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울이 다시 우리집에 찾아온 것은 11월 마지막 주 수요일로, 그애가 처음 우리집에 온 지 정확히 팔 년 만이었다. 물론 팔 년 전의 우리집과 지금의 우리집은 다르지만, 어찌됐든 시울은 또 한번 내가 사는 공간에 들어왔다. 그간 나는 시울을 여러 번 생각했으나 한 번도 연락한 적은 없었다. 중간에 핸드폰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시울의 번호가 날아간 터였다. 아니, 어쩌면 핸드폰을 잃어버린 후에도 어딘가에 시울의 번호가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연락처뿐 아니라 사진과 메모까지 죄다 컴퓨터에 백업해두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시울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을 때, 핸드폰 화면엔 열한 자리의 모르는 번호가 떴고 그래서 나는 그것이 내가 며칠째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심사 결과 연락이겠거니 넘겨짚고 말았다. 그런데.
“언니, 나예요.”
핸드폰 건너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제일 먼저 한 생각은 ‘설마’였다. 설마 그럴 리가. 설마 이 목소리가 내가 아는 그 목소리일 리가.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단번에 내 의구심을 꺼트렸다.
“언니, 나 시울이에요.”
나는 너무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엔 ‘설마’ 대신 ‘왜?’가 들어찼다. 왜? 왜 이제야? 왜 하필 지금? 그때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혹시 내가 기다리고 있는 연락을 전달하게 된 사람이 시울이 아닐까…… 그간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는 사이 시울이 그 일의 담당자가 된 것은 아닐까…… 그건 내가 최근 들어 한 생각 중 가장 어리석은 것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꽤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오랜만이네.”
시울은 아직도 거기에 사느냐고 물었다.
“거기 되게 좋았었는데.”
그럴 리가. 그 집은 너무 오래되어 일주일에 두 번씩 단수가 됐다. 단열이 허술해서 웃풍도 셋고 추위가 심한 날엔 카레를 안고 자도 코끝과 발끝이 시렸다. 그걸 벌써 다 잊은 거냐고 말하려다 말았다. 지금 와서 그런 것을 따질 이유는 없었다. 나는 그저 이사를 했다고 말했다. 이젠 거기에 안 산다고. 그런데도 시울은 계속 예전 집 얘기를 했다. 그곳에서의 겨울, 새벽에 창문 너머로 보이던 주먹만한 눈송이와 가로등 불빛, 비닐봉지에 넣은 뜨거운 물, 회전할 때마다 삐걱거리던 전기난로…… 그걸로도 모자라 시울은 우리가 먹었던 음식을 하나하나 읊기 시작했다.
“기억나요? 크리스마스 때 먹었던 라볶이. 언니가 양배추 대신 배추 넣어서 엄청 싱겁고 질척했잖아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오히려 시울이 그걸 기억하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어어, 그랬었지.”
내가 대충 얼버무리자 시울이 웃었다.
“에이, 벌써 다 잊어버린 것 같은데.”
그 말에 벌컥 짜증이 솟았다. 지금 뭐하자는 거지. 나는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웬일이야?”
이번엔 시울 쪽에서 침묵했다. 좀 너무했나? 어쩔 수 없었다. 시울이 내가 기다리던 소식을 전해줄 사람이 아니라는게 확실해진 마당에 이 통화를 계속 이어가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 게다가 이렇게 시울에게 붙잡혀 있는 사이 벌써 몇 통의 전화가 걸려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울이 한참 만에 입을 뗐다.
“저 지금 서울이거든요. 혹시 언니네 가도 돼요?”
“우리집? 지금?”
“네. 제가 잘 곳이 없어서요.”
어처구니가 없었다. 팔 년 만에 연락해서 갑자기 우리집에 오겠다니. 잘 곳이 없다니. 여전하구나, 너는. 그러나 그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올해 서른여덟, 그러니까 그런 말을 조금 더 우아하게 할 줄 알아야 하는 나이였고, 할 줄 모르더라도 지금만큼은 그렇게 하고 싶었다. 선뜻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던 건 그 때문이었다. 그때, 시울이 한마디 덧붙였다.
“카레도 보고 싶고요.”
이번엔 완전히 말문이 막혔다. 가슴에서 갑자기 무언가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카레는 갔어. 작년 봄에.”
‘갔어’라고 말하는데 바보같이 목이 메었다. 그간 썼던 수많은 표현(죽었어, 떠났어, 고양이 별로 갔어, 무지개 다리를 건넜어) 중 그나마 덤덤하게 뱉을 수 있는 말이 ‘갔다’였지만 끝내 울컥하고 마는 것은 다른 표현들을 사용했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슬픔의 강도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줄어든 건 인간관계뿐. 지난 일 년 반 동안, ‘아직도’ 힘드냐는 말을 한 친구와는 모두 결별했다. 그 결과 거의 외톨이가 되어버렸지만 후회는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시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시울이 헛소리를 하면 바로 전화를 끊어버릴 요량으로 귀를 쫑긋 세우고 기다렸다. 그러나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고, 뭐지, 끊었나? 싶었을 때 희미하게 콧물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딸꾹질을 하는 듯한 이상한 숨소리도. 나는 또 한번 당황했다.
“너 우니?”
대답 대신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밭은 숨소리와 딸꾹질 소리. 시울이 물었다.
“언제 갔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허겁지겁 눈물을 닦아냈지만 울음은 점점 더 맹렬해졌다. 결국 나는 울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핸드폰을 공중에 높이 쳐든 채로 콧물을 삼켜야만 했다. 머리 위에선 그 언젠가처럼 시울의 목소리가 계속 떨어졌다. 언제 갔어요? 언니, 괜찮아요? 언니, 언니.
팔 년 전인 2016년 11월 마지막 주 토요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나는 쭈그려앉아 울고 있었다.
아마 광화문역 4번 출구 앞이었을 것이다. 나는 몹시 지쳐 있었다. 일주일이나 빨리 생리가 터진데다 날도 추워 온몸이 덜덜 떨렸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함께 집회에 참석하기로 한 친구는 연락도 되지 않았다. 꼼짝없이 약속 장소에 발이 묶인 나는 핫팩을 옷 속에 구겨 넣으며 출구 안쪽 계단참에 쪼그려앉아 있었다. 그때, 핸드폰을 보며 올라오던 사람 중 하나가 그대로 내 몸을 들이받았다. 마치 당목이 범종을 치는 듯한 그 어마어마한 세기에 나는 계단참 바깥으로 튕겨져나갔다. 소리를 지를 새도 없었다. 어깨와 팔이 먼저 땅에 부딪혔고 등이 보도블록을 긁으며 미끄러졌다. 주변에서 비명소리가 터졌다. 어머, 어머! 어떡해! 나를 친 사람이 깜짝 놀라 달려왔다.
“죄송해요, 못 봤어요. 괜찮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저었다. 정말 괜찮아서가 아니라 갑자기 몰려든 이목에 질겁한 탓이었다. 내가 계속 손사래를 치자 그는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떠났다. 주변 사람들도 나를 흘긋거리다가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지나가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허리를 제대로 펼 수 없었다. 다리가 쩌릿했고 등의 통증이 아랫배까지 번졌다. 그것이 타박상 탓인지 생리 탓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나는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발끝에도 감각이 없었다. 추워서일까 넘어져서일까. 나는 끝없이 흘러내리는 콧물을 훌쩍거리며 무릎 위로 얼굴을 묻었다. 그때 누군가 나를 건드렸다. 나는 몸을 흠칫 떨었다. 아까처럼 누가 나를 들이받을까봐 지레 겁먹은 거였다. 그러나 정수리 위에 떨어진 건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괜찮으세요? 어디 안 좋으세요?”
고개를 들자,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여자애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횡설수설했다. 생리통이 있는데, 아까 넘어져가지고,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 같은데, 아무래도 좀 추워서…… 그애는 심각한 표정으로 내 얘길 듣더니 배낭을 뒤져 초록색 알약을 꺼냈다.
“이거 진통제인데 드실래요?”
나는 반가운 마음에 몸을 움직여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다시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수천 개의 바늘이 허리를 반으로 가르는 것 같았다. 대번에 다리가 풀리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당장에 느껴지는 통증보다 놀란 마음이 더 컸다. 그때, 그애가 옆에 쪼그려앉더니 덜덜 떨리는 내 입술 사이로 알약을 밀어넣었다. 그리고 물병을 내밀며 천사처럼 속삭였다.
“드세요. 집에 데려다줄게요.”
어떻게 집에 돌아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떠오르는 거라곤 택시 대신 지하철을 선택했던 것─진통제를 먹고 반짝 괜찮아진 바람에 오판한 결과였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집까지 걷는 동안 거의 그애에게 기대어서 걸었던 것, 그리고 그애의 목덜미에 맺힌 땀방울을 보면서 나를 버리고 갈까봐 걱정했던 것이 전부다. 다행히 그애는 끝까지 나를 버리지 않았다. 빌라 앞에서 딱 한 번 고비가 왔지만 말이다.
“사층이라고요?”
그애가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부러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서도 충분해요. 데려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덕분에 살았어요.”
“엘리베이터는 없어요?”
“없어요. 근데 괜찮아요. 올라갈 수 있어요. 괜찮으시면 연락처 하나 주시겠어요? 제가 꼭 사례할게요. 그리고 죄송한데,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시울이요. 정시울. 사례는 됐고요.”
그애는 빌라를 한번 더 올려다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며 배낭을 앞으로 돌려 멨다. 그리고 내 쪽으로 등을 돌린 후 몸을 낮추었다.
“자, 업혀요!”
언젠가 시울이 그때 얘기를 먼저 꺼낸 적이 있었다.
“여기 만져봐요, 여기. 중간에 톡 튀어나온 뼈 보여요?”
시울은 내 손을 자신의 허리에 갖다대며 어리광을 부렸다. 그때 사실 엄청 힘들었다고. 나를 업고 나서 무려 일주일 동안 허리가 아팠다고. 나는 괜히 시울의 뼈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그래? 그땐 멀쩡해 보였는데? 잘못 기억하는 거 아냐?”
억울해진 시울은, 아 진짜 아팠다고요! 하면서 발을 굴렀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카레가 어디선가 튀어나왔고 나는 깔깔거리며 카레를 안았다. 그렇게 셋이 함께 누워 있으면 그 날은 아무리 웃풍이 심해도 전혀 춥지 않았다…… 뭐, 전부 옛날 일이었다. 팔 년이나 지난 일. 거의 없었던 거나 마찬가지인 일. 물론 가끔씩 그때가 불쑥불쑥 떠오르긴 했다. 그러나 나는 의식적으로 그때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아무리 좋은 추억이 많다고 해도 결국 가장 생생하게 남는 건 마지막 순간에 대한 기억뿐이니까. 시울과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려봤자 괴롭기만 할 뿐이라는 걸 지긋지긋할 정도로 잘 알고 있으니까.
나를 업고 사층까지 올라온 그애는 우리집에 몇 번이나 와본 사람처럼 거실 한쪽에 자신의 가방과 외투를 아무렇게나 부렸다. 그리고 잽싸게 물을 끓여 비닐봉지에 넣더니 침대에 누우라고 했다.
“네?”
내가 당황하자 그애는 뭐하냐는 표정으로 재차 말했다.
“엎드려 누우세요.”
나는 얼결에 그애가 시키는 대로 엎드려 누웠고 그애는 내 허리 위에 그 뜨거운 물 봉지를 올려놓았다. 따뜻한 온기가 순식간에 온몸 구석구석 퍼졌다. 그애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좋죠?”
좋았다. 그냥 좋은 것이 아니라 너무 좋았고 고마웠고 그런데 또 미안하고 염치가 없었다. 그래서 괜히 말이 많아졌다. 시울씨는 어디에 사냐, 집에 가야 하는데 나 때문에 괜히 발목 잡힌 거 아니냐, 아니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 때문에 오늘 행진도 못했네, 지금이라도 얼른 가보는 게 어떻겠냐…… 시울은 뜨거운 봉지를 이리저리 굴리며 괜찮다고 했다. 어차피 오늘 집회가 끝나면 근처 찜질방에 묵을 생각이었고 행진은 언제든 또 참여할 수 있다고. 나는 얼른 말했다.
“그럼 오늘은 우리집에서 묵어요.”
시울이 살짝 놀란 듯 머뭇거렸다.
“아, 정말요? 근처 아무데나 가려고 했는데.”
“근처 아무데나 어디요? 위험해요. 시울씨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집에서 부모님이 걱정하시겠다.”
내 말에 시울이 잠시 멈칫하더니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부모님은 없고 할머니만 있어요. 근데 걱정은 안 하실 거예요.”
나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말이 실언이 될지 알 수 없다면 입을 다무는 편이 나았다. 그때 시울이 물었다.
“언니는 몇 살이에요?”
“저 서른이요.”
“서른? 오, 토끼띠?”
나는 너무 놀라 큰 소리로 물었다.
“시울씨, 혹시 토끼띠예요?”
시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이 여자애의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주근깨가, 통통한 볼살이 다시 보였다. 나는 더듬거렸다.
“아니, 그러면 저, 뭐지, 내일 학교 가야 되는 거 아니에요?”
“내일 일요일이잖아요.”
시울은 말을 끝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이 너무나 열여덟의 웃음 같아서, 나는 또 한번 할말을 잃고 말았다.
다음날, 시울은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그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매일 전화를 걸어와 내 몸 상태가 어떤지 물었는데, 나는 그게 너무 고마워서 언제든 묵을 곳이 필요하면 우리집으로 오라고 말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시울은 정말로 집에 찾아왔다. 나는 시울을 반겼다. 나를 살려준 은인을 반기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우리는 저녁을 배불리 먹고 침대 위에서 이불을 두른 채 또 야식을 먹으며 밤새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시울은 세상일에 관심이 많았다. 그해 벌어진 강남역 살인사건과 구의역 참사, 전담 수사팀이 꾸려진 지 얼마 안 된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열을 올리는 건 물론, 내가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회문제, 이를테면 성매매 위험에 노출된 가출 소녀들과 그들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접근하는 헬퍼의 만행, 매해 급증하는 유기 동물 같은 문제에도 핏대를 세웠다. 그러나 그렇게 온갖 얘기를 쏟아놓으면서도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딱히 숨긴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뭐라도 물어볼라치면 바로 눈빛이 죽는 게, 본인에 대해서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시울이 신기했다. 십대 시절의 나는 오로지 나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었고 사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취미라곤 만화책과 인터넷 소설을 읽는 게 전부였는데,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아예 직접 인터넷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주로 쓰는 건 어둡고 질척한 사랑 이야기였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동안 온갖 추한 감정들─갈망, 집착, 좌절, 원망, 분노, 의심,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인물들의 이야기. 나는 내 소설 속 인물들의 다면성과 복잡성을 사랑했고 그 인물들이 엮어내는 아름다운 비극을 사랑했다. 다른 무엇보다 내가 그것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랑했다. 그래, 내가 가장 사랑한 것은 그것이었다. 어떤 인물이든 창조할 수 있다는 전능함. 인물의 삶과 세계를 내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는 권능감. 물론 지금은 그 오만한 착각에서 벗어났지만 나는 여전히 매일 무언가를 썼다. 내가 창조한 인물들을 계속 사랑할 수 있길 바라면서. 덤으로, 이 인물들의 이야기가 심사에 통과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시울은 내 작업에 흥미를 보였다.
“저도 볼 수 있어요?”
나는 흔쾌히 시울에게 내 웹소설 링크를 문자로 보냈다. 얼마 전에 연재가 끝난 작품이었다. 내 눈앞에서 바로 읽기 시작하는 시울을 지켜보자니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시울은 읽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한마디 던지긴 했다.
“아, 언니는 이런 걸 쓰는구나.”
그게 끝이었다. 시울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화제를 꺼냈다. 내 웹소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얘기를. 그러나 나는 조금 전 시울이 한 말에 붙들려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런 걸 쓰는구나?
그게 대체 무슨 뜻이지? ‘이런 거’가 뭘 말하는 거지? 가만 있어보자, 내가 뭘 썼더라? 결국 나는 시울의 말을 끊고 말았다.
“저기, 미안한데, 아까 그거 무슨 뜻이야? 이런 걸 쓴다는 게……”
시울은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 잠시 눈을 굴리더니 뒤늦게 아, 그거,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사랑 이야기요. 연애 얘기라고 해야 하나?”
“어, 그게 왜? 아, 좀 시시한가? 하긴, 이 시국에 그런 거는 아무래도 좀……”
나는 버벅거렸다. 내 글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 앞에선 늘 그랬다. 아, 그게 좀 그런가? 하긴, 뭐. 나도 그렇게 생각을 하긴 했는데…… 그러면 상대방은 마음이 약해져서, 그런 게 아니라고, 어쩌면 자기가 잘못 읽은 것일 수도 있다고 서둘러 나를 달랬고 나는 그런 위로 때문에 완전히 실패한 기분이 들곤 했다. 시울은 달랐다. 시울은 위로 따윈 하지 않았다.
“그렇다기보다 제가 그쪽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사실 현실에서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사람이 죽고, 다치고, 그걸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저는 좀 거북한 것 같아요.”
거북. 그 단어가 죽창처럼 가슴에 꽂혔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죽고 사는 문제가 눈앞에 있는데 사랑 타령을 하는 게 그럴 수도. 하지만 사람들이 웹소설에서까지 현실을 보고 싶어할까. 웹소설은 현실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가려고 읽는 거 아닌가. 물론 현실의 사건을 다루는 웹소설도 적지 않지만 내가 어쭙잖게 그런 걸 썼다간 심사에서 다 떨어지고 말걸. 하고 싶은 말, 아니, 꼭 해야 할 것 같은 말이 입 안에 흥건히 고였다. 그렇지만, 언제나 말이 길어지는 쪽이 더 비참해지는 법이다. 나는 조용히 대꾸했다.
“나는 그냥 내가 쓸 수 있는 걸 쓰는 거야.”
그러자 갑자기 시울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아, 그런 말 하지 마요. 언니가 쓸 수 있는 건 무한해요.”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내 손을 꽉 쥐고 있는 시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뭐, 방금까지는 거북하다더니…… 시울의 손은 몹시 뜨겁고 축축했다. 마치 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비닐봉지처럼. 그 열기가 팔을 타고 올라와 기어이 가슴에 도달했다. 언니가 쓸 수 있는 건 무한해요. 시울의 말이 머릿속에서 반복되며 가슴 안쪽이 뜨거워졌다. 엔진이 작동하듯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가슴에 박혔던 죽창이 스르르 녹아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내 조금 부끄럽고 허탈해졌다. 이렇게 쉽게 상처받고 이렇게 쉽게 들뜨다니. 내가 이렇게나 쉬운 사람이라니. 나는 슬몃 손을 빼내며 시울의 시선을 피했다. 내가 그러든 말든 시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쏟아놓았다. 여기저기에서 만난 무작위의 인연들. 그들을 통해 듣게 된─내게는 영 시답잖게 들리는─사연들. 그러나 그 시답잖음 덕분에 지속될 수 있는 듯한 일상과 그러한 일상이 곱다시 쌓인 끝에 비로소 완성되는 다양한 이야기들. 시울은 이 모든 것을 ‘삶’이라고 통칭할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지 않냐고 말하며 눈을 빛냈다. 그러나 정작 내가 감탄한 건 불특정 다수의 사연이 아니라 번쩍번쩍 빛나는 시울의 눈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바로 저거다. 저런 눈빛만 있으면 정말로 쓸 수 있는 건 무한해질지도 모른다. 나는 홀린 듯이 시울의 눈을 쳐다보았다. 시울의 눈빛을 빼앗기라도 할 것처럼, 달이 태양빛을 받아 빛나듯 나 역시 시울의 빛을 받아 빛날 수 있을 것처럼, 시울에게서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