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회

연재를 시작하며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고? 아니다. 그들은 별을 본다. 달 과학자는 달을 보고, 태양물리학자는 하루도 빠짐없이 태양을 느낀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해와 달이 거기에 있고, 별과 행성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으니. 안다. 우리가 지금 그런 얘기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지 않은가. 내가 지금 괜히 너스레만 떨고 있다는 것을.

 

“코더coder가 되어 있는 줄은 몰랐네.”

 

가끔 소식만 전해 듣다 십여 년 만에 만난 친구가 말했다. 온종일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 코드를 짜는 사람. 그게 나다. 별 같은 건 보지 않고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한다. 화가도 아닌데 하루종일 그림만 그린다. 논문에 실을 그래프 하나를 얻기 위해 그 그래프 그리는 코드를 수백 번 고치는 게 내가 천문학자로서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일이다.

 

친구는 영 실망한 눈치였다. 내가 망원경을 크고 작은 것으로 두세 대는 갖추고 있으며, 그중 적어도 한 대는 언제나 차 트렁크에 실어두었다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밤이면 강원도 모처로 달려가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추운 겨울밤 두터운 패딩을 입고 거대한 망원경 옆에서 입김을 후후 내뱉으며 우주적 고민에 빠지는 내 모습을 상상했던 것일까.

 

그런 상상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TV에 나오는 천문학자는 커다란 망원경의 대안렌즈에 눈을 대고 무언가를 들여다보니까. 하지만 그건 천문학자가 TV에 나올 때나 하는 일이다. 19세기 이래로 연구용 망원경에는 대안렌즈 대신 각종 사진기가 붙어 있어서, 관측실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만 들여다보면 된다. 심지어 요즘은 집 거실에 앉아 인터넷으로 망원경을 구동하기도 한다. 그럼 그런 장면은 시청자를 기만하는 행위냐 하면 그렇지 않다. 그건 중세 유럽 천문학에 대한 오마주가 아닌가! 갈릴레이도, 케플러도, 코페르니쿠스도 멋지게 망원경에 눈을 대고 들여다보았다. 그땐 사진이라는 것이 없어 천문학자들은 망원경으로 보이는 것을 그림으로 그려 남겼다. 달의 복잡한 모양을 그대로 스케치하기 위해서 화가를 고용하기도 했다. 달은커녕 직선 하나 똑바로 못 그리는 나의 그림 솜씨를 생각할 때, 갈릴레이보다 418년 늦게 태어난 것은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하마터면 ‘똥손’이라 천문학자가 못 될 뻔했다.

 

맑은 날 밤이면 불빛이 적은 교외로 나가 망원경으로 행성 보기를 즐기는 행성 과학자를 알고 있다. ‘아무렴, 별 보는 천문학자가 아주 없진 않겠지!’라고 생각했다면 미안하다. 그분은 아들이 망원경 보는 걸 좋아해서 운전사 겸 짐꾼으로 따라다닌다.

 

천문학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별을 볼 수 있고, 달을 사랑할 수 있다. BTS의 노래 <소우주>의 가사를 달달 외울 수 있고, TV에서 여행스케치의 <별이 진다네>가 흘러나오면 나지막이 따라 부르며 감상에 젖을 수 있다. 글도 그렇다. 빼어난 문장가도 아니고, ‘정의란 무엇인가’ 하면 ‘definition’이라고 대답하며, '초록별 지구'라는 말을 보면 나도 모르게 지구는 별이 아니라고 ‘지적질하는’ 만행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입을 틀어막는 평범한 천문학자도 글을 쓸 수 있다고 편집자가 말했다. 편집자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 아니겠는가.

 

직업상 남들의 학위논문을 볼 일이 많은데, 가장 흥미를 자아내는 부분은 역시 ‘감사의 글’이다. 대개는 학과의 교수님들과 연구실 선후배, 친했던 동료들 이름을 줄줄이 읊은 뒤 가족에게도 감사하며 앞으로 열심히 하겠다는 말로 마무리되는, 등장인물 대부분을 모른다면 세상 지루한 글이지만 가끔은 재밌는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감사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예아!’로 시작하는 글이다. 지난한 과정 끝에 햇병아리 연구자로 첫발을 내딛는 설렘이 담긴 그 문장을 빌려, 연재를 시작하는 설렘과 기쁨을 전해본다.

 

“당신을 만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