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마치며

남궁인의 말


인터넷에 연재되는 문학웹진은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는 편견이 있었다. 그래서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한동안 누군가를 만날 때면 직업을 불문하고 모두가 “그…… 이슬아 작가하고 쓰는 편지”를 잘 보고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지난주에는 출근하니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1년 차 레지던트가 다음 편지는 어떤 내용이냐고 물었다. 어제는 인터뷰가 있어 집에 각기 소속이 다른 인터뷰 기자, 사진작가, 에디터 세 분이 왔다. 내가 전날 이슬아 작가님과 술을 마셨다고 했더니, 안 그래도 ‘우.사.오.’를 너무 재미있게 보았다고 세 분이 동시에 대답했다. 이것이 웹진의 힘인지 편지의 힘인지 아니면 이슬아 작가의 힘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왠지 이슬아 작가님의 편지만 읽고 내 편지는 건너뛰지 않았냐는 농담을 하려다가 참았다. 이러다가 또 혼난다고.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라는 제목 또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나는 제목을 짓는 일에 너무나 서투르기 때문에 편집자와 이슬아 작가님의 논의에서 나온 의견에 모조리 ‘찬성’으로 한 표를 던졌다. 어차피 내가 짓는 것보다 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목을 받아들고 나는 우리 사이의 오해를 적당히 털어놓고 약점도 고백한 다음 종국으로 향해갈수록 이산가족 상봉하는 것처럼 대화합이 펼쳐지는 결말을 구상했다. 하지만 웬걸. 그건 내 생각이었고 서간문은 혼자 쓰는 것이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우리 사이엔 정말로 태평양같이 너른 오해의 바다가 있었다. 결국 이 서간문은 마지막 편지까지 “오해는 흔하고 이해는 희귀하다”라는 명문장을 낳았다. 대화합으로 연재를 마쳤는지는 둘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는 임시로 지은 제목이며, 출간시에 제목을 다시 정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제 너무 유명하다.


열 달 동안 이슬아의 세계에서 살았다. 편지를 가장 먼저 받아 가장 많이 반복해서 읽었다. 쓰기 위해서는 곱절의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연재 내내 답을 구상하며 보낸 셈이다. 처음에는 편지가 반가웠고 나중에는 조마조마했다. 갑자기 전화를 걸어 외치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꾸짖으면 한 주간 너무 힘들다고!” 하지만 산더미 같은 마감을 쌓아두고도 서간문에 먼저 손이 갔다. 정신을 차려보면 엄청난 분량을 써놓고 있었다. 자신의 치졸함을 고백하는 글쓰기는 얼마나 즐거운지 모른다. 자애롭고 준엄한 수신자가 있다면 더더욱.


그럼에도 사람의 본성은 부단히 노력하지 않는 한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 편이 더 쉬운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글쓰기야말로 자신의 본성을 비추는 노동의 산물이라고 믿는다. 둘은 같은 시작점에서 출발해 서간을 쓰는 노동을 하면서 필연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것이 한 명은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이었고, 다른 한 명은 눈을 내리깔고 발밑을 더듬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조금 더 편한 자세로 글을 쓰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배운 점이 많았다. 진정한 우정과 애정을 나누어준 이슬아 작가에게 너무나 감사하다. 그 희귀하다는 이해를 앞으로도 같이 찾아볼 것을 제안한다.


2021년 5월 

남궁인



이슬아의 말

 

남궁인식 인사법에 관해 생각하고 있다. 편지 바깥에서 그는 좀 이상한 방식으로 인사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딘가에서 만나기로 한다. 조신한 걸음으로 그가 약속장소에 나타난다. 점점 가까워져오는 그의 모습은 훤칠하고 멀끔하다. 내가 시원시원하게 “안녕하세요!”라고 하면 선생님은 예의 그 상냥하고 자분자분한 말투로 “안녕하세요~”라고 대답한다. 생소한 동작을 하는 건 바로 이때인데, 그는 양손을 자신의 옆구리 높이까지만 살짝 올리고는 ‘부르르’ 떨듯이 흔든다. 레몬을 생으로 입에 넣었을 때처럼, 그래서 순간적으로 어깨가 들썩여질 때처럼, 몹시 시다는 듯한 얼굴로 그렇게 한다. 특수문자로 표현하자면 ‘(>_<;;)’ 이것에 가장 가까운 얼굴이다. 처음에는 뭘 잘못 드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격한 반가움의 표시라는 것을 알게 된 건 두번째 만남부터다. 도대체 얼마나 반가우면 그렇게 인사를 할까. 요즘엔 그를 만나면 나도 따라해본다. 양손을 옆구리 높이까지만 올리고 부르르 떨며 인사를 한다. 그리고 신맛의 반가움에 관해 생각한다. 살짝 괴롭고 짜릿하고 너무 좋은, 그래서 눈을 질끈 감게 되는 그런 반가움은 정말 흔치 않다.


신맛의 반가움 속에서 편지를 주고받았다. 남궁인 선생님이 얼마나 허술한지, 얼마나 잘 너덜너덜해지는지, 얼마나 잘 사과하는지, 얼마나 잘 고백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따뜻한지 실감하는 열 달이었다. 우정과 배신, 걱정과 구박, 조롱과 위로를 넘나드는 연재였다. 지금까지 해본 연재 중 가장 수월하고 즐거웠다. 한편으로는 서간문의 자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수많은 역할극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연재의 어느 대목은 스턴트맨 두 명이 합을 맞춰 찍는 액션 신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서로가 진짜로 부상을 입지는 않도록 심혈을 기울이면서 함께 만든 과격한 장면들을 기억한다. 나는 다른 지면에선 시도해본 적 없는 자세로 상대를 엎어치거나 메치고 싶었다. 남궁인 선생님 역시 낯선 자세로 한 바퀴 구르거나 자빠져보고 싶었을지 모른다. 글쓰기는 변화에 관한 예술이며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전과 다른 자신이 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우리 둘 다 이 연재에서 처음 들켜버린 표정이 있을 것이다. 남궁인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나의 위악적인 얼굴은 훨씬 더 훗날에 드러났을 거라고 짐작한다. 내가 짓궂게 굴 수 있는 공간을 편지 안팎으로 넉넉히 내어준 그에게 고맙다. 그가 품이 넓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나를 반가워해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제 나와 남궁인 선생님께 남은 일은 이 편지들로부터 멀리 떠나는 일이다. 언젠가 이 모든 게 남이 쓴 글처럼 느껴질 때까지 함께 새로워지면 좋겠다. 미래에도 계속될 우리 사이의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으려 한다. 질문하고 듣고 대답하고 되물을 수만 있다면, 그럼으로써 달라질 수만 있다면 오해는 아주 사소한 어려움일 테니 말이다. 남궁인 선생님과 우정의 새 국면을 맞이하게 되어 기쁘다. 그를 만날 때마다 양손을 부르르 떨며 반가워할 것이다. 

 

2021년 5월

이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