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주로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과 관련된 진로를 희망하는 학생들이 모여드는 전교생 기숙사형 공업계 특성화 고등학교였다. 통칭 ‘애니고’로 불리는 그곳이다. 입학과 동시에 우리 대부분은 가장 소중한 만화책과 동인지, 캐릭터 굿즈와 밴드 앨범을 각자의 기숙사 방 사물함에 보관했는데, 그렇기에 어렵지 않게 서로의 ‘취향’―특히 고등학생에게 세상 전부인 그것―을 교환할 수 있었다. 『원피스』(오다 에이치로)나 『강철의 연금술사』(아라카와 히로무) 같은 소년만화만 주로 ‘파던’ 내가,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하기오 모토), 『핑퐁』(마츠모토 타이요), 『네가 세상을 부수고 싶다면』(카오루 후지와라), 『태양 따위 뜨지 않아도 좋아』(타다 유미), 『시오리와 시미코』(모로호시 다이지로) 같은 동급생들의 ‘최애’ 작품들을 접했을 때의 충격은 컸다.
그 충격은 물론 작품이 대단해서도 있지만, 더 정확하게는 동급생들의 취향이 생물학적 다양성만큼이나 다르다는 견고한 사실 때문이었다. 그건 차라리 공포였다. 심지어 어떤 취향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취향’인지는 언급할 수가 없다. 그 당시 그 친구만 그 작품을 팠을 거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취향은 마치 나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내 정신세계에 꼭 들어맞았다. 아니, 그보다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내 정신세계 속 새로운 공간을 그제야 발견하도록 해줬다. 요컨대 『삐리리~불어봐! 재규어』(우스타 쿄스케, 이하 ‘재규어’) 같은 작품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그랬다. 당시 내게 『재규어』는 단순한 개그만화가 아니었다. 인생, 눈물, 희망… 한마디로, 모든 것이었다.
대부분의 개그만화는 당대의 시대정신과 공유된 감정, 경험을 일종의 필수 재료로 삼아 이를 변형하고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방식으로 유머를 발생시키기에, 이제 와 『재규어』를 다시 읽어도 확실히 그때만큼 배가 찢어져라 웃기지는 않다. 이건 마치 우연한 계기로 부모가 나이들었음을 발견할 때처럼 서글픈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연재 초기 『재규어』를 대표하는 「여름축제의 대실망쇼」와 같은 에피소드는 여러 번 반복해 읽어도 여전한 감동이 있다.
줄거리는 간단하다(사실 줄거리랄 것도 없다). 가릭슨 프로덕션 피리과에 재학중인 주인공 재규어와 피요히코는 어느 날 여름축제에 간다. 언제나 그렇듯 재규어는 피요히코를 따돌리고 축제 한편에 부스를 차려 ‘대실망쇼’를 벌인다. 어쩐지 두근거리는 반전을 기대하게 되는 이름과 달리 맥이 빠질 만큼 시시한 놀이 기구, 무성의한 재규어의 손님맞이로 대실망쇼는 말 그대로 철저하게 실망스럽기만 하다. 심지어 독자인 나에게도 그렇다. 전통적으로 개그만화의 기승전결은 공포 장르와 유사하게 서서히 긴장을 높여가다가 결말에 이르러 폭소(혹은 비명)를 유발하는 ‘한 방’을 제공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대실망쇼에서 그 ‘한 방’은 영원히 없고, 대신 바람 빠진 풍선에서 나는 피시식 소리마냥 침울해지는 ‘스미다가와 불꽃대회 스페셜’ 영상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피요히코는 실망할 걸 뻔히 알면서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무려 가장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고 대실망쇼 부스에 제 발로 들어온 자신을 원망할 뿐이다.
다소 얼큰하게 술 취한 아저씨의 말처럼 들리겠지만 대실망쇼가 인생의 알레고리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비극으로 승화할 수 있는 ‘대’실망조차 못 되는, 잔잔한 모욕감을 줄 뿐인 ‘소’실망의 연속으로 가득찬 ‘쇼’. 그것도 나 혼자 겪어야 하는 ‘쇼’가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인생일 테니까. 더욱 고통스러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가 더 있을 거란 기대를 포기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끝까지 재규어의 지시를 따르기는 하는 피요히코처럼…
『재규어』는 기존 개그만화의 정형화된 장르적 문법과 관습을 따르는 대신, 이를 천연덕스럽게 배신하며 독자를 유머라는 이름 아래 ‘교육’시킨다. 이에 깊은 영향을 받은 이들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슈르(シュール, ‘초현실주의surrealism’에서 온 단어로 흔히 괴상하다는 의미)계열 개그만화의 시초로 불리는 『멋지다! 마사루』(우스타 쿄스케, 이하 ‘마사루’)를 먼저 접한 사람들에게 『재규어』는 작가의 자기 복제쯤으로 취급된다. 물론 어떤 관점에서 그건 사실이다.
1995년 연재를 시작해 2년 뒤 전7권으로 완결된 『마사루』는 특유의 맥락 없는 전개, 무의미한 말장난, 진지한 극화부터 무신경한 ‘작붕’을 오가는 그림체, 시대의 유행어 “원츄!”를 탄생시킨 원조 ‘엽기’ 캐릭터 마사루라는 특징으로 요약된다. 2000년대 중반 처음 부산 코믹월드를 통해 동인(여기서는 ‘오타쿠’) 문화에 입문한 나는 벡스코 제1전시장에 울려퍼지던 『마사루』의 오프닝 〈로망스〉를 마치 어제 일처럼 잘 떠올릴 수 있다. 막 발아하고 있었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마사루』를 봤건 안 봤건 마치 ‘네티즌’의 기본 소양인 양 “원츄!”를 감탄사처럼 구사했다. 『마사루』의 유머는 당대를 휩쓴 또다른 유형의 개그만화 『이나중 탁구부』(후루야 미노루)가 보여주는 테스토스테론 과잉의 사춘기 유머나, 『우당탕탕 괴짜가족』(하마오카 켄지)이 제시하는 구토 유발의 화장실 유머와는 달랐다. 또 미국 대중문화에 대한 고맥락적 사전 지식을 요구하는 애니메이션 〈사우스 파크〉나 〈심슨 가족〉이 구사하는 냉소와 풍자, 과장과 패러디의 유머와도 달랐다. 차라리 『마사루』는 일종의 문화 현상에 가까웠다.
다소 시차가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마사루』의 문화적 유전자, 즉 ‘밈’을 제대로 계승하고 있는 국내 ‘병맛’ 웹툰, 그중에서도 한 인터뷰에서 『마사루』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답변한 바 있는 만화가이자 유튜버 이말년(침착맨)의 『이말년 씨리즈』에 대한 비평을 참조해볼 만하다. 노문학자 김수환은 「웹툰에 나타난 세대의 감성구조: 잉여에서 병맛까지」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이말년 씨리즈』와 같은 “조야한 그림체와 과격한 서사 파괴”의 경향이 짙은 병맛 웹툰의 유행을 두고 “서사를 가진 삶”이 더이상 불가능해진 청년 세대가 스스로를 ‘잉여’ 혹은 ‘루저’라 부르며 냉소하고 있음을 알리는 시대적 징후라고 본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유래한 밈을 유일한 자원 삼아 장르적 관습을 망치고 더럽히는 방식으로 노는 병맛 웹툰은, 마찬가지로 ‘성공 서사’에서 탈락한 잉여 혹은 루저 독자를 일종의 “연대 의식”을 가진 ‘공범자’로서 끌어들인다. 『마사루』 역시 같은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즉 『마사루』는 정상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잉여나 루저의 피난처이기도 했다고 말이다.
이런 『마사루』라는 ‘근본’을 두고 후속작인 『재규어』를 굳이 호명하는 까닭은 별다른 데 있지 않다. 단순히 말하면 타이밍 문제다. 새끼 오리가 막 태어나 본 대상을 어미 오리 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사태가 『재규어』와 나 사이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마사루』에게 가능했던 거리 두기가 『재규어』에게는 불가능했다. 게다가 잘 따지고 보면 두 작품은―『재규어』가 개그만화로서는 말도 안 되게 긴 세월인 10년 동안 『마사루』에서 시도된 ‘장르 파괴’를 나아진 작화력을 통하여 보다 다양하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실험한다는 점을 포함해―닮은 구석이 별로 없다.
물론 일본 만담에서의 전형적인 ‘보케(ボケ, 괴짜 역할)’와 ‘츳코미(突っ込み, 상식인 역할)’를 맡고 있는 재규어와 피요히코는 전작의 캐릭터 마사루와 후멍 관계의 단순 변형일 수 있지만, 그보다 훨씬 가학-피학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도착적이다. 『재규어』에 등장하는 다종다양한 ‘루저’(ex. 해머), ‘번식 탈락(ex. 뷰티 타무라)’, ‘변태(ex. 존다유 시걸)’ 캐릭터는 『마사루』의 캐릭터보다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하위문화에 기반한 부족적 행태를 보인다. 이를 통해 『재규어』는, 비록 메인 주인공인 재규어와 피요히코가 ‘남고생’ 비슷한 행동 양식을 보이기는 하지만 더이상 남고생의 이야기만은 아니게 된다. 그리고 난 그게 마음에 들었다. 아무리 기를 쓰고 남고생에 부적절한 동일시를 지속한다 해도 그 끝에 남는 건 결국 남자들의 ‘로망’을 ‘이해’씩이나 하는 특이한 여자애 취급을 받아온 역사가 지긋지긋해서였는지, 아니면 재규어와 피요히코라는 두 남성 ‘버디(buddy)’를 제외하고서도 결코 공감해주고 싶지 않은 조연 캐릭터들의 탄식이 절로 나오는 ‘찐따’ 행동이 미친듯이 웃겼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예컨대 해머는 자신이 ‘알파’ 남성이자 전에 없던(아마 그럴 것이다) 힙합 닌자라고 믿고 있고, 뷰티 타무라 역시 자신이 ‘미연시(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에 나올 법한 귀여운 여자아이라고 상상하며 마치 그런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실제로 둘은 그저 음침한 스토커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사실을 둘만 모르고 있기에 그 결과, 그들이 느껴야 하는 수치는 모조리 독자의 몫으로 귀속된다. 비슷하게 이미 대스타임에도 불구하고 재규어의 인정을 받으려 자발적 추락을 강행하는 포기(이름이다)와, 철저히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귀여운 얼굴의 로봇 하미 역시 차마 보기 부끄러울 만큼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하다. 이처럼 주제 파악조차 실패했기에 자기가 루저인 줄도 모르는 루저들로 가득한 『재규어』의 세계는, 인생이 혼자 겪어야만 하는 대실망쇼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보는 동안에는 마치 이 쇼를 혼자 겪고 있는 것만은 아닌 것 같은 묘한 위안을 준다. 그들과 나의 차이는 단지 내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지나치게 잘 알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안다는 건 다만 모를 수 있는 능력의 부재를 가리킬 따름이다.
『마사루』와 마찬가지로 『재규어』 역시 오랜 시간 루저와 잉여들에게 대실망쇼로 표상될 수 있을 피난처를 제공했다. 다소 이른 진단이긴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정확히 이런 기능 때문에 우리가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우스타 쿄스케의 개그만화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음을. 피난처로서 그의 만화가 수행하던 역할은 X(구 트위터)로, 릴스와 쇼츠로, 유튜브와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로 대체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라도 『재규어』를 펼쳐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대실망쇼에 머물 수 있다. 에피소드 속 피요히코의 마지막 대사처럼 “이렇게 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