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영혼의 서쪽 벽

들판을 뛰어다니던 까마귀들은 날아갔다. 구름이 왔다. 엄청난 뇌성이 울리고 폭우가 쏟아졌다. 우리의 얼굴은 빗물로 젖었다. 빗물은 배수로를 넘쳐흐르며 풀들이 무서운 속도로 물속에 잠겼다. 들판은 물이 출렁이는 늪처럼 변했다. 나무둥치를 두드리던 딱따구리가 소리가 그쳤다. 우리는 손을 잡고 뛰었다. 신발 속으로 물이 차올랐다. 우리라니, 누구를 말하는가? , 쏟아지는 비. 갑자기, 내가 최초로 썼던 글의 제목이 떠올랐다. 그건 폭우였다. 폭우가 내리던 여름날, 유리창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던 교사는 갑자기 우리에게 폭우에 관한 글을 당장 쓰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우리는 시의 구조와 주제 음운론 어휘풀이 등을 적어나가던 노트에폭우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 교실은 아주 조용했다, 속삭임이나 한숨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교사는 우리의 방해를 받지 않고 상념에 잠기기를 원했다.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날 내가 쓴 작문의 내용은 단 한 글자도 기억나지 않는다. , 쏟아지는 비. 봄에 피처럼 검붉었던 너도밤나무 잎새는 갈색으로 변했다. 번갯불이 번쩍였다. 들판을 뛰어다니던 까마귀들은 날아갔다. 바람 속에서 불의 냄새가 났다. 우리는 손을 잡고 뛰었다. 집 울타리 앞에 도착하니 테라스 지붕의 처마에서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빗물의 장막이 보였다. 이미 몇몇 지역에 침수가 일어났다는 뉴스가 있었다. 테라스에 내다놓은 물건들, 식탁과 의자, 양털 깔개, 스웨터와 겉옷, 책들, 양탄자 등이 모두 물에 흠뻑 젖었다. 우리의 옷과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고 장화 속은 빗물로 출렁였다. 집안 전체는 습기로 눅눅했다. 우리는 옷을 벗어 물을 짜내고 의자 등받이에 걸쳐놓았다. 뇌우 속에서 소방서의 사이렌이 몇 번이나 울렸다. 나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호수가 넘치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 집 앞의 들판이 물에 잠기고 물이 우리의 정원 안으로 밀려들어올지도 몰랐다. 테라스 천장의 목조 골격은 비에 젖어 검은색으로 변했다. 처마 아래 놓아둔 목재 까마귀상도 마찬가지이다. 번개가 그치지 않으므로 우리는 안전을 위해 오두막의 전기를 껐다. 어둠 속에서 촛불이 타올랐다. 전기 레인지를 사용할 수 없으므로 차가운 요구르트와 오트밀의 저녁식사. 밤이 되자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서까래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오두막은 작은 돛대를 가진 지붕 달린 뗏목으로 변했다. 자작나무 장작은 물에 젖어도 탄다고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말했다. 그러니 혹시 숲속에서 폭우를 만나 길을 잃어버리더라도 자작나무만 발견할 수 있으면 떨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자작나무를 찾아 헤맨다. 자작나무 모닥불을 만들 한줌의 마른 땅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무엇으로 불을 붙일 것인가. 나는 부싯돌을 갖고 있지 않다. 거센 파도가 우리의 뗏목을 흔들었다. 한 사발의 쌀과 한 덩이의 빵 그리고 한 잔의 물이 있으면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 자작나무 장작과 함께. 번개가 치면서 폭탄이 터지듯이 커다란 소리가 났다. 정원의 나무들이 바다처럼 움직였다. 폭우 속에서 나무들은 바다와 같은 소리를 내며 출렁였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오늘을 슬픔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그는 여름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여름의 빛, 여름의 냄새, 여름의 선언을 열애하기 때문이다. 그 여름이 지나가고 있음을 느낀다. 투야나무 울타리의 쇠 빗장이 덜컹거리는 소리에 귀기울이며 우리는 폭우 속에 앉아 있었다. 젖은 장작을 태우면 벌레들이 기어나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우리가 잊은 모자가 테라스의 어둠 속에서 젖고 있었다.

 

게르하르트 마이어를 읽었다. 어린 시절이란 다른 무엇보다도 공간이라고 게르하르트 마이어는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빛과 소리로 이루어진 공간. 그 공간 속에서 아주 어린 나이부터 막연한 상실감, 길을 잃고 내던져진 듯한 느낌을 알았던 아이. 벚나무 위에서 보낸 시간들, 햇빛이 퍼져나가고, 바람은 데이지꽃 무리를 흔들고 닭들의 깃털을 부풀린다. 그 위의 허공을 차지한 제비들. 당연히 간혹 비가 내리고 눈이 쏟아지기도 한다. 흰 서리가 내리면 가축우리의 철조망은 은백색의 섬세한 장신구로 변한다. 차갑고 새파란 하늘에는 까마귀들이 날아다닌다. 스위스인인 그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북독일과 보헤미아 지방의 농장에서 관리인으로 일했는데 북독일의 뤼겐섬에서 그의 어머니를 알게 되어 결혼했고 이후 스위스로 돌아왔다. 형제 중의 막내로 스위스에서 태어난 게르하르트 마이어는 68세가 되어 뤼겐섬을 처음 방문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로부터 뤼겐섬의 바다와 새하얀 백악질 절벽, 어머니가 학교 소풍을 갔던 호수와 바람꽃이라고 불리는 야생 아네모네가 피어 있는 너도밤나무 숲의 풍경을 들어왔다. 그리하여 그의 상상 속에 자리잡게 된 북독일 바닷가의 풍경과 실제로 만나본 뤼겐섬의 모습이 거의 그대로 일치하는 데 큰 충격과 감동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아마도 어머니가 태어났을 곳으로 추측되는 집을 방문했고, 그곳 정원의 흙을 한줌 플라스틱 봉지에 담아 스위스로 가져왔다. 센티멘털한 행동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아마도 어머니는 어린 시절 그 흙을 만지고 놀았으며 소녀이던 어머니가 그 흙을 파고 물망초를 심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르하르트 마이어는 썼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오직 기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 내린 다음날, 우리는 들판을 지나 호수로 갔다. 모래흙이 깎여나가 길은 군데군데 파인 자국이 생겼고 풀들은 쓰러졌으나 빗물은 대부분 길가 배수로로 흘러가버린 다음이었다. 단 한군데 들판만이 호수처럼 물이 고여 있었다. 흙이 쓸려나가버린 자리에는 마치 죽은 뱀처럼 나무뿌리가 기다랗게 지표면으로 드러났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교가 문을 열었다. 하교 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는 아이들이 보인다. 오래전 우리가 처음 알게 된 시기에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한국에 있던 내게 부탁했다. 어린 시절의 장소로 가달라고. 그곳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달라고. 자신은 내 어린 시절의 장소를 알기 원한다고

나는 도시에서 태어났지만 바닷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다시 도시로 돌아와 학교를 다녔다. 당시 도시는 하루하루 팽창하고 있었고, 우리는 모두 숨막히는 밀도에 익숙했다. 지금 내 어린 시절의 장소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고 내가 자란 바닷가 도시의 집은 오래전에 사라졌으며 서울의 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들 그렇듯이 나 또한 그것을 당연하게만 여겼다. 무엇보다도 그의 부탁은 나를 매우 당황하게 만들었는데, 어린 시절의 집에 의미를 부여하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 집들이 있던 곳은 거의 다 아파트로 변했다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한국의 아파트는 네가 말하는 어린 시절의 장소가 될 수 없노라고. 설사 거기서 태어나고 자랐다 할지라도, 어린 시절뿐 아니라 그 무엇을 위한장소도 될 수 없노라고. 집들은 사라지거나 교체되고 지상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장소의 익명성에 익숙하다고. 내가 자라난 대도시의 삶은 마치 공동묘지의 집단 매장 구역과도 같다고. 개개인의 묘석도 없고 망자의 이름과 생몰연도는 따로 기록되지 않는다고

선조가 세운 집에서 태어나 살았으며 아마 앞으로도 살게 될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도시인들과는 매우 다른 고향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의 고향은 한 채의 농가로 이루어진 전원이다. 처음 집을 지은 농부는 차츰 인근에 물방앗간과 목재를 가공하는 제재소를 지었다. 집에서는 가축을 돌보았으며 겨울이면 숲에서 사냥을 하거나 벌목 일을 했다. 가장 가까운 이웃집은 수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농부들은 신앙심이 깊었고 일요일이면 다들 교회에 갔다. 일꾼들이 모이는 식당에서는 온갖 미신과 소문과 마법적인 이야기가 오갔다. 그의 어머니는 말했다, 이 세상의 삶이란 오직 연극이며 리허설이라고, 진짜 인생은 신 앞으로 간 이후에 비로소 시작된다고. 밤이면 오직 별들만이 빛났다. 밤이면 오직 인근 강물이 흐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집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학교는 남아 있겠지, 하고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약간 실망하며 말했다. 그렇다, 나는 어린 시절의 학교를 기억한다, 조용하고 무표정하고 낯설어하고 어리둥절해하던 얼굴들을 기억한다. 무방비 상태인 그들의 맨발을 기억한다. 학교는 폭력적인 장소였는데 조용하고 무표정하고 낯설어하고 어리둥절해하던 얼굴들에게 좀더 폭력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얼굴들을, 그들의 맨발을 기억하는 것이 두렵기도 하다. 그런 얼굴들이 거의 매일 새롭게 나타났다. 풀 한 포기 없는 운동장은 먼지가 자욱했다. 학생 수가 너무 늘어나서 어느 날 갑자기 우리는 하나의 교실을 두 학급이 나누어 쓰기 위해 2부제 수업을 진행해야 했다. 반면에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고향에서 작은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네 학년이 모두 한 교실에서 한 명의 교사에게서 수업을 받았다고 했다. 1학년이 철자법을 연습하는 동안 2학년은 시를 석판에 옮겨 적었고 3학년은 산수를 하고 4학년은 작문을 써야만 하는 식이었다. 교사가 한 학년을 대상으로 가르치는 동안 다른 학년들은 각자 부여받은 과제를 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당연히 교사가 다른 학년에게 설명하는 말이 귀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고 학생들은 산만해질 수밖에 없었다. 3학년 때 옆자리의 학생이 수업 시간 내내 그를 컴퍼스로 찔러대며 괴롭혔다고 했다. 그는 교사에게 가서 괴롭힘을 호소했으나 교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당시 교사는 게이였고 하필이면 그의 옆자리 학생의 형과 커플인 사이라서 아무리 심한 장난을 쳐도 교사는 눈감아주었다는 것이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자리를 바꾸어달라고 끈질기게 부탁하여 마침내 새로운 자리로 옮겼으나 이번에는 옆자리의 아이가 매일 수업 시간에 오줌을 쌌다고 했다. 고향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 유일한 학교의 상황이 이러했으므로 그는 아홉 살의 나이로 부득이하게 집을 떠나 수녀원 부설 기숙학교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로소 공부라고 할 만한 것을 처음으로 배울 수 있었는데 불행히도 하루종일 아이들의 일상을 통제하는 수녀들의 엄격함과 폭력성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의 기숙학교의 친구인 F는 지금까지도 그 경험을 트라우마로 갖고 있다. F가 가톨릭에 등을 돌린 결정적인 이유도 그것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비슷한 피해를 입은 희생자들이 추기경에게 편지를 보내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일들이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조차도 거부할 정도로 F는 교회와 그 어떤 인연도 맺고 싶지 않다고 했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강압과 폭력적인 환경에 놓였지만 그것을 F처럼 심각한 상처로 기억하는 것 같지는 않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유를 물어보니 자신은 카를 마이의 모험소설을 읽으며 모든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고 심지어 상처나 분노도 판타지의 힘 앞에서는 다 소멸되어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인 이유는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수녀원의 거의 폭압적인 암기 교육이 자신의 지적, 정신적 성장에 어떤 식으로든 큰 도움이 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 밖의 상처는 스스로 치유할 수 있다. 예술가는 스스로를 치유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언젠가 F와 함께 자신의 어린 시절 학교인 수녀원을 찾아가보고 싶어한다. 기숙학교는 더이상 운영되지 않겠지만 수녀원 건물은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집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학교는 남아 있겠지, 하고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말했다. 집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아마 학교는 남아 있을 것이다. 학교를 없애고 아파트를 짓는 이야기는 아직은 들어보지 못했으므로 어쩌면 학교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장소이다. 하지만 나는 그 학교를 실제로 눈에 담을 자신이 없다. 내 안의 무언가가, 그게 무엇이든, 증폭될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폭된다고 한들, 무엇이 문제인가. 사나운 파도가/ 오고 그리고 간다.* 그것뿐이다. 학교는 오직 기억으로만 존재한다. 기억 속에 떠오르는 그 장소는 황량하고 사납고 슬프다. 그런데 그 황량함과 사나움과 슬픔은 수녀들의 손찌검이나 혹독한 규율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내 내부에서 우러나와 어린 시절의 사물들에 투영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슬픔의 아이들이 오고 그리고 간다.

기억을 다루는 방식에서 나와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얼마나 다른지 나는 종종 깨닫는다. 만약 그의 어머니가 머나먼 뤼겐섬 출신이었다면, 아마도 그는 그곳으로 찾아갔을 것이다. 바닷가의 흰 절벽들. 그리고 아마도, 게르하르트 마이어와 마찬가지로, 플라스틱 봉지에 어머니의 생가 마당의 흙을 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게르하르트 마이어가 그랬듯이, 그 시절 부모들이 북독일을 떠나 스위스로 올 때 거쳤으리라고 생각되는 경로를 그대로 따라 여행하는 방식을 택했을 것이다. 그들이 기차의 차창 밖으로 내다보았을 중간 기착지 베를린 거리의 모습을, 같은 마음으로 내다보기 위하여. 나는 카를 마이를 읽지 않았다. 인디언 모험 이야기를 좋아했을지도 의문이다. 내가 자란 바닷가의 도시는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달라졌으나 그 사실은 내 안의 무엇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나는 스스로를 치유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치유되지 못한다.

게르하르트 마이어는 썼다. 그의 누이 기젤라의 남편 페르디난트가 죽었다. 그가 마을 묘지의 흙 속에 묻힌 날, 기젤라는 그가 추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흙은 축축하고 차가우니까. 그날 이후 매번 부엌 창 너머 묘지를 건너다볼 때마다, 기젤라의 몸은 실제로 흙의 냉기를 느낀다. 기젤라는 추위에 떤다.

 

9월을 생각하면 마치 마지막의 시작과 같은 느낌이 든다. 작년 9, 베를린 서가의 주인과 나는 실스마리아로 갔다. 니체하우스를 보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그곳으로 간다고 하니 취리히의 친구 R이 지나가듯이 말했다. R의 부모님은 실스마리아 인근의 한 작은 마을인 본도의 묘지에 묻혀 있노라고. 부모님은 마을에서 가까운 산 위의 양치기 오두막을 구입하여 말년의 많은 시간을 그 오두막에서 보냈다고. 마을에는 아주 오래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마틴 교회가 있는데 그 안에는 최후의 만찬벽화가 있으니 기회가 된다면 들러보아도 좋을 거라고.

R이 알려준 본도 마을은 실스마리아에서 멀지 않았다. 우리가 마을로 간 날은 비가 내렸다. 구불구불하게 산을 한참 내려가는 3번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가다가 다리 앞에서 본도Bondo’라고 적힌 표시판이 나오면 좌회전하여 마을로 진입한다. 우산도 없이 우리는 비에 흠뻑 젖은 채 교회를 찾아갔다. 마을 중심부는 좁고 가파른 골목길로 이루어졌다. 낡은 집들은 테라스에 제라늄 화분을 내놓았고 오래되어 맨질맨질하게 닳은 검은 돌계단은 빗물에 미끄러웠다. 우리는 단 한 명의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이곳에는 누가 사는 것일까. 자료에 의하면 이 마을의 주민은 이백 명 남짓이다. 우리는 성 마틴 교회를 발견했는데, 교회 전면의 벽화를 보자 이 교회가 얼마나 오래된 건축물인지 상상할 수 있었다. R이 말해준 최후의 만찬 벽화는 교회 안 측면 벽에 있었고 커다란 기둥 하나가 그림의 일부를 가리고 있었다. 우리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대화를 나누었다. 조금이라도 큰 소리를 내면 이 낡은 벽화가, 무엇보다도 벽화의 노랑과 초록, 붉은색 색채가 자아내는 잔잔하고도 신비로운 톤이 흔적도 없이 부스러져내려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모든 색채와 형체는 부드러운 흙과 기름으로 이루어진 낡은 종이나 가죽의 질감을 연상시켰다. 이처럼 박물관에는 없는 오래된 벽화를 보기 위해서 동굴과 석굴, 사원과 교회로 직접 찾아가는 여행자들을 나는 알고 있다. 밖으로 나오니 빗줄기는 돌바닥 위로 점점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교회 뒤편으로 묘지로 올라가는 길이 있었다. 묘지에는 문이 있었으나 잠겨 있지는 않았다. 우리는 비를 맞으며 잠시 묘지를 산책했다. 마을의 주변은 산으로 둘러싸였다. R의 부모님이 살았다는 오두막은 어디에 있었을까. 차를 세워둔 곳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어느 집의 문이 열려 있고 환하고 따스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 저곳은 혹시 카페가 아닐까, 우리는 저기서 몸을 녹이고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 있지 않을까 기대에 들뜬 나는 그 집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곳은 카페와 같은 상업시설이 아니었다. 마을의 어디에서도 우리는 그런 장소를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어떤 이유에서든 문을 열어놓았고, 우리는 집안을 볼 수 있었다. 손바닥만한 거실에는 커다란 탁자가 있고 탁자 위에는 아름답고 커다란 도자기 그릇에 과일이 담겨 있었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짙은 호두색 목재로 꾸며진 어두운 실내 한구석 노란색 조명이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줄기를 비추고 있었다. 우리는 빗물에 몸이 젖는데도 불구하고 잠시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스마리아를 예정보다 며칠 앞당겨서 떠나야만 했는데, 기상이 나빠지고 눈이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던 탓이다. 우리는 며칠 뒤 독일에서 약속이 있었으므로 도로가 얼어붙어 교통이 통제될 것이 두려웠다. 해발 천팔백 미터가 넘는 실스마리아는 눈이 내릴 경우 자동차 운행이 불가능하여 산악열차에 견인되는 형태로만 산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고 했다. 실스마리아에서 내려오는 산길은 현기증이 날 만큼 경사가 심했다. 9월이 가까워오자 우리는 작년의 실스마리아 여행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언젠가 9월에 다시 실스마리아로 가서 니체하우스에서 묵게 될지도 모른다.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그걸 원하기 때문이다. 1880년대 니체는 실스마리아에서 머물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일부를 썼다. 그가 살았던 집은 니체하우스란 이름의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예약을 하면 숙박도 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만약 우리가 다시 실스마리아에 간다면 본도 마을의 성 마틴 교회를 한번 더 방문하여 최후의 만찬 벽화를 보고 R의 부모님이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 묘지를 산책하고 싶다고 했다. 만약 날씨가 좋고 우리에게 비옷과 튼튼한 신발이 있다면, 우리는 R의 부모님의 오두막이 있는 산으로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자동차를 타고 머나먼 실스마리아로 가는 대신, 매일 그렇듯이 우리는 오늘도 걸어서 호수로 간다. 들판에는 회색과 검정이 섞인 까마귀들이 있다. 초여름 불그스름한 여운으로 파도치던 자우어암퍼는 검은색에 가까운 어두운 갈색으로 물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검은 옷을 걸치고 안개 속에 서 있는 작은 과부들과 같았다. 여름의 풍성한 목초지도 여름의 황금빛 밀밭도 따스한 햇볕을 머금은 싱그러운 풀냄새와 함께 사라졌다. 하루는 매일매일 확연하게 짧아지고 있다. 마을의 교회에서 저녁 여섯시 기도 종소리가 울린다. 바람이 불때마다 나뭇잎에 매달려 있던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져내린다

우리는 사람 없는 호숫가에 앉아 책을 읽는다. 나는 게르하르트 마이어를,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아르노 슈미트를. 비 온 뒤 호수의 수위는 높아졌다. 수면을 향해 늘어져 있던 나무들의 가지 끝이 물속에 잠긴 것이 보인다. 기슭으로 떠내려온 커다란 죽은 물고기 한 마리. 수평선을 향해 빠르게 기울어지는 황금빛 태양과 거꾸로 선 횃불처럼 물 위로 길게 반사되며 하얗게 활활 타오르는 저녁 빛.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오늘 물속에 들어갈 마음이 없다. 날이 너무 차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충동을 느끼고 잠시 동안 수영을 했다. 친구 토마스와 코니 커플은 계절에 상관없이 거의 일 년내내, 호수가 얼어붙지만 않으면 수영을 한다고 했다. 나는 지난겨울 눈 덮인 숲속 호수에서 나체로 수영하던 여자를 생각했다. 비온 뒤 호수의 물은 투명하고 살짝 어두웠다. 물가 버드나무 아래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책을 읽고 있었다. 자줏빛 구름은 갈가리 찢어진 형태로 서쪽 하늘에 몰려 있었다. 나는 물속에 있었다. 물이 따뜻하다고 느꼈다. 호수에는 나 혼자였다.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모래흙은 부드러웠고 죽은 물고기는 동그란 두 눈을 뜨고 있었다. 오래전 폭우가 내렸고, 수업을 할 마음이 없었던 교사는 우리에게 작문을 지으라고 말했다. 교실은 조용하다. 오직 빗물이 흘러내리던 유리창들뿐. 이 그림을 나는 서쪽 벽에 건다.

영혼의 서쪽 벽에 걸린 그림이라고 게르하르트마이어는 썼다.

물속에서 나는, 빗물에 젖어 있던 차가운 분도 마을의 묘지를 생각한다. 우리는 묘지 출입문의 빗장을 벗기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이 정말로 R의 부모님이 묻혔다는 그 묘지가 맞는지 우리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만약, 이곳에 이 흙속에 정말로 내가 아는 누군가가 묻혀 있다면, 나는 비 내리는 이 묘지를 결코 눈에 담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에 젖은 돌계단을 밟고 녹슨 철제 빗장을 벗기고 묘지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흙속에 스며드는 빗물이 실제로 차갑기 때문이다. 내 몸이 차갑게 젖어오기 때문이다. 사나운 파도가/ 오고 그리고 간다. 나는 부엌 창 너머로 바라본다. 그리고 실제로 흙의 냉기를 느낀다. 나는 추위에 떤다.

 

 



*베르너 프리치, 『내 마음은 공허하여라MEIN HERZ IST LEER』(MOLOKO PRINT 173, 2022)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