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은 것: 후회
후회. 이전의 잘못을 깨치고 뉘우침. 그러나 나에게 후회의 개념은 뉘우침의 이전 단계인 것 같다 잘못을 알고 깨짐, 정도인 듯하다. 내 잘못 알아서 마음이 다 깨질 거 같은 거. 그게 너무 아파서 무릎이 꺾여 뉘우침까지 갈 수 없는 거.
후회를 어느 정도까지 다스릴 수는 있다. 후회하지 말아야지. 자기 암시를 거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한다고 해도 지나간 일은 훼손되지 않는다. 배우면 되지. 이번 기회로 배우면 되지.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시킨다.
겁이 많은 나는 후회할 일을 애초에 만들지 않으려 애쓴다. 그러나 세상일이 다 내 맘같이 되지는 않는다. 후회를 할 일이 생기고 만다. 후회를 피하며 살아서, 후회 겪기에 익숙하지 않으므로 타격이 크다.
이번에는 말을 너무 많이 했다.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흘리기도 했다. 그래도 남의 것 아니고 내 비밀이라 다행이다 싶으면서 마음 깊이 괴로웠다. 비밀을 구분 짓고 다행스럽게 여기는 내가 치졸해서. 더 큰 후회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본 것 같아서. 그러나 이것이 시작이 아니어서. 나는 이미 이전에도 같은 일로 후회를 한 적이 있는 것 같아서. 대화를 몰아붙인 상대를 탓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어 혼곤했다. 심지어 상대에게 내 후회의 기색을 읽혔다. 쩡찌님은 후회를 하는 것 같네요. 별거 아닌데요.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별거 아닌 게 내 몸속을 다 돌아다니면서 미치게 만들어요. 거꾸로 매달려서 피를 다 빼고 싶어요. 혈관을 꺼내서 박박 씻고 싶어요. 그러면 좀 나아질까요.
혼자 하는 후회는 그나마 낫다. 잊어서 버리면 없던 일 비슷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그러나 말실수처럼 상대가 있는 후회는 뼈아프다. 내 손을 떠나보냈기 때문에. 덮을 수 없이 날아가버렸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이 되어 나에게 돌아오더라도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 되어 돌아와 나를 갈기갈기 찢더라도 겸허를 흉내내며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나의 탓이니까. 그리고 나는 후회 앞에 도무지 겸허할 수가 없다. 나는 그렇게는 못한다. 가슴이 다 비참하게 깨지는 것 같다.
후회는 너무 아파. 왜 항상 후회는 아플까. 나는 후회가 너무 아파. 아프지 않고 후회하는 방법은 없을까. 아픔을 참듯이 이를 물어봐. 후회하지 말아야지. 암시를 걸어. 그러면 정말 참아진다고 나를 속일 수 있다. 후회는 단련될 수 있는 것일까? 후회에 언제쯤 초연하게 될까, 그러나
후회조차 하지 않는 때에 나는 망가져 있을 것이다.
참지 않은 것: 화
볏단을 숭덩숭덩 자르는 상상을 한다. 적의 목을 베듯이. 기다란 칼을 수평으로 휘두른다. 덜 마른 것을 꼭꼭 숨기고 있던 풀줄기의 축축한 냄새. 동강이 나 떨어지는 원기둥. 기둥은 짧아지고 더는 도려낼 수도 저밀 수도 없을 때.
화가 나서는 아니다. 나는 화를 참지 않는다. 참지 않은 것은 화. 화를 꺼낼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화를 내는 자신을 견딜 수가 없어서. 화를 내면 몸도 마음도 다 아프고 그게 너무 힘들어서 언제부터인가 나는 화내는 일을 피하는 사람이 됐다. 피하다못해 무감해지는 사람이 됐다. 나는 나에게도 남에게도 화 안 낸다.
선험에 의하면 익숙하지 못한 일에 맞닥뜨리면 화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다. 나 자신의 조심성 없음, 자세하지 못함 때문이기도 했고 외부의 규칙에 순응할 수 없거나 더디게 적응하는 것을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새로운 일에 별로 도전을 하지 않게 됐다. 도전이 줄면서 내 부족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됐다. 욕구가 줄어들었다. 가게는 늘 가던 곳으로, 사람도 만나던 인연만 유지했다. 새 자극으로 즐거울 일도 줄었지만 화나고 가슴 아파 괴로울 일도 생기지 않았다. 나는 그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 좀 편하고 싶으니까. 화 안 내고 편안하고 싶으니까. 이렇게 살다가 죽더라도. 내가 가만 고여 사는 것을 영영 깨닫지 못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행복한 결말이 아닐까. 앎이 반드시 행복을 찾아다 주지는 않잖아. 그렇게 썩어 죽어가는 방법도 있는 것 아닐까. 접어둔 잎사귀가 일어나듯이, 묶어둔 풀이 서서히 매듭을 풀듯이 호기심이 고개를 쳐드는 일도 있겠지만 무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귀찮음이 돕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그렇게 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는 귀찮음과 두려움을 구분하지 못하게 됐다. 무언가를 면밀하게 살피고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여 알맞게 대처하는 일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구분의 일은 나를 새롭게 알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괴로움이 될 것이다. 괴로움이 두려운 나는 괴로움을 귀찮음으로 뭉개어 아무데나 바른다. 그리고 우묵이 몸을 낮추고 하염없이 고이는 것이다. 더는 도려낼 수도 저밀 수도 없이.
참은 것: 하늘색 카디건
밤에 깊어지는 것이 있다. 기생하여 사는 작은 동물이나 벌레처럼. 피부의 위나 아래 어디 즈음에서 돌아다니는 것. 주로 통증이나 가려움이다. 나의 경우에는 가려움이 그렇다. 밤만 되면 온몸이 간지러워. 이불을 매일 세탁해보고 로션을 덧발라보기도 했다. 그래도 쉽게 나아지지를 않는다.
누구는 그게 다 스트레스 때문이라 했다. 스트레스 반응이 신경섬유를 활성화해 가려운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스트레스는 왜 하필 밤에 몸을 가렵게 만드는 것일까? 낮에는 참는 것, 밤에는 참지 않는 것일까? 답은 인터넷에서 손쉽게 찾을 수 있다. 몸에서 가려움증을 유발하는 체내 화학물질이 밤에 증가하는 반면, 염증반응 및 가려움증을 억제하는 호르몬 분비는 밤에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해서 속도 피부도 시원하게 긁어지지는 않았다.
살갗이 점처럼 작게 올라오며 두드러기가 시작한다. 두드러기는 자리를 찾듯 범위를 넓혀 부푼다. 콩이나 팥알만 했던 것이 동전만 해지고 그러다 손바닥만큼 커질 때도 있다. 부어오른 자리는 피가 몰린 듯 가렵고 뜨겁다.
겉으로 나는 두드러기는 차라리 나아. 몸속에 나는 두드러기가 정말 위험한 거야. 원인 불명이라는 진단을 받고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내게 주의를 주는 것이었다. 피부를 긁지 않고 둘 것. 그러나 두드러기는 몸속에도 나는 모양이었다. 내 장기를 다 들춰볼 수는 없어 확인은 못했지만. 내 몸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도무지 통제가 불가능한 것이 내 몸속에 있다는 데 신기함과 놀라움이 일었다. 어쩌면 놀이가 될 수도 있었겠다. 그게 내 목숨을 위협하지만 않았다면.
가렵니? 두드러기가 나는 것 같니? 엄마가 자주 묻게 됐다. 걱정하는 엄마의 눈. 혹시나 자신이 체질을 물려주었을까 슬퍼하는 눈. ‘원인 불명’이 완전히 설득하지 못한 눈. 엄마의 눈은 예쁘기만 해. 슬프지 말아. 그랬으면 했다. 피부를 긁지 않았다. 두드러기가 원인이 아닌 가려움도 참았다. 깊이 생각을 할 때 팔꿈치를 긁는 버릇을 일찍 그만둘 수 있었다. 엄마의 앞에서는.
그러니까 실제로 내가 한 일은 가려움을 참는 일이 아닌 가려움을 숨기는 일이었다. 어깨나 엉덩이에 두드러기가 나면 안심했다. 짧은 티셔츠와 바지로도 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식탁 의자 모서리에 몰래 엉덩이를 비벼 긁으며 밥을 먹었다. 가끔 밥덩이가 목구멍에 꽉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하늘색이 좋았다. 엄마의 하늘색 카디건이 좋았다. 엄마에게는 니트로 된 작은 하늘색 카디건이 있었다. 엄마의 몸에는 작고, 내 몸에는 넉넉한 카디건이었다. 내가 장롱에 손을 넣고 카디건을 매만지고 있는 것을 엄마가 보았다. 엄마는 내게 카디건을 입히고 소매를 여러 번 접어주었다. 엄마가 아주 옛날에 입던 거야. 이제 쩡찌에게 줄게. 카디건이 더 좋아졌다! 빙글 돌아도 보고 팔짝 뛰어도 봤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 어깨 부근이 가려웠다. 두드러기인 듯했다. 어깨는 카디건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곳이다. 행운의 연속. 세상에 카디건을 보여야지. 밖으로 나섰다. 아파트 주변을 몇 바퀴 돌았을까? 아까 먹은 밥덩이가 목구멍에 걸린 듯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온몸이 가렵게 된 지는 오래였다. 카디건을 들추자 두드러기가 전신을 덮고 있었다. 평소와 달랐다. 정신이 자꾸 혼곤하고 숨이 가빴다. 통제 불가능. 나는 응급실로 이송됐다.
하늘색 카디건은 다시는 입지 못하게 됐다. 응급실에서 가위로 잘라버렸기 때문이다. 단추가 있는데 왜 옷을 자르는 거예요. 벗을 수 있어요…… 알레르기로 목구멍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엄마의 눈. 사방으로 찢어지던 눈의 빛. 슬픔의 빛. 그 빛이 너무 강해서 나는 입을 다물고 눈을 감았다.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엄마는 내가 몸을 긁으면 묻는다. 가렵니? 두드러기니? 약은 먹었니? 그냥 갑자기 가렵네.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해도 내 팔이나 다리를 꼭 손으로 쓸어본다. 그리고 나도 발견하지 못했던 작은 상처, 얇게 긁혀 앉은 딱지를 찾아낸다.
참지 않은 것: 침묵
침묵을 참지 않았다. 참으면서 침묵할 때도 있지. 항의의 표현으로, 인내의 운동으로. 그런데 나는 침묵을 안 참을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안 참고 꺼내는 때가 더 많은 듯하다. 말조차 하고 싶지 않을 때 말이 없어도 될 것 같은 때 말하고 싶지 않은 때 나는 침묵한다. 오히려 말문이 막힐 때는 더 많이 말한다. 말문이 막히는 것을 감추고 싶기 때문이다.
이번은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참지 않고 침묵했다. 가끔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럴 때면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을 설명했다. 침묵을 참지 않는 것뿐이지 면피를 하거나 타인을 불편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침묵하고 싶은 기분을 설명하자 상대는 “이해한다”라고 말했다.
말이 없이 커뮤니케이션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상대에게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분명한 몸짓을 하게 된다. 내 몸이 그동안 얼마나 불분명하게 동작했는지, 대강의 형식을 취해왔는지 깨닫게 된다.
침묵을 참지 않자 별로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분에 앞서 말이 먼저 나오는 실수가 줄었다. 말을 많이 하고 돌아가는 길의 후회가 없었고, 기력을 아꼈다. 무엇보다 나의 침묵을 이해하(려)는 상대의 다정을 얻었다.
그런 얘기 있잖아. 사람들은 생각보다 친절하게 우리가 하는 말에 귀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러니 두려워 말고 일단 말을 꺼내어보라고. 반대의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우리가 하는 침묵을 유연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러니 안심하고 침묵해보라고.
숨겨둔 어둠이 없는 말과 같이 솔직한 침묵은 우리를 더 가깝게 한다. 서로가 내면의 정적에 다정하려는 것을 돕는다. 가끔 나는 침묵에서 기적을 발견한다. 불가해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나의 침묵을 들어봐. 네 침묵을 들려주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