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헤드라인에 ‘수성못’이라는 단어가 쓰여 있는 기사를 클릭했다. 언제부터인가, 아니 어느 때이고 내게는 대체될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린 곳이기에. 기사의 내용은 시시하리만치 평범했다. 유니버시아드 유치를 위해 도시 재정비 사업에 들어간다는 소식이었다. 폐허나 다름없던 수성 랜드가 철거되고, 오래돼 여름이면 모기가 들끓던 못 역시 재정비에 들어간다는 기사를 읽으며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낡고 오래된 것들은 깎이고 버려지고 사라져버리기 마련이니까. 그게 세상의 이치니까.
얼마 전 내가 살던 아파트도 조합원을 모집해 재건축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있는 돈 없는 돈을 끌어모아 사십 년이 다 된 아파트를 샀던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완전히 기운 가세를 한 번에 해결할 만한 호재라고 했다.
기사 말미의 연관 기사 목록을 보다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떨리는 손으로 그중 하나를 클릭했다. 물이 빠져나간 못 군데군데에 흙이 파헤쳐져 있는 사진이 떴다. 나는 마치 이제 막 글을 깨우친 사람처럼 더듬더듬 계속 같은 문장을 반복해 읽었다.
“물이 빠져나간 못에서 시체 한 구가 발견됐다. 아주 오래 방치된 듯 사체는 이미 백골화가 진행된 상태였다.”
그 순간 내 귀에 떠오르는 목소리. 안개 낀 새벽처럼 고요한 목소리. 너의 목소리.
―너는 살면서 제일 두려운 게 뭐야?
나는 매일 밤 침대에 누울 때마다 천장의 네 귀퉁이에 서려 있는 그림자가 내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히곤 한다고, 얼마나 많은 밤 동안 이 천장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면 모든 것들이 견딜 수 없이 막막해진다고 말했다.
―그럼, 우리 1차원의 세계에 머무르자.
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점과 점, 그리고 그 두 점이 견고하게 연결된 선분만이 존재하는, 1차원의 세계 말이야.
그때 우리가 나눴던 대화를 너는 아직도 기억할까? 나는 기억해. 우리가 했던 모든 말들을 다 기억해. 지금도 방안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게 될 때면, 너를 생각해. 너의 무게를 생각해. 숨막히게 나를 짓누르던 너의 질량과 그 무게가 주던 공포와 위안을 아직도 기억해.
뒤통수부터 시작된 냉기가 어깨를 타고 손가락, 발가락 끝까지 내려왔다. 아랫입술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창을 닫고 난 뒤에도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은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나는 아예 모니터를 꺼버렸다. 입꼬리가 처지고 미간에 옅은 주름이 지기 시작한 삼십대의 남자가 네모난 검은 화면에 비쳤다. 흰자가 많이 보여 공격적이고 의구심이 가득한 눈빛을 가진 남자. 그의 얼굴은 호수 아래에 가라앉은 시체 같기도 하고, 검고 네모난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 같기도 했다. 실수로 한 획을 잘못 그은 후, 완성할 의지를 잃은 채 마구잡이로 망쳐버린, 그런 그림 말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때로부터 도망쳐왔다. 한 겹씩 인생을 쌓아올리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지난 내 삶은 그 시절을 떠나보내기 위해 존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동안 나는 나를 철저히 숨길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그 시절이 송두리째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지금 나는 그것이 완벽한 내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시절 우리가 겪었던 일들이 언제나 현재형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갑자기 누군가가 나를 응시하는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돌렸다. 파티션 너머의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업무를 하기 바빴고 당연히 아무도 나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주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공포. 실체가 없는 그 감정. 어쩌면 한없이 공허에 가까운.
때때로 제어할 수 없는 공포가 찾아들 때면 내 몸의 모든 기관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았던 기관들을 생생하게 감각하게 됐다. 나는 내 골반과 무릎과 발목과 발가락 끝을 차례대로 느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고장난 목각인형처럼 간신히 복도로 나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숫자판을 켜 하나씩 버튼을 눌렀다. 내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지 않지만 그날 이후로 단 한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는 그 번호를 말이다.
*
2003년의 이른 봄날, 세상은 기이한 열정으로 들끓고 있었다. 2002년 월드컵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때까지도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가슴에 아로새긴 채 다녔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식의 분위기가 공기 중에 떠다녔다. 그것은 월드컵을 맞아 부랴부랴 경기장을 세웠던 D시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는 중2병을 온몸으로 때려맞아, 평소보다 훨씬 더 심드렁해져버린 나에게도 그런 감정이 옮아 붙어버렸을 정도니까.
그날, 나는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교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가방을 꼭 안은 채.
학교에서 학원까지는 버스를 타면 십 분, 걸어가면 이십 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버스 정류장 근처에 다다르면 나는 언제나 갈등에 사로잡히곤 했다. 내게는 세 가지의 선택지가 있었다. 이대로 쭉 걸어가 학원에 도착하는 것. 400번 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을 지나 학원 앞 정류장에 내리는 것. 그리고 210번 버스를 타는 것. 210번 버스의 종점은 D공항이었다. 청소년용 교통카드가 아닌 (아마도 훔친) 신용카드를 들고 210번을 탄 뒤 공항에 내려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의 항공권을 산 후 그대로 도망쳐 영원히 돌아가지 않는 것. 그것이 열여섯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짜릿한 탈주이자, 도피였다. 한없이 공상에 가까운. 그러나 그날만큼은 달랐다. 나는 지체 없이 학원 쪽을 향해 달렸다.
외고 심화 A반의 불은 꺼져 있었다. 나는 내 지정석인 왼쪽 두번째 줄 세번째 자리에 앉아 가방을 꼭 끌어안은 채 갈등하기 시작했다.
두 달 전,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2학기 말부터 나는 이 특목고 입시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사회는 학력이 더 나은 삶을 보장해줄 거라는 믿음이 유효한 상태였고, 특히나 외고나 과고 등의 특목고 열풍이 불고 있었다. 때문에 대단히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개나 소나 (그러니까 나같이 애매한 성적의 아이들조차) 특목고 입시를 준비했다. 그것이 실은 (돈줄인) 부모들을 안심시켜 학원에 묶어놓기 위한 개수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외고 심화 A반은 말이 좋아 A반이지 실은 알파, 베타, 감마 반에 이어 마련된 네번째 등위의, 그러니까 입시에서 보기 좋게 탈락할 구제불능을 모아놓은 종합반이었다. 물론 부모들에게는 이런 사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게 뻔했다. 나는 수학과 암기과목이 약한 대신, 맥락을 짚는 국어나 사회 같은 과목은 손쉽게 높은 성적을 받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예나 지금이나 주제파악이 너무 잘 돼서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학원에 다녔던 건, 입시야말로 내가 D시를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꿈을 꾸고야 마는 게 내 주제파악 능력의 한계라면 한계였다.
그것은 불 꺼진 강의실의 문턱을 밟은 그날도 마찬가지여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심지어는 내 삶을 흔들어놓을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지하면서도 기어이 학교가 끝나자마자 학원까지 달려오고야 만 것이었다. 나는 계속 가방을 끌어안은 채 혼잣말을 했다.
내 인생에서 단 한 번이라도 빛날 수 있는 날이 올까? 빛은 무슨. 더 고달파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가방에서 천천히 박스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마치 성배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그것을 내 오른쪽 대각선 앞쪽 자리에 올려두었다.
마트에서 가장 싼 초콜릿을 사서 인터넷 카페에서 본 레시피에 따라 뜨거운 물에 중탕을 한 뒤 하트 모양의 판에 부었다. 그 위에 어설프게 프로스팅과 드리즐을 얹고 슈가 파우더를 뿌려 완성한 내 인생 첫번째 핸드메이드 초콜릿. 학교 앞 선물가게에서 구매한 박스에 담은, 누가 봐도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초콜릿을 무심하게 책상 위에 툭 올려놓고 나오는 것이 당초의 내 계획이었다. 마치 마니또라도 되는 것처럼. 그런데 아무도 없는 강의실이, 나의 중2병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초콜릿을 단순히 초콜릿으로만 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결국 연습장 종이를 한 장 찢었다. 그리고 나의 필체와 가장 거리가 먼 아기자기하고 동글동글한 글씨로 한 글자씩 편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발신인이 누군지도 모를 텐데, 나는 한 글자 한 글자를 쓰면서 수도 없이 고민을 했다.
꽤 오래전부터 너를 좋아하고 있어.
나는 나 자신이 누군지도, 무엇이 될 수 있는지도 잘 모르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신하고 있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너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는 것. 자주 생각한다는 게 애정의 크기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간의 총량을 따지자면 그렇다는 말이야.
나는 내게 주어진, 내가 가능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가늠해보는 습관이 있어.
그 속에는 항상 네가 있어. 바보같이.
나는 백 번 천 번 속으로만 되뇌었던 고백의 말들을 정성껏 적으며 은밀한 쾌감을 느꼈다. 익명이기에 얻을 수 있는 한줌의 자유. 이 작은 종이 안에서만큼은 나는 더이상 아무런 비밀도 간직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몇 번의 수정을 거쳐서 완성한 발신인 없는 그 편지는 나 자신조차 수치스러울 정도로 원색 그대로의 감정을 담고 있었고, 그것을 소리 내 읽는 순간 스스로가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져 내 뺨을 내리쳤다. 정신 차려. 이걸 정말 넣을 작정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박스의 리본을 풀어 딱지 모양으로 접은 편지를 초콜릿 위에 올려두고 말았다. 그리고 리본을 묶은 뒤 다시 한번 내 뺨을 쳤다. 미쳤다. 너 진짜 돌았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어느새 그의 자리 위에 초콜릿 박스를 올려놓고야 말았고, 또 나도 모르게 가방을 멘 채 문을 열고 강의실 밖으로 나왔다. 시간은 다섯시 남짓. 수업 시작까지 아직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동안 편의점에서 컵라면이나 사 먹고 만화책이나 몇 권 빌려볼 생각이었다.
강의실 복도의 코너를 도는 순간 누군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타이트하게 줄인 체크무늬 교복 치마에 평균보다 조금 작은 신장, 뒤쪽은 목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짧은데 뺨 쪽으로 내려올수록 길어지는 일명 ‘칼머리’를 한 그녀.
이무늬.
무늬는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슥 쳐다보고는 멍하니 서 있는 내 곁을 지나쳐갔다. 언뜻 드러난 그녀의 귓바퀴에 피어싱이 연습장의 스프링처럼 잔뜩 꽂혀 있는 게 보였다. 무늬의 학교는 오늘부터 봄방학이라고 했던가. 단지 보름 동안의 일탈일지언정 그조차 참지 못하고 기어이 구멍을 몇 개나 내고 마는 게 너무 중학교 2학년 말의 감성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무늬가 강의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어떡하지. 일단 그녀를 붙잡아야 하나. 아니면 무늬보다 먼저 강의실에 들어가 책상 위의 박스를 챙겨 나와야 하나. 뭐 그리 대단한 러브레터를 쓰겠답시고 삐대지만 않았어도, 아니 싸대기 두 대를 후려칠 시간만 아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어쩌면 좋지. 우물쭈물하는 사이 무늬가 강의실로 들어가버렸다. 이미 늦은 일이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이 느껴졌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지금껏 안간힘을 다해 숨겨온 내 비밀이 단 한 번의 일탈로, 만용으로 이토록 손쉽게 알려져버리게 된다니. 내 멍청함 때문에 이렇게 된 게 괜히 분하고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니다. 조금 더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그걸 올려놓은 사람이 나라는 증거가 어디 있어? 난 그저 강의실 복도에서 무늬와 마주친 것뿐이라고. 나보다 먼저 누군가 놓고 갔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잖아? 내가 아니면 아닌 거라고. 그래, 한국 땅에서는 우기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그리고 무늬가 꼭 초콜릿 박스를 열어 본다는 보장도 없잖아? 아예 신경도 안 쓸 수도 있다고. 아닌 게 아니라 무늬는 자기 몸에 얼마나 많은 구멍을 뚫을 수 있을지, 어떡하면 교문에서 걸리지 않고 블루 블랙 컬러로 염색을 할 수 있을지, 얼마나 얇게 눈썹을 밀 수 있을지 고민하느라 남 일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아 보였으니까.
이무늬. 우리 학교 인근의 H 여중에 다니며, 근처를 지나칠 때면 언제나 담배 냄새를 풍기고, 심화 A반에서 수학과 과학 성적이 가장 좋은 아이. 구제불능인 우리 반에서 그나마 외고 진학 확률이 가장 높은 아이이기도 했다. 실은 무늬에 대해 아는 정보는 그게 전부였다. 무늬에 대한 정보가 고작 이 정도이며 그 단편적인 정보조차 이토록 모순적이라는 사실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무늬가 아이들에게 내가 초콜릿 박스를 놓고 가는 것을 보았다고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장면을 상상해봐도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았다. 차라리 무늬 옆자리에 앉는 혜영에게 들켰으면 조금은 나았을 것 같기도 했다. 혜영의 경우 나와 집 방향이 같고 성적도 엇비슷했으며 각자의 학교에서 학생회에 속해 있어 작년에 축제 합동 기획단에서 만난 적이 있는 사이였다. 그나마 몇 번 말을 섞어보기도 했고, 대단한 선인은 아닐지언정 적어도 공정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남아 있었다. 차라리 그녀에게 들켰다면 설득의 여지라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뾰족한 방도는 없었다. 불안한 건 불안한 거고 배고픈 것은 또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학원 앞 편의점으로 향했다.
평소처럼 왕뚜껑을 사 먹으려다 대신 생생우동을 골랐다. 시험을 망친 날이면, 부모님과 싸운 날이면 나는 꼭 생생우동을 사 먹었다. 마음이 복잡하고 산란할 때만큼 고가(?)의 음식이 절실한 날은 없었다. 뜨겁고 짜고 시큰한 간장 국물을 허겁지겁 마시면서 땀을 줄줄 흘리고 나면 머릿속을 뒤숭숭하게 만들던 고민까지도 덩달아 쓸려 내려가는 느낌이었으니까. 나는 뜨거운 물을 받은 뒤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채 편의점 테이블 위에 손가락을 굴리며 약 사 분을 버텼다. 그러고 국물을 버리는 쓰레기통을 열었다. 생생우동 뚜껑에 나 있는 구멍으로 물을 따라 버리려던 찰나 뚜껑의 무게중심이 아래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용기 속에 있던 면이 모조리 쓰레기통으로 쏟아졌다. 쓰레기통의 채반에 고스란히 담긴 고결한 백색의 면발. 김이 솔솔 올라오는 우동 면발을 보며, ‘삼 초의 룰’ 같은 것을 떠올리며 얼른 면발을 주워 담을까 고민했지만 그사이에 삼 초가 흘러버려 그러지 않았다. 입맛이 싹 가셔버려 액상 수프와 용기 모두 쓰레기통에 버렸다. 안되는 날은 우동 하나 제대로 못 끓여먹는다. 편의점 유리창에 비친 내 뺨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까 뺨을 너무 세게 내리쳤나. 별로 아프거나 하진 않았는데. 역시나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거겠지. 수업 시작까지는 삼십 분 정도 시간이 남았다. 그냥 집으로 도망쳐버릴까,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학원으로 돌아가 수업을 들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 모든 일들이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어.
물론 이런 생각을 할수록 더할 나위 없이 현실이기 마련이다. 나는 편의점을 나서며 생각했다. 그래, 오늘 하루 피한다고 한들 뭐가 달라질까. 설사 모두에게 비밀이 까발려진다고 한들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기왕에 용기를 낸 김에 한 발 더 앞으로 나서보자. 나는 과감하게 학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내 인생에 무슨 일이 펼쳐질지 모르는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