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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좋아하던 것을 직업으로 삼는 일만큼 행복하고 동시에 불행한 선택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커피가 가진 마력에 영혼이 사로잡혔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 열락의 순간은 지금도 황홀함과 회한을, 칭송과 탄식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안암동 카페 보헤미안에서였다. 당시 나는 이미 가망 없는 커피 중독자 신세였다. 하루는 평소대로 주문한 커피를 받아들었는데 그날따라 왠지 모를 사악한 기운이 확연했다. 강하게 볶은 원두를 융 필터로 진하게 내린 커피였는데, 흔치 않은 노란색 잔에 담겨 있었다. 커피는 육수처럼 걸쭉하고 표면에는 기름이 둥둥 떠 있고 색깔은 검다못해 보랏빛이 감돌았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 모금 마셨는데 그걸로 끝이었다. 호로록 쩝쩝. 나는 인생을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는 그 커피를 마시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얼마 후 나는 무엇에라도 홀린 듯, “여기서 일하게 해주세요”라고 보헤미안 점장님께 말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16년이 흘렀다.

 

허술하게 살고 있다. 좋은 재료를 구한답시고 커피 산지를 떠돌고, 품질을 높여야 한답시고 볶아놓은 원두 앞에서 늘 안절부절. 사장이랍시고 직원에게 일장 훈계를 늘어놓지만 나나 잘해야 한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다. 장사꾼이랍시고 매출 계획을 세워보지만 사실 나는 손님들이 운과 기적의 영토에 사는 신비한 족속이라고 믿는 편이다. 많은 것을 쉽게 규정하고 단정했던 지난 삶을 부끄러워하기도 버거운데 아니, 연재랍시고 뭔가를 써내기로 하다니.

 

 

아무튼, 이 연재에서는 커피로 돈 좀 벌어보려고 좌충우돌하고, 일도 삶도 뜻대로 되지 않아 아등바등하던 기억을 주술로라도 불러모으려고 한다. 막상 모아놓고 보면 이것이 내 기억이 맞나 싶기도 하다. ‘나는 무엇을 잊었나?’는 결코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알 수 없는 것은 알고 싶지 않다. 별수 없이 허술하고 긴가민가한 글일 테고, 보나 마나 커피 얘기다.

 

2020년 6월

서필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