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한가운데를 통과해서 도착한 선우씨의 편지에 입추가 지난 가을의 문턱에 앉아 이렇게 답장을 씁니다. 물론 기온은 입추의 여지도 없이 여전히 30도를 넘어서 있고, 다른 사람보다 추위를 잘 타는 저는(그런 주제에 여름보다 겨울을 더 좋아하는 건 왜일까요) 에어컨이 가동하는 사무실이나 지하철에서는 준비해간 겉옷이나 후드티를 입고도 조금씩 떨다가, 집에 오면 되도록 에어컨을 틀지 않으려고 선풍기로 버티면서 땀을 잔뜩 흘리는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요. 그래서 어쩌다 주말에 종일 집에서 일할 땐 하루에 샤워를 두 번씩 하고야 마는데요. 가끔씩 에어컨을 일정 시간 켜는 것과 두 번의 샤워로 물을 두 배로 소비하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곤 합니다. 음식마다 열량 표시가 붙어 있듯이, 어떤 행위가 지구에 끼치는 피해량을 누군가가 ‘유해지수’ 같은 수치로 환산해서 일일이 알려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면서요. ‘21도 냉방으로 에어컨 한 시간 틀기’의 유해지수는 몇, ‘33도 물로 샤워 오 분 하기’의 유해지수는 몇, 이런 식으로요. 그렇다면 의외로 ‘에어컨 n시간 가동이 샤워 두 번보다 지구에 덜 유해하다’ 같은 정확한 근거 아래 에어컨을 n시간 틀고 샤워를 하루에 한 번 하는 것으로 조절할 수 있을 텐데요. 기후위기는 언제나 가장 시급한 문제이지만 유독 여름에 더 피부로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올여름 지구의 일부를 덮친 40도 넘는 폭염과 더이상 ‘장마’라는 이름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현상이 되어버린 폭우의 피해를 보며 무척 가슴 아프고 두려웠어요. 언젠가는 ‘여름’이라는 이름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계절도 올 것만 같습니다. 이미 와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가장 무더웠고, 4차 백신 접종으로 컨디션이 바닥을 치던 시기를 “가마~~~ 있으므 마, 한개도 안 듭다” 정신으로 잘 넘겼습니다. 선우씨가 짐짓 언어학자처럼 풀어 써주신 설명을 읽으며 잔잔하게 웃음이 터졌는데, 어느새 홀린 듯이 선우씨의 가이드대로 억양을 넣어 따라 해보고 있더군요. (얼마 전 또 한번 레전드를 찍은 <여둘톡> ‘사투리 특집’도 아주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따라 할 때마다 비단 여름이 아니라 삶 전반에 대고 하는 격려의 말처럼 느껴져서 슬그머니 힘이 돋기도 했습니다. 저는 특히 앞에 가파르게 악센트를 찍어 ‘한개도’를 발음하는 순간이 너무 좋습니다. 목소리로 신나게 활강하는 기분이 들어요. 그러면서 더욱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태어나는 아기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이 말을 여름마다 꼭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아기들에게 가만히 있으면 한 개도 안 더울 수 있는 여름의 가능성을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이요. 정말 누군가 ‘지구 유해지수 계산앱’ 같은 걸 꼭 만들어주면 좋겠습니다.
선우씨의 20만이라는 숫자 고찰을 보면서 억~~~쑤로(자연스러운가요? 하지…… 말까요?) 웃었습니다. 저와 함께 사는 박태하가 너무나 D님 같은 사람인데다가, 자기 같은 사람의 미묘하게 정확한 말을 들으면 선우씨처럼 그 생각을 멈출 수 없는 사람이어서예요. 게다가 선우씨와 D님이 부산에 있던 시기에 마침 제가 부산시립미술관에서 강연을 하게 되어서 저희도 부산에 있었고 KTX와 부산역 인파를 일부 목격했거든요. “서울 인구의 50분의 1은 이번 주말 부산에 와 있지 않을까요?”라는 D님의 말을 저녁 식탁에서 제게 전해 들은 박태하는 “50분의 1이면 20만…… 20만은 좀 많지 않나?” 하더니 이내 다음과 같은 생각회로에 빠집니다. 1) 서울 인구 1천만에 총 25개 구, 이걸 나누면 구별 평균 인구가 40만인데, 한 구 인구의 절반이 그날 부산에 있었다? 잘 안 와닿네…… 2) 그래, 우리 아파트 단지가 1000세대쯤 되잖아. 세대별 인구수는 다를 테지만 세대 수 기준으로 따져도 비율은 비슷할 테니 그건 무시하고, 그렇다면 이 아파트 단지의 20세대가 부산에 있었다? 가능할……지도? 3) 왜, 우리 자랄 때 한 반에 50명쯤 있었잖아. 그럼 반에서 한 명 정도가 7월 성수기에 부산에 가 있다? 충분히 있을 수 있지 않나? 4) (한참을 노트북으로 검색하다가) 으아, KTX 서울-부산 구간 이용객 수 통계 찾기 되게 힘들다! 5) 근데 잠깐, D님의 말씀도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서울에서만 서울 인구의 50분의 1이 왔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서울 인구의 50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를 은유로 사용하셔서 ‘전국 각지에서 서울 인구의 50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의 사람들이 왔다’는 의미일까? 전자일 확률이 높긴 한데……
정말…… D님과 전화 통화라도 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지구 유해지수 계산앱’을 누군가 실제로 만든다면 D님과 박태하 같은 사람이 아닐까요. 이런 사람들이 조선시대에 숫자까지 콕 집어 ‘십만양병설’ 같은 걸 주장하고 그랬던 게 아닐까요. 박태하는 이를테면 정유정 작가님의 소설 『28』을 읽으면서도 소설 속 배경인 수도권 인근 도시 화양시 인구가 29만이고 4개의 구로 나뉜다는 설정을 보고 “광역시가 아닐 경우 시 인구가 50만은 돼야 구 설치 허가가 떨어지는데…… 심지어 50만이어도 구는 2개로 나뉘지 절대 4개까지는 될 수 없는데……”라며 못내 신경쓰여 좀처럼 진도를 나가지 못하기도 하고(물론 결국 끝까지 잘 읽었습니다), 평소에도 두루뭉술하게 ‘4~5일 정도’라고 말하는 대신 ‘117시간 정도’라고 말하기를 선호하는 편인데, 이런 정확을 지향하는 성향이 종종 저까지 미묘하게 계속 신경쓰이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선우씨가 D님의 말에 마음속으로 구포역까지 배회하셨던 것처럼요. 하지만 이런 미묘한 신경쓰임, 미묘해서 은근히 재밌지 않나요? 저는 선우씨도 그 과정을 십분 즐기는 것같이 보여 읽으면서 더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렇게 옆에서 찾아주는 정확함에 과녁처럼 관통당하기도 합니다. 한번은 제가 당시 같이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던, 아주 하는 짓마다 주변에 민폐를 흩뿌려 얄밉기 그지없는 모 계열사 팀장에 대해 투덜거리는 걸 한참 듣던 박태하가 불쑥 질문을 던졌어요. “근데 ‘얄’자를 붙이는 게 정말 맞아?” 얄? ‘얄’자를 붙이는 게 맞냐고……? 이게 무슨 얄리얄리얄라셩처럼 뜻 모를 말인지 잠깐 멍했던 저는 이윽고 질문의 의미를 알아챔과 동시에 크게 깨달았어요. 제가 ‘얄밉다’는 표현을 쓰는 많은 경우, 사실은 그 대상이 미웠던 것인데 미움이라는 감정을 받아들이기가 두려워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밉다’ 앞에 ‘얄’자를 붙인다는 것을요. 미워하는 게 정당한 순간에도 ‘얄’자를 붙여 상황을 귀엽고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대충 넘어갔고, ‘밉다’보다 한 단계 낮은 ‘얄밉다’로 감정의 수위를 낮춰 또 대충 넘어갔다는 것을요. 선우씨의 책 제목인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와 정확히 반대 선상에 있는 ‘미워한다고 말할 용기’를 저는 내지 못했던 거예요. 그것은 제 친구의 회사 대표가 직원들이 무언가를 정식으로 요구하고 간절하게 호소하는 것을 ‘징징댄다’라는 표현으로 가볍게 넘겨버리곤 하는 것과도 비슷한 행위여서 저는 약간 자괴감마저 느꼈습니다.
한 번에 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부터 제 말 속에서 얄짤없이 ‘얄’자를 없애고, ‘얄’ 뒤에 숨어 있던 미움과 대면하면서, 미움을 미움 그대로 받아들여야 그 미움을 비로소 해소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동안 충분히 해소될 수도 있던 미움들이 ‘얄’자에 막혀 오히려 쌓여가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미워할 용기는 미워하지 않을 용기, 나아가 사랑할 용기의 시작점이기도 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물론 미움을 꼭 버려야 할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갖고 있으면 있는 만큼 저의 에너지와 감정을 소진시키는 건 분명하니까요. 꼭 품어야 할 미움만을 정확하게 골라내고 나머지는 계속 버리고 싶습니다. 앞으로도요.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는 데에 요즘 꽤나 큰 기여를 하는 목탁을 선우씨가 보고 싶다고 하셔서 지금 저도, 목탁도 조금 흥분한 상태입니다. 심지어 ‘서울 사이버 음악대’의 피처링이라니, 세상에. 만약 성사된다면 제 삶에 흔적기관처럼 존재하는 제 음악인생에 가장 큰 성취가 될 거예요. 제 회사 동료들은 한 명을 빼고는 목탁의 존재를 모르지만, 들켜도 난처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간밤의 술자리에서 남은 소주를 가방에 병째 챙겨놓고 그 가방 그대로 출근했다가 동료들의 복잡한 얼굴을 몇 번 마주하면서(한 병까지는 그래도 괜찮은데 1차와 2차에서 각각 챙긴 두 병이 들어 있는 날에는 유독 복잡해 보이더군요……) 배짱이 두둑해졌기 때문입니다. 소주병에 비하면 목탁은 얼마나 건전한 물건인가요. 알고 보면 두 개 다 청아한 소리를 내는 물건이라는 점에서 궤를 같이하지만 말이에요.
홍콩에서 회사를 다니던 시절, 출근길 집 앞 계단에서 휴대폰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액정이 대차게 나간 적이 있습니다. 검은 화면 위로 얼핏 보면 영화 <매트릭스> 배경처럼 보이는 초록색 줄들이 사이버틱하게 그어져 있었어요. 속상한 것도 속상한 거지만, 무엇보다 시간을 볼 수 없다는 것에 당황한 저는 급히 집으로 들어가 시계를 찾았는데, 오래 방치해둔 손목시계는 멈춰 있었고, 당시 제 침대가 헤드 프레임에 조명, 콘센트, 전자알람시계가 고정적으로 부착되어 있는 제품이어서 탁상형 알람시계를 따로 장만해두지도 않았어요. 집안에 휴대폰 시계를 대체할 만한 게 이다지도 없다니(같은 용도의 물건을 여간해서는 두 개 이상 들이지 않는 미니멀리스트의 시련) 더욱 당황한 저는 그냥 갈까도 생각해보았지만, 그때그때 시각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은 너무 큰 공포여서(약속한 시간에 일 분이라도 늦으면 세상이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시간강박자의 시련) 급한 대로 벽에 걸린 커다란 벽시계를 떼어 가방에 넣고 서둘러 집을 나섰습니다.
그날은 마침 사무실이 아니라 외부 미팅처로 곧바로 출근해서 오후까지 미팅이 줄줄이 있는 날이었는데요. 미팅 사이사이 지하철을 타고 이동할 때마다 가방을 뒤적이는 척 신중히 연기하며 가방 속 벽시계로 시간을 틈틈이 확인하곤 했어요. 시계가 크니까 시원시원하니 좋긴 참 좋더군요. (분침 끝을 보려고 가방 속에서 살살살살 시계를 돌릴 때는 은밀한 재미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오후나 되어 사무실로 돌아온 저는 긴장이 풀리면서(사무실은 모니터 화면부터 시작해서 각종 시계들이 있는 천국이었으니까요!) 가방 단속에 잠시 소홀하고 말았고, 미팅중에 가방 틈으로 삐져나온 벽시계를 발견한 몇몇 동료들의 얼굴 위로 적나라한 ‘?????’라는 메시지가 일제히 떠오른 것을 보고 혼자 웃음이 터지는 바람에 회의를 주관중이던 팀장 눈에까지 띄어 벽시계의 사연을 들은 팀장이 당장 휴대폰을 고치라고 회의에서 절 빼주었던 게 오랜만에 생각났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벽시계도 들켜본 사람이니까요. 벽시계에 비하면 목탁은 얼마나 가방 속에 하나쯤은 들어 있을 법한 물건인가요. 고백하건대, 선우씨의 편지를 받은 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시험 삼아 마음가는 대로 목탁을 쳐봤다가 살짝 놀라버렸습니다. 『전국축제자랑』을 쓰기 위해 축제장을 돌아다니며 무수히 마주쳤기 때문일까요. 제 안에 어느새 품바의 바이브가 심어져 있더군요. 사실 저보다 더 깜짝 놀란 것은 목탁일 것입니다. 자신이 이런 방식으로 다루어질 줄 상상이나 했을까요. 어쩌다 이 목탁은 절이 아닌 저희 집에 와가지고는 이렇게 잔망스러운 품바의 리듬을 뿜어내게 되었을까요. 너무 불경한 건 아닌가 싶지만 목탁이 저 불경 대신 이 불경이라도 만나 반가워하면 좋겠습니다. 언제 목탁과 함께 가을을 기념할 겸 추억의(!) ‘의좋은 형제 축제’의 고장이자 사과가 맛있기로 유명한 충남 예산의 한 양조장에서 사과를 증류하고 오크통에서 숙성시켜 만든 사과 브랜디를 품에 안고 갈게요. 함께 마셔요.
2022년 8월 15일
김혼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