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시울의 방문(마지막)

시울이 집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시울은 항상 아침 일찍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내가 잠든 후에야 조용히 들어왔다. 내가 마주하는 건 늘 굳게 닫혀 있는 시울의 방문뿐이었다. 나는 그 앞에서 매번 깨달았다. 시울은 전처럼 달걀을 삶거나 커피를 내리지 않을 것이다. 잘 잤느냐고 물어보거나 산책은 언제 할 거냐고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예전 같은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때때로 자문했고그것이 서운한가?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절대 아니!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서운함도 공허함도 아닌 무엇이, 그렇다고 그리움이라고 표현하기에도 애매한 어떤 감정이 있었고 나는 그것을 외면하기 위해 작업에 몰두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일주일이 흘렀다. 12월 첫째 주 화요일, 시울이 우리집에서 떠나기 전날이었다. 그날 아침 시울이 처음으로 내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너무 놀라 들어오라고 대답하는 대신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시울은 예의 그 정확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오늘 시간 괜찮으면 같이 저녁 먹는 거 어때요? 음식은 제가 준비할게요.”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여섯시 반으로 잡았다. 누가 먼저 그 시간을 얘기했는지는 모르겠다. 시울은 문을 닫으며 돌아섰고(내가 먼저 닫았나?) 여느 때처럼 집을 나섰다. 이 모든 과정이 단 몇 분 안에 이루어졌고 나는 이렇게 되기까지 팔 년이란 세월이 걸렸다는 사실을 생각하느라 도통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시울은 그날만큼은 방문을 닫아놓지 않았다. 나는 시울이 묵었던 방을 들여다보았다. 이불과 베개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캐리어도 단단히 잠긴 채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냄새가 남아 있었다. 옅은 복숭아 향과 바닐라 향이 시울의 체취와 섞인 냄새. 시울의 얼굴만큼이나 그대로인 그 냄새를 맡고 있노라니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시울도 나처럼 그해 겨울을 잊지 못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 여전히 나를 향한 원망과 애정과 억울함과 미안함이 뒤얽혀 어찌할 바 모르고 있을 거라는 생각. 어쩌면 우리는 설을 앞두고 있던 20171월의 어느 날, 카레가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던 그 늦은 오후로부터 단 한 발짝도 벗어난 적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나는 여느 때처럼 다가오는 명절을 집에서 조용히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심 이번만큼은 시울도 함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물론 시울에겐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는할머니가 있고 나는 시울을 집으로 돌려보내야 할 의무 아닌 의무를 갖고 있었으나 한편으론 정말 그럴 필요가 있나, 시울만 괜찮다면 명절을 같이 보내도 되지 않을까, 같은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카레는 늘 껌딱지처럼 시울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시울이 외출하고 돌아와 옷을 벗어놓으면 그 안에 쏙 들어가 자리를 잡았고 밥을 먹을 때도 시울이 등을 쓰다듬어주지 않으면 깨작거리다 말았다. 잠을 잘 때도 꼭 시울과 나 사이에 끼어서 잠들었다. 애초에 그것이 문제였을까? 같은 공간에서 잠든 것이? 그렇지만 한 공간에 식탁과 침대와 작은 이 인용 소파가 그득그득 들어차 있는 작은 집에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리는 매일 한 이불을 덮고 잠들었으며 나는 시울과 카레의 온기 속에서 눈을 떴다. , 그 온기가 문제였던 것 같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가족이 되어가고 있다는 착각을 해버리고 말았으니. 그 착각 때문에 기어이 시울에게 묻고 말았으니. 명절은 어떻게 할 거냐고. 집에 갈 거냐고. 혹시 다른 계획이 없으면…… 시울은 늘 그러하듯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때쯤 다음 집으로 넘어가려고 해요.”

나는 시울의 대답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문장의 모든 단어가 이상했다. 그때쯤? 다음 집으로? 넘어가?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러나 심장은 벌써 전과 다른 리듬으로 박동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감이라는 건 참으로 오묘하다. 무언가를 완벽하게 이해하기도 전에 그것이 가져올 여파부터 느끼게 된다는 점에서. 시울은 차분하게 부연했다.

얼마 전에 집회에서 만난 분이 있는데 그분이 초대를 해주셨어요. 거기서 6월까지 머무르려고요. 곧 개학이라 학교도 거기서 통학하려고 하고요.”

초대? 그럼 할머니는? 너 집에 안 가?”

그 집엔 안 들어간 지 꽤 됐어요.”

뭐라고? 대체 그게 무슨, 아니, 언제부터? 너 혹시 가출했니?”

, 언니. 솔직하게 말할게요. 그간 너무 감사했지만 이러시는 건 좀 불편해요.”

……뭐가?”

자꾸 저에 대해서 묻는 거요. 제가 당연히 여기에 계속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요. 언제부턴가 언니가 자꾸 저랑 생활 전반을 공유하려고 하는 게…… 그게 좀 불편했어요.”

, 생활 전반을, ? 아니, 너 이미 여기서 두 달 가까이 살고 있잖아?”

알아요. 언니가 엄청 큰 도움을 주신 거. 언니 덕분에 겨울도 따뜻하게 보냈고. 하지만 그렇다고 언니한테 제 모든 걸 다 말할 수는 없어요. 언니 곁을 계속 지킬 수도 없고요.”

내가 언제 계속 곁을 지켜달래? 아니, 그런 상황이었으면 네가 먼저 설명했어야 되는 거 아니야?”

언니만 곤란해지잖아요. 요즘은 가출한 미성년자한테 숙식만 제공해도 불법이에요.”

뭐라고?”

……솔직히 언니가 다 눈치챘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일부러 아무것도 안 묻고 챙겨주는 줄 알았어요.”

아무것도 안 물은 건 니가 자기 얘기 하는 거 싫어하니까 그런 거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말 감사했어요. 진심이에요.”

시울은 그 두 마디로 내 입을 막아버렸다. 정말 감사했어요. 진심이에요. 그러니까 더이상 엉겨붙지 말아주실래요? 아니다. 맨 뒤 문장은 말한 적 없다. 시울은 그런 식으로 말하는 애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애의 차가운 표정이, 딱딱한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심장이 팔딱거리고 뺨이 달아올랐다. 명치끝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끓어올랐으나 동시에 머리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건 모멸감이었다. 상처 입은 몸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 상처는 내가 나 자신에게 입힌 것이었다. 실제로 시울은 그런 말더이상 엉겨붙지 말라는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 말은 상대를 원망하고 관계의 우위에 서기 위해 만들어낸 나의 졸렬한 상상일 뿐이었으니까. 모든 잘못은 내게 있었다. 멋대로 지어낸 상상에 상처받을 정도로 나약한 나 자신에게. 그럼에도 나는 이 감정을, 이 상황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가장 나약한 사람들이 하는 가장 나약한 선택을 했다. 시울을, 나보다 열두 살이나 어린 가출한 여자애를 몰아세운 것이었다. 그 사람이 널 초대한 건 확실해? 그분한테 사실대로 말은 했니? 안 했겠지. 너 그거 사기야. 아주 질 나쁜 사기. 그분도 나중에 알면 너한테 속았다고 생각할걸. 내 독기 서린 공격에 시울의 검은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물론 그 일렁임은 이전의 일렁임과는 달랐다. 시울이 말했다.

그분은 그런 사람 아니에요.”

그 순간, 우습게도 시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언니는 그런 사람이에요. 그래, 나는 그런 사람이었지. 그분은 그런 사람이 아니고. 그런데 그런이 대체 뭐지? 그때의 그런과 지금의 그런은 다르지 않나? 시울이 내게 말했던 그런감사하지만 불편한 뭔가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하지 않았나? 갑자기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웃겼다. 너무 웃겨서 하하하, 웃음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그 소리에 자고 있던 카레가 달려나왔고 시울은 자연스레 카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나는 너무 옹졸해서 우스꽝스러운 말, 죽을 때까지 실언의 전당에 남을 말을 내뱉었다.

만지지 마. 내 고양이야.”

시울은 조용히 두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시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너무나 정확한 조소의 무게로, 너무나 또렷한 연민의 감정을 담아, 너무나 명확하게 나의 영혼을 조준하는 그 미소를. 시울은 나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외로워서 나약해지고 나약한 만큼 치졸해진 한 인간을 가여워하면서, 동시에 비웃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더이상 시울과 한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내 뒤통수에 시울의 목소리오늘 나갈게요가 떨어졌지만 나는 대답 없이 문을 박차고 나갔다.

생각해보면, 그날 한 선택은 죄다 최악이었다. 나는 문을 나서자마자 정신없이 차에 올랐는데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강변북로였다. 다행히 러시아워의 강변북로는 주차장처럼 꽉 막혀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차 안에 우두커니 앉아 해가 지는 한강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일렁이는 강물을 보며 그 위로 물수제비를 뜨듯 질문들을 던졌다. 솔직히 그렇게 격분할 이유가 있었는가. 시울의 상황을 알았다 한들 다른 방법이 있었겠는가. 나는 그저 시울이 다른 곳으로 간다는 사실에 화가 났던 게 아닌가. 어찌 보면 내 분노는 혼자 잘해주고 혼자 기대했다가 혼자 실망한 과대망상자의 난동이자 행패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우리 사이에 오간 것 중 진정한 선의, 대가 없는 선물은 오로지 시울이 처음에 보여준 친절과 희생뿐이었나. 결국 나는, 나는 정말로 그런 사람인가.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는 핸들을 세게 내리쳤다. 느닷없는 클랙슨에 앞차가 움찔하며 앞으로 움직였다.

강변북로는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액셀을 밟으며 생각했다. 시울이 떠나기 전에 얼른 돌아가자. 사과하자. 여전히 어떤 부분은 화가 났지만 나도 잘한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 이대로, 이런 식으로 시울을 보내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그러나 집으로 가던 길에 또 한번 발목이 잡혔다. 집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받아 기다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뒤차가 나를 들이받은 것이었다. 엄청난 파열음이 울려퍼지면서 몸이 앞으로 튕겨나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잠깐 사이에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 사이드미러로 뒤차의 운전석 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나도 천천히 몸을 움직여 겨우 차문을 열었다. 그러나 땅에 발을 딛는 순간 주저앉고 말았다. 양쪽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접촉사고 때문인지 시울에게 사과를 건네기엔 이미 늦어버렸다는 자각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헐레벌떡 달려온 뒤차의 운전자그는 정말 멀쩡했다가 나를 향해 소리쳤다.

괜찮으세요? 아이고, 어떡해. 제가 한눈을 팔아서……

그가 계속 뭐라고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시울이 준비한 요리는 샤브샤브였다. 각종 야채와 소고기가 식탁 위에 차려져 있었고 어디서 찾았는지 휴대용 인덕션 위에서는 육수가 끓고 있었다. 맥주와 맥주잔도 놓여 있었다. 이상하다, 시울은 술을 못하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다가 뒤늦게, 아 맞다, 그땐 시울이 어렸었지, 하고 깨달았다. 참 희한한 일이다. 어떤 사람은 존재만으로 부재의 시간을 단축시켜버린다. 내게는 시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시울을 불러보았다.

시울아.”

시울은 소스를 준비하느라 나를 쳐다보지 않고 네, 하고 대답했다. 나는 오히려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카레는 신장이 안 좋았어. 약도 먹이고 수액도 놓고 병원도 자주 갔는데 갑자기 너무 안 좋아졌어.”

시울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내 앞에 소스 그릇을 놓아줄 때에서야 조용히 말했다.

언니 잘못 아니에요.”

육수 냄비 위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을 보자 카레가 가습기 연기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가끔 밤에 일어나보면 카레는 가습기 앞에 앉아 피어오르는 연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가습기 불빛 덕에 어둠과 카레를 구분할 수 있었다. 불빛이 없을 땐 한밤중에 카레를 밟은 적도 많았다. 그때마다 카레는 냐악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그것이 너무 귀여워서 가끔은 일부러 슬쩍슬쩍 밟아보기도 했다. 그러면 카레는 그 귀여운 얼굴로 나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런 것들을 시울이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내가 카레를 떠올릴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죄책감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 누군가와 작별한 후에 남은 죄책감의 크기는 그리움에 비하면 티끌만도 못하고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말했다.

그래도 카레 덕분에 지난 팔 년 동안 내 삶이 움직였어.”

시울이 물었다.

계속 글썼어요?”

. 계속 그런 거 썼어.”

시울이 웃었다.

계속 드라이브도 했고요?”

사고가 난 이후, 나는 차를 처분했다. 딱히 차를 몰 일도 없었거니와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뒤에서 또 누가 내 차를 들이받을까봐 잔뜩 위축되었던 까닭이었다. 아니다, 사실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나는 시울을 가장 먼저 생각했다. 내가 놓쳐버린 어떤 시간을 떠올렸다. 그것을 너무 곰곰이 곱씹느라 시동을 거는 걸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말을 전부 다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말 없이 시울의 잔에 맥주를 따랐다. 시울도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이미 내게 선물을 주면서 모든 걸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양껏 먹고 마시며 예전처럼 대화를 나눴다. 나는 카레의 이야기를, 시울은 세상 이야기를 하면서. 시울은 여전히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시울이 지금도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니고 있다는 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에 끈질기게 책임을 묻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들과 함께 소리치며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걸. 시울을 초대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고 시울은 어디에나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시울은 그들과 함께 생활할 테지만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진 않을 것이다. 시울의 삶은 계속 변화할 것이다. 나는 이제 시울의 눈빛이 세상의 온갖 광원을 흡수하고 반사하고 굴절하는 빛이라는 걸 안다. 그 광원 하나하나가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개개인의 삶이라는 것도. 시울의 눈을 닮고자 했던 것은 어쩌면 나 아닌 다른 삶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한껏 취기가 올랐을 때, 시울은 처음으로 자신에 대해 얘기했다.

언니, 내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가장자리라는 뜻이에요. 가끔은, 그래서 내가 이렇게 가장자리처럼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해요.”

시울은 말을 뱉어놓고 태연히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그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스르르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모든 형태는 가장자리로 인해 정해지잖아. 이 세상의 모양도 결국 가장자리가 빚어낸 걸지도 몰라. 우리는 전부 가장자리에 빚지고 있어.”

시울은 살짝 놀란 듯 나를 쳐다보다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찰나에, 나는 분명히 보았다. 시울의 얼굴에 작게 번지던 미소를.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정확하지 않은 미소를.

우리는 한참을 떠들다가 밤 열시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마음이 편안하고 만족스러웠다. 나는 열한시가 되기 전에 누웠다. 그러나 잠에 막 빠져들려던 찰나, 선명한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뭐지? 나는 게슴츠레 눈을 떴다. 방문 앞엔 외투까지 다 갖춰 입은 시울이 서 있었다. 나는 졸음이 묻은 목소리로 물었다.

? 무슨 일이야?”

가만 보면, 세상사는 참으로 기가 막히다. 모든 게 끝임없이 변화하는 것 같으면서도 끝끝내 같은 어리석음에 빠지고 만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어떤 과거는 기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나고야 만다는 점에서. 시울은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

언니, 빨리 일어나요. 우리 지금 당장 나가야 돼요. 나가서 막아야 돼요.”

그 소리에 몸이 절로 일으켜졌다. 시울이 울다니. 모르긴 몰라도 이 세상에 무슨 큰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