은 오후 두시에 마치는데다 자율 학습이 없어서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빈 의자가 보였다. 선생님들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누군가는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을, 누군가는 아르바이트를 간다며 담임 선생님에게 허락을 구했다. 기숙사는 방학에도 운영됐다. 부모님은 집으로 내려오길 원했지만 나는 불쑥 검도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싸움을 잘하고 싶었다. 검도를 고른 이유는, 얼마 전 교실 뒤편에서 반장과 다른 반 학생이 싸움이 붙었는데, 반장이 상대를 코피가 날 때까지 때린 후 굴복시킨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반장은 항상 가방에 검도복을 걸고 등교했다. 한 친구는 괜한 허세가 분명할 거라고 말했지만, 그애마저도 반장에게 어느 학원에 다니냐고 물었다.
나는 이런 사고방식이 어른이 된 후 가끔 생각나곤 했다. 동경하는 누군가가 생기고, 그의 선택을 따라 하는 방식에는 어떤 순수함이 있었다. 내게는 엽이 그런 존재였지만, 엽은 축구를 좋아했기에 검도 학원을 홀로 등록하기까지 수없이 고민했다. 함께 가자고 말할까 고민하다가 결국엔 꺼내지 못했다.
학원비가 비싸서 등록을 반대할 줄 알았지만 아버지는 흔쾌히 송금해주었다. 초등학생 때 마을에 처음 생긴 태권도장에 보내지 못해 그간 마음이 쓰였었다는 사실은 엄마가 말해줘서 알았다. 도복과 죽도까지 사라며 돈을 보냈는데 난생처음 보는 큰 액수였다. 은행에서 돈을 출금해 학원까지 가는 길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관장님은 수북한 턱수염을 만지며 부모님과 통화를 시켜달라고 말했다. 오늘은 도장 뒤에서 참관만 하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사라졌다. 맨발로 바닥을 달리는 소리, 죽도가 호구를 내리치는 소리, 관원들의 기합, 규칙적인 고함이 한데 섞여, 어질어질해질 정도의 열기가 전해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심한 요의를 느꼈다.
매일 검도를 배웠다. 첫 주는 죽도를 머리 위로 들고 오리걸음으로 도장을 걷는 훈련을 받았고, 기초체력이 쌓인 뒤에는 기본기를 배웠다. 상대를 찌르고 베는 과정 속에서 팔근육이 단단해졌다. 밤마다 방에서 팔굽혀펴기를 하고 운동장을 뛰었다. 현은 내게 대회에 나갈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열심히 하느냐고 물었다. 현은 잠들기 직전까지 소니 카세트 플레이어에 이어폰을 꽂고 영어 학원에서 배운 내용을 중얼거렸다.
처음 겪는 도시의 여름은 너무 더워서 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가끔 엽과 연락을 나눴다. 엽은 아버지의 일을 돕느라 밤마다 녹초가 되어 잠든다고 했다. 아버지가 나보다 더 방학을 기다리는 것 같다고, 그래도 용돈을 많이 주는 건 좋다고 전했다.
관장님은 관원들 중에 등록 기간이 짧은 몇 명에게 가끔 청소를 맡겼다. 청소도 수련에 도움이 되니 배운다는 마음으로 바닥을 쓸고 닦으라고 말했다. 다른 관원들은 관장님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를 비웠다. 나 혼자 남아 넓은 도장을 청소할 때면 그 적막함이 좋았다. 가끔은 훈련보다 그 시간을 더 기다렸다.
여느 때처럼 운동을 마친 뒤 도장 청소를 하고 나오던 어느 날, 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도장에서 종종 보던 형들이었다.
우리 학교 1학년이지?
그들은 계단 아래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내게 오라고 손짓했다. 가까이서 보니 나와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왜 그동안 인사 안 했어.
나는 매번 그들보다 도장에 늦게 도착했기에 선배라는 걸 알 길이 없었다.
무시해?
무시하지 않았다고 말하자 죽도로 명치를 쿡 찔렀다. 몸이 구부러질 정도로 아팠지만 참았다.
이리 와. 같이 피우자.
한 번도 담배를 피운 적이 없기도 하고 배우고 싶은 생각도 없어 거절했다. 일순 모두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자리를 옮겨 학원 건물 뒤로 나를 데려갔다. 계속 권했다. 거절 한 번에 주먹 한 번. 거절 한 번에 발 한 번. 거절을 할 때마다 주먹과 발이 날아들었다. 아프지 않았다. 끝까지 담배를 받지 않았다. 오기가 생겼는지 내 팔을 붙잡아 억지로 입에 물리려고 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입을 벌리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길이라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 실랑이를 하느라 넷 모두 밭은 숨을 내뱉었다. 나는 그들이 제발 포기하기를 바랐다. 그때 계단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관장님이 다시 돌아온 줄 알고 이제 기숙사에 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키가 우리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검은 형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도장에서 배출한 전국 순위권에 드는 고등학생 선수였고, 얼마 전에도 대회에서 입상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관장님이 보면 어쩌려고.
형들은 내게서 멀찍이 떨어진 뒤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조용히 우리를 주시하던 그가 말했다.
줘봐.
누군가 담배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나 안 피우잖아. 불붙여서 달라고.
담배를 받은 그는 내게 웃는 얼굴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줄 알았으나 손목에 담배를 가져다 댔다. 살이 타는 냄새가 났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도 모르는 새에 눈물이 흘렀다. 그는 담배를 내 입술 가까이 대고 말했다.
또 거절하면 얼굴에 할 거야.
나는 담배를 입에 물었고 곧바로 토하듯이 기침했다. 그는 다른 형들의 뺨을 한 대씩 때리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손목에 동그랗게 생긴 흉터는 쉽게 아물지 않고 여름 내내 자리했다. 언젠가 엽은 피딱지가 검은 반점으로 변하는 것을 보며 꼭 무당벌레 같다고 말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그들은 학교에서 마주치면 내게 알은체를 했다. 교실로 찾아온 적도 있었다. 매점 심부름을 시키거나 옥상으로 불러 담배를 피우게 했다. 엽은 그들과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물었는데, 도장에서 만났다고 하자 중학생 시절부터 익히 들은 형들이라고 말했다. 엽은 내가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탐탁지 않아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들은 자신들과 친하게 지내면 학교생활이 편할 거라고 말했다. 나는 학교생활이 편하길 바라지 않았다. 엽과 어울리는 일만이 가장 즐거웠다. 하지만 이때는 몰랐다. 이들과의 만남이 엽과 멀어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될 거라곤.
5
준의 성화에 백화점에 다녀왔다. 누나의 가족을 만나는 자리든, 자신의 가족을 만나는 자리든 단정한 옷이 필요할 거라고 말했다. 유니클로에서 블레이저와 슬랙스를 샀다. 누나는 부담 갖지 말고 나오라 했지만 엄마는 내게 꼭 미용실에 다녀오라고 했다. 미용실 직원에게 상견례에 어울리는 스타일로 부탁했다. 거울을 봐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KTX를 타고 대전에 가는 동안 옷에 주름이 생길까봐 거의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식당 앞에서 누나가 손을 흔들었다. 누나는 축구공보다 조금 작게 부푼 배를 한 손으로 받치고 있었다.
나도 이제 왔어.
오랜만에 만난 누나의 임신한 모습이 생경하게 느껴지는 한편, 그 이전까지는 상상만 해왔던 현실감이 가시적으로 밀려들었다. 나는 누나에게 인사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왜 나와 있어.
누나가 대답하려는 찰나 누군가 다가왔다. 한 아이의 손을 붙잡고 걸어온 그는 웃는 얼굴로 악수를 청했다.
누나가 책 보여줬어요.
아이는 코끼리 인형을 손에 쥐고 나를 가만히 올려봤다. 나는 그들에게 처음 인사했다. 그는 누나의 어깨를 감싸며 건물 안으로 먼저 향했다. 앞서 걷는 그들의 뒷모습에 오래 시선이 갔다.
그간 상상했던 것만큼 어렵거나 불편한 자리는 아니었다. 음식이 순서대로 나오는 동안 서로를 소개했다. 엄마는 중간중간 뭔가를 말하려다가 삼키는 것 같았다. 상견례 전에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 갑작스럽게 결혼과 임신 소식을 전해드려서 놀라셨을 것 같다, 누나의 애인은 엄마가 어떤 마음인지 이미 아는 것처럼 사과와 고백을 번갈아 꺼냈다. 엄마의 성격을 아는 누나가 미리 귀띔한 것 같았다.
결혼과 임신, 좋은 소식을 한 번에 들으면 두 배로 좋은 게 아닐까요.
그의 아버지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엄마는 그를 잠깐 흘겨봤다. 테이블 끝에 앉은 아이는 누나가 가위로 잘라준 고기를 한 점씩 받아먹고 있었다. 투정을 하거나 보채지 않았다. 간혹 눈이 마주치면 나를 오래 바라봤다. 아이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아직 판단이 서질 않았다. 피가 섞이진 않았지만, 우린 곧 가족이 된다. 그 사실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애가 이쁘지?
누나는 말했다.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해.
나는 아이의 사정보다 누나의 사정이 더 궁금했다. 몇 년 동안 남처럼 지내다가 이런 상황이 된 사정. 엄마 입장에선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엄마가 이 자리에 참석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와 누나는 나란히 앉아 얼마 전까지 좋지 않은 사이였다는 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서로 다정하게 대했다. 엄마는 누나의 배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너 임신했을 때랑 비슷하다. 그때도 이렇게 위쪽이 둥글했어.
누나와 내가 닮지 않은 것만큼, 엄마와 누나도 닮은 부분을 찾기가 어려웠다. 엄마는 키가 작고 쌍꺼풀이 있으며 피부가 하얗다. 누나는 아버지를 더 닮았다. 말수가 적은 성격도. 엄마는 간혹 누나를 보면 속이 터진다고 했는데 그건 아버지를 향한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누나는 이번에도 끝끝내 설명하지 않을 작정인 듯했다.
식사를 마치고 주차장에서 서로를 배웅했다. 엄마는 아이를 출산한 후에 결혼식 날짜를 정해보자고 말했다. 누나는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며 엄마의 등을 떠밀었다. 택시에 타기 전, 다른 가족 사이에 선 누나를 바라봤다. 누나는 그 어떤 이질감이나 어색함 없이,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사람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나는 엄마와 함께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엄마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고 옷을 갈아입으며 조용히 울었다.
서울역에 도착해 준에게 문자를 보내자 본가에서 잘 거라는 답장이 왔다. 마침 마감할 원고가 있어 밤새 작업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준은 원고를 쓸 때 먹으라며 냉장고에 이런저런 간식을 넣어놨다. 샤워를 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준의 책상은 원목으로 된 직사각형 테이블이었는데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를 쌓아놔서 그것들부터 정리했다.
고전문학으로 알려진 소설에 대한 서평을 쓰는 일이었다. 바쁜 현대인을 위해 그 책을 읽지 않아도 읽은 것처럼 느껴지도록 만드는 것이 기획의 취지였다. 청탁서를 다시 보자 평균보다 높은 원고료가 책정되어 있었다. ‘평소 좋아하는 소설을 소개해주세요.’ 나는 후안 룰포의 『페드로 파라모』를 떠올렸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영화화도 된 작품이라 적당할 것 같았다. 막상 원고를 쓰려고 하니 시작부터 막혔다. 아버지를 찾아나선 아들이 코말라라는 마을에 도착했는데 아버지는 이미 죽고 그곳은 망자들의 마을이다, 시점과 인칭이 혼란스러우며 멕시코혁명에 대한 작가의 회의감이 반영되어 있다, 일흔 개의 조각처럼 나누어진 에피소드는 읽는 사람의 마음대로 읽을 수 있다, 이런 문장을 쓸 수 없었다. 이는 이 책을 읽은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고 내용을 압축하는 과정에서 전혀 다른 소설이 될 것만 같았다. 다른 책들도 떠올렸지만 마찬가지였다. 애당초 현대인을 위해 한 권의 책을 원고지 몇 매로 줄여서 설명한다는 것이 내게는 그 어떤 일보다 버거웠다.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할 순 있지만 소설은 줄거리만 존재하는 글쓰기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이런 점들 때문에 소설을 좋아하고 쓰고 있다, 라고 메일에 적으려다가 관뒀다. 그저 개인 일정상 마감일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아 죄송하다는 말만 적었다.
침대에 누울 즈음 준은 문자를 보내왔다. 내일 여기로 올래? 나는 알겠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