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우정 테스트

뉴욕에 사시는 친구 커플과 나는 오랜만에 함께 외출하여 백화점 세일 코너를 샅샅이 돌아다닌 후, 일본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평소 많이 먹지도 못하는 주제에 코스를 시키질 않나 좀 오버하는가 싶더니, 결국 집으로 가는 지하철 급행열차에서 친구는 비싼 돈 주고 먹은 그 모든 것을 바닥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친구의 옆자리에 앉은 나는 얘 상태가 좀 안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일까지 목도하게 될 줄은 정말 모르고 있었다. 다리 사이에 백화점 종이봉투를 끼고 앉아 한동안 말없이 허공을 응시하던 친구는, 어느 순간 천천히 봉투에서 새로 산 바지를 꺼냈다. 그러곤 바지를 작게 돌돌 말아 떨어지지 않도록 배 쪽에 단단히 끼워넣더니, 곧바로 어떤 사전 예고도 없이 상체를 굽힘과 동시에 봉투에 고개를 처박고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내 친구라는 애들의 이런 모습을 봐야 한다는 것에 충격이 컸으나, 새 바지를 망쳐버리지 않은 꼼꼼한 준비성만은 솔직히 무척 성숙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약하고 죄 없는 친환경 종이봉투는 친구의 조금도 담아내지 못한 채 거의 곧바로 바닥을 열어버렸고, 그저 친구의 입에서 지하철 바닥으로 뚫린 통로나 대롱에 가까운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주변 승객들이 아주 합리적인 이유로 신속하게 최대한 우리에게서 멀리 사방으로 흩어졌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친구의 애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360도로 매우 쏘리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내부 사정을 모르는 야속한 급행열차는 언제나처럼 사람들을 내려주지 않은 채 많은 정류장을 그냥 지나쳐갔고, 마침내 가장 긴 마지막 구간을 지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우리의 무엇이 묻을세라 계속 조금씩 멀어지면서도, 괜찮다 괜찮다 억지미소를 지어 보이는 여유를 아직까지는 보여주었다. 꼼짝없이 우정이라는 쇠사슬로 묶인 나는 차마 친구 곁을 떠나지 못하고, 때때로 등을 쓸어주며 관계의 유한함에 대해 생각했다. 


이제 열차는 막판 스퍼트를 내며 속도를 올리는 듯하더니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친구가 꺼내놓은 내용들도 그 움직임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흐름의 줄기가 시작되던 그 순간, 정말로 열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탄식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옆 칸으로 이동하는 선택지가 없는 구식 열차에 발이 묶인 승객들은 악몽이 확장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친구를 살피는 척 바닥에서 일어나고 있는 흐름을 놓치지 않고 주시하다가, 적당한 때에 두 발을 들어 친구가 조금도 나에게 묻지 않도록 했다. 갑자기 스무 살이 된 기분이 들었다. 뉴욕에 낸 각종 돌려받지 못할 쇼핑 세금을 내 친구라도 이렇게 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한 구토에 눈이 벌게진 친구가 봉투에서 잠깐 고개를 든 순간 그의 머리에서 멋쟁이 노란색 비니가 미끄러져내리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그때는 나도 모르게 정말 크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지하철 바닥까지는 세금의 영역이지만, 예쁜 비니의 손상은 전혀 다른 차원의 회복이 필요한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내 것이 아니더라도, 예쁜 물건은 항상 더 나은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 다행히 비니는 바닥에 당도하기 직전 친구 애인의 재빠른 손놀림으로 구제되었다. 지가 사준 거라 그랬는지 평소보다 눈에 띄게 민첩했다.


이윽고 숨막히게 길고 길었던 역과 역을 지나 마침내 급행열차의 문이 열렸을 때, 그제서야 승객들은 매너를 벗어던지고 전속력으로 열차를 빠져나갔다. 우리 셋은 가장 마지막에 열차에서 내렸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아침 겨울바람에 눈물을 닦았던 휴지를 찾아내 친구에게 건넸고, 입을 대강 닦은 친구는 소중한 검정 워커를 더 꼼꼼히 닦는 젠더 표현을 그 와중에도 잊지 않았다.

아주 가혹한 테스트를 통과한 느낌이 들었다. 일종의 성인식인지도 몰랐다. 친구와 애인에게 이 일은 러브라든가 파트너십 같은 고상한 말로 설명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인성과 우정, 그리고 위생을 시험받고 도전받는 긴 터널을 견뎌내는 시간이었다. 

역사 밖을 나온 친구는 어김없이 바로 담배를 꺼내 물었고, 나는 언제나처럼 그에게서 최대한 멀어지며, 증맬 지독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담배를 피우는 놈들은 꼭 항상 저런 면들이 있었다. 그렇게 만천하에 내장을 다 까뒤집고도 담배를 끝까지 입에 물어대는 고집, 끈기, 혹은 지롤…… 토론토 공항에서 뉴욕행 비행기 탑승시간이 임박했다는데도, 끝까지 전화로 면세점 담배 가격을 샅샅이 물었던 친구는 여기서도 변치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역에서 집으로 걸어오는 길, 지하철 바닥에 자신의 바닥도 어느 정도 많이 내려놓고 온 친구는 어느 때보다 가벼워 보였다. 그런 친구에게 나는 어젯밤에 너에 대한 어떤 얘기도 책에 써도 된다고 한 걸 기억하냐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