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회

새로운 시대

로아가 가방에 숨겼던 레토르트 죽 몇 봉지의 값을 치르고 물류 창고를 빠져나오자마자 소리는 온 얼굴을 찌푸리며 악을 썼다.

그러니까 집에 있으라고 했잖아. 왜 따라 나오느냐고, !”

언니, 미안해.”

이심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로아의 조그만 어깨를 토닥이며 모영에게 먼저 집에 가 있으라고 말했다. “자세한 사정은 내가 나중에 집에 가서……

모영은 오른팔로 아이를 끌어안으며 이심의 말머리를 잘랐다. “이런 동네에 어떻게 언니만 두고 가.”

, 그러니까 이런 동네에서 꺼지라고!” 소리가 이심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뭐야, 왜 이제 와서 착한 척인데!”

로아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소리는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렀지만 이내 손을 뻗어 동생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새 한풀 기가 꺾인 소리의 얼굴을 보자 이심은 몇 해 전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병원비를 마련하지 못한 친구를 위해 편지를 쓰고, 수줍어하며 자기 엄마 등뒤로 숨던 해사한 얼굴이 겹쳐 보였던 것이다. 물류 창고 앞에서 스친 순간에 곧바로 알은척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도 들었다. 그랬다면 최소한 로아가 경비 로봇에게 붙들리는 일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로아는 그만 울라는 소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쉬이 눈물을 그치지 못했고, 로아의 눈물을 보고 덩달아 겁을 먹은 아이도 훌쩍이기 시작했다. 아이의 얼굴과 모영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던 소리가 입술을 달싹이며 걸음을 멈췄다. 아이의 정체를 눈치챈 것일까. 이심과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고개를 돌린 소리는 이 동네까지 온 것을 보면 그쪽 사정도 빤하다며 이죽거렸다.

그래, 소리야. 네 말이 다 맞아.” 어깨에 손을 올리며 대꾸하자 소리가 부루퉁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이심의 손을 뿌리쳤다. “내가 반갑지 않을 만하지. 우리는 아무 관계도 아니고. 하지만 최소한 너희를 집에는 데려다주고 가야겠다.”

걸어갈 만한 거리였지만 지나온 길로 되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이심은 일행을 데리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순순히 따라와서 지하철을 타기는 했으나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은 채 화살표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소리를 대신해 이심은 로아에게 애월씨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자 조그마한 입에서 한숨부터 새어나왔다.

할머니는 아파요.” 로아가 다시 울 듯한 얼굴로 말했다. “엄마도 이제 선생님 아니에요. 삼촌들이 잡혀갔는데……

소리가 로아의 손목을 쥐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이심을 향해 눈을 흘기며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비유각이라고 전하더니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느냐고 질문하자 재미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포인트라도 쌓아서 엄마 드리려고?”

그거 말고, 더 중요한 데 쓰려고요.”

소리는 이심을 향해 어쩌면 저렇게 모를까, 하는 실로 경멸에 가까운 시선을 던진 뒤에 다시금 게임에 열을 올렸다. 모영의 안색에서 피로감을 읽은 이심은 다음 역에 닿았을 때 아이와 역사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청했다. 역의 출구와 출구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는 낙서도, 쓰레기도, 악취도 없었다. 조금 전과는 딱 한 정거장 차이인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평범한 모습을 본 모영은 고집을 부리지 않고 아이와 함께 역에 남았다.

몇 번이고 손을 뿌리치는 소리를 붙잡아 집안에 들였을 때 세진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딸을 끌어안더니 이심에게 무어라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소리가 귀가하지 않은 며칠 동안 애를 태우다, 태우다 화를 낼 기운도 남지 않았다는 얼굴이 해쓱했다. 로아는 곧장 이심이 사준 죽을 데워서 방 한구석에 누워 있던 애월씨 앞으로 가지고 갔지만 애월씨는 입맛이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애월씨, 저 기억하세요?” 이심이 애월씨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원칙상 정식으로 진료는 못해드리지만, 어디가 편찮으신지 말씀해보세요. 가볍게나마 제가 한번 봐드릴게요.”

말씀은 고마운데, 괜찮아요. 아픈 데 없어요.”

애월씨가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 앉았다.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온 소리가 열이 있는지 그녀의 이마를 짚어본 다음 숟가락을 쥐여주었다. 세진은 그런 소리의 모습을 핏발이 선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엄마가 졌다하고 말했다.

너 거기 나가는 거 더이상 안 말릴게. 집에만 들어와. 잠은 와서 자라고. ?”

소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아가 소리에게 매달리듯 끌어안았다. 소리는 덥다며 뿌리쳤지만 풀어진 얼굴로 웃고 있었다. 세진이 한시름 놓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이심을 향해 옥상에 올라가자는 눈짓을 했다.

선생님한테 하소연할 일은 아니겠지만, 기계들이 화병은 못 읽나봐요. 진단은 애월씨한테 아무 이상이 없다고 나오는데 딱 봐도 그래 보이지는 않잖아요.” 세진이 말했다.

로아가 삼촌들이 잡혀갔다고 하던데요. 세진씨도 하던 일을 못 하신다고요.”

한참 됐어요. 하필이면 집에 애월씨하고 애들만 있을 때 정훈이가 끌려간 게요. 저도 애월씨처럼 속이 썩을 것 같으니 선생님께만 얘기하는 거예요.” 세진이 이심 곁으로 바짝 붙어 서서 목소리를 낮췄다. “훈민이가 퇴근길에 먼저 연행됐고, 이튿날에 경찰이 집에 들이닥친 거예요. 경찰들 말로는 비리가 있었대요. 훈민이가 시정 전체에 막대한 손해를 끼칠 만한 비리를 저질렀고 정훈도 연관이 됐다는 거예요.”

잠시만요, 그만한 비리에 연행을 할 정도면 언론을 타고도 남았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공영 뉴스 맨날 보지만 들은 기억이 없는데요.”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세진이 명치께를 두드리더니 크게 숨을 몰아쉬며 흐느끼듯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납득이 안 돼요. 훈민이는 그 일 있기 열흘 전에 승진을 했었어요. 부서도 세무 쪽에서 비서실로 바뀌었고요. 업무 파악만 해도 벅찼을 텐데, 승진을 하자마자 열흘 만에 그런 비리를 저질렀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게다가 그 사람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저는 알아요. 가족으로 정붙이고 몇 년을 살았으니까요. 물론 훈민이가 우리 애들 키우는 데는 손 하나 까딱 안했죠. 그건 선생님이 맞게 보셨어요. 하지만 최소한 나랏일 하면서 어마어마한 비리를 저지르고 딴 주머니 찰 사람은 아니에요. 그 보다는……

눈치를 볼 줄 모르는 사람이죠.” 이심이 대꾸했다. “훈민씨가 부서를 옮겼다면 남들이 보고도 못 본 척 덮어뒀던 윗선의 비리를 눈치 없이 캐물었겠네요. 여태 관례라고 넘어가던 일을 문제삼았을 수도 있겠고요.”

세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날 밤에 귀가한 자신에게 애월씨가 훈민 형제에 관해서는 입을 닫아야 한다며 신신당부했다고 말했다. 갑자기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설령 공무원으로 일하며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절차에 맞게 재판을 받아야 할 게 아니냐고 기막혀하자 소리와 로아에게까지 불똥이 튀는 것을 막으려면 제발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고 거의 빌다시피 했다는 것이었다.

애월씨는 그날 이후로 딴사람이 됐어요. 도대체 경찰들에게 무슨 협박을 받았는지는 여태 저도 몰라요. 제가 아는 건, 다 털고 새 출발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뿐이에요. 일자리도 마음대로 못 구하고, 이사도 안 된대요. 반국가 세력의 가족은 거주지를 마음대로 이전하지 못하게 방지법으로 막아놨다네요.”

거듭 한숨을 쉬는 세진의 이마와 미간 사이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이심은 세진의 손을 쥐어보았다. 차고 거친 손을 쥐고서 엷은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을 바라보는데 더이상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니던 직장에서, 함께 사는 가족에게, 가족이 될 뻔한 사람에게 일어난 일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명확했다. 이런 일들이 우연하게도 일제히 자기 주변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 사회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서로가 서로에게 일어난 일을 눈치챌까봐, 속속들이 알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세력이 모두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것이다.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는 처음이라면서 헛웃음을 짓는 세진은 무척 지쳐 보였다. 이심은 그녀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도 지쳐 보였기 때문에 자신이 알고 겪은 일에 관해 모조리 털어놓을 수 없었다. 다만 시청뿐만 아니라 보건 센터에서도 유사한 일이 있었다고만 전했다.

경총을 막았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세진이 말했다.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까요?”

글쎄요. 속는 셈 치고 우리 큰딸 말을 들어볼까봐요.” 세진이 땀을 닦듯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요즘 소리가 그러거든요. 자기들한테 경총을 무너뜨릴 계획이 있으니까 같이 하자고요.”

 

*

 

길었던 주말의 끝에 이심을 위로해준 것은 엄마가 보내온 몇 장의 사진이었다. 엄마는 무탈하게 이사를 마쳤으니 안심하라고 했다. 이제는 평생의 짐이었던 남편도 잊고, 마음에 돌덩이를 얹어놓는 뉴스에도 관심을 끊고 고즈넉하게 살겠다고 강조했다. 새 보금자리를 찍은 사진 아래에는 비록 다섯 명이 살기에 좁기는 하지만 맞바람이 치는 구조라 쾌적하다고 적혀 있었다. 게다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덜 추운 남동향인 모양이었다.

남동향이라. 어쩐지 위안이 되는 그 말을 이심은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어보았다. 그러고는 도대체 아빠가 살아 있기나 한 것일까 싶은 불안감이 피어오를 때마다 볕이 잘 들고 바람도 잘 통하는 엄마의 새 보금자리에 관해서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환한 방에서 휴식을 취하는 엄마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편히 잠드는 데 도움이 되었다. 다만 고작 며칠간 유효했을 뿐이었다. 열대야가 시작되자 끝없이 이어지는 상념을 곱씹으며 새벽까지 뒤척이게 된 것이다.

더위에 지쳐 겨우 잠이 든 후에도 샴푸의 요정까지 갖추고 있던 일층의 소유권을 빼앗기고 이층에 여섯 가족의 짐 전체를 몰아넣은 소리네의 컴컴한 모습이, 몇 년 사이에 기력이 쇠한 애월씨가, 죽 몇 봉지 때문에 로봇에게 붙들려 떨던 로아의 얼굴이, 약에 취해 길에 늘어져 있던 이들과 행방을 알 수 없는 최선생이 부유하는 꿈을 꾸다 땀에 흠뻑 젖어 깨어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아침이면 메이드의 액정 위로 피어난 새싹이 누렇게 시든 잎을 늘어뜨리며 마그네슘과 멜라토닌 복용을 권했지만 건강보조제를 챙겨 먹을 기력조차 나지 않았다.

그날도 내내 잠을 설친 후 출근길에 나선 이심은 지하철에 오르자마자 하나 남은 빈자리를 차지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집안과 다를 것 없이 아침부터 푹푹 찌는 열차 내부의 공기에는 더위에 지친 사람들의 몸에서 풍기는 땀냄새가 안개처럼 스며 있었다.

테크노 비엔날레 개막 막바지 준비에 박차

새로운 시대라는 테마로

미래를 여는 기술이 총망라될 전망

습관처럼 지하철 내부의 공영 뉴스 화면을 바라보던 이심은 자막으로 이어지는 문구를 한없이 공허하게 느끼며 목에 밴 땀을 닦았다. 이번 행사에서 공개될 기후위기 피해 지역 재건 기술을 소개하는 영상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사막이 된 지역을 다시 주거지로 만드는 기술을 널리 자랑하려고 국제 행사도 여는 나라의 수도에서 출근길 지하철 내부의 냉방은 기대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심은 실소했다. 차세대 이동 기술과 혁신적인 스마트팜 플랫폼, 이번 행사를 통해 국내에 최초로 선보인다는 치안 유지 전용 안드로이드를 소개하는 현란한 영상이 이어지는 동안 이심은 제발 백 년도 전에 개발한 에어컨이나 제대로 활용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더 들여다보고 있다가는 뉴스 화면에 뭔가 던져버릴 것만 같아서 질끈 눈을 감았다.

시각이 차단되자 공기 중의 쿰쿰한 냄새가 더 짙게 느껴지는 것 같아 진저리를 치기도 잠시, 어느새 꾸벅꾸벅 졸던 이심은 귓가를 파고드는 다급한 호소에 눈을 떴다. 옆자리에 앉은 여자의 입에서 세상에, 라는 감탄사가 비어져나왔으므로 이심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여자의 손끝이 공영 뉴스 화면을 가리켰다. 초췌한 낯빛에 형형한 눈빛을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도저히 더는 견딜 수 없어서 양심 고백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소리는 화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메이드로 뉴스의 음성을 재생시킨 것이었다.

화면 속 남자는 앞서 자신과 같은 문제의식을 드러낸 동료들이 있었으나 하루아침에 증발해버렸다고 알렸다. 이번 테크노 비엔날레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사라진 사람들의 명단과 함께 총리실에서 자행한 반헌법적인 범죄의 실체가 드러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발언은 자막 처리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누군가 음성을 틀어주지 않았다면 남자가 하는 말에 아나운서가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며 놀라고 있다는 사실밖에는 알지 못했을 터였다.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화면이 바뀌어 폭염 시기에 즐기기 좋은 게임을 소개하는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무실 안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문을 열자마자 창가에 몰려있던 동료 중 박선생이 달려들 듯 이심에게 다가오더니 혹시 유료로 구독하고 있는 뉴스가 있느냐고 물었다.

저도 아직 없어요.” 이심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전부터 봐야 된다는 마음은 있었는데 아무래도 여유가 안 나서……

최선생 없으니까 전멸이구만.” 박선생이 혀를 차더니 여기를 좀 보라며 메이드의 홀로그램 프레임을 열었다. “뉴스에 나온 그 사람도 공무원이었대요. 처음 화면에 잡혔을 때 아나운서가 비엔날레 홍보 담당자로 소개했거든요. 그 사람 말이 끝나기 무섭게 테크노 비엔날레 홈페이지에 들어갔는데 그새 막혔더라니까요.”

검게 변한 화면 한가운데에 갈등 조장 방지법으로 인해 열람을 제한한 페이지라는 문구가 보였다. 포털 사이트는 물론이고 소셜 네트워크에서 아침에 있었던 일이나 해당 공무원의 이름을 검색해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제 정말 막 나가는구만.” 김선생이 반 발짝 뒷걸음질치며 말했다. “보세요. 우리 지역 학부모들이 정보 나누는 카페인데, 여기 자유 게시판도 닫혔어요.”

다음 순간, 사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팀장은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들어오더니 대뜸 우리 팀에 진단학과 전공은 없느냐고 물었다.

원래는 있었잖아요. 아시면서.” 박선생이 대답했다. “왜요? 자제분이 또 어디 아파요?”

팀장은 말을 꺼낼 기력도 없다는 듯 오른손을 내젓더니 에어컨을 껐다. 주먹 쥔 손으로 목뒤를 두드리던 그는 이달부터 공공기관의 실내 온도 기준이 조정되어서 폭염주의보가 내리지 않은 날에는 에어컨을 쓸 수 없다고 덧붙였다. 동시에 기가 막힌다는 탄식이 쏟아졌지만 팀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금지 사항을 한 가지 더 알렸다. 테크노 비엔날레를 노리는 테러 행위에 가담할 우려로 인해 당분간은 다른 국가로 우회한 IP를 사용하여 인터넷에 접속하는 일이 금지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팀장이 공식적으로 정부에서 금지한 일을 공무원이 범했을 때 어떤 불이익이 따르는지를 설명하리라고 이심은 추측했고 예상대로였다.

기껏 목숨 걸고 양심선언하는 공무원이 나왔는데도 단속이나 시키면서 들들 볶고, 나라가 이렇게 망하는군요. 아니, 어차피 이번 행사는 순찰용 안드로이드인가 뭔가 그거 사 올 구실 만들려고 쇼하는 거 다들 아는데 왜 이 난리랍니까.”

기막혀하는 박선생에게 팀장은 지금까지의 일은 난리 축에도 못 낀다며 놀라기에는 이르다고 말했다. 뭐가 더 남았을까. 이어질 말이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속에서 신물이 올라와서 이심은 물잔을 집어들었다.

비엔날레 행사 당일에 공무원 동원령이 떨어졌어요. 새로운 시대 어쩌고 하는 테마 들었죠? 새 시대의 주인공인 다음 세대와의 공존을 보여줘야 된다고, 꼭 가족 전원이 참석하시랍니다.”

사무실 안으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이심은 물잔을 손에서 놓칠 것만 같아서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박선생이 진통제로 보이는 알약 한 알을 삼키더니 이게 지금 진지하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하고 반문했다.

, 기가 막히죠. 나도 마찬가지예요. 어쩌다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왔나, 내가 이런 꼴을 보자고 공공의가 됐나 싶은 그 별의별 잡생각들은 일단 행사 뒤로 집어치우시고 행사 당일에는 가족 동반으로 전원 참석하도록 하세요.”

그러니까 팀장님.” 김선생이 헛기침을 하며 나섰다. “권고 사항이 아니라 정말로 필수 참여라고요? 그것도 가족 전원이요?”

. 전원이요. 김선생 남편이 아마 교사셨죠? 그럼 아마 남편분도 오늘 학교에서 공지 전달 받았을 테니까 따로 말 안 해도 아실 겁니다.”

아니, 아무리 공무원을 단속하고 싶대도 그렇지, 총리 본인은 홀로그램으로만 등장하는 행사에 우리는 이 더위에 가족까지 끌고 가서 박수 부대를 하라니요. 무슨 독재국가처럼 일을 이런 식으로……

듣자 듣자 하니까, 거 제발 입 조심 좀 해요!”

팀장이 테이블을 내려치자 그의 오른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있던 펜이 튀어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김선생이 기가 막힌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따지려 들자 박선생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렸다.

날도 더운데 우리 김선생님 위해서 한번 더 말씀드리죠. 이 지역 공무원이랑 공무직들은 다음주 행사에 온 가족을 데리고 참여하라는 게 정부 지침이에요. 시간외수당은 없지만 다음 연말정산 때 그만큼 챙겨준답니다. 이상, 그사이에 가족 구성원 인원 변동된 사람 있으면 남고, 나머지는 일들 봐요.”

팀장은 아이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노골적으로 이심을 응시하며 말을 맺었다. 그럼에도 이심은 아이의 존재를 자기 입으로 알리는 게 맞는지 아닌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팀원들이 자리를 뜨는 동안 모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난 말이야, 이선생. 최선생 그 여자가 여태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참 용하다 싶어요.” 사무실에 둘이 남자마자 이심 곁으로 다가온 팀장이 중얼거렸다.

?”

그렇잖습니까. 우리처럼 골목 골목 돌아다니면서 일하는 사람이, 그렇게 오만 일을 다 벌이고 다니다보면 객사하기 딱 좋잖아. 나 최선생한테 직접 얘기한 적도 여러 번이에요. 자살당한다는 말도 못 들어봤냐고. 그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객사당하는 수가 있으니까 작작 좀 하라고. 그랬더니 뭐, 객사 정도면 호상이라나? 세상에는 멀쩡히 태어나서 의료 폐기물 취급받는 생명들도 많다나? 어이구, 이거 어째 이선생도 무슨 얘긴지 알아듣는 눈친데.”

궁금하시면 알려드릴까요?

팀장은 노여운 것인지 두려운 것인지 모를 눈빛으로 이심을 쏘아보더니 메이드의 통화 알림이 울리자 잠시 기다리라고 손짓했다.

아니, 두 시간 밖에 안 지났는데 다시 먹이는 건 안 돼. 그거 독한 약이라고. 일단은 해열 시트를 갈아줘봐. 그것밖에는 수가 있나. 그래요, 내가 금방 다시 걸게.”

팀장이 무너지듯 자리에 앉더니 오른손으로 자기 가슴을 쿵쿵 소리가 나도록 두드렸다.

자제분 열이 심하신가보네요.”

사흘 전부터 애가 펄펄 끓는데, 염병할 메이드는 아무 문제 없다고만 하니 돌겠어. 나는 지금 이 앞에 빌어먹을 최선생이 있으면, 우리 애 한 번만 좀 봐달라고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이거 보라고. 옛말에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최선생은 진작에 수감이 됐다더군.”

이심이 들고 있던 부채를 놓치자 팀장이 주워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놀라는 거 보니까 이선생은 확실히 최선생이랑은 달라. 최선생 그 미친 여자는 그릇이 얼마나 크신지 수감되면서도 아주 실실 쪼개고 있었다던데. 그래, 객사도 호상이라고 나불거리면서도 실실 쪼갰었지.”

수감이라니, 어디로요?”

그걸 전하게 놔둘 것 같습니까? 이선생 집 사정이나 돌봐요. 위에서 그 댁 사정 다 파악하고 있다니까, 비엔날래에 애 손 꼭 붙잡고 오고. 왕진 가서는 제발 입 조심하고.”

 

방지법에 의해 열람이 불가능한 페이지는 점차 늘어갔지만, 팀장의 경고와 달리 이심이 진료중에 입단속을 해야 할 만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땀에 젖어 자기 집을 방문해준 선생님께 드릴 게 찬물뿐이라며 민망해하는 노인들은 여느 때처럼 허리와 무릎과 어깨의 통증을 호소할 뿐이었다. 양심선언을 한 공무원을 보지 못한 것인지, 보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팀장의 말마따나 입 조심을 하고 있는 이심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고 느낄 때마다 이심은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이미 너무 많이 일어나버렸다고 악을 쓰며 소리치고 싶었다. 동시에 만에 하나 당장 전 국민이 시청하는 공영 뉴스에 등장하여 악을 쓴다고 하더라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게 빤하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꼈다. 그러나 나흘이 지난 후, 이심은 그날의 첫 진료를 위해 방문한 노부부의 집에서 아무런 변화가 없으리라는 예측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사태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그 집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조여들 만큼 곳곳에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백발을 한쪽으로 빗어 넘긴 할머니가 처음 보는 선생님 앞에 집꼴이 창피스럽다며 구시렁거렸는데, 이심은 이런 풍경에는 익숙하니 개의치 않아도 된다고 대꾸했다.

우리집 말고도 이런 집이 많다고요?”

그럼요, 어르신. 원래 아끼고 살다보면 선뜻 뭐 하나 버리기가 어렵잖아요. 이번주에만 해도 몇 집이나 뵈었어요.”

할머니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자기 남편 앞에서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아달라며 안방 쪽으로 원망의 시선을 던졌다. 방문은 닫혀 있었지만 익숙한 공영 뉴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문 위에 걸린 붉은 천 위에는 힘 있는 필치로 ‘OUT!’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OUT! 위에 적힌 문구는 보이지 않도록 낡은 수건으로 가려져 있었다. 할머니는 이심의 시선을 의식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헛기침을 했다. 이심이 진료를 시작하겠다고 밝히자 그녀는 지난주부터 남편이 복통과 설사에 시달렸다가 어제부터 자신에게도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최소한 와이프한테 아픈 걸 옮기지는 말아야지. 내가 그렇게 진료를 받으라고 해도 바우처 아깝다고 고집을 피우더니, 나아야 말이죠. 엊그제부터는 나까지 속이 안 좋은 거예요. 그래놓고 배앓이가 감기도 아니고 어떻게 옮느냐고 그러는데, 옮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바이러스성 장염이면 옮으실 수 있죠. 특히 한집에서 화장실을 같이 쓰시는 경우는요. 변기를 락스로 자주 닦아주세요.”

아이고, 이거 봐.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할머니는 그것부터 확인하고 싶었던 듯 벌떡 일어나서 의기양양하게 안방 문을 열었다.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할아버지가 반쯤 입을 벌린 채 공영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볼륨이 지나치게 커서 이심이 미간을 찌푸리자 할머니가 볼륨을 두 단계 내리며 혀를 찼다.

이 양반이 가는귀가 먹어서 이래요.” 할머니가 한결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자기 남편을 바라보았다. “귀는 이번처럼 치료를 미뤄서가 아니라, 그때 내가 천식이 도져서 쓴 바우처 때문에 이 사람이 쓸 바우처가 안 남아서……

옛날 얘기 해서 뭐해.” 할아버지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배탈 좀 난 걸로, 바우처 쓸 일이 아닌데. 선생님, 저 정말 거의 나았어요.”

지금 자세만 봐도 기운이 없어 보이시는데요. 이렇게 종일 계시면 허리 건강에도 치명타예요, 어르신. 허리 쪽은 바우처 한두 장 써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건 잘 아시죠?”

이심의 경고에 할아버지는 냉큼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의 의료 정보에는 식품에 관한 알레르기가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이심은 그에게 혈변을 본 적은 없는지, 구토는 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등뒤에서 흘러나오는 공영 뉴스의 아나운서의 어투가 신경쓰였다. 평소보다 한층 상기된 음성은 그 자체로 뭔가를 예고하는 듯했다.

예고의 실체는 이심이 진료를 마치기 직전에 등장했다. 자신을 서울시청에서 근무하는 평범한 7급 공무원이라고 소개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기 위해 이심은 고개를 돌렸다. 프레임 한가운데에 등장한 남자는 어디에나 존재할 법한 수더분한 인상이었다. 그는 테크노 비엔날레를 앞두고 벌어진 테러 행위를 접하고 지금껏 당연하게 여겨왔던 일에 관해 재고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공무원으로서 국가에 봉사할 기회도 언제 어디서든 위협받을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게, 이번 제안의 배경이 되었다고요?”

아나운서의 질문에 그는 온화하고도 겸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조금 엉뚱한 사고방식일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위기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미담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확장 현실을 통해 편리한 방법으로 치를 수 있는 행사지만, 이런 때일수록 공무원들이 직접 발 벗고 나서보면 어떨까, 그 자체로 국가를 섬기는 서로의 진심이 전달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실은 제가 제안을 하면서도 호응이 있을지 반신반의했는데요. 예상외로 몇 시간 만에 공무원 사회 전체에서 호응이 쇄도했습니다.”

공영 뉴스는 공공의에게까지 동원령을 내린 일도, 아침 뉴스에서 내부 고발을 했던 공무원의 행방도, 방지법을 근거로 한순간에 사라진 사람들과 인터넷 게시판 페이지들도 애초에 없었던 듯 진행되었다. 동원령을 내려놓고는 이렇게 뻔뻔할 수가. 이심은 다시금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그 같은 거부감마저 압살하겠다는 것처럼 뉴스에서는 종일 평범한 7급 공무원의 아이디어가 일으킨 나비효과’ ‘사이버 테러에 맞서는 미담’ ‘공무원들의 자발적 참여 움직임같은 타이틀을 단 보도가 이어졌다.

그날 저녁 뉴스에는 어김없이 경총이 등장하여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테러와 거짓 선동으로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은 이때, 대한민국 공무원들이 보여준 위대한 솔선수범의 정신을 깊이 치하한다고 운을 뗐다. 미사여구를 남발하는 그의 등뒤로 얌전히 서 있는 여야의 지도부 중에는 한때 청년 정치의 희망으로 불리던 신찬석도 있었다. 카메라가 신찬석의 핏기 없는 얼굴을 비췄을 때, 푸르스름한 멍자국이 비쳤다. 왼쪽 눈썹 위에서 이마까지 번져 있는 멍을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경총일 것이라고 이심은 직감했다. 연설을 마친 경총이 찰나의 순간 화면 중앙을 응시하며 한쪽 눈에만 살짝 힘을 주는 표정을 보자 직감은 좀더 분명해졌다. 그 얼굴에는 자신이 무엇이든 던지고 누구든 부숴버릴 수 있다고 쓰여 있는 듯했다. 뉴스를 시청하는 국민들이 이런 짐작을 하리라는 점까지 고려하고 신찬석을 세워두었다고 으스대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모두에게 숨소리조차 내지 말고 총리실의 뜻에 따르라는 경고로 읽혔다.

전력 제한으로 멈춘 엘리베이터 때문에 집까지 계단으로 걸어올라가는 동안, 이심은 여러 번 멈춰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듣는 이 하나 없는 허공에 대고 지쳤다는 말을 몇 번이나 내뱉은 후 벨을 누르자 문을 열어준 아이는 이심을 향해 활짝 웃으며 기다렸어요!” 하고 말했다.

기다렸어? 나를?”

!”

이심은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아이를 끌어안았다. 양손에 타월 소재의 원피스가 가진 보송보송한 촉감이 느껴졌다. 볼에는 온기를 품은 아이의 정수리가 닿았다. 어쩌면 이렇게 따스할까. 아이를 품에 안을 때마다 이심은 그저 아는 것과 실제로 느끼는 일의 차이를 통감했다. 의학 지식으로 그 또래 아이라면 대체로 성인보다 기초 체온이 높다는 점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0.5도 정도 높은 체온이 발산하는 힘이 얼마나 크고 구체적인 것인지는 아이를 만나고 눈을 맞추며 지낸 시간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이심은 문득 자기 아이가 며칠간 고열에 시달리고 있다는 팀장을 떠올렸다.

결국 말이야. 최선생님이,” 이심은 운을 뗐다가 아이가 잠든 뒤에 전하리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머, 최선생님 소식 들었어?”

, 나중에 얘기할게.”

모영은 알아들었다는 듯 이심의 어깨를 도닥이더니 이번주가 참 길지하고 속삭였다.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좋은 소식이 하나 있어. 얘가 드디어 이름을 두 배수로 압축했대.”

이심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 정한 건 아니고?”

아직 정한 건 아니래.” 모영도 따라 웃었다. “나는 뭐, 이해해. 이름처럼 중요한 것도 없잖아. 그리고 얘가 오늘 언니를 더 열심히 기다린 이유는 따로 있지.”

모영은 얼른 말하라는 듯 검지로 아이의 볼을 톡톡 건드렸다. 그러자 아이가 이심에게서 몸을 떼더니 두 눈을 반짝이며 같이 게임해요! 화살표 게임!” 하며 활짝 웃었다.

뭐야, 날 기다린 이유가 그거였니?” 허탈해진 이심이 아이의 코끝을 쥐며 말했다.

포기해, 언니. 얘 눈이 이렇게 빛나는 것 좀 봐.” 모영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필 오늘 게임이 업그레이드가 됐거든. 한 판만 얼른 해주고 재우는 게 나아.”

모영은 이심에게 오늘부로 추가된 기능을 설명해주었다. 메이드의 게임용 프레임 안에서만 즐길 수 있던 배경 제한이 해제되어서 어디에든 화살표를 띄우고 밀어올리거나 끌어당길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여러 사람이 합을 맞춰 플레이하면 화살표의 크기도 더 커진다고 했다.

그게 오늘부터 되는 거였어?” 이심이 물었다.

. 경총 담화보다 이것 때문에 더 난리던데?”

물류 창고 근처에서 봤던 애들도 그렇고 프레임 없이,” 거기까지 말한 뒤 이심은 입을 다물었다. 선민과 희수가 찾아온 일은 혼자 알고 있는 게 낫겠다 싶어서였다. 당시에 선민이 커스텀한 것이라고 말하던 모습도 그제야 떠올랐다. “아무튼, 어떻게 하는 건데?”

모영과 아이는 시범을 보여주겠다며 그들의 방에 엄지손가락 크기의 화살표를 띄우더니 합 십하여 몇 분 만에 주먹만하게 부풀렸다. 화살표가 커지는 데 비례하여 점수 획득을 알리는 축포도 더 크고 화려해졌다. 아이는 한 번에 세 명이 함께 플레이하면 화살표가 얼마나 커질지 궁금하다며 두 발을 동동거렸고 이심은 하품을 삼키며 그럼 딱 한 번만 성공시킨 뒤에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고 약속을 받았다. 냉큼 대답을 하고서 메이드를 찬 왼손을 들어올리는 아이의 모습은 자못 비장하기까지 했다.

오랜만에 화살표 게임을 하는 이심의 동작은 둘에 비해 번번이 반 박자 늦었다. 이윽고 이심의 입에서 그만하고 내일 다시 해보자는 말이 나올 즈음 드디어 셋의 동작이 맞아떨어지자 공중에서 형광 불꽃이 분수처럼 쏟아져내리더니 주먹만한 화살표가 아이의 머리통만해졌다. 모영은 아이와 하이파이브를 한 후에 가차없이 게임을 종료시켰다. 어찌나 재빨리 움직였는지 한 판만 더요!”라고 조르는 아이가 한발 늦은 꼴이 되었다.

안 돼. 우리집에는 약속 안 지키는 사람 없으니까. 안 그래?” 모영이 단호하게 입을 앙다물었다.

그럼, 그럼. 우리집에는 약속 안 지키는 사람도, 거짓말하는 사람도 없지.”

이심이 거들자 아이는 작은 어깨를 늘어뜨렸으나 곧 납득한 듯 양치질을 하겠다며 욕실로 향했다. 게임을 껐지만 거실에는 색색의 화살표와 축포의 잔상이 여전히 남아 있는 듯했다. 앉은자리에서 그대로 눈을 감자 모영이 이심의 어깨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여기 뭉친 것 좀 봐. 언니 가서 누워, 내가 스팀 타월 만들어 갈게.”

더워도 그건 좋지.” 이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 차라리 이번달에 같이 많이 해줘.”

게임을?” 욕실로 향하려던 모영이 멈춰 서며 물었다.

. 데이터세 깎아주는 건 이번달 한정이니까.”

그래야겠네. 일단 가서 누워 있어.”

침대에 누운 이심은 욕실에서 내일도 꼭 같이 해달라고 모영에게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꽤 멀리에서 들리는 것처럼 느꼈다. 눈을 감자 다시금 화살표 게임의 잔상이 아른거렸는데 잠시 뒤에 모영이 덮어주는 스팀 타월이 후끈후끈한 열기로 눈꺼풀을 감싸며 휴식시간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하필 그때 메이드의 메시지 알림음이 들리자 모영은 신경을 끄고 그만 쉬라고 종용했다. 그러나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이심은 그럴 수 없었다. 메시지를 보내온 사람은 엄마였다. 이제 정말 세상일에 관심을 끊고 살고 싶었다고 운을 뗀 엄마는 자신이 구독하고 있는 뉴스에서 보도된 내용에 소름이 끼친다고 적었다. 한숨을 쉬는 이심을 보며 또 무슨 일이 났느냐는 모영의 질문에 이심은 메시지 창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사흘 전, 아침 뉴스에 등장하여 내부고발을 감행했던 공무원이 갈등 조장 방지법 위반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던 중 돌연사했으며, 유족들은 고인의 건강에 이상이 없었다며 반발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다음 내용 또한 그에 못지않은 충격을 안겼다. 현재 해당 방송의 프로듀서 또한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루하고도 한나절이 지나는 동안 그는 누구에게도 목격되지 않았다. 또한 어떠한 연락에도 응답이 없는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