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가족이 다 함께 외출할 일정을 잡은 후에 모영은 아이에게 이제 슬슬 이름을 결정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보호자가 둘이나 함께하니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부르면서 찾을 이름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이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평소처럼 소리 내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않는 태도와 모영의 시선을 피하는 얼굴을 보건대 시간이 더 걸리리라고 이심은 예상했다.
실제로 외출하기 전날 밤, 어깨를 옹송그린 아이의 입에서는 “아직 못 정했어요.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모영은 맥 빠진 표정을 숨기지 못했지만 이내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하긴 나 같아도 결정이 어려울 것 같아. 이름이 이상하면 사람들이 놀릴까봐 겁나서 그러지?”
“아니요.” 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진짜 마음에 드는 걸 못 찾아서요.”
“정말?” 모영은 웃음을
터뜨렸는데, 웃음이 잦아들었을 때는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남
눈치 보느라 그러는 게 아니라니. 세상에, 확실히 네가 나보다
낫다. 이런 것도 일종의 진화로 볼 수 있으려나.”
모영은 판단의 기준이 외부보다 스스로의 만족에 있는 듯한 아이의 태도를 환영하는 것과는 별개로 안전을 위한 방비
태세는 늦출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언젠가부터 소위 슬럼이나 다름없다고 치부되는 동네로 향하는
여정인 만큼 지하철역에서부터 목적지까지의 동선을 대로 위주로 짰으며, 아이에게는 특별한 미션을 주겠다고
일렀다. 이름을 짓기 전까지는 집 밖에서 수줍음을 잘 타는 아이처럼 굴라는 것이었다. 미션을 잘 수행하면 다녀와서 간식을 주겠다고 하자 아이의 두 눈이 반짝였다.
“집 밖에서 누가 말을 걸면 있지,
그냥 내 뒤로 숨으면 돼.” 모영이 입을 앙다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처럼 이렇게 조금 창피한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오른손으로
내 옷을 살짝 쥐면 더 자연스럽겠다. 연습을 좀 해보자.”
이심이 연습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자 모영은 아이의 시선을 피해 상체를 틀더니 소리를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만
“왠지 불안하단 말이야!” 하고 읊조렸다. 그런 다음 이심에게 자기와 마주보고 서라고 했다. 이심은 알겠다고
대답하며 일어났지만 때마침 엄마에게서 집을 내놨다는 메시지가 도착하자 도로 자리에 앉았다. 드문 확률로
아빠가 생존해 있고, 만에 하나 마음을 바꾸어 먹는다고 해도 이제는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이심은
떠올렸다.
담당 수사관은 이런 식으로 메이드를 놓고 증발한 사람들의 말로는 빤하니 실종자의 신변 정리를 해두도록 권했다고
엄마는 적었다. 처음 실종 신고를 접수받은 경찰의 반응도 엇비슷했으므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놀라기는커녕 어릴 적부터 지금껏 이심은 엄마가 아빠를 놓아버리기를 바라왔다.
그랬음에도 ‘이쯤 하면 내 몫은 다 했구나 싶다. 여기까지
하련다’라는 메시지를 읽고 나자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아빠가 택한 것으로 짐작되는 죽음의 형태가 허망하게 느껴져서일까. 아니면 이렇게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엄마가 여태 미루고만 있던 세월이 허망해서일까. 양쪽 다인 것 같았다. 향후의 거취에 관해 묻자 엄마는 서안의 집으로 가는 것은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이심은 자기 방으로 들어와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거기로 가는 게 아니라고?”
“그래. 대강 들었는데도
거기로는 못 가겠더라. 일단 한 번 들어가면 하나 있는 자식도 내 마음대로 못 본다더라고. 너 한번 만나려면 사전 승인을 받아야 된다나 뭐라나. 그러다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해봐라. 너랑 눈도 한 번 못 맞추고 가는 수가 있겠더라니까? 이제 와서 그렇게는 못 살지.”
“그럼 어디로 갈 건데.”
“내 걱정 마. 옆집 살던
모녀 기억나지? 그 집 딸이 먼저 저세상 간 다음에 엄마 쪽이 편입한 가족이 있는데, 거기서 나도 받아준대. 너한테 부담 줄 걱정도 없고 얼마나 다행이야.”
이심은 모영의 엄마 성지씨의 경우를 떠올렸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기회는 아주 드문 행운이었다. 기본적으로 고령자가 혼자서 집합가족에 받아들여지는 확률은 극히
낮았다. 그럼에도 이심은 한숨 놓았다는 엄마의 말에 쉬이 맞장구를 칠 수 없었다. 옆집 아주머니를 제외하면 일면식도 없는 가족 사이에 끼어드는 것은 결코 녹록치 않을 터였다. 간호사였던 경력 덕분에 받아주었다니 엄마에게 바라는 점이 분명할 테고, 그
사실을 엄마 또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심은 엄마를 적극적으로 말릴 수 없었다. 아이가 없었다 하더라도 고민 없이 엄마에게 손을 내밀 능력은 되지 않았다. 얼마나
더 열심히 살았다면 그럴 능력이 되었을까 싶은 생각에 이심은 통화를 마친 후에도 한동안 불 켜지 않은 방에서 망연히 앉아 있었다.
방에서 나온 이심에게 모영은 다시금 무슨 일이 있느냐고 입모양으로 물었다. 이심
역시 입모양으로 아이가 잔 후에 다시 얘기하자고 답하자 모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언니, 거기 그대로 서서 물어봐. 애기야, 이름이 뭐니, 하고.”
“이름이 뭐니?” 이심의
목소리가 떨렸다.
모영은 얼른 자기 등뒤로 몸을 숨기고는 허리춤을 꼭 붙잡는 아이에게 잘했다고 칭찬하며 큼직한 사탕 한 알을 건넸다. 그러자 아이는 손뼉까지 치며 환하게 웃었다.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아이의 얼굴은 안에 든 액체의 빛깔을 그대로 비춰 보이는 맑고 투명한 잔 같다고 이심은 생각했다. 그렇게
맛있느냐고 물은 이심은 아이를 꼭 끌어안아보았다. 아이가 까르륵 웃자 달콤한 사탕 냄새가 나는 숨결이
느껴졌다. 모영이 두 사람을 동시에 끌어안으며 아이의 볼을 간질였다.
‘수줍은 척하기 연습’은
이튿날 아침에도 이어졌다. 귀찮아하며 마지못해 돕던 이심은 지하철에 오르자마자 모영의 조심성이 지나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 내부의 뉴스 화면 위로 또다시 테러라는 단어가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공영 뉴스의 아나운서는 경찰국이 보름 앞으로 다가온 테크노 비엔날레를 대비해 비상 태세에
돌입했다며 테러와 관련되는 사항은 무엇이든 신고하는 시민 정신을 발휘해달라고 강조했다. 화면 하단에
고지된 테러 신고 핫라인은 뉴스의 꼭지가 바뀌어 테크노 비엔날레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각국의 재계 인사들이 소개되는 동안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상해.” 모영이 팔짱을
낀 채 화면을 응시하며 말했다. “요새는 국빈이라는 말을 막 쓰는 거 같지 않아? 옛날에는 외국에서 대통령이나 와야 국빈이라고 했었을 텐데.”
“경총 기준이겠지 뭐. 외국
대통령보다는 CEO들이랑 할 얘기도 더 많고, 해먹을 것도
더 많지 않겠어?”
이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면 한가운데에 경총이 등장했다. 그는
증폭되는 가짜 뉴스에 지친 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앞으로 두 달간 모든 국민에게 데이터 세를 30% 감면해주기로
했다는 소식을 직접 알렸다. 몽롱한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한시바삐 데이터를 사용해야겠다는
듯 자신의 메이드로 손을 뻗었다.
개찰구를 빠져나왔을 때 모영은 아이의 손부터 잡았다. 이심도 아이
옆으로 바짝 붙었다.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찔렀고, 출구
쪽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는 이미 한참 전부터 가동을 멈춘 것으로 보였다. 그 옆으로 난 계단 곳곳에
굴러다니는 쓰레기에는 주삿바늘도 섞여 있었다. 외설적인 그라피티를 지운 흔적이 거칠게 남아 있는 벽을
보며 이심은 아이의 눈을 가려주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역 밖으로 나가자 상황은 더욱 암담했다.
시선이 닿는 곳 어디나 약물에 중독되어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앙상한 가로수의 그늘이나마 찾아서 기대어 있는 사람은 그나마 나은 축이었다. 쓰레기 더미를
베고 늘어져 있는 이들은 오월과 함께 시작된 더위 속에 살갗이 따갑도록 내리쬐는 뙤약볕을 피할 생각조차 못하는 듯했다. 듬성듬성 이가 빠진 남자가 뭉개진 발음으로 히죽거리며 말을 걸어왔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한 단어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무료 급식 센터 건립 후 벌어진 일에 관한 소문은 들었지만, 고작
몇 년 사이에 이 지경이 되었을 줄이야. 이심은 자신이 이 근처에서 살 뻔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경악했다. 한때는 진지하게 편입을 고려했었던 가족들이 살던 곳, 단정한 이층
주택이 이어지는 비교적 말끔하던 동네는 방금 내린 역에서 고작 한 정류장 떨어져 있었다. 걸어서도 여기서
이십 분이면 닿을 거리였다.
“우리 조금만 더 빨리 걷자.”
길 건너를 향해 눈짓하는 모영의 시선이 닿는 곳에 굵은 쇠꼬챙이를 쥔 채 어슬렁거리고 있는 일군의 무리가 보였다. 이심도 아이의 손을 잡았고, 셋은 뛰다시피 걸음의 속도를 높여 목적지로
향했다.
덜컹거리는 엘리베이터와 거울에 적힌 난삽한 욕설을 보며 예상한 것과 달리 약물중독 관리 지원 센터 내부의 분위기는
화사했다. 냉방이 되는 실내에는 부드러운 재즈 피아노의 선율이 흘렀다.
아치형 눈썹을 가진 비서 안드로이드는 자신의 이름을 ‘순’이라고
소개했는데 안드로이드치고는 풍채가 좋아서 이심보다 키도 한 뼘은 더 컸다. 아이는 순을 보자 재빨리
모영의 허리춤을 붙잡으며 뒤로 숨었고, 모영은 잘하고 있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순을 따라 상담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센터장의 입에서 맨 먼저 나온 말은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였는데 차가운 어투는 아니었다.
“놀라셨을까봐 그래요. 세시
정각이면 순찰차가 도니까, 일부러 그때 맞춰 오십사 말씀을 드린 거라서요.”
센터장은 백발이 더 많이 보이는 잿빛 단발 아래 얇은 면으로 된 가운을 입고 있었다. 순은 찻잔이 든 쟁반을 가지고 왔는데 센터장이 한쪽 팔을 흔들며 눈짓하자 “안
까먹었어요. 아무튼 성격이 왜 이렇게 급하신지 몰라” 하고
웃으며 이심에게 손바닥만한 바구니를 건넸다.
왼쪽 팔목의 메이드를 작동 중지시키고 벗자 팔목에 주변보다 피부색이 한 단계 엷어진 띠가 보였다. 근래에 집밖에서 메이드를 벗었던 적이 있기는 하던가. 이심은 흐릿한
기억을 더듬으며 모영이 건넨 바구니 안에 메이드를 넣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구니를
돌려받은 순이 물러나자 센터장이 입을 열었다. “순이는 누가 염탐하러 오면 어련히 메이드 말고 다른
장비를 숨겨오지 않겠냐고 그러지만, 저는 이렇게 해야 마음이 놓이더라고요.”
“조심해서 나쁠 거 없죠.” 이심이
동의했다.
센터장은 빙긋 웃으며 아이와 눈을 맞췄다. “머릿결이 참 곱구나. 이름은 지었니?”
아이는 연습한 대로 입을 꾹 닫은 채 모영의 팔 쪽에 기대며 얼굴을 묻었다. 앉아
있는 터라 나름의 요령을 발휘한 것이었다. 모영은 “여기는
안전한 곳이니까……” 하고 입을 열었다가 혼란을 줄 게 염려되었는지 말끝을 흐린 채 가만 아이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네. 조심해서 나쁠 거
없겠죠.” 센터장이 사정을 알 만하다는 듯 말했다. “그간의
복용량은 얼마나 되나요?”
이심이 가방 안에서 약통을 꺼내 건네자 센터장은 뚜껑을 열어 안을 확인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어 번 정도 먹은 게 다네요. 천만다행입니다.”
“랩실 안에서는 한 번도 복용한 적 없다고 해요.” 이심이 말했다.
“그랬을 거예요. 나올
때만 쥐여주는 식이니까요.”
센터장은 일찍 발견해서 다행이라고 한번 더 강조한 뒤 아이가 알약을 삼키는 일을 어려워하지는 않는지, 알레르기는 없는지, 잊지 않고 매일 같은 시간에 약을 챙겨 먹을
수 있는 환경인지 체크했다.
“원래는 살필 게 더 많은데, 이
댁에는 이선생님이 계시니까 걱정이 없어요. 얘야, 이제 어른들끼리
잠깐만 얘기할게. 나가서 순이랑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있을래?”
아이는 아이스크림이라는 말을 듣고 꿀꺽 침을 삼켰지만, 다시 한번
모영의 팔을 양팔로 끌어안았다.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순이 미소 지으며 두 팔을 내밀었으나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언니랑 같이 가면 안 돼요?”
“금방 나갈 텐데 뭐. 잠깐만
아이스크림 먹고 있으면 돼.”
모영이 달랬으나 아이는 연신 싫다고, 무섭다고 말하며 모영에게 매달렸다. 수줍음을 노력하는 행동으로 보기에는 지나쳤다. 좀처럼 투정을 부리지
않는 아이가 안드로이드 앞에서 처음으로 떼를 쓰는 모습을 보자 이심은 아이가 랩실에서 겪었을지도 모르는 일에 관해 섬뜩한 추측을 하게 되었다. 그래, 애가 얌전해도 너무 얌전하다 싶었어. 이심은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아무래도 내가 데리고 나가 있는 게 좋겠어.”
모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이도 냉큼 서서 그녀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두
사람이 상담실 밖으로 나가자 센터장은 이심이 지금 염려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알겠다고 말했다.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랩실
안에서 나고 자란 애들 환경이 행복했다고는 못하겠지만, 학대받는 일은 없거든요. 랩실을 만든 사람들하고, 자진해서 유전자를 제공한 사람들은 다른
건 몰라도 애들 인지 발달이나 기억력에 해를 끼칠 일은 절대로 안 만들어요. 어린 시절에 겪는 폭력이나
가혹행위가 인지 발달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쯤이야 뭐, 상식이고요.”
“다행이라는 말은 뭣하지만 그나마 다행이네요.” 이심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긴, 안드로이드 개발사 쪽에서도 신경을 쓰는 문제일 테고요.”
“그럼요. 보험료 때문에
망한 회사 나오고, ‘팰러앨토 합의’ 나온 뒤부터는 아시잖아요. 인간한테 완력을 썼다는 혐의로 보험료 물 일만큼은 안 만들겠다고, 안드로이드를
출시한 다음에도 단속이 아주 철저해요. 다른 건 안 무서워도 회사가 망하는 건 무섭다 이거죠. 랩실 만들고서 벌인 일 때문에 망한 회사는 없는데, 그것도 참 기가
막힌 일이네요.”
“이런 사정을 아시면, 센터장님도
혹시……”
“네. 저도 랩실 소속이었던
시기가 있어요. 변명 같지만, 유전자 편집 연구 파트는 아예
분리된 곳이어서 본관에서 일어난 일은 나중에서야 알았죠.”
“제 파트너도 비슷한 경우였던가봐요.”
연구 초기에 몇몇 랩실에서 탈출 사건이 벌어진 직후는 끔찍했다고 센터장은 말했다. 물론 당시에 자진하여 랩실을 해체시킨 회사도 없지는 않았다. 아이들을
입양해가는 재벌가도 있었다고 전해 들었다. 그러나 흉흉한 소문이 더 많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도시 괴담이 입에 오르자 랩실 관계자는 자기 마음대로 회사를 그만둘 수도 없었다.
“사직서 들고 갔더니 당장 회사를 그만두는 건 갈등 조장 방지법 위반이라
안 된다는 거예요. 법으로 불가하다니 그럼 여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어디서 뛰어내리는 수밖에는 없는가보다
하고 있을 때 손을 내밀어준 게 최선생님이었어요. 저더러 그러다 수배자 처지가 되지 말고, 몇 달 조용히 버티다가 인사부 쪽에 딜을 넣어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이제 최선생님 관해서는 무슨 얘기를 들어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아요.” 이심이 말했다.
“알 만하네요.” 센터장이
미소 지었다. “그런 최선생님도 이 동네가 이 지경이 되었을 때는 놀라는 눈치였지만요. 급식 센터를 크게 짓는다 싶더니 무료 식사 쿠폰을 거의 무한정 뿌려댔거든요.”
“그런 일이 있었나요?” 이심이
놀라며 물었다.
“공영 뉴스에는 안 나오니까 이 동네 사람이 아니면 모르죠. 서울 전역의 노숙자가 모였는데 나중에는 경기도나 강원도에서부터도 걸어왔답니다.
그런데 경비를 강화하기는커녕 하루 두 번 순찰차가 돌 때 아니면 이 동네에 경찰이 있기는 한가 싶다니까요. 아예 망치려고 마음을 먹었는지 경찰 조직에서 도려내야 될 인사들은 죄 여기로 배정된다고 하고요. 정부가 손을 놨다는 소문이 나면서 약 거래 하는 인간들까지 꼬이다보니까 손쓸 수 없는 지경이 된 거예요, 고작 몇 년 만에요.” 센터장은 약통을 집어들더니 말을 이었다. “실은, 랩실에서 돌려받은 아이들이 버티는 시간도 그 정도랍니다. 고작 몇 년이요. 그나마도 랩실에서 쥐여준 진통제를 자주 복용한
아이들한테 남은 시간은 그보다 더 짧고요.”
모영의 회사에서 양육 수당을 지급하며 강조한 ‘아이가 살아있는 동안’이라는 문구를 떠올리며 이심은 이마를 짚었다. 센터장의 손에 든 갈색
병 안에 든 젤리는 한때 북유럽 일부 지역에서 만성 통증 완화에 도움을 주는 건강보조제로 인기몰이를 하다 미량의 마약 성분이 검출되어 판매가 중지되고, 한국에는 아예 수입 자체가 금지된 제품이었다. 직접 볼 일이 생기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던 그 오렌지빛 젤리의 정체를 깨닫고 난 후에 이심이 상의할 사람이라고는 최선생의 딸, 선민뿐이었다. 선민은 이곳의 위치를 알려준 뒤에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전했다. 우선
처음 한두 번은 아이를 데리고 가야 한다는 것. 동네가 험하니 셋이 함께 움직이는 편이 낫다는 것. 그리고 당분간은 최선생이 맡던 진료를 이어서 해달라는 것.
모종의 불길함을 느끼면서도 한집에 사는 아이에게 닥친 위험을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으므로 이심은 순순히 선민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최선생을 대신해서 진료를 하러 갔을 때 이대로 자기들을 두고 갈 수는 없다며
온몸을 떨던 이들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때 거실에 모여 있던 이들 중 다수는 청소년이었다. 본래부터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처지의 아이들은 진통제인 줄 알고 복용한 젤리로 자신도
모르게 중독에 빠진 것이었다. 한 집에서 따라 먹은 가족이 함께 중독된 경우도 왕왕 있을 터였다. 그들은 그 점을 빌미로 언제든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될지 모른다는 위기감마저 안고 있다고 센터장은 말했다.
“여기서 삼십 분쯤 더 외곽에 있었던 오래된 시영 아파트가 작년에
헐렸거든요. 거기를 다 밀고 새로 올린 건물도 급식 센터다 아니다 소문이 무성했는데, 얼마 전에야 알게 됐죠. 열 동짜리 건물 전체가 다 소년원이라는
사실을요.”
창밖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고, 이어서 무언가 산산조각을 내듯
연이어 내리치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이어졌다. 익숙한 일인지 센터장은 창 쪽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찻잔을 들었다.
“센터 안은 안전하니까 걱정 마세요.
보험 접수 안 하면서 상황 정리하는 데는 순이만한 고수가 없을 거예요.”
센터장은 낡은 캔버스 백에 아이에게 줄 것과 진료시에 쓸 몇 가지 약을 넣어주며 미량이라 하더라도 이미 마약
성분에 오래 노출된 아이들이 원인 불명의 고통 없이 지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남은 삶에서 조금이나마 덜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눈을 감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심은
캔버스 백을 끌어안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최선생님은 괜찮으신 건가요?”
“아시잖아요. 그분은 아마
이 자리에 계셨으면 내 걱정 할 때가 아니라고, 그럴 여유가 있으면 자기가 하는 일을 좀더 적극적으로
도와달라고 했겠죠.” 센터장이 이심을 응시하다가 이해한다는 듯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도 부담스러우면 됐어, 나한테는 선민이가 있잖아, 하고 씩 웃었을 거고요. 자기 뜻을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센터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이심에게 잠시 기다렸다가 다음 방문자들과 함께 나가라고 권했다. 남매인 그들은 이 동네 출신이라 지름길로 안내할 거라면서 그녀는 차 한 잔을 더 따라주었다.
남매는 마침 역 근처의 물류 창고에 갈 계획이었다며 이심의 가족을 역까지 배웅해달라는 센터장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모영은 물류 창고에 가면 물건을 직접 살펴보고 살 수 있는 거냐고 흥미를 보였다.
“그게 이 동네에 사는 유일한 장점이긴 한데, 물건이 많지는 않아요. 기본적으로 더 보관하는 게 손해인 것만 싸게
팔아치우는 거니까요.”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남동생 쪽이 말했다.
모영은 역과 가깝다니 금상첨화라고, 아이의 옷을 사서 가자며 반겼는데
이심은 썩 내키지 않았다. 센터장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의 잔상 때문인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괜스레 남매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 같아서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가자, 우리 애 옷 사본
적 없어서 곤란했잖아. 가서 딱 얘 여름옷만 좀 사자. 다른
건 눈길도 안 줄게. 약속할게.”
이심은 별수없이 그러마고 동의했지만 이십 분 후, 목적지에 근접했을
때 누나 쪽이 한 가지 주의 사항이 있다는 말을 꺼내자 다시금 불안감에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물류 창고 입구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애들한테는 눈길을 주지 마세요. 곧장 창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 기억하시면 돼요.”
“위험한 아이들인가요?” 이심이
물었다.
“불쌍한 애들이죠.” 남동생
쪽이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출한 애들이 앵벌이를 하거든요.”
“뭘 한다고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모영이 걸음을 멈춰 서서 되물었다.
“창고 안에서 나올 때 빵 한 봉지만, 쌀 한 봉지만 사서 나눠 달라, 데이터를 조금만 나누어 달라 그러면서
엉겨붙는 식이에요.” 누나가 쯧쯧 혀를 차며 대꾸했다.
잿빛 컨테이너 수십 채를 이어 붙인 모양의 창고 근방에 다다랐을 때 구걸하는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입구에서 몇 미터쯤 떨어진 곳에 한 무리의 청소년들이 있었고 그들은 서넛이 짝을 이루어 화살표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시시덕거리는 모습은 얼핏 천진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열 명 남짓 되는 그들 사이에는 이르게 찾아온 더위를 고려해도 노출이 지나친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앞만
보시는 게 좋아요.” 동생 쪽이 그렇게 말한 것과 거의 동시에 앙상한 허벅지를 훤히 드러내는 핫팬츠를
입은 소녀가 함께 게임을 하고 가라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말씀드렸잖아요.” 누나
쪽이 손바닥을 들어 이심의 시야를 가리며 말했다. 아예 시선을 주지 마시라니까요.”
이심은 뭔가 할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마디가 더 오고가면 더 견디지 못하고 상대에게 짜증을 내고 말 것처럼 날이 무척 습했다. 창고 안에
들어섰을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흐릿한 먼지 냄새가 이는 실내에는 더이상 적재할 가치를 잃은 상품을
할인 판매하는 F 구역의 위치를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왔고, 팔
부분이 반질반질해 보이도록 닭은 구형 로봇이 물건을 훔치다 적발될 경우에 원 상품 가격의 스무 배에 해당하는 벌금을 부과한다는 경고를 반복하며
느릿느릿 실내를 누볐다. 천장 가까이로는 납작한 박스를 매단 드론이 이동하고 있었다.
“그럼 장 보세요.” 누나
쪽이 손부채질 하며 말했다. “이따가는 후문 방향으로 나가시면 길만 건너서 바로 역이에요.”
남매와 일별하자 모영은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밝은 음성으로 물건을 직접 보고 고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며
미소 지었다. 어릴 때는 엄마의 휴일 전날 밤마다 함께 마트에 왔다는 말을 덧붙이자 아이가 정말이냐고
되물었다.
“그럼, 정말이지.” 모영이 쾌활하게 대꾸했다.
“배달은요?”
“배달도 있었지만, 직접
나와서 쇼핑을 하기도 했어.” 모영이 대답했다. “여러 가지
중에서 뭘 먹을지, 뭘 입을지, 내 눈으로 보고 결정하는
거야. 재밌겠지?”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습관적으로 모영의 말에 맞장구를 친 것에 불과한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주 잠깐만 이십여 년 전의 마트나 백화점에 데려다놓을 수 있다면 단박에 알아들으리라고 이심은 생각했다. 계절을 앞서가며 쇼윈도를 밝히던 패션 코너에서 비스듬히 사람들을 내려다보던 마네킹, 끊임없이 새로운 기능을 더해가며 최신이라는 말을 갱신해가던 가전제품 코너, 매대와
쇼케이스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던 갖가지 식품과 탐스럽게 쌓여있던 색색의 먹거리, 와글거리는 가족들로
넘치던 푸드 코트를 한 바퀴 빙 둘러보기만 해도 카트를 가득 채우며 느끼던 포만감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
물건을 채운 카트를 연상한 순간, 이심은 익살스러운 미소를 짓던 아빠의
얼굴을 떠올렸다. 엄마가 허락하지 않아서 얌전히 제 자리에 돌려놓으려던 캐러멜을 몰래 롤 휴지 아래로
밀어넣으며 웃던 아빠. 그득그득한 물건들 사이를 누비던 일도, 아빠와
함께 웃고 장난을 치던 기억도 어찌나 멀리 느껴지는지 자신이 어린 시절에 직접 겪은 게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만 같았다. 이심의 입에서는 한번 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앞서가던 모영이 돌아보자
이심은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상품 검색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이의 체형에 맞거나 살짝 큰 옷 중에서 당장 입어볼 수 있는 옷의 종류는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상의 세 벌, 하의 두 벌을 입혀보기로 결정하자마자
이심과 모영은 입이 떡 벌어질 지경이었다. 창고 안의 옷을 찾아서 검색대 앞까지 가져오는 일에 드론을
쓰면 운반비가 옷 가격의 30%를 넘었기 때문이었다. 옷을
직접 찾아서 만나기로 뜻을 모은 뒤 아이와 함께 움직이는 모영은 하의를, 이심은 상의를 맡기로 했다.
토끼가 그려진 면티를 찾기 위해 F 구역의 안쪽으로 향하던 이심이
먼저 들은 것은 새된 비명이었다. 다음에는 “이거 놔! 놓으라고!”라는 신경질적인 외침이 들렸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심은 어떤 일행이 자기들끼리 다투고 있는 상황이리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잠시 뒤 검색대 방향에서 “로봇이 어린애를 때려요! 내 동생을 때려요!”라는 외침까지 들리자 동작을 멈추고 앳된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비록 전면 패널 자체가 cctv의
역할을 겸하는 구형 로봇이라 해도 로봇이 사람을 폭행하는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발생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어서 들리는 여자아이의 비명 소리를 도저히 모르는 척할 수 없어서 소리가 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는 곳은 F 구역 입구 방향의 검색대 앞이었다. 금속의 긴팔을 뻗어 뒤에서 껴안은 자세로 어린 소녀를 붙잡고 있는 로봇은 식품 절도 행위가 발견되었으므로 담당자가
와서 처리할 때까지 이 자리에서 이동할 수 없다는 안내를 반복하고 있었다. 붙들려있는 소녀는 열 살
남짓으로 보였는데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반쯤 체념한 표정이었다. 그 옆에 서서 자기 동생을 살려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소녀는 조금 전까지 물류 창고의 입구 근처에서 화살표 게임을 하던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 소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이심의 입에서 설마, 라는
말이 비어져나왔다. 동생을 살려달라는 비명이 계속되었고 몇몇 사람들이 달려왔다가 움직임 없이 아이를
붙들고만 있는 로봇의 모습과 아이의 차림새를 훑어보고는 사정을 알 만하다는 듯 뒤돌아갔다. 슬럼가에서는
이런 일이 왕왕 일어나는 것일까. 하지만 방금 전만 하더라도 센터장은 순이가 팰러알토 합의 안에서 움직인다고
했는데. 이심은 혼란을 느끼며 그들과 몇 발짝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더 가까이 다가가지도, 외면하지도 못한 채 굳어 있었다. 물류 창고의 보안 담당자는 그제야
어슬렁거리는 걸음걸이로 나타나서 검지로 언니 쪽의 머리를 쿡쿡 찔렀다.
“야, 너 오랜만이다. 오늘은 동생도 달고 왔냐?” 그가 자기 손을 쳐내려는 소녀의 손목을
붙잡고 위아래로 훑어보며 눈알을 굴렸다. “더울 때 보니까 아주 좋다야.”
때마침 F 구역으로 들어온 한 커플이 그의 행동을 제지하려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관리자는 냉큼 수더분한 표정을 지으며 소녀에게서 한발 물러났다. 그러니 이제 돌아가서 아이의 옷을 찾자고 마음먹은 이심이 걸음을 돌리려던 차였다.
“어디까지나 이것들이 도둑질을 해서 잡고 있는 거예요. 경찰 오기 전에 도망가면 안 되잖습니까.”
관리자의 입에서 경찰, 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언니 쪽이 부들부들
떨면서 동생은 놔달라고 말했다. 기가 꺾인 듯 울먹이는 음성이었다.
“이제 좀 실감이 나냐? 동생이랑
소년원 동기 되면 외롭지도 않고 좋지 뭘.”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요.” 결국
참지 못해 나서면서 이심은 스스로의 행동이 미친 짓이라고 여겼다. “저랑 같이 온 애들이에요. 놔주시면 물건값을 바로 치를게요.”
“아이고 그러세요? 이
동네 사람 아닌 거 빤히 티가 나는데 왜 그런 개소리를 하실까?”
“네. 이 동네에는 안
살아요.” 이심은 떨림을 숨기기 위해 목소리를 낮췄다. “친척이에요. 드론 운반도 돈이 드니까 골라서 오라고, 만나서 계산하기로 했더니
이런 일이 생겼네요. 죄송합니다만 일단 놔주시고 얘기하시죠.”
관리자는 팔짱을 낀 자세로 히죽거렸다. “인류애가 대단하시네. 친척은 개뿔 댈 거면 차라리 집합가족 핑계를 대지 그러셨어. 다른
동네 살아서 모르는가본데, 이것들은 갱생이 안 되는 것들이에요.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소년원에 넣어서……”
“얘들은 그런 애들 아니에요. 못 믿으시겠으면 얘들 바이오 정보를 보여드릴게요.” 어느새 그의 뒤로 다가온 모영과 새 옷을 손에 든 아이에게 다급히 눈짓을 보낸 뒤에 이심이 말을 이었다. “언니 쪽 이름이 소리고 동생은 로아예요. 로아는 계란에 알레르기가 있고요. 소리야, 메이드에서 얼른 로아 정보 띄워서 보여드려. 오해 풀고 집으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