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10월 29일 이후의 첫 편지

혼비씨, 

제가 리코더로 연주하길 좋아하는 노래 가운데 <전국노래자랑> 주제곡이 있습니다. 딩동댕동 울리는 실로폰 뒤로 사회자와 청중들이 “전국~” “노래자랑!” 하고 크게 외치면 뒤따르는 악단이 ‘빰빰빰 빠바밤빰’ 연주하며 시작되는 그 흥겨운 곡 말입니다. 얼마 전에는 김하나 작가의 우쿨렐레와 호흡을 맞춰 이 노래를 녹음해서 팟캐스트 오프닝에 넣어보기도 했어요. 김신영씨가 새로 진행을 맡게 된 일을 기념하는 의미였습니다. 리코더로 연주할 때는 ‘도도도 시시시 라라라 미 솔파’ 하며 같은 음을 규칙적으로 소리내는 텅잉이 까다로운데, 그 부분을 뭉개지 않고 리듬을 잘 살려내면 기분이 좋아요. 

진행자가 바뀐 후에는 일요일 낮에 TV를 켜서 종종 이 프로그램을 틀어놓습니다. 10대 때 이후로는 시청한 기억이 없어서인지, <전국노래자랑>을 볼 때면 가족들이 다 같이 늦잠을 자고 일어나 느긋하게 집에 머물던 어린 시절 주말 한낮의 시간이 돌아오는 것 같아요. 그때는 삶에서 그런 평화가 아주 짧게 주어진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죠. 연세가 많은 분들이 주로 나와서 오래된 트로트를 부른다는 인상을 갖고 있었지만, <전국노래자랑>에는 의외로 1990년대 이후 태어난 출연자들도 많고, 나와서 부르는 곡의 장르나 제작 시기도 다양합니다. 그사이 제 나이가 많아졌고 10대 때만큼 트로트에 질색하지 않으며 곧잘 듣는다는 변화가 벌어지기도 했네요. 벌써 42년째 이 프로그램이 일요일마다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돌아가신 전 진행자 송해 선생님의 삶도 떠오르고, 이 프로그램을 만들어온 사람들은 삶의 어떤 사건들을 통과해왔을까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경기도 하남 편, 어머니의 여든번째 생신을 축하하러 나온 50대의 3남매는 축하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무대에 섰습니다. 어머니는 세 아이가 차례로 태어난 직후인 30대 초반부터 홀로되셨는데, 갖은 고생을 하며 자신들을 훌륭하게 키워주셨다고 해요. 그런데 그들이 흥겨이 부르는 노래 가사가 뜻밖에 쓸쓸하고 서글퍼서 잠깐 멈칫하게 됩니다. 

“어두운 바닷가 홀로 남은 새야/갈 곳을 잃었나 하얀 바다새야/힘없는 소리로 홀로 우는 새야 (새야)/ 네 짝을 잃었나 하얀 바다새야 (우 우 우)”(바다새의 노래 <바다새>)

여기서 짝을 잃은 바다새는 홀어머니를 비유한 것일까요? 노랫말에 의미를 담기보다 남녀 혼성 트리오 곡으로 적당히 부를 만한 것을 찾다보니 선곡이 공교롭게 그리된 것이겠지요? 남매는 우수상 부상으로 100만 원권 백화점상품권을 받으면서 그들이 보여줄 수 있는 효의 절정을 구현하고 좌중의 인정을 받습니다. 기뻐하는 얼굴 표정이 서로 닮아 있습니다. 

송대관씨가 그랬나요, 쿵짝쿵짝 네 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다고요. <전국노래자랑>은 효 말고도 노래 속에 펼쳐지는 한 글자들의 향연입니다. 흥, 끼, 뽐, 춤, 신, 쿵과 짝, 그리고 거의 매번 선곡에서 빠지지 않는 “찐찐찐찐 찐이야”의 찐. 이 모든 것이 소란스럽고도 자연스럽게 무대를 꽉 채웁니다. 아, 그리고 힘도 있었습니다. 충북 영동군 편이었던 이번 주 방송에서는 영동군청 소속 여성 씨름 선수들 예닐곱 명이 나왔거든요. 춤과 노래를 마친 그들은 예상되다시피 사회자 김신영씨에게 샅바를 건넸습니다. 혼자 있어도 자그만데 키 차이가 족히 20센티미터는 날 것 같은 상대 선수 앞에서 더 자그마해진 김신영씨는 “이겨? 말어?” 하며 짐짓 여유로운 척을 허세를 부렸지만, 보는 이들은 이 멘트가 더 극적인 패배 장면을 만들어내기 위한 밑작업이라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습니다. 선수가 맞배지기로 번쩍 들어올리자 공중에 뜬 채로 허우적허우적, 맥없이 사위를 휘저으며 버둥대는 김신영씨의 잘동막한 팔다리가 클로즈업됩니다. 번쩍 들려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분명히 알고 들리는 이의 버둥댐은 얼마나 아름답던지요. 

평생 들은 것보다 많은 트로트 곡들을 집중적으로 들으며 지낸 시기가 기억납니다. 2020년 봄, 팬데믹이 심각하게 번져나가던 때였습니다. 카페에도 갈 수 없고, 식당도 일찍 문을 닫고, 확진이 되면 어디를 다녀가서 누구를 만났는지가 공개되며 비난받기에 무엇보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두려운 때였습니다. 겨울 한 달을 집에 칩거하며 마감한 원고의 출간은 무기한 미뤄지고, 아이디어를 써보낸 광고 론칭이 취소되면서 돈도 해명도 사과도 받지 못했어요. 질병에 감염되거나 사망하거나 직장을 잃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 제 처지가 특별히 힘든 것도 아니었죠. 다만 갑자기 많아진 시간이 어색해 밤마다 집에서 술을 마시거나 경연 프로그램 <미스터트롯>을 봤습니다. 

제가 특히 열광했던 무대는 태권도를 하며 노래를 부르는 출연자의 예선전이었어요.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서라도 당신이 부르면 달려갈 거야” 하는 노래를 부르며 동시에 무대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공중회전돌기를 이어가는데 너무 힘차서 그대로 돌면서 바다까지 건널 수 있을 것 같더라구요. 분명 하체가 더 높은 곳에 있고 머리가 아래에 있는 순간에도 그 상태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멈추지 않는 출연자를 보면서 그 폐활량이, 코어 근육이 너무 감탄스러웠던 기억이 나요. 지금은 그때처럼 자주 술을 마시지도 못하고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을 몰아서 보지도 않으며, 트로트 대신에 다른 음악들을 고루 찾아 듣습니다. 세상도 저도 팬데믹에는 어느 정도 적응해서 다시 균형을 찾은 것처럼 보입니다. 다만 당시의 저에게는 그렇게 TV 앞에서 넋 놓을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반짝이는 조명이 돌아가고 노래가 계속되는 동안은 세상에 가득한 고통이 잠시 멈추는 것 같았어요. 중력도, 갑갑한 현실의 우울도, 코로나의 불안도 잊을 수 있을 것처럼요.   

사람은 노래하고 춤을 춥니다. 기쁠 때뿐 아니라 슬플 때도 그것들을 필요로 해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일요일마다 예배당이나 절에 가듯 어떤 사람들은 TV를 틀어놓고 그 앞에 앉아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심지어 바흐 시대 이전부터 교회나 성당이나 절에 가도 노래가 있었지요.) 그리고 세상 속으로 돌아가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나머지 여섯 날에 힘을 내어 일하고 슬픔을 견디고, 화를 내고, 해야 할 싸움을 이어나갈지도 모른다고요. 전통음악에 담긴 정서로 ‘한’을 이야기할 때 보통 사람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너무 강렬한 개념이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조금씩 수긍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꾸 억울하게 죽는 사회에서, 낫기도 전에 또 쌓이는 이 슬픔과 좌절의 응어리는 다 어디로 갈까요? 

안부를 묻기가 조심스럽습니다. 바로 지난 편지에서 버거 값을 치르지 못해 곤란해하다 담배 두 갑과 물물교환이라는 신박하고도 유쾌한 해결책을 만나는 늦은 밤의 혼비씨를 상상하며 웃었는데, 그 노점이 있던 장소가 이태원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니 이제 마음이 저릿합니다. 물론 저의 이태원에서도 수많은 즐거운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대체 우리 중 누구에게 그렇지 않겠어요? 

혼비씨는 무엇에 기대어서 이 시간을 견디고 있나요? 담요님은 담배가 더 늘진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부디 사소하지만 도움이 되는 것들을 곁에 두고 단단히 붙드시길 바랍니다. 


2022년 11월 8일

황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