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reason

reason

 

입국 심사대에서 안경을 쓴 젊은 여자로부터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일이 떠오른다. 원래대로라면 별말 없이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었을 거다.

 

 

“넌 왜 이렇게 오래 머무니?”

 

“……”

 

What’s the purpose of the visit? How long will you stay here? Where will you stay? 입국 심사를 위해 준비한 질문은 이것뿐이었는데.

 

“이렇게 오래 머무는 이유가 있니?”

 

“reason?”

 

순간 할말을 잃는다. 쉬고 싶어서. 도망쳤어. 한시도 쉬지 않고 주절대는 목소리로부터. 그 미치광이의 현혹이 의미가 없다는 걸 증명하려고. 내게 쏟아지는 질문을 멈추려고. 오지 않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으려고. 내가 원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싶어서.

 

 

나의 어린 갱스터에게

 

달리는 차나 몇층짜리 건물에서 뛰리던 시절이 있었다. 충동과 과열이 낮과 밤을 오갔다. 셀 수 없이 많은 시들을 써내려갔다.

 

“보름 뒤 자신의 목이 교수대에 매달릴 것을 아는 사람은 남은 나날 동안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한다.”

 

18세기 시인 새뮤얼 존슨의 말처럼 나는 내 죽을 날들을 쫓는 유령처럼 지냈다.

 

통제되지 않는 날들이 시소처럼 오르고 내려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를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온전치 못했으므로 그대로 부셔졌다.

 

미래에 대한 상심, 내 젊은 날 나는 고통에만 마음을 열었다. 밤거리를 쏘다니다 허무해지면 영혼을 달래기보다 파괴할 것들을 찾아다녔고, 숨을 내쉴 때마다 세상이 싫었다.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쓰기는 자기 파괴의 결과물이었다. 가끔 약간의 탤런트가 반짝 빛났지만 그때 내 밤하늘에 별이 떠 있었던가.

 

살아가기를 포기한 인간이 어떤 곡을 연주하는지 알면서도 연주를 멈출 수 없었다. 뚝뚝 흐르는 천장 위 피를 오롯이 다 맞았다. 특히 주류나 기득권처럼 느껴지는 자들에겐 적당한 타협은 없었다. 송곳니를 드러내지 않으면 내 목덜미 살점이 먼저 뜯겨나갈 것 같았다. 입에서 늘 피맛이 났다. 그때 내 정원에 핀 풀과 꽃들은 휘어져 있었고 나는 거기에 코피를 흘리며 누워 있었다. 여행중에 종종 그 정원이 떠오른다.

 

정원이 절망으로 물들거나 엉망이 되는 걸 막을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한번쯤은 천사들이 놀러와 노래하며 기쁨을 나눴을 텐데. 그 시절을 회상하면 쓸쓸하고 측은하다.

 

종종 낯빛이 안 좋은 후배들을 마주칠 때면 다시 그 정원을 마주하게 된다. 어둠과 두려움을 멈춰도 괜찮다고, 혼자 외롭게 그 연주곡을 다 연주할 필요가 없다고, 삶을 작품과 혼동해 나아가지 않아도 네가 꿈꾸는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반드시 문학으로 성공하지 않아도 된다고. 내키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아도 돼. 네가 망가지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 떨고 있는 손을 꼭 붙잡고 말해주고 싶다.

 

 

윤리

 

옳고 그름, 세계의 질서와 조화를 배우기 위해서.

 

더 좋은 선택, 윤리를 배우기 위해. 나의 천국을 지키고 오염시키지 않기 위해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카렌 호나이의 책 『내가 나를 치유한다』에는 신경증으로 훼손된 가짜 당위의 예가 나온다.

 

 

마침내 그는 정반대 극단으로 치달아, 겉으로 불합리해 보일 정도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려고 할 수도 있다. 이때 위협과 속박으로 가득 찬 초기 생애를 충분히 자각할 수도 있다. (……) 자신이 당한 일이 어느 누구도 박살내기 충분했다고 자각하더라도, 그는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그 일을 극복했어야 했다. (……) 달리 말해 그는 어느 지점까지 현실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할 터이다. “그것은 정말이지 위선과 잔혹함의 구렁이에 빠지는 체험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음에 시력이 흐려져서 이렇게 말할 터이다. “그런 처지에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버려졌지만, 늪 속에서 피어난 백합처럼 극복해야 했습니다.”

 

만약 이렇게 비논리적인 가짜 책임이 아니라 자기 인생에 실제로 진짜 책임을 질 수 있었다면, 그는 다르게 생각했을 터이다. (……) 그는 자신이 빠진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력을 쓰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아무 영향도 받지 않았어야 했다고 요구해, 그는 모든 문제를 현실과 동떨어진 공상에 빠진 헛수고 끝에 그대로 남겨 두었다.

 

(……)우리는 왜 실패했는지 검토할 수 있고 이러한 검토에서 배울점이 있다. (……) 그러나 신경증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는 일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

 

어떤 환자들은 오로지 의지력만으로 자신들이 자각한 곤경을 제거하려고 한다. (……) 어린 두 소녀가 좋은 예이다. 두 소녀 가운데 한 소녀는 강도가 들까봐 무서워했는데, 두려움이 사라질 때까지 억지로 혼자 빈집에서 잠을 잤다. 다른 소녀는 뱀이나 물고기에게 물릴까봐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물이 아니면 수영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녀는 억지로 상어가 출몰하는 만을 가로질러 수영했다. 두 소녀는 이런 식으로 두려움을 없애려 했다. (……)*

 

인간 내면의 기전을 설명하기에 심리학적 관점은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래도 불안으로 힘든 날에 이 문장들의 도움을 받았다.

특별한 도전으로 불안을 건드려도, 건드리지 못한다 해도 모든 체험의 가치는 당사자가 아닌 이에겐 의미가 없다. 내 실존을 체험하면 그것은 내 안에 들어온다. 지금 방어기제가 삶이 흘러가도록 도와주고 있다면 방어기제에 기대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지난 과거, 오지 않을 미래에 내내 고립될 필요가 없음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나를 집어삼킨 상처나 실패가 지나갔다는 것을. 지난 것은 지난 것이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웨이트를 하다보면 매일 실패하는 인간이 되기도 한다. 지난 기록에 내내 머물기도 한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운동하는 사람들을 아무도 낙오자라고 하진 않는다.

 


move

 

낮에 하는 생각을 좋아한다.

 

구름 위에서 음악을 들으며. 흩어지는 구름을 보면서 만화를 보면서. 흩어지는 만화를 구름에 누워 보면서.

 

흩어지는 말풍선

흩어지는 갈등

흩어지는 주인공들의 선

 

피카소 초기작이 널린 바로셀로나나 세비야에서 남은 생을 사는 편이 더 즐겁지 않을까. 관광객과 홈리스가 섞이고 홈리스와 홈리스가 기르는 개로 가득한 거리가 가끔 질리고 지치겠지. 그러나 그런 곳에서라면 행복이 어떤 얼굴인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커다란 창이 있는 내 방에서.

 

아침 식당에서 사탕 묶음보다 더 작은 손으로 아침 인사와 하이파이브를 해주는 꼬맹이들이 여기저기 주렁주렁 매달린 것 같은 도시나 거리라면 더 좋겠지.

마음껏 어지르고 적당히 치울 수 있는 방이 있다면, 룸메이트랑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룸메이트와 나란히 누워 유튜브를 볼 수도 있을 거다. 한 명씩만 샤워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때론 불편하겠지만 돈 없는 외국인의 삶은 그래. 창문이 있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하지.

 

저녁이면 윤리와 상식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들로 길거리가 바글거리겠지만 나는 이전처럼 공포로 두리번거리지 않을 테지. 공포는 내부에서 시작되어 드라마가 될 법한 장면으로 자라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가끔 공포에 휩싸이겠지. 허나 그 한복판에서 불현듯 웃음이 빵 터질 것 같다.

보트 밑바닥에 무심하게 몰려 있는 물고기떼처럼

언젠간 유튜브에서 보았던 호주 캠핑장에 등장한 불곰처럼

텐트 안에 사람들이 자고 있든 말든

그릴 위에 올려진 타버린 고기와 새우를 치고 가든 말든

자기 길을 가는, 덤덤하게 지나가는 불곰처럼 뭐든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낮의 안도

 

오르막길 캄캄한 골목, 담벼락 문을 열면 모두 웃고 떠들며 와인과 음식을 먹고 있

지. 식당 내부가 오렌지빛 조명으로 가득해, 파괴와 좌절을 일삼던 나의 내부가 팬케이크 위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린다. 여기구나. 열 시간이 넘게 비행기를 타고 좁은 좌석에서 고생했지만 이렇게 좁고 작은 세상으로부터, 아니 세상으로부터 받을 위안이 있었다는 감격이 밀려왔다.

 

타파스와 카바 한 잔을 주문했다. 보글보글 기포가 올라오는 샴페인을 들이키니 이 땅에 내가 있다는 것이 실감됐다. 정말 카탈루냐라니! 한평생 겁쟁이에 불과했던 내가!

 

버스를 타고 분수를 지나 도착한 몬주익 언덕은 평화로웠다.

 

바르셀로네타 항구와 장난감처럼 보이는 화물선, 보트, 영화에서나 볼 법한 크루즈의 돛이 나부끼는 것을 바라보았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성의 계단을 오르면 도심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지중해인가? 멀리 보이는 바다가 지중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 손을 뻗어본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흙도 만져보고 성의 외벽도 손으로 쓸어보지만, 진공상태처럼 마음에 어떤 것도 일지 않아서, 마음에 어떤 것도 일지 않은 적이 없어서 이 상태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이름을 붙여봐. 속삭인다. 맑고 평화로운……

 

생존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숨죽이지 않아도, 살금살금 걷지 않아도, 들판의 사자 그림자에 웅크려 얼룩말처럼 떨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

 

양팔을 힘차게 흔들며 걷는다. 그동안의 불리하다 느껴졌던 나의 조건들 그리고 존재에 대한 골치 아픈 증명들이 갑자기 닿지 않는 먼 곳으로 간 것이다. 팔과 다리가 흔들리는 것만이 느껴지고 모든 것이 가볍고 자연스럽다. 광장이든, 언덕을 내려오는 길이든 성큼성큼, 원래의 나처럼 우당탕탕 넘어지면서.

 

 


 

* 카렌 호나이, 『내가 나를 치유한다』, 서상복 옮김, 연암서가, 2024.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