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휴게실 맥주

휴게실 맥주

 

너는 어디어디 여행해봤니? 한국에 와본 적 있어? 나는 아이슬란드에 가본 적이 없어. 거긴 춥지 않니? 추운 곳은 싫어. 추운 곳에 여행하러 간 적은 없어. 아, 넌 호주에 사는구나. 호주에도 가본 적이 없어. 호주도 굉장히 크지. 캥거루도 코알라도 다 영어였던가.

 

난 떡볶이를 정말 좋아해. 우리나라에서도 떡볶이를 만들어 먹어. 맵지 않아? 아니 결코, 나는 매운 것을 좋아해. 미국에서 살지만 남미에서 태어난 여자 한 명이 나를 붙잡고 자신이 얼마나 코리안 푸드를 사랑하고 좋아하는지 떠든다.

 

그녀의 말은 지나치게 빨라서 내용의 절반은 알아듣지 못한다. 그녀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다른 테이블에 앉은 남자 한 명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도와줄까? 장난을 치듯 한쪽 눈을 찡긋거린다. “만나서 진짜 반가웠어”라고 아쉬움을 전하던 그다.

 

‘아냐 난 괜찮아 즐거워.’

 

내 나라에서는 대마를 하면 잡혀가. 나는 양손을 붙여 손목에 수갑을 차고 경찰에게 끌려가는 흉내를 낸다. 사람들이 웃는다. no legal.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합법이잖아. 아이슬란드 여자 한 명이 테이블 위에 종이를 돌돌 말아 대마잎을 넣는다. 인디언의 후예처럼 보이는 남자친구가 그녀를 돕는다.

 

“come to korea.”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녀와 그녀의 남자친구가 말한다. 우리가 한국에 와서 너에게 연락하면

 

야 나 제인이야!

제인? 그게 누구지? 나는 몰라

너 이렇게 우리를 모른 척 하는 거 아냐?

아마도?

 

그들을 따라 웃는다.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영어가 아니라 연기가 늘어간다. 그들은 돌아가며 한명씩 돌돌 만 종이를 피운다. 구글에 Cannabis, weed long term effect in brain을 검색한다. 이런 문장들이 나온다.

 

Some people who consume cannabis long-term may develop brain fog, lowered motivation, difficulty with learning, or difficulty with attention. Symptoms are typically reversible, though using products with higher THC content may increase risk of developing cognitive symptoms.

 

(장기간 대마초를 섭취하는 일부 사람들은 브레인 포그(brain fog), 동기 저하, 학습장애 또는 주의력 장애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증상은 일반적으로 가역적이지만 THC 함량이 높은 제품을 사용하면 인지 증상이 발생할 위험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뇌 손상, 학습의 어려움. 대마의 치명적인 부작용 중 하나는 운동신경 능력의 저하다. 검색 결과를 읽으며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공들여 쌓아온 운동신경이 저하될 수 있다니! 돈으로도 바꿀 수 없다. 무자비한 쾌감, 무자비한 혼돈…… 이미 충분하다. 그들이 주는 대마를 거절한다. 어떤 중독에도 도전할 마음이 없다.

 

-천국에는 더 재밌는 것이 많지.

 

-천국에서 대마까지 하면 더 재밌지.

 

제인의 웃음소리는 치명적이다.

 

 

웨이트

 

한 번은 운동에 대한 애정과 즐거움에 대해 말해야겠지. 웨이트를 시작한 뒤 다른 운동에 대한 도전과 모험을 즐기게 되었고 그 덕분에 운동을 포기하지 않게 되었다. 웨이트에서 중요한 건 꾸준함이다. 내 입에서 꾸준함이라니! 방만했던 삶은 무언가에 꾸준히 몰두한 채 나아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네이비 실Navy SEALs이다’ 포기 대신 이 말을 되뇌djT다. 잠드는 순간까지도. 어금니가 닳는지도 모르고 얼마나 이를 악물고 해왔는지 모른다. 웨이트트레이닝은 정직하다.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게 술수가 아닌 노력임은 웨이트는 보여준다. 그 정직함에 반했다.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었다. 트레이너 선생님이 보디빌더 대회에 나가기전 했던 말이 인상적이었다.

“가서 무대에서 보여주려고요. 어린 친구들한테 그리고 준비 없이 도전한 참가자들에게 이것이 웨이트다.”

웨이트 덕분에 많은 것들을 덤으로 얻었다. 다른 방향에서 뇌 과학과 생리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심리학적 차원이 아니라 트레이닝의 관점에서 인간의 한계와 인지능력에 대해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신체가 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우리는 어떤 것에 방해받고 회복하는가. 그런 공부를 좀더 재미있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 웨이트트레이닝에서 가장 쓸모없는 건 잡념이다. 신경과학적, 심리학적 면에서도 꼬리를 무는 생각은 유해하다. 심리학적 용어로는 ‘반추’가 있다. 반복되는 잡념과 공상이 해보겠다는 의지를 꺾어놓을 수도 있다. 신경가소성에 관한 책을 읽으며 새로운 신경섬유 가지를 얻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새로운 신경가지가 생긴다면 ‘이것이 웨이트다’라고 나도 보여줄 수 있을까.

운동을 하려면 일단 몸부터 일으켜야 한다. 갈까, 말까 망설이는 날이 잦다면 차라리 전날 운동복을 입은 채로 잠드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근육을 그리고 운동 실력을 늘리고 싶다면 어제보다 오늘, 더 큰 노력과 정성을 쏟아야 한다.

 

처음엔 불가능이라 여겼다. 피로했다. 저 문장만으로. 인생에서 뭘 더 얼마큼 또 노력이나 정성 따위를 쏟아야 한다는 것인가? 지금은 안다. 그런 질문이 떠오르기도 전에 운동화를 신고 약속 시간에 늦은 것처럼 운동화를 신고 허겁지겁 나가는 것이 존재론적 질문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웨이트를 하는 동안, 계속 무언가를 넘어서겠다는 의지가 생긴다. 자기 자신을 초월하길 바라는 열망이거나, 앞서 말한 신경증의 특별한 도전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이든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그 의지로 모든 게 지탱된다. 도파민이 분비되는 동안, 아무도 없는 정원 한가운데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육체를 감싸는 것 같다.

 

운동기구에 앉아 잠시 쉬는 일 분의 시간은 이루 설명할 수 없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짧고도 긴 그 시간.

 

근육에 가해지는 충격 다음에는 어떤 감정도 기억도 오지 않는다. 다음 운동 순서만 기다린다. 웨이트를 해서 체력과 근육을 갖게 된다면 눈 앞의 두려움이, 불안 장애가 해소되리라 믿었다. 그것이 다른 아픔으로 교환되리란 희망이 있었다.

무엇보다 어떻게 해도 바뀔 것 같지 않은 나라는 사람이 서서히 바뀌는 느낌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나 자신의 사랑과 응원이면 충분했다.

 

헬스장 문을 밀고 계단을 올라(탈출하듯) 땀에 젖은 채로 신호등을 기다리면,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입고 있는 옷이 한겨울의 패딩에서 여름의 반소매로 바뀌는 동안 감내하기 어려웠던 일들, 자기 비난과 판단이 기습하던 불안의 밤들은 땀과 함께 서늘하게 식어간다. 열기로 달궈진 뺨과 몸의 온도가 내려간다. 한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돌아오는 결과물이 선물처럼 느껴진다.

 

헬스장이 당신의 안전지대네요? 심리상담 중에 상담 선생님이 이런 말을 꺼낸 적이 있다. 100kg를 들기 위한 훈련. 나의 안전지대는 쇳덩이로 가득하다. 잔뜩 쌓여 있는 덤벨이나 케틀 벨. 전세계 어디에서도 저 쇳덩이들만 있으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겠지. 아니 쇳덩이들이 없더라도 내겐 새로 배운 달리기와 수영, 무엇보다 다이빙이 있다

 

쇳덩이들은 콜로세움 훈련장 같은 모습으로 고요히 나를 기다린다. 세상에 쫓겨나도 내겐 이제 갈 데가 있다. 요가 매트 위에서 스트레칭을 하며 준비를 한다. 오늘 어떤 부위를 단련할지 고민한다. 시퀀스를 그린다. 들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어 먹는 코뿔소, 맹수가 나타나기 전까지 평화로울 것이다. 맹수가 나타나면 그때 도망치면 된다고. 예전의 나라면 그렇게 예상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조금 달라졌다 맹수가 등장하건 등장하지 않건, 나는 나의 고요 속에 있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