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로나, 우리의 별 (1)

*

우리는 가능하다.

*

 

이십 년 전 한여름의 금요일 밤, 중학교 2학년이었던 외다리비둘기는 <모두의 스타>를 보자는 친오빠의 성화에 텔레비전 리모컨을 넘겨줬다. 거실에서 무슨 프로그램을 볼지 가족 간 합의가 필요한 시절이었다. 당시만 해도 대국민 오디션은 참신했다.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공격적으로 확장을 꾀하던 MKTV는 채널의 명운을 걸고 <모두의 스타>에 대규모의 자본을 투입했다. 음악성과 대중성 양면에서 인정받은 유명 가수들이 심사위원과 트레이너로 동원되었다. 우승자에게는 상금으로 일억원, 부상으로 고급 세단이 주어지며, 음반 발매까지 약속되었다. “그게 어쨌다는 거야”라며 외다리비둘기는 심드렁하게 소파에 기대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었다. 곧 화면에 교복을 입고 기타를 멘 참가자가 등장했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뒤로 묶은 머리가 자연스럽다기보다는 자연인스러웠다. 조끼에 박음질된 명찰에는 ‘오로나’라고 쓰여 있었다.

로나는 무덤덤하게 자신은 고등학교 1학년이며, 아침에 무궁화호를 타고 서울 오디션장으로 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내 눈길 닿는 곳 어디나>를 부르겠다고 했다. 선글라스를 쓴 심사위원이 “노찾사 때 태어나기는 했었나요”라며 호기심을 보였다. 로나는 숨을 고른 뒤 기타로 반주를 시작했다. 그녀의 입에서 첫 소절이 흘러나올 때, 외다리비둘기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소파 위에 누워 있던 오빠가 “쟤 좀 예쁘지 않냐”라고 말했다. 외다리비둘기는 ‘예쁘다’라는 단어의 협소함을 깨달았다. 그날부터 로나는 외다리비둘기의 언니가 되었다.

로나는 12주간의 치열한 서바이벌에서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우승이 발표된 뒤, 스노볼처럼 꽃가루가 흩날리는 가운데 눈물 한 방울이 뺨에 흐르는 장면은 프로그램의 절정이었다. 꽃가루가 입에 들어가서 울다 웃는 장면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변변찮은 동네에서 태어나 자신이 무엇을 가졌는지 모르고 살아가다 요정들의 도움으로…… 같은 신데렐라 스토리는 엔터테인먼트 역사에서 반복되어왔다. 현실세계의 요정은 작고 빛나는 날개가 아니라 전용기로 날아다니고, 이슬이 아니라 위스키를 마신다. 업계를 좌지우지하는 ‘거물’들의 탐욕과 오만을 새삼 설명할 필요는 없다. 로나가 대국민 오디션인 <모두의 스타>로 데뷔하였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울 뿐이다. 그녀에게 유리 구두를 신긴 건 요정도 왕자도 거물도 아니고 ‘사람들’이었다. 힘든 한 주를 보낸 금요일 밤, 조금은 홀가분하게 거실 텔레비전 앞에 앉는 평범한 사람들 말이다. 로나를 우승으로 이끈 132만 건의 유료 문자 중에는 외다리비둘기가 오빠와 엄마까지 동원한 세 표가 포함되지만, 똑딱이단추나 아로미처럼 비밀스럽게 한 표를 보탠 경우도 많다. <모두의 스타>가 시청률 하락 끝에 시즌4에서 초라하게 종영할 때까지, 어떤 우승자도 로나만큼 득표하지 못했다. 우리는 자신 있게 강조한다. 대한민국 연예계에서 최초이자 최고의 ‘선출직 스타’는 로나다.

 

“혼자 해낸 우승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응원해주신 분들, 그리고 지켜봐주신 분들이 더 행복해지도록 ‘모두의 스타’가 되겠습니다.”

―<모두의 스타> 우승 소감 중에서

 

정식 데뷔는 사 개월 뒤였다. 오디션 참가자에서 엔터테이너로 훈련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팝펑크풍의 데뷔곡 <컨버스 걸>은 주요 차트에 진입했으나 우승 당시의 화제성에 비하면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두었다. 댄스가 주류였던 가요계에서 모처럼 록에 기반을 둔 신인이라는 점에서 일부 평론가들이 호응했다. 그렇지만 기존 록 팬들의 지지를 받기에는 간주의 안무가 우스웠다. 외다리비둘기는 로나를 따라 척테일러 1970 클래식 하이 컨버스를 신고 끈을 늘어뜨렸지만, 메탈 키드였던 제플린88의 눈에 <컨버스 걸>은 록에 대한 모독으로 보였다.

<컨버스 걸>은 유행을 어설프게 의식한 프로듀서의 실책으로 이해됐다. 하지만 근래 넷플릭스에 공개된 <오로나>, 더 앞서 VH1에서 방영된 에 따르면 로나는 초기부터 셀프 프로듀싱에 적극적이었다. 기획사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잠재력을 계발하려고 그녀에게 신인치고 큰 재량을 부여했다. 프로듀서였던 이현영의 회고이므로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다. 하지만 로나가 여러 번 우스개로 밝혔듯 최소한 안무는 자신의 아이디어였다. 그 어설픈 춤이 발굴되어 ‘댄싱 로나 챌린지’로 소비되고, 제플린88도 카메라 앞에서 기꺼이 어깨춤을 추는 건 먼 미래의 일이었다.

시행착오를 겪은 로나는 일 년의 준비를 거쳐 첫 미니앨범을 발표했다. 타이틀인 <너의 하루와 세상의 우연>은 전작처럼 록에 뿌리를 두었지만 발라드풍의 서정미가 가미된 곡으로, 고등학생이라고 믿기 힘든 호소력 짙은 보컬이 돋보였다. 음반의 시대는 끝났고 굿즈의 시대는 오기 전이었지만 이례적인 판매량을 기록했다. 처참한 음 이탈을 각오하고서라도 중고등학생부터 중년의 회사원까지 모두가 노래방에서 “알고 싶어”로 시작하는 후렴을 열창했다. 로나는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한 시절을 대표하는 유행가를 보유하게 됐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정체성을 확립했다는 점에서도 유의미한 성공이었다. 깁슨의 어쿠스틱 기타로, 체리 선버스트 색상의 단풍나무 바디에 픽 가드에는 비둘기 문양이 박힌 ‘붉은 도브’를 든 것도 이때부터다. 아로미는 동갑인 로나에게 고무되어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첫 기타를 샀다. 깁슨은 아니고 국산 보급형 브랜드였지만 붉은색은 같았다.

아로미가 간호대를 졸업하고 직장인 밴드에 들어가 12개월 할부로 진짜 깁슨을 살 때까지 로나도 성공가도를 달렸다. 정규 1집 ‘Twenty’의 타이틀이었던 는 발매 첫 주에 지상파 3사 음악 방송에서 1위를 차지했다. 젤리, 탄산음료, 청바지, 화장품 등 광고 시장에서 러브콜이 이어졌다. <모두의 스타>를 만든 MKTV가 그러했듯, 자본은 때때로 자신이 무엇을 잉태하는지도 모르고 질주한다. 조지 오웰의 『1984』를 차용해, 가상의 전체주의 국가에서 붉은 도브를 든 로나가 해방의 노래를 퍼뜨린다는 통신사 광고는 지금 돌아보면 의미심장하다.

로나는 작사·작곡을 넘어 앨범 전체의 기획을 주도하는 아티스트로서 성장했다. 연애 감정보다는 보편적 꿈과 용기를 주제 삼은 정규 2집 ‘목련’은 전곡을 주요 음원 차트에 줄 세웠다.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앨범’을 수상하며 대중성과 예술성 양면에서 인정받는 뮤지션으로 입지를 굳혔다. 해외에서의 성과는 예상 밖이었다. 케이팝이 세계적으로 저변을 넓히고 있었지만 솔로 싱어송라이터가 성공한 사례는 없었다. 길은 의외의 방식으로 열렸다. 세 명의 오디션 심사위원 앞에 선 날부터 상암 월드컵경기장에 모인 육만 명 앞에서 노래할 때까지의 역사를 2분 55초로 압축한 클립이 갑자기 미국에서 알고리즘의 축복을 받았다. 영상을 편집해서 업로드한 똑딱이단추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성공 신화에 대한 미국인들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것이다. 스포티파이에서 로나의 곡들이 스트리밍됐고 세 달 후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 초대 받아 한국어로 <목련>을 불렀다. 그 무대는 사천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고, 가사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눈물을 흘렸다는 댓글이 이어졌다. 성급한 평론가들은 키가 5피트를 조금 넘는 이 극동아시아 출신 싱어송라이터가 얼래니스 모리셋이나 켈리 클라크슨, 테일러 스위프트의 뒤를 이을지 점쳤다.

미국 진출에는 행운이 따랐지만 모든 성장 과정을 요약하자면 새롭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노래 잘하는 국민 여동생에서 조금은 의뭉스러운 스무 살 아가씨로, 그리고 꿈과 용기를 주는 만인의 뮤즈로…… 적절한 시기의 이미지 전환이 대중 가수의 수명 연장에 필수적이라면, 로나는 그 일을 능숙히 수행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녀가 어떤 콘셉트로 커리어를 이어나갈지 기대했다. 가죽과 금속의 여전사, 붉은 입술의 팜파탈, 황금 망토를 두르고 다이아몬드 왕관을 쓴 디바,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맨발로 양떼 사이를 거니는 여신…… 로나는 스물여섯 살에 불과했고 그녀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