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스포츠만화라는 젊음 포르노

※이 글은 스포츠만화를 그다지 많이 보지 않았으며, 스포츠 또한 즐겨본 적 없는 사람에 의해 쓰였습니다. 

 

얼마 전 웹툰 〈가비지 타임〉(2사장)을 봤다. 실화에서 영감을 얻은 이 작품은 부산에 위치한 지상고등학교 남자 농구부원들의 정신적 성장을 다루는 스포츠만화다. 놀랍게도 이 짧은 소개는 전혀 유혹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가비지 타임〉뿐만 아니라 모든 스포츠만화는 스포츠를 진지하게 다루는 척하면서 실은 소년(혹은 소녀)의 성장을 작품의 ‘진짜’ 주제로 삼고 있다. 열정만 있고 기술은 없는 ‘아마추어’ 주인공이 운동부에 입부해 여러 인물과 사건을 마주하며 ‘프로’선수로서 성장한다는 스포츠만화의 한 서사적 전형을 떠올려보라. 『더 화이팅』(모리카와 조지) 『이니셜 D』(시게노 슈이치) 『고스트 바둑왕』(홋타 유미, 오바타 다케시) 『아이실드21』(이나가키 리이치로, 무라타 유스케) 『겁쟁이 페달』(와타나베 와타루) 『하이큐!!』(후루다테 하루이치) 등등. 일찍이 『슬램덩크』(이노우에 다케히코)가 닦아놓은 이 길은 대체로 실패하는 법이 없다. ‘아마추어’ 주인공의 성장이라는 주제가 여전히 먹히는 이유는 우선 독자가 이런 타입의 주인공에 상대적으로 더 쉽게 호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자기보다 낮은 위계에 있다고 간주되는 ‘바보’ 캐릭터 앞에서 편하게 경계를 풀고, 웃음에서 눈물에 이르는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내보인다. 만약 『슬램덩크』의 주인공이 ‘풋내기’ ‘멍청이’ 강백호가 아니라 ‘슈퍼 루키’ 서태웅이었다면 어땠을까? 물론 좋았겠지만, 아마 지금처럼 인기를 끌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뭘 안다고 이런 소리를? 하지만 이노우에 작가의 초기작이자 서태웅의 프로토타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단편 「카에데 퍼플」을 한번 봐보세요.) 

또다른 이유는 그냥 사람들이 ‘성장’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모든 것이 불확실한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성장만큼 달콤한 게 있을까? 스포츠만화는 연습하는 만큼 늘고, 각성하는 만큼 승리하는 주인공을 보여준다. 우리는 세상이 ‘사실’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노력하면 성공한다’라는 이데올로기가 스포츠만화 속에서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내심 안심한다. 왜 안심하는가? 그야 그러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주인공이 ‘노력했는데도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저 청소년의 젊음이 착취되는 과정을 담은 절정 없는 포르노를 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포르노의 이름은 현실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통상 스포츠만화에 등장하는 통과의례적인 사건에는 주인공의 성장이라는 플롯상의 결과가 반드시 뒤따른다. 몸만 큰 남자(혹은 여자) ‘아이’였던 주인공은 이러한 사건이 가져다주는 쓰디쓴 패배감을 제대로 씹어 삼킨 끝에 결국 선수로서, 때로 성인 ‘남자’(혹은 성인 ‘여자’)로서, 무엇보다 인간으로서의 한 단계 높은 정신적 성장을 이룬다. 종종 처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하는 포르노, 아니 현실과는 달리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스포츠만화 속에서 일어나는 성장을 ‘정말로’ 좋아하는 건지 종종 모호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주로 경기 중 일어나는 주인공의 에피파니(Epiphany, 갑작스러운 깨달음 혹은 자각을 뜻함)를 말풍선의 형태로 중계받는다. 실패에 대한 용기, 아마추어의 열정과 프로의 타성, 팀워크의 아름다움과 같은 일견 구시대적 ‘진정성’의 가치를 설파하는 주인공의 ‘스피치’가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면 그 까닭은 어찌 보면 상투적이기만 한 메시지 자체에 있지 않다. 잔인하게도 우리는 스포츠가 걸어놓은 각종 규칙과 제약에 주인공이 날것의 정신과 육체를 욱여넣는 데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감동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주인공이 더 큰 고난을 자발적으로 원하는 초인적인 인간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에 또한 감동한다. 게다가 우리는 주인공의 이러한 성장 혹은 ‘진화’를 실시간(?)으로 목격한 마지막 증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는 곧 성인이 될 테고, 그렇게 되면 지금과 같은 속도와 강도로 육체는 물론이고 정신까지 급격하게 성장하는 ‘사건’을 기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의 ‘스완송(Swan song)’을 보고 있는 셈인가? 그것도 꽤나 즐겁게…? 만약 우리가 스포츠만화를 볼 때 ‘정말로’ 즐기고 있는 것이, 노력에 따른 정직한 성장이 아니라 언젠가 반드시 끝날 주인공의 유한한 젊음이라면 사태는 다소 우려스러워진다. 그렇다면 비유가 아니라, 스포츠만화란 정말로 젊음이 착취되고, 소진되고, 변형되는 과정을 담은 포르노인 셈이니까. ‘끝’이라는 절정이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스포츠만화에서 성장이 실은 ‘젊음’의 끝을 의미한다는 관점은 과거 유럽에서 유행했던 소설의 한 장르인 성장소설(Bildungsroman, 빌둥스로만)을 떠올리게 한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성장소설은 “어른이 되어가는 어린 주인공의 심리적이고 도덕적인 성장에 초점을 맞추는 소설 장르”를 뜻한다. 18세기 말 쓰인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시초로 하는 이 소설 장르는 오늘날 우리에겐 친숙하지만, 당시에는 전에 없던 가치를 ‘젊음’이란 기호에 부여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것이었다. 문학 이론가 프랑코 모레티는 성장소설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분석한 책 『세상의 이치』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젊음은 새로운 시대의 ‘특정한 물질적 기호’로 ‘선택’된다. (...) 젊음은 근대의 역동성과 불안정성을 강조하여 보여줄 수 있으므로. 젊음은 말하자면 근대의 ‘정수精髓’이며, 과거에서보다는 미래에서 그 의미를 찾는 세계의 표상이다.” 

봉건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던 시기의 근대 유럽은 스스로를 안정시킬 새로운 문화를 필요로 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젊음’을 상징으로 내세운 성장소설이었다. 한편으로 ‘젊음’은 자본주의가 개방한 새로운 공간에 대한 탐색 가능성(“이동성”)과 그러한 탐색에 수반되는 “벼락 출세”에 대한 기대와 불안(“내면성”)이라는 “무정형적인” 특성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젊음’은 “영원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언젠가는 끝이 날 거라는 “종결의 느낌”을 품고 있다. 거의 정반대되는 ‘젊음’의 두 특성은 성장소설 속에서 모순적인 방식으로 결합한다. “해내거나” 혹은 “망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충만한 성장소설의 주된 주인공인 부르주아 계급의 ‘젊은 남성’은 자신이 속한 작품의 구조만큼이나 모순적인 가치들–요컨대 행복과 자유, 개인성과 정상성, 성숙과 젊음–사이에서 고뇌한다. 끝에 가서 주인공이 귀족 사회로 복귀하든, 아니면 구시대와 결별하고 부르주아 사회로 편입되든 간에 이처럼 상반되는 가치들은 해결되는 대신 공존하며 주인공에게 “내면화”된다. “근대의 상징적 형식 가운데서 가장 모순적인 형식”인 성장소설은 이처럼 “모순의 공존”을 통해 귀족 사회와 자본주의 사회라는 “서로 구분되는 세계관을 화해시키려” 시도한 이데올로기적 산물이다. 성장소설이라는 장르 속에서 ‘젊음’의 무한한 자원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화해”라는 큰 목표를 위해서만 동원되고, 관리되고, 분배된다. 

이게 다 스포츠만화와 무슨 상관이냐고? 혈기왕성한 육체들이 호각을 다투는 장르인 스포츠만화야말로 ‘젊음’ 그 자체인데, 고작 교훈 따위를 위해 ‘젊음’을 전유하는 성장소설 같은 장르에 비할 수가 있겠느냐고? 물론 아무도 이렇게 안 물어봤다. 나도 안다. 하지만 이왕 말을 꺼낸 김에 이 장르의 고전 『슬램덩크』를 다시 한번 떠올려보자. 농구의 ‘ㄴ’자도 몰랐던 ‘양키’ 강백호는 점차 농구의 매력에 빠지면서 농구의 룰을 익히게 된다. 말하자면 그는 농구와 함께 최초로 그가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규칙’의 세계에 진입한 것이다. 그는 ‘단순 무식’한 농구를 향한 집념을 원료로 경기를 거듭하며 엄청난 속도로 성장한다. 이따금 보이는 그의 ‘농구부원’ 같지 않은 돌발 행동은 관객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을 감화시키기도 한다. 이처럼 『슬램덩크』의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그는 ‘양키’와 ‘농구부’라는, 모순되는 두 세계의 “경첩” 같은 존재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얼마 전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산왕전’에 이르러 드러난다. 경기 중 서태웅에게 자극받아 미국행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던 그는 온몸을 날려 루즈볼을 잡은 뒤 등에서 불길한 아픔을 느끼게 된다. 애써 아픔을 무시하고 강행된 덩크슛 끝에 결국 그는 비틀거리며 쓰러진다. 강백호 본인도 알고 있다시피 등 부상은 “선수 생명”과 직결된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코트에서 뛰기로 “단호”하게 “결의”한다. 신현철이 제안한 ‘미래’(“네겐 미래가 있다.”)가 그 자신의 ‘현재’(“난 지금입니다!”)로 대체되는 순간이다. 그는 ‘현재’라는 “영광의 순간”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슬램덩크』가 ‘젊음’이라는 한순간에 대한 찬가–즉 포르노–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순전히 작중에서 가장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던, 하지만 자신의 성장 가능성을 단숨에 소진하기를 택했던 주인공 강백호의 덕택이라고 할 수 있다. ‘젊음’은 아름답게 끝장난다. ‘성숙’으로 향하는 강백호의 미래를 대가로 지불한 뒤에 말이다. 부모도 집도 돈도 없는 그의 세계와 계급 사다리의 매개인 스포츠의 세계는 이렇듯 그의 등 부상을 절개선 삼아 역설적으로, 안전하게 봉합된다. (물론 강백호는 이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농구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가 회복되지 않고 농구를 그만두지도 않는 세계가 바로 작가의 후속작이자 휠체어 농구를 다루는 『리얼』에서 그려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우리 모두의 염원과는 별개로 말이다.)

자, 여기서 다소 늦긴 했지만 〈가비지 타임〉으로 돌아가보자. 『슬램덩크』와 마찬가지로 〈가비지 타임〉 역시 성장, 즉 ‘젊음’의 끝을 다루는 작품이다. 게다가 작중에서 등장인물들의 일상이 거의 다뤄지지 않으며 오로지 경기 중 일어나는 각성이 승리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점 또한 같다. 게다가 미친듯이 재미있다는 점 또한. 물론 두 작품 간 차이는 두 작품이 속한 국가(일본과 한국)와 시대(1990년대와 2010년대)라는 조건이 다른 만큼이나 분명하다. 지난 2019년 네이버웹툰에서 연재를 시작해 올해 초 완결된 〈가비지 타임〉이 여타의 스포츠만화와 차별화된 건 단연 ‘엘리트 체육’이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를 통해서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엘리트 체육’이란 “정책적으로 특정 소수의 엘리트 선수들에게만 집중적으로 투자를 하고 훈련을 시켜 국제대회 등에서 메달 획득의 가능성을 높이는 스포츠”를 뜻한다. 이러한 ‘엘리트 체육’의 코스를 밟는 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훗날 운동선수로서 ‘성공’하기 위한 훈련을 받는다. 어디까지나 ‘부활동’에 온전히 청춘을 바친 뒤 깨끗이 졸업해도 되는 북산고등학교와, ‘체육 특기자 전형’으로 ‘인서울’하는 걸 목표 삼고 있기에 부활동, 정확히는 ‘실적’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지상고등학교는 사정이 좀 다르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강백호가 구하는 것이 스스로 ‘거짓 없이’ 좋아할 수 있는 무엇이라면, 성준수가 구하는 것은 그가 지망하는 준향대를 가기 위한 대회 8강이라는 성취다. 이것이 그가 〈가비지 타임〉의 중반부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독자들이 붙여준 별명인) “입시 악귀”가 들린 듯 부원들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며 승리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성준수와 반대로 작중에서 가장 성격이 좋아 보이는 박병찬 역시 대학 입시를 위해 2년을 유급했으니, 결과적으로 〈가비지 타임〉의 등장인물 중 대부분이 ‘엘리트 체육’에 드리워진 무시무시한 성공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는 셈이다. 

표면적으로 〈가비지 타임〉은 이들의 대학 진학과 함께 ‘젊음’이 종결되는, 성장소설과 비슷한 플롯을 지닌 통상의 스포츠만화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비지 타임〉을 단순한 스포츠만화보다 더 도착적인 ‘젊음’ 포르노로 만드는 건 작중에서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즐기라!”는 명령이다. 도대체 어떻게 대학 입시를 즐기는 것이 가능한가? 기실 “즐기라!”는 명령 앞에 괄호 쳐진 조건은 (대학 진학에 도움이 되는 선에서)가 아닌가? 물론 작중에서 누구보다 신자유주의적 에토스를 강하게 체화한 성준수는 이유 한번 묻지 않고 그 불가능한 명령을 완수해낸다… 더구나 고등학교 3년은 물론이고 중학교 3년, 초등학교 6년 도합 12년의 승패가 입시라는 짧은 순간에 결정되는 말도 안 되는 한국의 교육 제도 아래 살고 있는 지상고등학교 농구부원들에게 애당초 ‘젊음’이란 무엇인가?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그것은 대학 진학 이후로 유예된, 처음부터 현재가 아닌 미래로 양도된 텅 빈 특권이다. 진짜 ‘젊음’은 지상고등학교가 아니라 준향대학교에 있다. 그렇다면 〈가비지 타임〉에서는 끝날 ‘젊음’조차 아직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도 저도 아닌 채로 ‘가비지 타임’(농구에서 이미 승패가 결정된 시간대)를 보내고 있는 기상호의 십육 세가 ‘젊음’이 아닐 이유는 뭔가? 만년 벤치 신세였던 기상호는 지상고등학교의 쌍용기 우승을 거치며 기술적으로, 정신적으로 부쩍 성장한다. 분명 화려하게 만개한 ‘젊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짝인 적 없는 ‘젊음’도 아닐 것이다. 완결에 이르러 그려지는, 쌍용기 우승 이후에도 여전히 열띤 얼굴로 농구부를 향해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까지 보고 나면 이런 생각까지 든다. 어쩌면 기상호는 실적과 재미라는 모순을 내면화하기를 명령하는 ‘엘리트 체육’의 질서를 거부했기에,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괜찮은 ‘가비지 타임’에 속해 있기를 택한 건지도 모르겠다고. 여기에는 대단한 성장도 없고 그러므로 대단한 끝장도 없다. 하지만 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하는 아마추어로 남을 수는 있다. 그런 식으로 ‘젊음’이라는 상징을 현실로 데려올 수 있다. ‘젊음’이 더이상 포르노만은 아닐 수 있다… 누구보다 ‘젊음’ 포르노에 중독되어 있으면서, 나는 기만적이게도 이런 것들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