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1부

아이디, 여름



1


발소리가 들린다. 나를 쫓아오고 있다. 쉿, 그가 오고 있다.




이메일을 받던 날, 비가 쏟아졌다. 유난히 이른 폭염이 시작된 후부터 비다운 비를 본 적이 없었다. 끈끈하고 무거운 더위였다. 대기의 어딘가에 젖은 솜같이 축축한 습기가 뭉치째 쑤셔박혀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아침, 마침내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마치 덩어리째 떨어지는 듯한 비였다.

아이디 여름. 정확히 말하면 dufma. 한글을 자모순대로 영자로 타이핑한 그 아이디를 곧바로 여름으로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건 단지 출처를 알 수 없는 메일일 뿐이었다. 곧바로 삭제를 하거나 나중에 한꺼번에 삭제하려고 내버려두지 않은 건 그 아이디 뒤에 붙은 숫자 때문이었다. dufma0724. 0724는 그의 신용카드 비밀번호였다. 보안 관계로 변경을 하기 전까지는 이메일 패스워드의 일부이기도 했었다.

dufma의 이메일에는 제목도 없고 내용도 없었다. 파일이 하나 첨부되어 있었는데, 커서를 옮기자 오리지널 사이즈의 그림이 화면에 떴다. 파일의 사이즈를 화면에 맞추지 않고 스크롤을 해가며 이만은 그 그림을 봤다. 반쯤 벗겨진 운동화, 정강이까지 오는 길이의 젖은 바지, 빗물, 붉은색의 빗물…… 아니, 피일까. 그림 속 남자는 쓰러져 있었고, 아무래도 죽은 것처럼 보였다.

사무실은 추웠다. 비 때문이 아니었다. 비가 내리든 말든 바깥의 기온이 어떻든 사무실은 과도한 중앙 냉방으로 인해 언제나 지나치게 추웠다. 며칠째 냉방장치 점검중이라는 안내가 엘리베이터에 붙어 있었다. 폭염에 에어컨이 멈추기라도 할까봐 걱정했더니 오히려 그 반대인 모양이었다. 에어컨은 쉼없이 냉풍을 쏟아냈다. 후드 티를 뒤집어쓰거나 심지어는 무릎 담요 같은 것을 스카프처럼 둘러맨 직원들이 보였다. 그래픽팀에서 먼저 설치하기 시작한 나뭇잎 캐노피들이 이제는 자리마다 없는 데가 없어서 회사 전체가 마치 정글처럼 보였는데, 그 정글이 춥다못해 온몸이 시릴 지경이었다.

포커스 그룹이 있는 부스 안은 달랐다. 곧 출시 예정인 신규 대전 게임 테스트를 시작한 지 이틀째였다. 테스트 그룹은 대행업체로부터 고용된 일반 유저들이었는데, 돈을 받고 하는 일이어서인지 아니면 게임이 그만큼 흥미진진해서인지 모두들 완전히 몰두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보안상 회사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가림막이 설치된 부스였다. 그렇다고 실내 온도가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부스 안은 더워 보였다. 몰두와 집중의 온도일 것이다. 누군가가 땀을 닦는 것처럼 손등으로 이마를 문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간혹 탄성과 탄식 소리가 새어나왔고,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욕하는 소리도 가끔 섞이는 듯했다.

포커스 그룹의 반응에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건 당연히 그 게임을 제작한 프로젝트B팀이었다. 최종 시연회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었다. 대전 게임을 여러 차례 출시했고, 또 그런 게임으로 돈을 벌고는 있었지만, 이만은 어떻게 해도 그런 종류의 게임은 좋아할 수가 없었다. 너무 나이가 들어버린 건지도 몰랐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회사 대표라기보다는 현장에서 발로 뛰는 개발자라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그게 자신의 소망에 불과하다는 것도 모르지는 않았다. 그가 S팀 프로그래머로 참여하고 있는 게임은 벌써 출시를 다섯번째 미루고 있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의 최대 장애요인이 바로 그라고 말하는 팀원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불행히도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런 말을 하는 팀원은 일부지만 그런 생각은 모두가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바쁜 하루였다. 포커스 그룹은 어쨌든 외부 손님들이었으므로 신경을 써야 했고, 신규 게임이 시연회에서 호평을 받은 후 어쩐지 전보다 더 눈치를 주는 것 같은 자신의 팀원들과 미팅도 해야 했고, 그러는 사이 CS팀장의 보고도 받아야 했다. 드래곤2974가 또 찾아왔는데, 이번에는 대표를 만나게 해달라며 돌아가지를 않는 통에 애를 먹었다는 것이었다. CS팀장과 통화를 하면서 이만은 건물 입구가 내려다보이는 창가 쪽으로 갔다. 여전히 비가 쏟아붓고 있었다. 장마가 시작된 것도 아니라는데 종일 줄기찬 비였다. 거리를 뒤덮고 있는 우산들 때문에 방금 회사에서 나갔다는 드래곤2974를 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드래곤2974는 현재 이만의 회사에서 유일하게 수익을 내고 있는 게임의 유저였다. 그냥 유저인 게 아니라 상위 몇 프로 안에 드는 유저였다. 어떤 게임이든 그 게임이 유지되는 건 상위 1프로 안에 드는 유저들 덕분이었다. 고래라고 불리는 그들이 지출하는 돈으로 게임은 굴러갔고, 나머지 99프로, 혹은 99. 5프로의 유저들은 그 고래들을 둘러싼 숫자에 불과했다. 드래곤2974는 고래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툭하면 회사를 찾아오는 유저로 유명했다. 방문 이유는 다양했다. 새로운 아이디어, 버그의 문제, 새로 업데이트된 아이템에 대한 불만, 난데없이 ‘그냥 지나가다가’. 회사 대표를 만나겠다는 요구를 한 적까지는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이만은 창가에 서서 오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드래곤2974를 생각했다. 숫자 때문이었다. 0724와 2974는 유사하게도 여겨졌고, 반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것도 같았다. dufma는 누구일까. 왜 난데없이 그런 메일이 온 것일까. 0724는 그저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혹시 어느 그래픽디자이너 지망생이 보낸 메일은 아닐까.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르지만 간혹 그의 개인 메일로 포트폴리오를 보내는 취업 지망생들이 있었다. dufma도 그중의 하나이고, 0724는 그저 우연한 조합에 불과했던 건 아닐까.

세상의 모든 우연들.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는 일들. 그러나, 때로는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믿어지는, 고작 우연이었다니, 그래서는 절대로, 결단코 안 된다고 믿어지는 그런 일들이 있었다. 그런 일들이 있다는 걸, 적어도 이만은 알고 있었다.

그날 비가 오지 않았다면, 우산을 들고 내려오는 걸 잊지 않았다면, 드래곤2974가 로비에서 벌였다는 소란이 문득 궁금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시큐리티와 이야기하기 위해 로비에서 잠깐 서성거리지 않았다면, 그는 로비 벽에 설치되어 있는 TV 화면에서 그 뉴스를 보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재개발 예정지구에서 백골 사체 발굴. 20년 이상 된 사체로 추정.


그는 그 재개발 예정지구를 안다. 모를 수가 없는 곳이다. 이십여 년 전에 그는 그곳에서 살았고, 그 십 년 전에도 그곳에서 살았었다. 그곳을 떠난 날짜도 기억했다. 1994년 7월 24일. 그가 칼에 찔리던 그날,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에게 칼에 찔리던 그날, 다섯 번이나 깊숙이 찔리고 베여 온몸이 너덜너덜해지던 바로 그날. 그리고 그날 밤의 일들. 19940724. 서울의 한낮 기온이 38.4도까지 올라갔던 날의 밤, 연희에게 줄 감기약을 사러 가던 골목길, 그 무더운 습기, 온몸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듯하던, 그리고 더운 숨, 개처럼 헉헉거리지 않을 수 없던, 마치 수증기 속을 헤엄쳐 걷는 듯하던, 그리고 하도 풀어대서 빨갛게 물들어 있던 연희의 콧볼, 토끼 같던, 그 코를 떠올리며 그가 홀로 지었던 미소…… 그리고,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그의 몸속 깊숙이 들어왔던 그 칼. 하나, 둘, 셋, 넷, 다섯.



3


기록적인 폭염이 몰아닥쳤던 1994년. 그해는 더위로 먼저 기억된다. 숨이 막힐 것 같던, 그러다가 마침내 정말로 사람들이 더위에 숨이 막혀 죽어갔던. 

그해 그 더운 여름에 이만은 통풍이 거의 안 되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셋방에서 살았다. 주인집 역시 손바닥만한 작은 집이었는데, 그 작은 집의 뒷담과 내벽 사이에 그야말로 억지로 작은 방 한 칸을 내고, 온돌을 깔고 아궁이를 내고, 뒷담을 헐어 문을 내고, 그 문과 방 사이의 좁은 공간에 수도까지 놓아 값싸게 세를 놓은 곳이었다. 화장실은 주인집과 함께 써야 했지만, 그는 자신의 방문 앞에서 세수는 물론이거니와 머리도 감을 수 있었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소변을 볼 수도 있었다. 그곳에는 간신히 석유곤로 하나를 놓을 자리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오줌 냄새가 가시지 않는 그곳에서 밥을 해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코일로 열을 내는 작은 전기 스토브 하나를 방에 들여놓고, 그걸로 믹스 커피를 타 마실 물을 끓이거나 라면을 끓여먹었다. 얼마 후부터는 그걸로 밥도 하고 국도 끓여먹었다. 더 나중에는 석유곤로까지 방안에 들여놓고 불 두 개를 피워 찌개를 데우면서 고기까지 구워먹었다. 물론 겨울을 날 때의 얘기였다. 

1994년, 그해 여름에는 열기는 물론이거니와 온기를 일으키는 그 어떤 것도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겨울에는 외풍이 극심하더니 여름에는 살인적으로 푹푹 찌는 방이었다. 어떤 밤에는 모기향이 타는 것조차 못 견딜 지경이었는데, 사실 그해 여름은 못 견딜 수준이 아니라 죽을 것 같은 수준이었다. 밖이 너무 더워 집으로 들어가면 집은 더 더웠고, 그래서 밖으로 나오면 밖은 또 더 더웠다. 에어컨은 당연히 없었고, 그걸 설치할 만한 돈이 있다고 해도 공간이 없었다. 선풍기는 더운 바람을 무한 재생산해냈는데, 선풍기를 밤새 켜놓고 자면 사망에 이른다는 속설은 아마도 저 더운 바람에 의한 열사병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달리 방법이 없었으므로 이만은 매일 밤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개처럼 혓바닥을 길게 내밀고 헉헉거리며 집으로 향하는 낮은 언덕길을 오르다보면 더위에 익은 온갖 냄새가 코를 찔렀고, 집집마다 마당을 식히느라 쏟아부은 물이 하수구에 고여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대문 앞에 내놓은 화분의 꽃들은 밤에도 축 늘어져 있었다. 다시 아침이 올 거라는 사실이 끔찍한 건 개나 사람이나 꽃이나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랬으므로 연희를 자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호프집에서 술을 마시든, 한강 다리 아래에서 후끈한 바람을 맞으며 캔맥주를 마시든, 땀을 뻘뻘 흘리며 텐트를 메고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든, 그 어떤 것도 혼자서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오래전 그때, 그는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사소한 이유만으로도 자주 몸이 뜨거워졌다. 그해 여름에 그의 몸과 머릿속은 온통 ‘연희와 함께’  ‘죽을 것 같은 더위를 피해’  ‘냉방 완비된’  ‘여관이나 모텔’에 가는 상상으로 가득차 있었다. 거의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상상은, 혹은 욕망은 매일 부풀어오르고 또 부풀어올랐다.

그해 여름의 어느 한낮에 연희와 함께 그의 방에 간 적이 있었다. 골목에서 바깥문을 열고 안으로 한 발자국을 들여놓기도 전에 연희의 표정이 아연해졌다. 방문을 열었을 때는 거의 경악에 가까운 표정으로 변했다. 말하자면 그건 방문이 아니라 찜통의 뚜껑을 연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 찜통 속에서는 키스는커녕 서로의 혀를 섞기도 전에 입술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으니까. 어쩌자고 그 더운 여름날의 한낮에 여자를, 그러니까 연희를, 그런 방에 데려갈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가 그 시간에 자신의 방이 어떤 상태일지 짐작 못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드디어, 연희와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과 흥분으로 말미암아 다른 모든 것들은 전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난데없이 비가 쏟아져 날이 좀 시원해질 수도 있고, 선풍기가 느닷없이 차가운 바람을 쏟아낼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서로에게 홀린 나머지, 더위 같은 건 무슨, 그런 건 느끼지도 못할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러나 현실의 그의 방은 그저 어마어마한 찜통일 뿐이었다. 연희는 방안으로 들어서는 대신 팔짱을 꼈다. 마치 몹쓸 셋방을 보게 된 까다로운 세입자처럼. 고집스러운 표정을 한 단단한 턱 아래로 땀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연희가 말했다.

“안 되겠다.”

“안 될까?”

“되겠니, 그럼?”

다시 골목을 돌아 언덕길을 내려오는 동안 연희는 거의 말이 없었다. 미안함과 민망함과 후회, 그리고 또 어쩌면 그런 방에 사는 남자에 대한 짜증과 불안, 난데없는 수치심, 그 모든 것이 뒤범벅되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괜찮아, 라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연희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잇, 더워! 진짜 더워!”

그후 연희는 더이상 말이 없었고, 그는 그런 그녀에게 괜찮다는 말은커녕 ‘실은 내가 미안해, 이런 방에 살아서……’라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1994년에 그가 그렇게 가난했었다는 얘길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시절에도 잘사는 사람들은 잘살았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보통 그 정도로 살았다. 그가 아주, 극도로 비참한 지경인 건 아니었다는 소리다. 이만이 그 방을 얻었던 것도 싼 월세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돈도 돈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그 집의 위치가 좋았다. 강북의 중심에 있었고, 병특으로 다니고 있던 회사와는 조금 거리가 있긴 했지만 대신 신촌과 홍대가 가까웠다. 이만이 만날 수 있는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곳에서 밤과 낮을 보냈다. 중개인의 말마따나 이만은 운이 좋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동네는 이만이 어렸을 때 살던 곳이기도 했다. 자취방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에서 골목 하나만 틀면 초등학생 때 살았던 옛집이 나타났다. 때때로 이만은 일부러 방향을 틀어 옛집 앞으로 지나가곤 했다. 그러고 나면 자신의 허름한 자취방이 좀더 견딜 만해졌는데, 방값이 싸서 그런 곳에서 사는 게 아니라 추억 때문에 사는 거라고 자신을 속일 수 있었고, 속는 줄 알면서도 기쁘게 속을 수 있었다.

이만이 그 동네를 떠난 것은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그리고 자취방을 얻기 위해 다시 돌아가게 된 것이 그후 십 년이 지나서였는데, 그 십 년 사이 그 동네는 정말이지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변한 것은 없는 대신 고스란히 세월만 흘러 가난했던 것은 더욱 가난해졌고, 허름했던 것은 허물어지기 직전이었고, 허물어지기 직전이었던 것들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폐가 딱지가 붙은 집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이만이 자기 집처럼 들락거리던 친구의 집도 있었다.

그 동네에 방을 보러 다니던 날, 부동산 중개인이 그를 데리고 갔던 집 중에는 큰대문집도 있었다. 동네에서 가장 번듯했던 한옥집이라 그렇게 불렸던 걸로 기억했다. 이만은 그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었다. 집주인이 한의사였는데 한밤중에 열이 오른 그를 아버지가 무슨 까닭에선지 병원 응급실 대신 그 한의사의 집으로 데려갔었다. 병원 응급실이 멀었거나 응급실까지 갈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거나 응급실이라는 데가 두렵게 여겨졌거나 그런 이유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금방 열이 안 내렸던지 이만은 그날 밤을 그 한의사의 집에서 보냈다. 그건 아주 기이한 경험이라 똑똑히 기억이 났다. 낯선 집의 낯선 방에서 홀로 밤을 보내던 기억. 열은 머지않아 내려서 몸이 괴로웠던 기억은 나지 않는데, 대신 낯섦이 너무 괴로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던 기억은 선명했다.

마당이 아주 넓은 집이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화장실을 가야 했는데, 마치 벌판을 가로지르는 듯했다. 남의 집에 홀로 떨어져 있었던 밤, 몸이 아팠던 밤, 마당은 쓸쓸하고 고적하고 무서워서 더 넓게 여겨졌다. 달빛이 한가득 내려앉아 있었고, 화단의 나뭇잎들이 흔들렸다. 화단에는 라일락 나무와 꽃이 활짝 핀 수국과 여주 덩굴이 있었다. 밤의 나뭇잎들은 억세고 음침하고 불길해 보였다.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그리고 난데없이도 너무나 쓸쓸해서 어린 이만은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었다.

그러했던 그 집, 그러나 십여 년이 지나 다시 찾아간 그 한의사의 집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집은 그야말로 조각조각 나뉘어 조각조각 소유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기억 속에서 엄청나게 넓었던 마당은 사실 벌판처럼 넓지도 않았고, 그나마 각자의 사생활을 유지하려는 가난한 세입자들의 악착같은 노력으로 말미암아 합판과 슬레이트와 심지어는 종이 박스 등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마당이라기보다는 셋방들의 벽을 공유하는 일종의 휴전 지대처럼 보였다. 참으로 울적한 변신이었다.

당시에는 복덕방 할아버지라고 불렸던, 정말로 할아버지처럼 늙었던 부동산 중개인의 말에 의하면 그 집은 원래 잘나가는 요정이었다고 했다. 잘나가던 당시에는 길가에 지프차들과 까만 자가용들이 ‘나래비’를 섰는데, 그런 차들 중의 하나에서 내리는 ‘그분’을 본 적도 있다고 말하면서 팔꿈치로 이만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중개인이 말하는 ‘원래’란 아마도 한의사가 살기 이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중개인의 말을 믿기는 조금 어려웠는데, 아무리 ‘그분’들이 살던 곳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동네고, 또 그가 기억하는 한의사의 집이 아무리 멋져 보였다고는 해도 이렇게 가난하고, 이렇게 비밀스럽지 못한 곳에 잘나가는 요정이 있었을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아서였다. 

게다가 그분이라니,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오랜 세월 전의 인물들이 떠올랐다. 박정희, 김형욱, 김종필 같은…… 그중의 한 사람은 총에 맞아 죽었고, 그중의 또 한 사람은 실종되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늙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만은 자신이 그런 것들을 알고 있고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고, 그러자 복덕방 할아버지가 느닷없이 동시대의 인물처럼 여겨졌다. 아무려나. 살아 있는 순간들은 누구에게나 동시대일 터였다. 

복덕방 할아버지와 한의사의 집, 혹은 요정의 마당에 서 있던 그때로부터 다시 이십 년이 넘게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이만은 지금도 그 동네의 구석구석을 다 기억할 수 있었다. 어떻게 안 그럴 수가 있겠는가. 그는 바로 그곳, 한의사의 집 바로 옆으로 나 그의 자취방으로 이어지던 좁은 골목길에서 칼에 찔렸다. 그것도 다섯 번이나. 찔리고 베이고 다시 찔리고 베이던 그 끔찍한 일이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졌었다. 그때 일어났던 그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동네를 먼저 설명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그런 동네가 아니었다면, 폐가와 쪽방과 가난과 번잡함이 그렇게 뒤섞여 있는 동네가 아니었다면, 그런 일이 그렇게 쉽게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가 누군지도 모르는 자에게 칼에 찔리는 일. 그런 동네가 아니었다면, 서울 한복판에서 그런 일이 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4


 백골 사체가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본 이튿날 오전, 이만은 그 동네를 찾아갔다. 처음부터 그럴 작정은 아니었다. 회사 앞의 정거장에 그 동네 쪽으로 가는 버스가 서 있었고,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 버스를 타는 걸 보았을 뿐이었다. 그때까지는 그런 노선의 버스가 거기 서는 줄도 몰랐었다. 버스를 탈 일은 거의 없었고, 그는 버스 요금이 얼마인 줄도 몰랐다. 줄이 점점 줄어들었다. 바쁜 출근 시간대가 지나서인지 버스 안에는 자리가 많았다. 버스가 문을 닫고 막 출발을 할 때, 그는 다급하게 달려가 차체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두드렸다. 놀랍게도 버스는 멈춰 섰고, 문이 열렸다.

이만의 회사는 IT 업체들이 모여 테크노밸리를 형성한 서울 근교의 신도시에 있었고, 그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버스는 고속도로 방향으로 달렸다. 서울에 진입할 때까지는 정차하는 정거장도 없었다. 차창으로 오전의 햇살이 길게 들어왔다. 비가 지나간 뒤의 햇살은 더 날카롭고 더 뜨거웠다. 그는 곧 곯아떨어졌다. 두어 번, 버스 유리창에 이마를 찧고 깨어났는데, 그때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 줄을 몰라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놀란 마음이 가시기 전에 다시 잠이 쏟아졌다. 

지난밤 이만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뒤척이기를 포기하고 끝내 일어나 앉은 게 새벽 세시 무렵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기사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신문, 그리고 거의 모든 인터넷 매체에서 백골 사체에 관해 다루고 있었지만 전부 단신이었고, 통신사의 기사를 받아서 쓴 듯 한결같이 똑같은 내용이었다. 기사에 의하면 사체는 폐가의 축대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폐가를 허물면서 담장과 연결되어 있던 축대의 일부가 손상되었는데, 그때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뼈마디가 토사와 함께 발견되었고, 그후 발굴 작업을 통해 나머지 부분까지 찾아냈다는 것이었다. 사체와 함께 묻힌 유류품들도 나왔다고 했다. 이십 년 이상 된 백골 사체라는 추정은 그래서 나온 것인 듯했다. 그는 같은 내용의 기사들을 거듭해서 읽다가 나중에는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새벽빛이 서서히 그의 오른쪽 뺨을 밝혀왔다. 

 사체는 축대 아래에서 발견되기는 했지만 애초에 거기에 묻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만은 기사에 나오지 않은 내용들을 짐작했다. 축대에 연해 있는 그 동네 대부분의 집들이 부실한 축대를 걱정했었다. 축대 쪽에는 장독대나 화단이 있기 마련이었다. 곧바로 축대를 뒷담으로 쓰고 있던 집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런 집들이라면 더군다나 안전을 신경써야 했으므로 시체 아니라 그 무엇을 묻기 위해서라도 그 밑을 파는 짓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시체는 화단이거나 마당이었던 곳에 묻혔을 것이고, 오랜 세월에 걸쳐 축대 쪽으로 밀려갔을 것이다. 그러니까 오랜 세월…… 땅속에서 시체가 밀려갈 정도로 오랜 세월…… 그런 일이 정말로 가능한지는 몰랐으나, 그럴 수도 있을 정도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작정 없이 버스에 올라타 계획 없이 그곳으로 향하고 있기는 했지만 사체가 발견되었다는 폐가를 찾는 것이 어려운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큰 동네가 아니었고, 그 동네에서도 폐가가 있는 구역은 한정되어 있었고, 이만은 그 동네를 아주 잘 알았다. 두 번에 걸쳐 십 년 넘게 살았던 곳이었다. 마지막으로 떠난 후 또 이십 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기는 했지만, 그 동네는 정말이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변하는 동네였다. 누군가 아주 변하지 않는다고 말을 할까봐, 아주 변하지 않아서 민원이라도 들어갈까봐, 간신히, 정말로 억지로 흉내만 내놓는 듯이 달라지는 동네였다. 

그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동네는 놀라울 정도로 여전했다. 길이 새로 깔렸지만 골목은 그대로였고, 낡은 한옥집이 재건축되어 삼층짜리 건물이 되기도 했지만 그 뒷골목에는 여전히 몇십 년 묵은 폐가가 있는 식이었다. 여전히 사람이 칼에 찔려도 놀랍지 않고, 시체가 아니라 무엇이 나온다고 해도 놀라울 게 없을 것 같은 동네였다. 

폐가가 있는 구역으로 가는 동안, 이만은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이들 몇 명이 골목 한쪽에 모여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은 서로 자신의 핸드폰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가끔씩 오고가는 말들이 방금 전 사체 발굴 현장을 다녀온 길인 듯했고, 그 현장을 찍은 사진을 돌려보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대박, 죽인다, 근데 시체는 어디 있는 거야? 그러니까 어제 왔어야 한다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맑고 명랑한 웃음소리들. 방금 전 시체가 있던 곳을 다녀온 아이들의 저토록 맑은 웃음소리라니. 

그중 한 아이의 시선이 이만과 마주쳤다. 갑자기 아이의 눈이 사나워졌다. 왜? 뭘 봐? 욕이라도 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설마 아이들에게 시체가 발견된 곳이 어디냐고 묻지는 않았겠지만, 그 눈빛 때문에 이만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다. 자신은, 이러고 놀기에는, 그러니까 사체 발굴 현장을 찾아다니며 놀기에는 너무 늙은 게 아닌가. 게다가 여름방학중일 아이들과는 달리 그는 무단결근중이었다.

아이들이 모여 서 있는 골목의 끝에 큰대문집이 있었다. 그 집도 이제 폐가가 되어 있었다. 대문에는 굵은 쇠사슬과 함께 자물쇠가 걸려 있었고, 그 앞에는 폐가구들이 무더기 져 쌓여 있었다. 설마 그 집에서 사체가 발견되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이만은 문 앞에 놓인 폐소파를 밟고 올라가 문틈 사이로 눈을 갖다대보기까지 했다. 그가 하룻밤을 잤던 그 집의 변화가 궁금하기도 했고, 어쩌면 혹시 이 집일지 알 게 뭔가, 하는 마음이기도 했을 것이다.

한옥집의 대문은 틈이 넓어 안이 다 들여다보일 것 같았지만, 문안에까지 폐가구와 쓰레기들이 쌓여 있어서 마당이 환히 들여다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눈의 초점을 맞춰가면서 애써 들여다보았는데, 그가 기억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화단이 있던 자리, 수국이 피었던 자리, 화장실이 있던 자리, 그리고 달빛이 있던 자리는 전부 무너지거나 사라졌다.

“거긴 왜 들여다보는 거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더니 남자 하나가 뒤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편하다못해 후줄근해 보이는 반바지에 러닝셔츠만 입고, 라면과 소주병이 든 검은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이만이 허둥지둥 폐소파에서 내려설 때까지도 남자는 그를 지켜보고 서 있었다. 이제는 바라보는 게 아니라 아예 노려보는 듯했다. 이상한 남자였다. 그러나 그 이상한 남자에게는 이만이 더 이상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남자를 피해 서둘러 다른 골목으로 들어선 후에도 시선이 계속 뒤를 따라오는 듯했다. 느낌만은 아니었다. 잠시 후, 남자의 발소리와 함께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쫓아오기 시작했다. 종잡을 수 없는 중얼거림이기는 했지만 대충 해석해보면 시체가 발견됐다는 게 뉴스에 나온 후 별 이상한 것들이 동네를 휘젓고 다닌다는 것, 그게 다 미친놈들이 아니겠냐는 것, 그렇잖아도 흉흉한 동네에 별 미친놈 시체까지 나뒹군다는 것, 그걸 보러 오는 놈들은 더 미친놈이라는 것, 그러니까 결론은 이만에 대한 욕설이었다.

이만이 골목 하나를 틀어 방향을 바꾸었는데도 남자는 이만의 뒤를 쫓아왔다. 어쩌면 그 남자는 그 자신이 열거한 모든 ‘미친놈들’ 중에서도 가장 미친놈일지 몰랐다. 이마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만은 정말이지, 그게 누구라도, 그게 무슨 이유더라도,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존재를 견딜 수가 없었다.

이만이 돌아섰다. 남자는 녹슨 초록색 양철문 앞에 서 있었다. 골목이 완전히 비탈길이어서 이만이 서 있는 곳에서 남자가 서 있는 문의 안쪽이 환히 내려다보였다. 꽃과 개가 보였는데, 들꽃도 아니고 들개도 아니었다. 무더기 진 소주병들이 보였고, 방금 전 안주를 배달시켰는지 배달통도 보였다. 그곳이 바로 남자의 집인 모양이었다. 겉에서 볼 때는 폐가나 다름이 없어 보였지만, 그 안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거였다. 다 무너져가든 어떻든, 버려져 있든 어떻든, 그곳에서 백골 사체가 발견되었든 말았든,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살아 있는 골목이었다.

“뭘 봐, 이 자식아! 이 미친놈아!”

그런데, 그 난데없는, 그토록 폭발적인 적의라니. 남자가 온몸을 흔들어가며 욕설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뭘 보냐고, 이 개자식아. 눈깔을 빼버릴라! 이 찢어 죽일 놈, 이 벼락을 맞아 죽을 놈아아아!”

이만은 완전히 얼어붙어 그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조차 못했는데, 그것은 그 낯선 남자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적의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멈춰 선 그곳이 그가 칼에 찔렸던 바로 그 골목이라는 것을 바로 그 순간에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노란색 폴리스 라인이 설치된 폐가가 있었다. 폐가 안쪽을 잘 들여다보기 위해 골목 위쪽에 모여 서 있던 구경꾼들이 일제히 그  사나운 욕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들 모두가 이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5


1994년 7월 24일. 이만은 칼에 찔렸다. ‘09:54:02’. 시간을 알고 있는 건 그 일이 벌어지기 직전에 시계를 보았기 때문이다. 카시오 전자 손목시계. 청회색 액정에서 까맣게 깜빡이던 숫자들. 그렇더라도 초 단위까지 기억하는 건 그의 기억력이 그만큼 좋아서가 아니다. 그는 그 순간을 기억해내기 위해 최면 시술을 받았었다.

그날 저녁 연희가 그의 자취방에 왔었다. 그날은 술기운 때문이었다. 너무 더워서 호프집엘 들어갔는데 에어컨이 형편없던 그 호프집도 덥기는 마찬가지였고, 한여름에 개도 안 걸린다는 감기에 걸려 있던 연희는 그 시원찮은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콧물까지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그날 연희가 몇 번이나 ‘아잇, 더워!’라고 외쳤는지 모른다. 그래도 시원한 건 맥주밖에 없어서 그렇게 한 번 외칠 때마다 들이붓듯이 마시지 않을 수 없었고, 술과 함께 몸속이 더워졌다. 아니, 뜨거워져버렸다. 둘은 결국 그의 방에까지 이르렀고, 그때야 그는 자신의 방에 꼭 필요한 것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약국엘 다녀와야 했다. 콧물감기약. 그리고 콘돔.

사건 직전 손목시계를 본 것은 약국 문이 닫힐까봐 조바심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약국으로 가는 지름길인 골목을 달려내려가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맹렬한 속도로 달리고 있던 중인데, 시계를 보는 동안에는 잠깐 속도가 줄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이상한 소리였다.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도저히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한. 

그러지 마요.

울음소리 같기도 했고, 신음소리 같기도 했고, 짐승의 소리 같기도 했다. 외진 골목길이었다. 거의 사람 사는 기척이 없을 정도로.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동네를 떠나간 후였는데, 그 골목에 유독 빈집이 많았다. 평소라면 굳이 그 골목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골목은 약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골목에는 사람 대신 길고양이들이 많이 살았다. 그가 들은 것은 어쩌면 발정기에 든 고양이의 ‘아주 고요한’ 울음소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소리보다도 이상한 느낌 때문이었다. 그를 쫓아오는 이상한 흔들거림. 소리가 아니라 공기의 흔들거림. 무덥고 습한, 너무나 습해서 물방울이 흘러내릴 듯한 공기의 흐느적거리는 움직임.

그는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하나 있었다. 골목이 어두워서 그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내 여자예요.

그 남자가, 아니 그것이 서서히 그에게로 걸어왔다. 술에 취한 듯 흔들리는 발걸음 같기도 했고, 혹은 절박한 듯 다급하게 달려오는 발걸음 같기도 헀다. 그 상반된 이미지가 어떻게 같이 떠오르나. 흐느적흐느적, 그러다가 순식간에 날아오는 이미지. 그러므로, 습격. 오랜 후에야 이만은 그것이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려지곤 하는 좀비의 습격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터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보다 더 실제처럼 느껴지는 공포라는 것.

이만은 몸을 벽 쪽으로 밀착했다가 곧 등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적어도 그러려고 했다. 그것, 그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뭔가를 보았던 것이다. 뭔가, 그러나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런데도 대단히 위협적인, 이해할 수 없도록 치명적인. 첫번째 칼이 등을 찔렀다. 이만은 돌아서면서 그것을 막으려 했고, 두번째 칼이 그의 팔을 그었다. 그리고 세번째 칼이 그의 배를 찔렀다. 네번째, 다섯번째는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나 어리둥절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의 감정을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랬다, 그건 어리둥절함이었다. 

칼에 찔렸다, 죽겠구나, 세상에, 내가 칼에 찔렸다, 죽겠구나, 맙소사, 칼에 찔렸다, 내가, 영화처럼, 죽겠구나, 엄마, 아버지…… 내가, 내가……

“내가 죽어가고 있어요.”

최면에 빠졌을 때, 그가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을 하면서 그는 흐느껴 울고 있었다.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검거된 용의자도 없었다. 그리고 연희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십 년을 훌쩍 넘긴 어느 날, 그가 칼에 찔린 곳에서 백골 사체가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