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하룻밤에 칠 년씩
이마치는 산뜻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젊음이 지나간 뒤 그런 아침은 정말 흔치 않았다. 완벽한 휴식을 취했다는 느낌, 온몸 구석구석 느껴지는 생명의 충전. 이마치는 침대 밑에서 체중계를 꺼내 몸무게를 쟀고, 59란 숫자를 확인하는 동시에 방문이 열렸다. 이마치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죄송해요. 전 일어나신 줄 알고.”
노아는 밤새 사라지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불어난 체중도 꺼지지 않았다. 모든 게 꿈이 아니었다. 이마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곳엔 안개가 서린 끝없는 초지가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오시길래 들어와봤어요.”
죽은 남편의 옷을 입은 젊은 남자, 노아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아침은 안 드시나요?”
이마치는 본디 아침을 먹지 않았지만, 말없이 부엌으로 나왔다. 냉동실에서 꽝꽝 얼어붙은 식빵을 겨우 찾았고, 그것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계란과 잼과 햄을 넣은 두툼한 샌드위치였다. 광고 촬영이나 드라마 촬영 말고, 그녀가 직접 샌드위치를 만들어본 적이 있던가? 적어도 그녀의 기억에는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제법 그럴듯하게 해냈다. 노아는 샌드위치를 내려다보고 아주 맛있겠다는 듯 두 손을 비비더니 크게 한입 베어물었다.
“어젯밤에 제가 좀 생각해봤는데요.”
그는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누전이라는 핑계를 대면 집집마다 들어가기 어렵지 않을 거예요. 이곳에도 질서라는 게 있는데, 무턱대고 쳐들어갈 순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는 테이블 위에 뭔가를 꺼내놓았다.
“이게 뭐지?”
“아드님 방에서 찾았어요.”
장난감 워키토키였다. 아들의 것은 파란색, 딸의 것은 빨간색. 장난감이지만 제법 성능이 좋아 400미터 이상 먼 곳에서도 대화가 가능했다. 아이들은 캠핑을 가서 사용해보고 싶어했지만, 집안에서 가지고 논 게 고작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산이나 바다에 가본 적이 없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놀랍게도 빨간 불이 들어오고 지지직거리는 소음이 들렸다.
“가짜라도 소품이 필요하겠죠. 연극에 대해서는 저보다 잘 아시잖아요.”
“연극을 실패하면 어떻게 되지? 그들이 나를 알아본다면?”
이마치는 내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상관없어요. 거울에 비친 상이 굴절되거나 쪼개진다고 본질이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요. 그들은 반사체일 뿐이에요. 자신이 반사체라는 걸 모르는 반사체. 다만 소란을 피하기 위해서 연극을 하자는 거죠. 사실을 알리면 층층마다 시끄러울 텐데, 피곤하잖아요?”
노아는 샌드위치를 두 개째 집어먹었다.
“섭식을 안 해도 존재가 가능하니 어쩌니 하더니 잘도 먹네.”
그는 비난하는 건가 싶어 잠시 그녀의 눈치를 살피더니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는 더욱 마음놓고 먹었다. 빵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았다.
이마치는 후줄근한 청바지에 회색 티셔츠를 입었다. 누가 알아봐도 상관없다는 노아의 말이 아니더라도 변장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눈에 띄지 않는 초라한 노파였다. 전날 43층의 이마치 역시 그녀가 누구인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나 변한 걸까. 만약 그녀가 이십 년 뒤의 자신과 마주치면 전날처럼 모르고 지나치게 될까. 집을 나서기 전, 이마치는 챙이 긴 벙거지모자를 썼다. 모든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마치의 발목은 아직도 부기가 빠지지 않았고, 계단을 내려갈 때는 거의 힘을 쓸 수 없었다. 노아는 자신의 팔을 잘 붙잡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렇게 겨우 한 층을 내려갔다. 벨을 눌렀지만 응답이 없었다. 그들은 적막 속에서 한참 서 있다가 그 아래 58층으로 내려갔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어지는 50층대 집들이 모두 허탈하리만치 무응답이었다.
이마치는 자신이 오십대일 때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떠올려보았지만 좀처럼 기억나는 게 없었다. 당시 출연했던 작품들은 물론 나열할 수 있었다. 그녀가 배우 인생에서 돈을 제일 많이 만진 것이 오십대였으니까. 빚을 다 갚고, 남편이 사업에서 완전히 손떼면서 구멍으로 새는 돈이 사라지자, 버는 족족 돈이 쌓였다. K와 결별하면서 더이상 도전이나 실험이 될 만한 작업도 하지 않았다. 그런 나이였다. 어머니 역할을 빼면 할 게 없는 나이. 그녀는 어머니처럼 말하고, 어머니처럼 웃고, 어머니처럼 우는 법을 더욱 연마했다. 한평생 가장 무능했던 역할에서 연기로 경지에 올랐다. 사실 그만큼 쉬운 연기도 없었다. 자식을 목숨처럼 사랑하는 어머니들. 그들은 소나무나 바위 같은 존재였다. 적당한 의상을 입고 무대 한쪽에 서 있으면, 사람들은 그것이 소나무나 바위인 줄 알고 신경을 껐다. 살짝 휘청거리거나, 재채기를 하거나, 눈을 깜빡거려도 괜찮았다. 그것은 소나무나 바위일 뿐이었다.
일일극과 주말극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어머니 역할들을 쉬엄쉬엄 주워먹어도 다 못 먹게 배가 불렀다. 그녀는 그 작품들을 소중히 여겼다. 돈을 벌어줬으니까.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하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편이 죽고, 딸이 독립하고, 그녀는 호텔에서 혼자 지냈다. 호텔 내부의 가구와 인테리어마저 뭐 하나 기억나는 게 없었다.
50층에서 40층으로 내려오는 동안 문을 여는 집은 한 군데도 없었다. 어제 두 번이나 들어갔던 43층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들은 계단을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
“이렇게 오르내리다간 무릎 연골이 다 나가버릴 거야.”
이마치는 영 마땅치 않다는 듯 말했다. 사실 그녀는 노아에게 체중을 거의 맡기다시피 기대어 걷고 있었고, 그 끝없는 하강 운동이 별로 힘들지도 않았다. 실없는 툴툴거림은 그저 조바심과 민망함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몸을 기대는 일이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조금만 힘내요. 절반은 왔잖아요.”
노아는 이마치의 손등 위를 툭툭 두드렸다. 이마치는 말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30층대를 지나 20층대에 이르렀을 때, 어느 집에선가 특이한 벨소리가 났다. 25층이었다. 이마치는 그 초인종소리를 기억했다. 새가 우는 것처럼 삐효삐효 울리던 소리. 한낮에도 굴속처럼 캄캄한 다세대주택의 1층이었는데, 세대별로 벨을 제대로 표기해놓지 않아서 방문객들은 으레 제일 왼쪽에 있는 그녀의 집 벨을 눌렀다. 집에 있으면 종일 새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무응답인 줄 알고 발걸음을 돌리려고 할 때, 그 집 문이 열렸다. 이마치는 깜짝 놀랐다. K가 나온 것이다. 스물일곱 살 청년이었던 K. 그는 커다란 덩치로 문을 가로막고 서서 이마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시죠?”
말을 잇지 못하는 이마치 대신 노아가 끼어들었다.
“누전 신고가 들어와서 확인중입니다.”
“누전 신고라고요? 누가요?”
“4층 주인집이요.”
이마치가 대답했다.
“주인 할아버지가 아침부터 동사무소에 전화하셨어요. 엊그제 비가 내린 후로 집에 전기가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고요.”
K의 눈빛이 수그러드는 것이 보였다. 그는 마지못한 듯 한 발 비켜서 그들이 집안에 들어오게 해주었다. 제일 먼저 좁은 거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공간에 비해 넘치게 많은 짐이 구획별로 선반에 정리되어 있었다. 전부 K의 솜씨였다. 그녀는 그가 오기 전 이 집이 어떤 꼴이었는지 기억했다.
“최대한 조용히 살펴보세요.”
K는 걸레를 집어들며 말했다.
“방에 사람이 있는데, 밤새 일하고 들어와서 잠깐 졸고 있거든요.”
그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방에서 여자가 나왔다. 스물다섯 살의 이마치였다. K가 다가가서 상황을 설명하자, 그녀는 그들을 흘긋 바라보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풀거리는 단발머리, 투명한 피부, 반듯한 어깨선. 이마치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노아가 헛기침을 했다.
“방안을 살펴보세요. 전 바깥을 볼게요. 이상이 있으면 저 부르시고요.”
노아는 워키토키를 들고 벽을 훑어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그것으로 누전 여부를 알 수 있다는 듯 연기를 하는 것이었다. 이마치는 그처럼 워키토키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문 옆에 보자기를 씌운 물건이 옆으로 쓰러져 깜짝 놀랐다. 보자기가 흘러내리면서 대형 사진 액자가 드러났다. 그녀가 데뷔하고 얼마 안 되어 찍은 화보 사진이었다. 잿빛 남성 양복을 입고, 높은 스툴에 걸터앉아 찍은 그 사진은 건전 심의엔가 걸려 결국 잡지에 실리지 못했다. 노출이라곤 새하얀 와이셔츠 위에 반 뼘쯤 드러난 목뿐이라 건전하지 않을 게 없는데, 가만히 보면 갑옷 같은 남성 양복 안에서 여자의 가늘고 기다란 몸이 움직이는 실루엣이 상상되었다. 짙은 화장 속 긴장일지 두려움일지 얼어붙은 눈동자의 낙차가 기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자연스레 사진을 찍던 날이 떠올랐다. 포토그래퍼의 뱀 같은 눈과 담배 냄새와 이상한 지시들―다리를 벌려 앉아보라거나 혀를 내밀어보라거나 머리카락을 넘겨 귓불을 보여달라는―로 인해 그녀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두려움으로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뛰어나가는 대신 그의 요구대로 카메라에 시선을 맞춰야 했다. 더한 상황이라도 발 벗고 나설 신인들이 널렸으니까. 업계에서 제일 유명한 포토그래퍼였으니까. 아쉬운 건 그녀였으니까. 사이즈가 너무 큰 옷을 뒤에서 옷핀으로 잡은 것이라 화장실에 갈 수도, 물을 마실 수도 없었다. 온종일 사진작가의 말대로 움직이면서 수치와 갈증을 참아야 했다. 그녀는 사진을 보자마자 그것을 느꼈다. 수치와 갈증.
그 사진은 실제로 그녀에게 유명세를 안겨줬다. 사진이 아니라 건전 심의에 걸렸다는 사실이 이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소속사 사장은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확대해 집으로 보냈는데, 영 처분할 길이 없어 보자기를 덮어두고 지내다 이사 때 버린 기억이 났다. 그 방엔 침대가 없고 두꺼운 매트리스만 있었다. 이불과 베개는 전부 낡고 숨이 다 죽어 있었다. 초라한 침구 옆에는 부자연스럽게 화려한 거울이 있었고, 작은 옷장 앞에는 옷이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아침마다 그 안에서 옷을 찾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났다.
열아홉 살에 집을 나온 뒤 그녀는 거리를 떠돌며 극단 사람들의 집에 빌붙어 살았다. 이 집은 처음 가진 그녀만의 집이었다. 이곳에서 데뷔했고, 첫 작품 주연도 맡았다. 그러한 애착 때문이었을까. 배우로 이름을 알리고도 한참 더 이곳에서 살았다. 바쁘기도 했고, 귀찮기도 했고, 무엇보다 새집으로 이사가야 할 필요를 딱히 못 느꼈다. 그녀에겐 이 집이 충분히 포근하고 안락했다. 나중에 보다못한 소속사에서 품위 유지 운운하며 새집으로 이사를 시켰다. 그 역시 K가 도맡았다. 이 집에 처음 왔을 때 한 바퀴 둘러본 뒤 그가 했던 말. 먼지 구덩이에서 사는 거 숨 안 막혀요? 집안 아무데나 물건이 처박혀 있는 꼴을 보자마자 그는 말없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이후 그는 스케줄이 있을 때 그녀를 데리러 오거나 데려다주면서 시간을 내어 집 청소를 했다. 큰 덩치에 맞는 앞치마와 고무장갑도 상비해두었다. 그는 그녀의 첫 매니저였다. 그녀는 매니저들이 으레 그런 일을 하는 줄 알았다.
그때 누군가 방에 들어왔다. 사진 속 스물다섯 살의 이마치였다. 그녀가 방안의 불을 켜자, 순식간에 주위가 환해졌다. 그들은 동시에 쓰러진 액자를 바라봤다.
“모델인가봐요, 아니면 연예인?”
이마치는 액자를 바로 세우며 물었다.
“아니요, 둘 다 아니에요.”
여자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이마치에게 거짓말했다. 그들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자가 굶주려 있다는 것을 이마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핏기 없는 얼굴에 눈 밑이 거뭇거뭇했다.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첫 드라마의 성공에도 곧이어 다음 작품 섭외가 들어오지 않자, 소속사에서는 살을 좀 빼는 게 좋겠다고 충고했다. 가뜩이나 키가 큰데 근육이 많고 탄탄한 체격이라 도무지 처연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처연함, 그것은 당시 여자배우의 필수 조건이었다. 어떤 감독은 그녀에게 존재감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사이즈를 줄이지 않는 한 주인공 캐스팅은 힘들 거라고, 고작 광고나 찍으며 이미지를 팔다 끝날 거라고 했다. 존재감을 없애고, 처연함을 더하기 위해 이마치는 굶기 시작했다. 종일 굶으면 신경이 곤두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것을 독주로 짓눌러, 스스로를 때려 쓰러뜨리다시피 잠을 청했다. 5킬로그램이 빠지자, 거짓말처럼 섭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명세를 타고 소위 청춘스타가 된 뒤에도 그녀의 삶은 똑같았다. 차가운 음식을 먹고, 냄새나는 화장실을 쓰고, 아무데서나 등을 대면 잠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이마치는 환한 빛 속에서 그 여자―삼십오 년 전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일자형의 눈썹과 낮은 콧날, 옅은 갈색 주근깨, 이상하리만치 커다란 눈동자. 여자는 아름다웠다. 이마치는 그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고, 동시에 그럴 필요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을 테니까. 너는 아름답다는 말. 그녀는 한 번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다 봤으면 이제 나와요.”
워키토키에서 노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집에서 나올 때 K는 그녀와 노아에게 시원한 요구르트를 건넸다. 이마치는 자기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노아는 그녀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시원한 요구르트. 그것은 K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었다. 시원한 요구르트에 빨대를 꽂아 먹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낙관적인 기분이 든다고 그는 말했다. 그들은 요구르트를 먹으며 내려갔다. 그후 1층까지 문이 열린 집은 한 군데도 없었다.
이마치는 아파트의 출입문 앞에 섰다. 노아의 말대로 유리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다. 문밖은 평소에 그녀가 보던 아파트 단지가 아니었다. 초원의 한가운데 같았다. 기묘하게 가지가 휘어진 나무들, 이끼가 자라는 땅, 그 위로 내리쬐는 생경한 햇볕. 이마치는 유리문에 손을 대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형벌이나 다름없겠지.”
이마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기 갇혀서 영원히 자기 인생을 보는 것 말이야.”
“아까처럼 젊은 시절을 계속 볼 수 있는 건 꽤 괜찮을 것 같은데요.”
“글쎄. 저 시절 난 매일 죽고 싶었어.”
이마치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고 일어나면 칠 년, 또 자고 일어나면 칠 년, 이렇게 시간이 지나가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빨리 노인이 되고 싶었어.”
“꿈이 이루어졌네요.”
밖에 바람이 부는지 갑자기 나뭇잎이 흔들렸다. 그 풍경에 잊고 있던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이마치는 노아에게 말했다.
“고아원 뒷숲이야. 사실 숲도 아니고 버려진 텃밭에 가까웠는데, 다들 그렇게 불렀지. 오래전 원생들을 동원해서 심은 작물들이 무더기로 죽고, 더러는 살아남고, 혼종으로 뒤엉켜서 저들끼리 자랐어. 그곳에 사는 아이들처럼.”
“고아원에 오래 있었던 건 아니잖아요.”
노아는 우편함 쪽으로 가서 내용물을 살피며 말했다.
“지옥에선 하루나 십 년이나 같아.”
이마치는 어린애를 가르치듯 말했다.
“그런데 여기 장미가 없네. 뒷숲은 징그럽게 시뻘건 장미 천지였는데.”
이마치가 그 말을 내뱉자마자 사방에 빨간 장미 덩굴이 나타났다. 그녀는 탄성을 질렀다.
“세상에, 이것 좀 봐.”
“왜요?”
멀리서 노아가 물었다.
“아깐 분명히 없었는데. 내가 말하자마자 여기 갑자기 장미 덩굴이 생겨났어.”
“잘못 본 거겠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노아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정말이야. 이것 좀 보라고.”
“저도 보고 있어요. 장미는 이곳에서 흔해요. 워낙 그 꽃을 좋아하잖아요.”
노아는 우편함에서 꺼내온 엽서를 이마치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마치는 엽서를 내려다보았다. 엽서에는 어제와 같은 필체로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오늘 당신은 온종일 기분이 저조했지.
아인이에게도 냉담하게 굴어서, 아이가 일찌감치 혼자 집에 돌아가버렸어.
당신은 그애한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드라이브를 나가서 동네를 몇 바퀴나 돌고, 또 돌았지.
몇 바퀴째 돌았을 때였나. 당신이 말했어.
뭔가를 잃어버렸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고. 그리고 내게 물었어.
“당신은 그런 거 없어?”
왜 없어. 누구에게나 그런 게 있지.
정말 소중한 것은 잃어버리고서야 알게 되는 것 같아.
그래서 인생이 이렇게 슬픈 거야. 축축한 거야.
우울한 당신 곁에 나도 웅크리고 누워서 작고 단단한 당신의 등을 봐.
그리고 생각하지. 그래도 이렇게 당신 곁에 있을 수 있어서 좋다고.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해도 이것만은 정말 좋다고.
“난 드라이브를 함께 할 사람도 없고, 같은 자리에 누울 사람도 없어. 엉터리 헛소리라고. 대체 왜 이렇게 엽서에 집착하는 거야?”
“제가 이 건물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바로 우편함이거든요.”
노아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모든 게 없어져도 이것만은 없어지지 않기를 바라요.”
“모든 게 없어져?”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죠. 죽을 때 기억을 가져가는 사람은 없잖아요. 이 건물은 결국 텅 비고 말 거예요.”
노아의 말에 이마치는 할말을 잃고 생각에 잠겼다.
“이제 다시 올라가요. 해 지기 전까지 별로 시간이 없어요”
이마치는 찜찜한 얼굴로 출입문의 유리 너머를 보았지만 이내 그의 팔을 잡았다. 갑자기 장미가 생겨나다니, 너무나 이상한 일이었다. 하기는 여기서 이상하지 않은 것을 찾는 게 더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이 젊은 남자의 팔을 잡고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이상한 일이었다. 이마치는 평생 스킨십에 거부감이 있었다. 가족이나 친구라 해도 예외가 없었다. 여자 친구들과 팔짱을 끼는 것도, 사귀는 남자들과 길을 걸으며 손을 잡는 것도 껄끄러웠다. 어린 딸과 아들이 스스럼없이 그녀에게 매달려오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늘 간신히 숨을 참고 견디다 슬그머니 몸을 빼내곤 했다. 하지만 어제 만난 이 청년은, 그와 몸이 닿는 것은 괜찮았다. 어색하거나 이물스럽지 않았다. 그들은 가다 쉬다,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별말을 하지 않았고, 침묵이 이어졌으나 그마저도 편안했다. 31층에 도착했을 때 노아는 슬그머니 그녀의 손을 떼어놓았는데, 그게 조금 아쉽기까지 했다.
“여기, 문이 열려 있어요.”
정말이었다. 이마치는 그 앞으로 다가가서 살짝 열린 문을 당겨보았다. 어두컴컴한 집안에 물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현관에 들어서자 집안에서 누군가 그들을 향해 속삭이듯 물었다.
“누구세요?”
“전기 누전으로 점검 나왔습니다.”
노아도 목소리를 죽여 대답했다. 기다란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카락을 집게핀으로 올린 여자가 나타났다. 이마치는 그 원피스를 기억했다. 임신 기간 내내 입고, 출산 이후에도 입었던 면소재의 부드러운 원피스였다. 몸이 변화를 겪을 때마다 입어서 제 살 같던 원피스. 그 옷에 평생 가장 많은 땀을 흘렸다. 서른한 살이라면 결혼하고 큰아이를 낳은 해였다.
“누전이라면, 위험한 건 아니죠?”
여자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네, 그럼요. 혹시나 해서 둘러보기만 하는 거예요.”
이마치는 노아와 함께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새집에 온통 새것인 집안 살림이, 마치 모델하우스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그 아파트는 남편이 결혼할 때 장만해온 것이었다. 막 개발이 시작되는 지역의 신축 아파트라 근방이 온통 공사장이었다. 창문을 열어놓으면 반나절 만에 온 집안에 먼지가 뿌옇게 쌓였다.
노아는 방을 살피러 들어갔고, 이마치는 거실을 둘러보았다. 전면에 있는 가죽소파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처음 임신했을 때 그녀는 그 소파에서 종일 잠만 잤다. 그렇게 잠이 쏟아지는 경험은 평생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뭔가에 취한 듯, 자도자도 졸렸다. 이른 점심을 먹고 잠들었다가 해가 뉘엿뉘엿 질 때야 잠에서 깨며 느꼈던 절망감. 한평생 그녀의 몸에 고인 물 같았던 막막함. 결국 결혼도 임신도 그녀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각. 이마치는 오래전 그때처럼 손발이 저릿거리는 느낌에 지그시 주먹을 쥐었다.
거실 한복판에는 커다란 아기 침대가 있었다. 갓난아기인 딸이 그 안에 잠들어 있었다. 31층 여자는 어색한 자세로 옆에 서 있었다.
“아기 침대가 좋아 보여요.”
“네, 이걸 조립하느라 남편이 고생깨나 했어요.”
그 침대는 그들 부부가 외국의 한 카탈로그를 보고 주문한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해외에서 물건을 사는 일이 흔치 않았다. 배송에만 석 달이 걸렸다. 과연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침대가 올까 마음을 졸였는데, 다행히 출산을 며칠 앞두고 도착했다. 아기 침대가 아니라 한 척의 배인 양 엄청난 크기의 상자에 담겨서. 두꺼운 나무 합판과 플라스틱 조각들, 수십 개의 나사가 일일이 포장되어 있었다. 스페인어로 된 불친절한 설명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조립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마치는 그만 포기하고 다른 것을 사자고 했지만 남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사흘 밤낮을 끙끙대더니 조립에 성공했다. 그들은 완성된 침대 옆에 서서 텅 빈 공간을 내려다보았다. 부모가 된 기분을 느껴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침대는 필요 이상 거대하고 튼튼했다. 성인이 누워 자도 너끈한 크기였다. 남편의 쓸모없는 고집, 아집, 신경증에 가까운 성실함이 하나의 조형물로 완성된 것 같았다.
“저기 계속 물이 흐르고 있어요. 제가 대신 물 잠글까요?”
이마치가 물었다. 물 흐르는 소리의 진원지는 부엌 싱크대였다. 별 용도 없이 물을 틀어놓은 것이다. 설거지통에서 한없이 넘쳐흐르는 물이 보였다.
“아뇨, 일부러 틀어놓은 거예요. 집이 너무 적막해서요.”
이마치는 조용히 여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이 잘 안 보이는 거죠?”
“어떻게 아셨어요?”
여자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아직 젊었고, 모든 산모가 그러하듯 무방비의 모습이었다. 숨을 데가 없는 짐승 같았다.
“벽을 더듬으며 걷잖아요. 기준 삼아 부엌에 물을 틀어놓고요. 저도 그랬어요. 첫아이를 낳고 일주일간 눈이 멀었죠.”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걸 인지한 것은 출산하고 하루가 지난 뒤였다. 시야가 점점 좁아지더니 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남편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심리적인 원인이라고 했던 의사의 말이 일종의 선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의사는 금세 나아질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고, 퇴원할 때 이제 괜찮죠, 라고 지나가듯 물었다. 이마치는 뿌연 눈앞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돌아온 뒤에는 아이를 종일 침대에 눕혀두고 그 주변을 서성거렸다. 눈이 먼 채로 갓난아기와 온종일 집에 갇혀 지냈다는 사실이 거짓말 같았다.
“더디게 느껴져도, 결국엔 다 괜찮아져요. 걱정하지 말아요.”
31층 여자는 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갑자기 아기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동시에 침대를 바라보았다. 여자가 침대로 주춤주춤 다가서는 것이 그 집 문을 닫기 전에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