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크누트, 공주(마지막)

가영이 곰사당에 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세 사람은 곧 다시 차에 올랐다. 곰사당은 솔밭길 한가운데 자리잡은 향토문화유적이었다. 세 사람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진한 솔향기를 맡으며 곰사당으로 향했다. 황톳길이 좋다고 소문이 난 건지 몇몇 사람들이 신발과 양말을 벗은 채 맨발 걷기를 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내려놓기에 좋은 장소였다. 동섭도 복잡한 마음을 비우고 편안한 기분을 느끼려 애쓰며 가영의 뒤를 따랐다.

―한 번쯤 이런 곳에 같이 오고 싶었어.

가영은 때때로 멈춰 서서 눈을 감고 깊게 호흡을 마시고 내쉬었다. 가져갈 건 챙기고 버릴 것은 내려놓는 깨끗하고 알찬 숨이었다. 동섭은 길 곳곳에 떨어진 솔방울을 눈에 담았다. 시간이 더 있다면 모양이 좋은 솔방울을 골라 줍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때보다 눈앞이 선명하게 보였다. 세 사람은 계속해서 걸었다.

곧 곰사당이 있는 작은 문 앞에 다다랐다. 다섯 평 남짓인 사당에는 곰의 석상이 있었고 마당엔 곰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가영은 곰 설화를 읽고 공주에 오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크누트처럼 버림받은 곰이 공주에도 있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너무 믿었어.

가영이 말했다.

설화 속 암곰은 어느 나그네와 사랑에 빠졌고 그와 동굴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암곰은 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동굴 입구를 늘 바위로 막아두었는데 그들 사이에 아기가 둘 생기자  나그네가 도망가지 못할 거라 생각해 동굴 문을 열어둔 채 외출을 했다. 나그네는 그때를 틈타 탈출했고 뒤늦게 암곰과 새끼들이 쫓아왔지만 소용이 없었다. 떠나는 나그네의 모습을 본 암곰과 새끼들은 상심한 나머지 모조리 금강에 빠져 죽어버렸다. 곰사당은 그때 죽은 곰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가영은 사당 안으로 들어가 곰 석상을 향해 참배를 하고 향을 피웠다. 별이가 동섭의 손을 잡았다. 아이의 작은 손에서 전해진 온기가 동섭의 몸 전체에 퍼져가는 게 느껴졌다. 동섭은 오랜만에 느낀 소중한 감정을 온전히 느끼려고 미동 없이 한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가영이 피운 향냄새가 은은하게 올라왔다. 가영은 곰 석상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참배를 마친 가영이 별이를 곰 석상에게 인사시키려고 했지만 별이는 동섭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더 매달렸다. 별이가 움직이지 않자 가영이 조금 거칠게 손을 잡아끌었고 결국 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가영이 곰 석상을 가리키며 달랬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당 안에 있는 곰은 평소 별이가 좋아하던 곰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잘 하잖아, 얼른.

가영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보다못한 동섭이 가영을 말렸다.

―그냥 가자. 인사시켜서 뭐해.

동섭이 부드럽게 가영을 타일렀다. 가영은 정말 화가 난 듯 동섭에게 소리쳤다.

―버림받았잖아!

가영이 누구를 위로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동섭도 화가 났다.

―누가 누굴 버려?

동섭이 소리쳤다. 가영이 사당에서 나가려는 듯 별이를 안아 들었다. 동섭이 막아섰고 잠시 두 사람 간에 날카로운 눈빛이 오갔다. 독일에 있을 때 두 사람은 소리 내 싸우지 않았다. 동섭은 가영이 왜 갑자기 이런 상황을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별이가 그만하라는 듯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갑자기 비가 내렸다. 가는 빗줄기가 바람에 실려 떨어지는 여우비였다.

뾰족한 솔잎 사이로 촉촉이 여름비가 떨어졌다. 어쩐지 다른 시공간에 온 느낌이었다. 동섭은 흩뿌리는 빗방울을 가만히 바라봤다. 가영도 무리해서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오랜만에 세 사람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버림받지 않았어.

바람과 함께 퍼져나가는 빗소리를 뚫고 동섭이 말했다. 크누트와 설화 속 암곰 모두 사랑하는 이와 함께한 시간이 분명 있었다. 그 시간은 아무도 버림받는 존재로 만들지 못한다. 동섭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섭이 남긴 말만 허공에 남아 빗방울을 머금은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말이 땅 밑으로 가라앉고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두 사람은 앞의 풍경만을 바라보았다. 비는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동섭이 발걸음을 옮겨 사당 입구에 자리 잡은 가영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별이는 잠에 들어 가영의 가슴 깊이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별이 응급실 갔을 때 말이야.

비 그친 숲속을 바라보던 가영이 입을 열었다. 잠든 별이는 더운지 두 볼이 발그스름해져 있었다. 가영이 땀에 젖은 별이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네 편을 못 들어줬더라.

가영이 이어 말했다. 동섭은 턱에 손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 별이는 고열에 시달리다 경기를 일으켰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이 났을 거라는 얘기도 들었다.

동섭이 혼자 별이를 보고 있을 때였다. 응급 전화번호를 눌러 최대한 상세하게 아이 상태를 설명했지만 어쩐 일인지 구급대는 바로 출동하지 않았다. 가영이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아 야근중이었기 때문에 연락을 하기도 망설여졌다. 동섭은 스스로 해결하자고 다짐했다. 따뜻한 수건을 아이의 이마에 덮어주고 해열제를 먹이는 사이 아이의 열은 올랐다가 내리기를 반복했다. 가영이 퇴근했을 땐 다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열이 올라 결국 앰뷸런스를 불렀다.

수액을 맞고 열이 어느 정도 잡혔을 때 가영은 동섭에게 왜 앰뷸런스를 부르지 않았는지 물었다. 동섭은 구급대를 불렀지만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가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이가 숨은 제대로 쉬었는지 물었다. 의사에게서 호흡이 불안정했을 거란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쯤 되자 동섭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전화를 받은 구급대원이 앰뷸런스를 연결해주겠다고 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별이는 잠깐이라도 정말 호흡을 멈췄을 수도 있다. 동섭이 아무 답을 하지 못하자 가영이 답답하다는 듯 자리를 떠났다. 동섭은 홀로 남아 별이의 자는 모습을 지켜봤다. 자꾸만 숨을 멈추는 것 같아 심장이 두근거렸다.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왔는데도 열이 오른 모습이 겹쳐 보였다. 동섭은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숙면을 취하지 못한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그때 가영이 자신을 이해해줬다면 독일에 계속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동섭은 비 갠 뒤 더욱 청명해진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리 다 힘들었잖아.

스스로를 다독일 때 하던 말이었다. 가영에게도 그 말이 유효하길 바랐다. 가영은 동섭이 떠난 것을 알고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얼마 뒤 동섭이 챙기지 못한 짐을 부쳐왔을 뿐이었다. 비로소 가영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동섭은 안심할 수 없었다. 이혼 숙려 기간인 ‘트레눙시아(Trennungsjahr)’는 이혼을 확정하는 기간이기도 하지만 이혼을 정정하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동섭은 가영이 갑자기 찾아와 별이를 만나게 해준 것이 고맙게 여겨지면서도 혹시 다른 기대를 하고 있는 건 아닐지 걱정됐다.

잠든 별이를 안고 세 사람은 공산성으로 향했다. 공산성까지는 차로 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가영이 주차를 할 동안 동섭은 별이를 안고 먼저 내려 입장권을 구매했다. 가영이 주차를 마치고 인근 카페에서 파는 밤파이를 사왔다며 내밀었다. 뢰머광장의 식은 샌드위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따뜻하고 달콤한 파이였다. 동섭은 입장권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가영이 앞장을 섰다.

―제멋대로다.

경사진 성곽길을 오르던 가영이 멈춰 서 말했다. 별이를 안고 있던 동섭은 자기한테 한 말인 줄 알고 움찔했다. 가영이 턱짓으로 성벽을 가리켰다. 동섭이 고개를 돌려 보니 가파른 오르막길이 있었다. 동섭은 입구에서 가영을 기다리며 휴대폰으로 읽은 설명문을 떠올렸다. 백제인이 고구려군에게 쫓겨 급히 천도해 만들다보니 땅을 깎거나 고를 시간이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험한 산세를 그대로 반영한 들쭉날쭉한 산성이 됐지만 오히려 그 덕에 지반이 안정되고 튼튼하다는 특징도 포함돼 있었다.

―얼마나 정교한데.

동섭이 뢰머광장의 지붕을 떠올리며 말했다.

두 사람은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정교한 것들에 대해 더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동섭 혼자 생각을 이어갔을 뿐이다.

동섭과 가영도 무언가를 깎고 골라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소리 내 싸우거나 서로에게 요철이 될 만한 뾰족한 부분을 매끄럽게 다듬어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기질을 기반으로 쌓아올린 두 사람의 성벽은 겉보기에 험준했다. 그럼에도 완전히 붕괴될 수 없는 단단한 관계임엔 틀림없었다. 동섭과 가영은 함께 긴 시간 장거리 연애를 견뎠고 무엇보다 별이의 탄생을 같이 겪었다. 둘의 인연은 다했더라도 부모로서의 역할은 아직 남아 있었다. 앞으로 별이가 성장해 인생의 분기점을 넘는 순간마다 두 사람은 함께 자리를 지키게 될 것이다. 둘 중 한 명이 먼저 크누트처럼 세상을 떠나는 날에는 남은 한 명이 별이와 함께 찾아와 조화를 놓아줄 것이다. 그건 두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 새 삶을 이뤄도 변하지 않을 사실일 것이다. 순간 가영이 발을 헛디뎌 동섭이 손을 내밀었다. 석양에 가려 가영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성벽에 오르니 금강 일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잠시 깨어 맛있게 밤파이를 먹던 별이는 금세 지쳐 동섭의 등에 가만히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동섭은 업고 있던 아이를 가슴 앞으로 당겨 안으며 경치를 감상했다. 드넓은 금강이 지는 해를 반사시키며 반짝반짝 빛났다.

―너는 크누트가 왜 좋았어?

가영이 물었다. 동섭은 웃음이 터졌다. 사실 동섭은 크누트를 좋아하지 않았다. 크누트에게 관심은 있었지만 독일인들이 쏟은 만큼의 애정을 느끼지는 못했다. 동섭이 십 년도 더 지난 크누트 얘기를 먼저 꺼낼 땐 독일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뿐이었다. 독일인들은 한국에서 온 동섭이 크누트를 안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여기며 금세 친밀감을 느꼈다. 동섭이 독일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한 이유는 순전히 가영 때문이었다. 동섭이 독일에 빨리 적응할수록 가영의 부담도 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동섭이 크누트를 좋아했다면 그건 오로지 가영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동섭은 이 말을 온전히 옮기지 못했다. 그는 어떤 언어에도 능숙하지 못했다.

―너는 왜 좋았는데?

동섭이 물었을 때 가영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작고 귀여우니까.

처음 만났을 때 가영은 크누트가 ‘위대해서’ 좋다고 말했다. 일 년 만에 백 킬로그램 가까이 성장한 크누트를 보며 독일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가 작고 귀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크누트는 자신을 버린 어미 없이도 잘 컸고 씩씩하게 방문객들의 앞에 섰다. 사육사의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모든 동물이 그렇게 자라지는 않는다. 그건 온전히 크누트 스스로의 공이었다.

죽을 위기에 처했던 생명체가 어느새 자라 위엄을 자랑하는 곰이 된 모습을 봤을 때 동섭은 전율이 일었다. 크누트는 더이상 그저 귀여운 아기 곰이 아니었다. 사랑을 준 사람들에게 사랑을 갚으며 행복을 만들어내는 위대한 생명체였다.

―튼튼하고 정교해 보였어.

해가 흔적없이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금강을 바라보며 동섭이 말했다.

―내가 크누트를 좋아했던 이유야.

생각지 못한 급경사를 발견한 표정으로 가영이 동섭을 바라봤다. 북극곰처럼 새하얗고 총명한 눈빛이었다.

공산성에서 내려오며 동섭은 가영에게 내일 무령왕릉을 구경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가영은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좋다고 답했다. 이혼 숙려 기간엔 공간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에 두 사람은 숙소 입구 앞에서 헤어졌다. 베를린 법원이 공주시의 숙박 내역까지 검사하진 않을 것 같았지만 신중하게 행동하고 싶었다.

―아빠 빠빠이 해.

동섭에게 안겨 있던 별이를 데려가며 가영이 말했다. 반년 전만 해도 알아듣는 단어가 별로 없던 별이는 신기하게도 금세 엄마 말을 이해하고 양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동섭이 맞은편에 서서 같이 손을 흔들었다.

동섭과 짧은 눈인사를 나눈 뒤 아이는 곧 엄마 손을 잡고 둘만의 방으로 걸어들어갔다. 두 사람의 모습이 해질녘 잔잔히 흐르던 금강처럼 한동안 동섭의 기억에 남아 맴돌았다.

다음날, 가영은 동섭에게 문자를 보내 먼저 서울로 떠났다고 했다. 서울에서 다른 곳을 좀더 둘러본 뒤 독일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했다.

―어쩐지 동굴은 내키지가 않네.

무령왕릉에 가기로 하지 않았냐고 물었을 때 가영은 밤사이 생각이 바뀌었다면서 허무한 핑계를 댔다.

왕릉이 어떻게 동굴이랑 같냐고 동섭은 되물었을 때 가영은 생각해볼 일이라고 하면서도 되돌아오지는 않았다. 한결같이 제멋대로인 모습이 황당했지만 동섭은 한 가지 사실에 집중했다. 세 사람에게는 여전히 시간이 필요했다.

정오가 다 되어갈 무렵 동섭은 홀로 공주 시내를 구경하기로 마음먹었다. 숙소 앞엔 전날 다 같이 사진을 찍은 큰 곰 조형물이 땡볕을 맞으며 서 있었다. 동섭은 그 옆을 빙 둘러 걸었다. 바짝 붙으면 너무 더울 것 같았다.

카페가 많은 번화가를 찾아갔는데 결국 도착한 곳은 공산성 앞이었다. 동섭은 가영이 밤파이를 사왔던 카페에 찾아가 밤라테를 주문한 뒤 전망 좋은 자리를 골라 앉았다. 공산성의 푸른 언덕이 눈앞에 펼쳐졌다.

테이블 위에 다른 관광객이 놓고 간 듯 무령왕릉 안내책자가 놓여 있었다. 동섭은 표지 속 무령왕릉 사진을 바라봤다. 벽돌식 무덤이라는 무령왕릉은 일정한 크기의 돌이 천장 끝까지 촘촘하게 쌓여 있었다. 빈틈없이 완벽한 모습이었다. 숨막히는 정교함에 동섭은 할말을 잃었고 어쩐지 서글픈 감정이 들었다. 동섭은 밤라테를 한입 마셨고 벽돌무덤만큼 밀도 높은 질감을 입안 가득 느꼈다.

혀끝에 남은 밤 알갱이를 곱씹으며 동섭은 결국 이혼 절차에 대해선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독일에서 이혼하려면 변호사를 필수로 고용해야 했다. 재산 분할이야 복잡할 게 없겠지만 양육비와 면접교섭권에 대해선 조정이 필요했다. 동섭은 자신이 독일에 직접 가야 하는지 한국에서 해결할 수 있는지 아직 알지 못했다. 가영은 복잡한 얘기는 나중으로 미루자고 했다.

―가끔 공주에서 만나자.

공산성에 올라 석양을 감상하고 있을 때 가영이 말했다. 좀더 구체적인 얘기를 할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다. 동섭은 가영을 바라봤다. 가영은 동섭을 보지 않고 있었다.

구들장의 뜻을 알게 됐을 때 가영은 동섭이 서울로 떠난 이유를 알게 됐다고 했다. 도저히 알 수 없는 것투성이인 세상에서 자신은 진입 장벽이 낮은 다른 사전을 찾아 동섭에게 내주지 못했던 것 같다고 했다. 가영은 막아뒀던 동굴 입구를 밀어내는 암곰처럼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동섭은 고개를 저었다. 다음 여행에선 함께여서 행복했던 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선선한 밤기운에도 가영의 이마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동섭은 안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별이의 이마를 닦은 다음 가영에게 내밀었다. 가영은 손수건을 받아 땀을 닦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섭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왜 하필 공주야?

가끔 만나자는 말을 떠올리며 동섭이 가영에게 물었다. 차돌멩이가 인도에 우수수 떨어져 있어 멀리로 차내야 했다.

―공주엔 곰이 많잖아.

가영이 고른 흙길을 내디디며 말했다. 그 걸음처럼 단단한 말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