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시와 산문 사이를 우왕좌왕하며

어떤 사람들의 산문은 감히 산문을 쓰는 일을 감히 거들떠볼 수도 없게 만든다. 가령 리베카 솔닛, 존 버거의 산문을 읽으면 나는 산문집 계약은 미친 짓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나에게 용기를 주는 작가들도 있다. 아니 에르노, 멀리사 브로더, 소피 칼 같은 한 부류로 묶을 수는 없지만 산문을 통해 정신의 해부학 같은 글을 쓰는 여성들. 나는 잘 쓰는 건 못해도 솔직하게 쓰는 건 자신 있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고민한다. 내가 정말 솔직한가? 


시를 쓰는 나는 종종 나를 능가한다. 산문을 쓰는 나는 한 문단을 끌어갈 호흡도 없는 바보다. 왜 이렇게 큰 격차가 생겨버리는 걸까. 쉬운 말로 모드 전환이 안 되어서 그래, 라고 말하고 말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버튼이 있어서 ■를 누르면 시가 나오고 ▽를 누르면 산문이 나오고 그런 게 아니니까. 시도 잘 쓰고 산문도 잘 쓰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아니다. 나는 갑자기 김종삼을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김종삼은 사실 산문 바보였던 거 아닐까요? 그런 식으로 상상해보면서 혼자 웃는다.


산문집을 계약한 건 남편이 너무 많은 카드빚을 졌기 때문이다. 내가 어디 가서 갑자기 목돈을 구하겠어? 이 글을 쓰는 나는 지금 그와 이혼 숙려 기간을 보내는 중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산문집 계약을 안 했을 텐데. 아이고, 하며 후회하고 있다. 근데 또 한두 권 계약한 게 아니라서 여기저기 “안녕하세요. 제 쓰레기를 읽어주세요!” 하고 내 치부를 자랑하게 생겼다. 계약금을 돌려줄 여력도 없다. 그래서 일단 써보려고 한다. 오늘 몇 매나 쓸 수 있을까? 이런 글을 모아서 출간하는 건 나무에게 너무 미안한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집을 낼 때는 나무에게 미안한 적이 없었는데요. 


나는 내가 싫다. 나는 내 삶도 싫으면서 좋다.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하면서 안도한다. 이 세 문장은 아마도 이 산문집의 키워드가 될 것 같아서(아마도) 적어둔다. 나는 시인같이 말하는 걸 즐기지만 시인같이 말하는 나를 약간 병맛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지금 나는, 마음속 새장을 열어 새를 꺼내고 그 새를 죽인 다음 새를 대신해서 하얗고 큰 돌을 새장 속에 넣는 이야기를 끝도 없이 쓸 수 있다. 그건 얼추 시 같은 얘기일 것이다. 그치만 내 마음속에 새장 같은 건 없어. 솔직히 시는 시고 산문은 산문이야. 실망해도 어쩔 수 없어. 새를 죽이는 하나하나의 과정을 검은 눈동자를 마주보며 웃는 미친 화자를 묘사할 수도 있다. 동물권은 소중하니까 은유적으로라도 새를 죽이는 얘기를 쓰면 엄청난 화를 당할지 모른다. 시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에도 주저하게 된다. 점점 커지는 자기검열. 나는 욕먹기 싫다. 나는 욕하고 싶다. 이 세상과 이 세상의 모든 추와 미에 엿을 먹이고 웃으면서 불에 타 죽고 싶다. 근데 안 그럴 거니까. 


나는 평론가를 싫어한다. 나는 시인도 싫다. 나는 소설가도 싫다. 음악가도 싫고 진짜 착한 사람도 진짜 나쁜 사람도 싫다. 나는 그냥 인간 전반이 싫다. 나는 이런 기만적인 내가 가장 싫다. 이렇게 싫다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게 아마 이 책의 내용일 것 같다. 나는 싫은 게 너무 많다. 근데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건 너무 좋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다 싫다. 세상의 모든 선의를 의심하면서도 선의를 믿는 바보 같은 내가 싫다. 이 책을 쓰게 만든 전 남편 예정자가 너무나도 싫다.


계통이라면 조립이며 배설입니다. 


줄에 묶인 두 발입니다.


한 아이가 만들어낸 엄마입니다.


벌레가 없는 깨끗한 뼈로 조립한 인간. 


그게 내 이름입니다.


누군가는 이런 글을 쓰는 시인(?) 백은선도 좋아해줄까. 출판사에서만은 좋아해줬으면 좋겠다. 나보다 잘 쓰는 사람 엄청 많은데 시인이라고 산문집도 내고 부끄럽다.


한동안 일기 썼었지, 그래. 상담받으러 다니면서, 『애도일기』 읽고 갑자기 일기 뽕 맞아서 열심히 썼었지. 감정을 못 느껴서. 잃어버린 감정을 찾아서, 헤매느라고. 정신과 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가. 원래도 그랬지. 나는 내 삶을 구경해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요. 느끼지도 못하는데 뭘 쓰겠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요. 기계 인간이에요. 아침이면 일어나서 애 보고 출근하고 집에 오면 책 읽고 자요. 그래도 꼴에 좋은 건 알아가지고 좋은 거 읽으면 전생처럼 두근거려. 질투 나. 


아마도 이 산문집을 질투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다행이에요. 얼마 전에 산문을 발표했는데 교정지에 편집자가 디자이너에게 보내는 메모가 함께 스캔되어 있었다. ‘글이 너무 파편적이라 문단을 나눠야 할 것 같아요.’ 확인사살 감사합니다. 파편이 내 삶의 숙명 같아요. 엄마로 시인으로 작가로 가사노동자로 선생으로 살면서 매일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습니다. 그래 그게 숙명이라면 파편의 대마왕이 되고 말 거야. 


모두가 침묵할 때 함께 침묵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그러면 내가 살 것 같아요. 


죽은 사람은 잘 생각 안 해요. 생각도 안 나고 생각해도 안 슬퍼서요. 그런 내가 무서워서요. 


사실은 매일 생각해요. 생각해도 살아나지 않아서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미안하니까. 


뭔 소리 하는 거야? 하고 느끼셨다면 그 생각을 의도한 게 맞습니다만. 자세한 얘기는 하기 싫어서요. 공감받는 건 정말 별로니까.


너도 사실은 네가 누군지 알기 싫잖아. 나도 내가 누군지 알고 싶지도 않고 함부로 정의당하기도 싫어. 


자, 이제 미리 보기 창을 닫고 다른 책을 살펴보세요. 아니면 책을 닫고 어디든 바깥으로 나가세요. 인간은 아직 건강을 추구할 수 있답니다. 


*


위 글은 책을 출판할 때 서문을 대신하려고 쓴 것이다. 산문을 연재하게 될 줄 모르고 있었고 세상 전반에 몹시 분노하고 있었던 때이다. 지금은 이혼을 한 지 반년 정도 지났고 여전히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지만 분노만은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다. 한때는 내 모든 것이 분노라고 생각했는데 분노마저 사라진다면 나는 도대체 어떤 인간이 될 수 있을까, 뭘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무섭다. 분노가 없어도 나는 구성될 수 있을까? 이제 분노가 사라진 자리엔 공허함과 무력감, 짜증만이 가득하다.


나는 대학생일 때 한강 선생님을 깊이깊이 부러워했다. 너무나 단호하면서도 우아하고 자신의 앞을 제대로 응시할 수 있는 사람이라서. 혼자 가만히 있어도 그 가만가만함이 가장 유연하면서도 단단한 사람이라서. 그 중심이 고요히 빛나는 걸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해서. 내가 보는 한강은 그랬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대학 내내 엄청나게 생각하고 노력했다. 그리고 당연히 실패했다.

실패의 요인은 방정맞음, 불성실함, 소모적인 생활, 우물쭈물하는 태도,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성질, 의지박약 때문이었다. 열거하라면 더 열거할 수 있지만. 아무튼 나는 나를 파악하는 자질만은 제대로 갖추고 있었고 그러므로 빠르게 포기했다. 한강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을. 


하고 싶은 말의 요지는 앞의 서문 격의 글에도 써뒀듯이 내 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산문을 안 좋아할지도 몰라서 무섭고 무섭지만 어쩔 거야 난 이미 내가 얼마나 엉망 괴짜인지 알고 이제 당신들 차례고 불만 있으면 읽지 마. 혹은 제발 잘 좀 봐주세요, 하는 양가감정? 


나는 내가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앨리 웡이 됐을 거라고 장난처럼 친구들에게 얘기하곤 했다. 2000년대에 태어났다면 글쓰지 않고 유튜버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난 항상 나를 표현하고 싶은 열망에 시달렸으니까. 뭘 그렇게 드러내고 싶었던 건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불쌍하게도. 

내가 어렸을 때는 세상에 컴퓨터와 인터넷이 없었다. 휴대전화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친구도. 할일이 별로 없어서 책을 많이 봤다. 지금도 가끔 부모님 몰래 피시 통신을 하던 시절이 그립다. 파란 화면. 악성 댓글 같은 건 존재하지 않고 모두가 서로 좋아하는 것을 격려하던 이상한 공동체 같은 느낌? 제대로 기억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나’ 혹은 ‘내가’라는 말을 안 하고 싶다. 이미 너무 많이 썼기 때문이다. 근데 자꾸 그러면 어떻게 하지? 연재한다고 생각하니 겁난다. 근데 원고료를 주니까 열심히 좋은 말을 해서 사람들을 막 재미있게 만들고 싶은데 막상 그런 생각을 하니 더 잘 안 되려고 한다. 저는 여기까진가봐요. 


연재 제목은 뭐로 하지? 될 대로 되라, 엉망진창 일기, 404 NOT FOUND, 친애하는 여러분????? 생각하고 싶은데, 이젠 생각이란 말도 그만하고 싶은데.


참고로 말하자면 제가 쓰는 모든 이야기는 출판사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가 망글을 쓰는 것이 해를 입힐까 두렵습니다. 


오늘은 코로나 때문에 출근하지 못(안)한 지 거의 한 달째다. 돈을 너무 아껴 썼더니 꼭 써야 되는 신용카드 최소 사용액 삼십만원을 못 채울 것 같다. 삼십만원을 못 채우면 이억팔백만원에 1% 가산금리가 붙는다. 뭔가 사야만 하는데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담다가 다 부질없다는 생각에 그냥 앱을 꺼버렸다. 치약 샴푸 비누 세제 화장지 같은 걸 사야 하는 걸까? 이 시점에? 


그 대신 로또를 만원어치 샀다. 당첨됐으면 좋겠다. 


아이랑 같이 로또를 사고 돌아오는 길에 당첨이 되면 뭘 할지 같이 얘기했다. 로또의 가장 좋은 점은 순간의 희망을 서로 나누면서 오지 않을 행복에 미리 기뻐하는 것이다. 아이는 전에 살던 집을 다시 사고 싶다고 했다. 엄마도 그래. 엄마도 그 집이 그리워. 그리고 장난감도 사고 아이스크림도 사고 과자도 사고 저축도 많이 하자고 그런 얘기를 하면서 집에 돌아왔다. 아이는 벌써 우리가 억만장자(늘 엉망장자라고 발음한다)가 될 것이 확실하다고 믿고 있어서 걱정됐다. 아니야. 그렇게 쉽게 당첨되는 게 아니야. 몇 번을 반복해서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한다. 


집에 오는 길에 누가 새집을 많이 찾는지 내기를 했다. 나무를 하염없이 둘러보면서 손을 꼭 잡고 집에 돌아왔다. 너는 새집을 발견하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이 작은 생명을 이 예쁜 생명을 어떻게 하면 좋지? 엄마는 너무 무섭다. 

집에 와서 드라마 <이어즈&이어즈>를 보고 우울해졌다. 돈이 많아지면 현금화해서 집에 보관해야겠다고 누군가가 나 대신 세상을 구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상상 속에서도 비겁하기 그지없었다.

부풀고 있던 핑크빛 상상에 누군가 긴 바늘을 찔러 터뜨린 것 같고 현타가 왔다. 로또가 당첨되어도 나는 연재를 계속할까? 잘 모르겠다. 약속은 지켜야지. 그래도 더 대담하게 쓸 수도 있을 거 같긴 하다.


근데 요즘은 메일링 서비스도 정말 많고 양질의 좋은 글을 써서 사람들이 그냥 배포하기도 하는데 누가 이걸 읽어줄까? 시를 쓸 땐 누가 읽어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왜 이렇게 부담이 되는지 모르겠다. 재미있거나, 의미 있거나, 감동을 주거나 셋 중 하나는 되어야 읽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근데 나는 아무것도 주기 싫은데(줄 수 없을 거 같은데).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너무 싫다고 생각되면 꼭 SNS에 올려주세요. 왜 싫은지. 그럼 제가 참고해서 다른 글도 써볼게. 근데 안 참고할지도 몰라. 나도 몰라.


손목을 몇 번이나 움켜쥐었다가 놓았다가 했다. 그럼 피가 멈췄다가 다시 흐르는 게 보인다. 그러면 가끔 살아 있다는 실감이 들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