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추어리sanctuary
현실의 자잘한 문제들에 시달릴 때면 침대에 누워 바다의 고요를 떠올리며 잠을 청했다. 아침의 나는 다를 것이다. 절망과 두려움으로부터 일상을 방해받지도, 지배되지도, 이상한 드라마에 휘말릴 필요도 없다고, 내일이 있으니 기운을 차리자고…… 당장 기운을 차리지 못하더라도 잠에 들면 모든 게 끝날 것이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음 밑바닥이나 틈새에 남아 있는 것들. 변질되고 왜곡되지 않으면서 상실되지도 않는 힘. 빛이 통과하듯 퍼져가는 쾌감. 투시하며 외면해가는. 악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것들의 잔상이겠지.
꿈은 디테일하다. 정신을 차리려고 할수록 악몽은 실패로 끝난 백일몽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사건들, 마주치는 얼굴, 끔찍한 냄새, 진짜 얼굴을 갉아먹는 날카로운 소리.
스토리는 매번 달라지지만 일어나는 일들은 대게 말이 통하지 않는 패싸움에 가깝다. 나는 벽 뒤나 캐비닛 안, 테이블 아래에서 도망칠 기회를 엿보지만 언제나 잡힌다. 그곳에서 나는 쫓기거나 목소리가 없는 자이다. 끌려가면서 나는 발버둥친다. 하루는 여러 번 좀비가 되었다. 좀비들의 관리자에게 붙잡힌다. 이미 좀비가 되었는데도 나는 붙잡힌다(이미 숱한 고통과 대가를 치뤘음에도).
관리자인 그가 묻는다 너는 한 번 물렸니? 나는 여러 번 물린 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만 그는 내게 아직 인간성이 남아 있는 것을 감지한다. 무엇 때문에 들킨 것인지 추측하는 동안에도 테스트는 계속된다.
호스텔에서 꾸는 꿈이었을 뿐인데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한 좀비에게 목덜미를 물어뜯긴다. 살점이 뜯겨나간다. 신체의 감각들이 생생하다. 내장이 뜯기는 아픔 속에 중얼거린다. 나는 모험을 하러 온 것뿐인데…… 얼굴마저 뜯기면 안 되는데 아, 이것은 신경증의 일종인가. 이 많은 수를 혼자 물리칠 수 있을까.
나는 글을 쓸 때마다 폭력적으로 변했다. 그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부유물의 성질이 자기애나 사랑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사위는 어둠에 둘러싸이고 궁지에 몰린 승냥이처럼 어둠 뒤에 숨은 것들을 감각해야 한다. 누구도 기억의 밑바닥을 정확히 볼 수 없다.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억은 어떤 모습으로 떠오를지 모른다. 기억은 자아의 습관적 해석이다.
뇌과학과 심리학은 이미 다양한 자아에 대해 개념화하고 이론화했다. 여러 자아에 대한 분류법은 몇 가지가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방법은 ‘지금 여기서 특정한 경험을 하는 경험자아’와 ‘경험한 것을 일화기억으로 축적하는 기억자아’로 구분하는 것이다. 기억자아는 개별자아 혹은 에고(ego)라고도 불리며 일상적인 자아정체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경험자아나 기억자아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배경자아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지금 음악을 듣고 있다. 이때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이 참 좋다고 느끼는 것은 경험자아다. 그리고 음악을 들으며 ‘예전에 누구와 어디에서 이 음악을 들었었지’와 같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기억자아다. 이러한 경험자아와 기억자아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이 배경자아다. 다양한 형태의 내면소통 중에서도 마음근력 훈련의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이 배경자아의 알아차림이다.(……)
카너먼의 개념을 빌려서 말하자면, 자기조절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경험하는 자아(experiencing self)’가 ‘기억하는 자아(remembering self)’를 잘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경험하는 자아’는 지금-여기에 존재하면서 현재 내가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아다. 반면에 ‘기억하는 자아’는 과거의 경험을 기억의 형태로 저장해둠으로써 생겨나는 자아 개념이다. 말하자면 ‘경험하는 자아’는 주관적 자아(I)이고, ‘기억하는 자아’는 객관적 자아(self)다.
경험하는 자아가 ‘나는 지금 여기서 하나의 경험을 하고 있다’라고 심리적으로 느끼는 ‘순간’의 지속 시간은 대략 삼 초 내외다. 따라서 우리는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평균 이만 번의 ‘지금 이 순간의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가 만일 팔십 년 남짓 산다면 평생 대략 육억 번가량 ‘지금 이 순간의 경험’을 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은 대부분 즉시 사라져버린다. 우리 기억 속에 아예 남지 않는 것이다. 이중 극히 일부만 특정한 이야기로 편집되어 저장된다. 이러한 이야기가 쌓여 ‘기억하는 자아’를 만들어낸다.
나의 어린 시절, 인간관계, 직업 등 온갖 경험에 관한 기억들이 모두 일화기억(episodic memory)을 이룬다. 즉 나는 수많은 경험 가운데 극히 일부만을 선택해 자의적으로 통합하거나 각색하고 편집해서 나름의 의미부여를 한 다음 하나의 이야기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에 대한 기억들의 집합체가 곧 ‘기억하는 자아’이자 객관적 자아(self)다. 기억하는 자아는 수많은 경험이 쌓여 형성된다. 따라서 기억하는 자아는 지금 여기에서 수많은 경험을 쌓는 ‘경험하는 자아’를 존중하고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곧 주관적 나(I)와 객관적 나(self)의 건강한 관계이기도 하다.*
현재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기억들이 진실일리 없다. 진실의 진위 여부를 묻는 것이 이제 와 의미가 있을까. 의식이 머무는 단면은 환상이고 스토리텔링이다. 내 의식의 단면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스위치가 꺼진 눈동자
검고 까마득한
빨아들이는
흙먼지, 뿌연 물속
모래 회오리가 이는
손상, 손상된 적 없는
꿈속에서 매일 쫓기는 동안 도파민은 밤새 흘러나올 테고, 머리가 잘려나가는 상황에서 꿈밖의 나는 많은 생각을 한다. 잘려나간 머리통을 쳐다본다. 불쌍하다, 안쓰럽다, 안타깝다, 처연하다, 모두 같은 말이야. 나는 나의 어디를 바라볼 수 있을까.
You’re safe
잠에서 깨어난다. 커튼이 열려 있다. 커튼 틈으로 새어들어온 희푸른 빛.
누군가 나를 힘껏 껴안아주며 꿈이야. 하지만 너무 지독했구나.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니. 너는 안전해…… 너에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어. 아침이야. 밤은 다 지나갔어라고.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벌어진다.
눈을 뜨면 이층 침대의 나무 프레임이 눈에 들어온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 상처가 다시 벌어지든. 내가 회복되지 않아도,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리란 생각이 찾아와도 얇고 서걱거리는 이불을 맨다리로 휘감고 잠이 든다. 그것이 악몽이라도 나는 잠들 것이다.
쿠
골목을 빠져나오면 호텔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를 든 픽업트럭 기사들이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자신의 투숙객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미아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예약한 숙소 이름을 찾아 손을 높게 든다. ‘여기, 여기’ 동양인이라고 믿기 어려울만큼 검은 피부를 가진 한 남자가 피던 담배를 끄고 다가온다.
“아임 쿠!”
나는 반갑다는 말을 건네며 어색하게 악수한다.
그는 차가 있는 곳을 가리킨다. 캐리어와 백팩을 차례대로 트럭 뒤에 싣는다. 작은 알루미늄 계단을 트럭 짐칸 앞에 두고 올라타라고 손짓한다. 캐리어와 백팩과 함께 나는 짐칸에 앉는다.
“만나서 진짜 반가웠어.” 호스텔에서의 저녁, 종종 휴게실에서 대화를 나누던 이가 떠나기 전 찾아와 가볍게 포옹하며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사실 그 짧은 순간에도 그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열심히 사고 회로를 돌렸다.) 그가 떠난 후에야 사람의 진심이 언어가 아닌 것으로 전해질 수 있음을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말과 포옹이 진심임을 느꼈다.
당시 내게는 타인과 주고 받을 감정이 없었다. 인간관계에 넌더리가 났고, 현실적인 문제를 피해 여행을 왔을 뿐이다. 친절한 제스처는 위험신호로 느껴졌다.
삶에서 위로 받은 경험보다 인간관계에서 소외되는 경험, 버려지는 경험을 더 자주 겪은 사람이라면 늘 위험을 알리는 스위치가 켜지는 것은 당연했으리라. 절실하고 외로운 인간에게 친절과 베풂은 함정이나 덫이 될 때가 있다. 어떤 상황에서 차이를 분별해야 하는 즉각적인 생존 본능과 방어기제를 늘 뒷춤에 칼처럼 차고 있어야 나는 안전했다.
다만 그럼에도 ‘모든 사람은 소중하고 연약하며 중요하다’라는 명제가 내면에 흐르고 있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구분은 그저 직감으로 때려맞추기로, 너무 많이 생각지 않기로 했다. 늘 막다른 길에서 다른 들개떼에서 내몰린 개 한마리처럼 살 순 없었다. 모든 걸 위협으로만 느끼면 나는 편안하게 쉴 수 없었다.
위협과 추위, 공포…… 인간의 삶에서 그 외에도 무언가 있을 거라고. 흔들리는 잎사귀를 바라보며 떠올리곤 했다.
그래서 문득 진짜 반가웠다고 말한, 그것을 느끼게 해준 당신의 이름을 가끔 떠올리고 싶다. 낯선 이들로 가득한 여행지에서 수용과 자비 같은 단어는 목록에 없었다. 불안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약했으므로 아마 당시 모든 선택이 최선이었으리.
* 김주환, 『내면소통』, 인플루엔셜,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