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회

테러

한 달간 주어진 유급 휴가 기간에 모영은 종일 아이 옆에 붙어 있었다. 보호자로서 온화하고 일관성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며 불필요한 통제는 하지 않으려 애썼고, 사소한 일에도 아이의 취향과 의사를 묻고 존중해주었다. 아이는 자기 입으로 저는 말썽쟁이가 아니에요. 말썽쟁이 싫어요라고 말했으며, 실제로도 손이 많이 가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모영은 깨어 있는 시간이 전보다 두 배쯤 빠르게 가는 것 같다고 했다. 아이가 잠들고 나면 몸을 의자 위에 비스듬히 늘어뜨리고 한참을 꼼짝하지 않았다. 때로는 멍한 얼굴로 거실을 서성이는 밤도 있었다. “전산상 착오로 생긴 일이라는 게, 그 과정은 어차피 들어도 이해 못할 거라는 게 도대체 말이 돼?” 하고 거듭 되뇌는 모영에게 이심은 그간 그녀가 자신에게 해준 대로 따스한 차를 건네거나 스팀 타월을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형태로 새 식구를 받아들이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므로 이심 역시 혼란과 불안을 느꼈다. 회사측에서 양육 수당을 지급하겠다고 했지만 이미 신뢰가 깨진 조직의 약속을 곧이곧대로 신뢰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언제가 됐든 모영이 도저히 이런 회사에 남고 싶지 않다고 호소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혼자 번 수입으로 세 식구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러다 누군가 아프기라도 한다면…… 막막한 예측이 종잡을 수 없이 뻗어나갈 때면 이심은 어깨를 곧게 펴고 심호흡했다. 모영이 받은 충격과 배신감을 고려하면 나라도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한 달 후에 모영이 받아온 급여는 약속대로 평소보다 1.5배가량 늘어난 액수였다. 모영은 아이가 살아 있는 동안이라는 전제를 굳이 명시한 서류에는 외출은 최대한 자제한다는 조항을 필두로 이십여 가지 항목이 꼼꼼히도 나열되어 있었다며 모영은 치를 떨었다.

이후 두 사람은 양육 수당에 기대어 이심은 매주 하루씩, 모영은 이틀씩 근무 일수를 줄이고 집에 아이와 함께 머물게 되었다. 아이는 모영에게는 찰싹 붙어 있다시피 했지만 이심에게는 아직 낯을 가렸다. 식사하고 필수 교육 과정을 대체하는 학습지를 살펴볼 때 외에는 손이 가지 않았으므로, 이심은 주에 하루씩 휴가가 생긴 기분이었다.

오늘만 하더라도 점심 설거지를 마치고 아이의 수학 숙제를 봐주고서 이심은 아주 오랜만에 종이책으로 소설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데, 최선생님은 수배중이건만 나는 이렇게 속 편히 있어도 될까.’ 내리 두 시간을 자고 일어난 이심은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낮잠의 나른한 여운에 취해서 겨우 눈만 뜨고 있었다. 그리고 늦은 오후의 뭉근한 햇살로 감싸인 고요한 방 안에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성인이 된 이후 휴가나 병가를 내지 않은 평일 오후에 즐긴 낮잠은 물론, 여가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게 처음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도 항상 쪼들리면서 살았는데 그게 맞는 건가 싶더라고.” 그날 밤, 아이가 잠자리에 든 후에 이심은 모영에게 토로했다.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다들 빡세게 사니까 그러려니 하고 있다가 좀 현타가 왔다고 해야 되나.”

모영은 이런 날 마시려고 아껴둔 거 아니냐면서 냉장고 안쪽에 두었던 캔맥주를 가지고 왔다.

나도 오늘 회사에서 기가 막힌 얘기를 들었거든. 옆 부서에 얼마 전에 갑자기 휴직을 신청한 사람이 있는데 말이야. 그 사람이 자기는 어떤 팬데믹에도 천하무적이었다고 자랑했었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걸린 적 없다면서. 나도 호흡기성 전염병에 걸린 적이 없잖아.”

한 번도? 가볍게 앓고 지나간 적도 없었어?”

, 없어. 심지어 우리 엄마가 신종 플루 걸렸다가 낫고서 얼마 안 돼서 나 가졌거든. 그러니까 내 유전자가 어떻기에 전염병에 강한 건지, 엄마가 신종 플루 직후에 임신한 게 이유인지 그런 걸 연구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 천재들을 백업해놓는 프로젝트에 내가 끼어들어갔다면 이유는 그것밖에 없어.”

그럼 전산상 착오라는 말은……

거짓말이지 뭐.” 모영이 코웃음 쳤다. “보통은 거짓말을 하면서 말이 되게 하려고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잖아? 그런 고민 없이 찍 하고 갈긴 거라 오히려 거짓말인 줄 짐작을 못했던 거야. 체세포는 어떻게 구했을까? 먼지 떼어주는 척하면서 머리카락이라도 뽑아갔을까?”

그 정도 규모의 일을 감행하는 조직이면 건강검진 때 해결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입사하면서 회사 자체 검진 받은 적 있지 않아?”

. 그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던 모영은 별안간 숨을 크게 몰아쉬더니 앉은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벽 앞에 섰다. 머리를 찧을 것처럼 뒤로 젖혔다가 한숨을 몰아쉰 뒤에 삐딱한 자세로 기대선 모영은 다시 숨을 크게 내쉬었다. 들썩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은 채 등을 쓸어주면서 이심은 모영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을 감정의 편린을 그려보았다. 동의를 구하지 않고 자신을 복제한 회사의 결정은 누구든 결코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어처구니없는 사측의 결정이 유전 정보를 탐한 게 아니라 모영의 능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면 지금보다 받아들이기가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게다가 모영은 이 같은 상황에서도 그런 비교를 떨쳐버릴 수 없는 자신의 일면을 지긋지긋하게 여기며 미워하고 있을 것이다.

회사 건물이라도 불질러버리면 속이 좀 시원할 것 같아. 랩실이고 뭐고 전부 싹 다.”

전에 들은 적 없는 과격한 말을 내뱉는 순간에도 모영은 잠든 아이가 깰 것을 염려하여 한껏 목소리를 낮춘 채 소곤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심이 아이를 향한 그녀의 배려심에 감탄을 표하자 모영은 남한테 잘하는 게 배려잖아. 남이 아닌데, 하며 맥없이 웃었다.

이튿날 아침에 모영의 방문을 열었을 때 나란히 이불을 차낸 채로 잠든 둘의 모습을 보면서 이심은 남이 아니라던 모영의 말을 떠올렸다. 모영과 아이는 모로 누워 무릎을 살짝 구부린 자세가 같았고, 끌어안고 있는 게 베개냐 인형이냐 하는 점이 다를 뿐 그 위로 왼팔을 두른 모양마저 일치했다. 세상에 어떤 모녀도 이만큼이나 닮을 수는 없을 것이고, 그 어떤 부모도 모영이 아이에 관해 속속들이 알고 이해하는 것만큼 자신의 아이를 알지는 못할 것이다. 이심은 문득 며칠 전에 아빠가 보내온 메시지가 떠올라 선 자세 그대로 두 눈을 감았다가 뜨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때로 아빠가 느닷없이 쏟아내는 메시지는 오물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을 주었다. 오물은 치워버리는 것이지 찬찬히 들여다볼 만한 것이 아니므로 입씨름을 하지 않고 바로 지워버리는 게 평소 원칙이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모영이 아이를 대하는 태도와 아빠의 모습이 비교되어 화가 치밀어오른 탓이었다. 이심은 아빠에게 그런 질문의 답은 남이 주는 게 아니고, 그중에서도 자식에게 물어볼 질문은 더더욱 아니라고 적어 전송했다. 이제 자기 연민과 한탄이 줄줄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한참 있다가 도착한 답신의 내용은 엄마를 잘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지만 대화는 거기에서 끝이 났다.

이심은 속으로 심호흡을 하면서 아빠 생각은 이제 그만하자고 되뇌었다. 애초에 무엇을 가지러 이 방의 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으므로 이심은 커트러리 세트 속 스푼과 티스푼처럼 보이는 둘 위로 이불을 덮어주었다. 방에서 나와서는 어제 만들어둔 주먹밥을 꺼냈다.

데운 주먹밥을 손에 들고 습관처럼 메이드의 홀로그램 프레임을 열어 공영 뉴스를 재생시켰을 때였다. 이심은 화면 하단에 볼드체로 적힌 테러라는 단어를 보고 깜짝 놀라 쥐고 있던 주먹밥을 접시 위로 떨어뜨렸다. ‘테러?’ 총리 주재로 모인 여야의 당대표들이 피로한 듯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화면 아래로 대테러 위기의 대응 방안을 논하는 긴급 대책 회의를 가졌다는 문구를 보고서도 어떤 상황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경총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주요 국가기관과 국가 기반 산업을 겨냥한 잇따른 해킹과 더불어 생명 윤리의 근간을 뒤흔드는 가짜뉴스가 맞물리며 사회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고 전했다. 짧은 침묵 후에 그가 화면을 정면으로 쏘아보며 테크노 비엔날레라는 국제적 행사를 앞둔 시점을 노린 게 분명한 작금의 상황을 테러로 규정한다고 말했다.

이에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이심의 입 밖으로 긴 탄식이 비어져나왔다. 이 뉴스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속아넘어갈까. 차라리 모른다면 마음이 편할까. 막연하게나마 거짓임을 눈치채는 사람이 많을 수도 있었지만 오랜 시간 세간을 떠돌던 도시 전설의 실체와 한집에 살고 있는 자신은 그가 가짜뉴스라고 일컫는 사안이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모를래야 모를 수 없었다. 그 사안을 법률적으로 승인해준 최종 결정권자가 시치미를 떼고 테러를 운운하는 모습을 마주한 심정은 고통스럽기보다 비위가 거슬리는 편에 가까웠다. 이심의 메이드가 뉴스 화면 위로 오늘 오전 중에 두통이 발생할 확률을 예고하는 알림을 띄웠다.

국가의 질서를 뒤흔들고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는 테러 행위를 정부는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테러 행위의 주동자는 물론 단순 가담자 또한 예외 없이 테러리스트로 간주, 불관용 원칙으로……

이심이 급히 뉴스의 볼륨을 줄인 것은 방에서 나온 아이의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꾸벅 인사한 뒤에 세수를 하고 왔고, 이심은 아이 몫의 주먹밥을 데워주었다. 출생 후 줄곧 단체 생활을 한 여파 때문인지 아이는 삼시 세끼를 늘 같은 시간에 남기지 않고 먹었다. 반찬 투정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버섯도 잘 먹는구나?” 이심이 묻자 아이는 입에 든 것을 전부 씹어 삼킨 후에 입을 열었다. “! 맛있어요.”

어쩌면 이렇게 식사 예절을 잘 배웠는지 몰라. 혹시 제대로 안 지키면 누가 막 무섭게 혼내고 그랬던 건 아니지?”

별 뜻 없이 물었던 터라 이심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릇을 치우기 위해 일어났다. 아이는 이심이 식탁 앞으로 돌아오자 겨우겨우 들릴 만한 목소리로 안 된다고 말했다.

뭐가 안 되는데? 그 얘기 하면 안 되는 거야?”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어요.”

누구랑?”

그것도 말하면 안 돼요.”

평온한 얼굴로 대답하는 아이에게서 겁에 질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심은 아이의 입가에 묻은 밥알을 보고 티슈를 뽑아들었다가 내려놓고 곁으로 다가가 직접 떼어주었다. 그러자 아이는 이심이 농담이라도 건넨 것처럼 쿡쿡 웃었다. 그 순간, 이심은 아이를 꼭 끌어안아주고 싶어졌으나 어쩐지 바로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 다만 하나 더 먹겠느냐고 물으며 아이의 조그마한 뒤통수를 쓰다듬어보았다. 아이는 모영의 몫이 남아 있는지부터 확인한 후에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착하기도 하지.” 이심이 칭찬하자 아이는 기쁜 듯 미소 지었다.

설거지를 시작하며 이심은 최선생을 떠올렸다. 그녀가 있었다면 아이에 관해서 터놓고 얘기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최선생의 행방은 알 도리가 없었고, 최선생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일마저 금지돼 있었다. 심지어 오늘 뉴스에 따르면 최선생의 행방을 묻고 아이에 대해서 발설하는 것만으로도 테러리스트가 되는 상황이었다. 미리 진통제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관자놀이 주변으로 두통이 번져갔다.

 

이후로 며칠간 이심은 자주 두통약을 삼켰다. 목에 가시가 걸린 채 생활하는 것처럼 테러라는 단어가 수시로 존재감을 드러내며 몸의 이곳저곳을 찔렀다. 그러다 금요일 퇴근길에 엄마에게 메시지를 받고서야 다소나마 숨통이 트였다. 비밀이 새어나갈 걱정 없이 무엇이든 토로할 수 있는 사람은 최선생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왜 떠올리지 못했을까. 다만 오늘 들를 수 있겠냐는 엄마의 메시지에 묘한 긴박감이 느껴졌으므로 전화를 걸었다. 아빠가 사라졌는데, 일단은 와서 얘기하자는 엄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이심을 맞이하자마자 덥석 두 손을 잡는 엄마는 눈가가 젖어 있었는데 슬픔보다 분노 때문에 눈물을 쏟은 듯 두 눈에 핏발이 선 모습이었다.

아빠가 전에도 이런 적 몇 번 있었잖아. 그냥 말 안 하고 나가서 아직 안 들어온 거 아니야?”

심각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릴 요량으로 이심은 애써 밝게 말했다. 그러면서 집안에 흐릿하게 남은 묘한 향기를 의아하게 여기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에게는 향수를 뿌리는 취향도 여유도 없었다. 게다가 이심은 언젠가 이와 같은 향을 맡아본 적이 있었다. 곧이어 엄마가 건넨 물잔을 받아든 이심은 그 향을 맡아본 장소의 하얀 벽과 바닥을 떠올릴 수 있었다.

혹시 말이야. 엄마, 그 아저씨랑 둘이 있는 모습을 아빠한테 들키기라도 했어?”

그 반대니까 오해하지 마. 그 사람은 내가 기함하니까 잠깐 왔다가 간 것뿐이야.”

엄마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테이블 위에 꺼내놓았다. 손목시계처럼 뭉툭한 모양을 한 아빠의 구형 메이드였다. 전원을 켜자마자 날카로운 심벌 소리 같은 경고음이 울렸다. 작은 화면 위로는

건강 위험 경보

5단계

라고 적힌 적색의 알림이 깜빡이고 있었다. 클릭하자 세 가지 이상의 전조 증상 및 유전적 취약성을 종합하면 한 달 이내 뇌경색이 발생할 확률이 90% 이상이라는 안내 문구가 등장했다. 화면을 옆으로 한번 더 넘기면 유사시에 방문할 집중 치료 센터와 이동 수단을 예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빠가 한 일이라고는 딸에게 엉뚱한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겁에 질려서, 무기력한 심정이 되어 보낸 구조 요청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심은 별수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동시에 분명한 구조 수단을 눈앞에 두고도 투정 섞인 메시지부터 던져놓고는 증발해버린 아빠의 행동 양태에 진저리를 쳤다.

이 알람이 나한테는 왜 안 왔지?” 말을 내뱉고 나서야 이심은 자신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음을 알았다.

설정을 바꿔놨나봐.” 엄마가 이마를 짚으며 대꾸했다. “나도 모르겠다. 그 멍청한 인간이 어떻게 그런 건 할 줄 알았는지. 언제 바꿨는지.”

엄마가 두통약을 가지러 간 사이에 이심은 다시 설정을 전체 정보 가족 공개로 전환하여 아빠가 이전에 받았던 건강 위험 경보 내역을 확인했다. 주의를 요하는 3단계의 경보는 지난해 초입 맨 처음 도달했었다. 올해에는 즉시 조치를 취하기를 촉구하는 4단계 경보가 온 게 이미 다섯 차례였다. 메이드가 주기적으로 주의와 경고를 주는 동안, 아빠는 건강을 회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라도 한 사람처럼 일관적으로 대응을 하지 않았다. 운동 및 식단 처방을 받겠느냐는 질문을 흘려보냈으며, 진단의 정확성을 위해 망막을 촬영해달라는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바우처를 사용하여 공공 보건의의 방문을 받으라는 권유도 무시했다. 그러니 끝내 사망의 위험성이 급격히 치솟았다는 5단계 알림을 받은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심의 손에서 떨어진 메이드가 탁자 위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저거 받자마자 아빠가 5단계 생존율이랑 뇌경색 사망률 같은 걸 검색해봤어. 그뒤에 나올 내용은 엄마도 알잖아.”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렸겠지.”

그러고서 나한테 메시지를 하나 보냈어.”

뭐라고?”

쉰 목소리를 고르듯 헛기침을 하며 엄마가 물었다. 굳이 알 필요가 없는 얘기라고 이심은 자책했는데 엄마는 뭐라고 적었더냐는 질문을 반복했다. 문득 이심의 눈에 엄마가 입은 낡은 면 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잔뜩 일어난 보풀, 닳아서 해진 소매 끝을 바라보던 이심은 더이상 숨길 게 무엇이 있겠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아빠가 인생을 잘못 산 거냐고, 솔직하게 대답해달라고 하더니, 엄마를 잘 부탁한다고 하던데.” 이심이 대답했다.

엄마의 입이 기가 막힌다는 듯 벌어졌다가 아무런 말도 뱉지 않은 채 닫혔다. 이심은 아빠가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의 의미를 그 순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간 메이드의 거듭된 경고를 받고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탓에 위급 상황이 벌어지면 막대한 의료비가 부과되리라는 사실을 인지한 아빠는 가족들에게 짐을 남기지 않을 유일한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자포자기와 마지막 배려 중 어느 쪽이라고 여기며 집을 나섰을까. 이심은 알 수 없었다. 경보 5단계를 선고받은 몸으로 느닷없이 사라지면서 남긴 메시지를 곱씹으며 딸의 마음이 어떤 방향으로 뒤틀릴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까. 혹은 얼마간 그 점을 노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느 쪽이든 하염없이 버티기만 하다가 자기 마음이 내키는 대로 감행했다는 점에서는 아빠다운 선택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으므로 이심은 엄마의 어깨를 끌어안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실종 신고를 마친 뒤 지하철 막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이심은 어린 시절에 아빠가 했던 약속들을 떠올렸다. 가족 여행을 떠나자던 약속, 아빠의 빈자리를 서안이 채운 여행을 다녀온 이심의 손에 새끼손가락을 걸며 내년 여름에야말로 더 좋은 데 데려다주겠다던 속삭임, 안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잠을 설친 이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는 엄마와 싸우지 않겠다며 거듭하던 다짐. 지금의 자기 또래였던 아빠는 번번이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으나 늘 진심처럼 보였다. 이심은 옆자리에 앉은 사람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용히 흐르는 눈물을 닦아낸 후에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에 무슨 일이 있었어?” 부리나케 현관 앞으로 나온 모영이 물었다.

거두절미하고 얘기하자면 갑자기 엄마 거취를 결정해야 할 상황이 됐어.”

어머니 거취라면 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생겼어?”

.” 늘 쓰던 의자가 문득 낯설고 딱딱해 보여서 이심은 벽에 기대 맨바닥에 다리를 뻗고 앉았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할게.”

모영은 언제든 편할 때 얘기해달라고 하더니 이심의 옆으로 와서 앉았다. “나는 말이야, 오늘 애 앞에서는 진짜 조심해야 된다는 걸 다시 한번 확실히 알게 됐어.”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이실직고할게. 애가 보는 데서는 게임 안 하기로 했으니까 여태 참았는데, 오늘 저녁 먹고서 잠깐……

아유, 그 놈의 화살표 게임!” 이심이 모영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전에는 관심도 없더니 갑자기 왜 빠져서 그래?”

전에 해봤으니까 알잖아. 원래 되게 단순한데 중독성 있는 게 무서운 거야.”

그걸 알면서 애 앞에서 했어?”

대놓고는 아니고, 씻으러 가길래 그사이에 진짜 딱 한 판만 해야지 했다가 들킨 거야. 처음에는 자기도 한 판만 하고 싶다고 그러더니 자기 전까지 계속 더 하고 싶다고 졸라서 재우느라 혼났어. 더 떼쓰면 네 이름을 화살표라고 부를 거라고 해서 겨우 진정시켰다니까.”

이름 가지고 협박은 좀 너무했다.” 이심은 어깨로 모영의 어깨를 밀었다. “자기 이름 찾는 건 아직이래?”

매일 고민하는 모양이니까 이제 얼마 안 남았을 거야.”

랩실 안에서 일련번호 끝 세 자리의 숫자로 불렸던 아이는 모영에게 자기 이름을 직접 지어도 된다는 말을 듣고 교재에서 본 역사 속 인물이 된 것 같다며 한껏 상기된 상태였다. 모영은 아이가 이번주 내내 위인전을 살폈으니 위인의 이름을 조합하여 지으리라고 예상했다. 이심의 생각은 달랐다. 아이는 아마 모영과 비슷한 이름을 지을 것이다. 근거는 없지만 느낌이 그랬다. 아이가 잠들어 있던 방의 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그러자 모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어머, 우리 말소리 때문에 깼어?” 하고 물었다.

배가 아파서요.”

배가?” 이심이 물었다. “어디 좀 보게 이리 와봐. 저녁에는 뭐 먹었는데?”

, 그냥 조금 아픈 건데……잠이 덜 깬 아이가 얼버무리더니 모영을 향해 말했다. “제 생존 키트 좀 주세요. 조금 아플 때는 거기 있는 약을 먹으면 된다고 했어요.”

그러자 모영은 아, 하더니 랩실에서 챙겨준 소아용 진통제가 있다며 갈색 병을 가지고 왔다. 모영이 병을 건네자 아이는 두 알을 집더니 물도 없이 입에 넣었다. 의아해하는 이심의 시선을 느낀 모영이 젤리 타입이라고 설명하며 전에도 먹는 모습을 본 적 있다고 말했다.

젤리 타입으로 된 영양제라면 모를까 진통제는 낯설었으므로 이심은 아이에게 약을 좀 보아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자신의 진정한 보호자는 모영이라고 여기는 듯 모영 쪽을 바라보았고, 모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로소 이심에게 약통을 건넸다. 반투명한 갈색 통에는 성분이나 기전을 짐작할 만한 어떤 표식도 없었다. 통 안에 든 젤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약의 종류를 표시하는 영문자 없이 오렌지 빛깔과 향을 띄고 있을 뿐이었다.

젤리 형태라, 내가 직접 처방한 적은 없는 약인데 어디더라? 어디서 들어는 본 것 같단 말이야.”

그래? 랩실 자체 제작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보네.”

모영은 그렇게 대꾸한 뒤 아이가 눕는 것을 보고 방문을 닫아주었다. 이심은 그제야 퍼뜩 놀라 모영을 흘겨보았다.

약이라도 그렇지, 젤리를 먹었는데 그냥 재우면 어떡해. 양치질을 시켜야지.”

자다가 말고서 하겠어?”

정 안되면 물로 헹구게라도 해야지, .”

모영은 앞으로는 명심하겠다면서 켕기는 게 있음이 분명한 묘한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이심의 입에서 너도 안 했구나?” 하는 말이 나오자 잘 자라는 말을 허공에 흩뿌리듯 날린 채 쏜살같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이심은 칫솔질을 하며 내일은 셋이 마주앉아 게임과 양치질에 관한 원칙을 분명히 세우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하여 내일 꼭 할 일은 엄마에게 한번 더 연락하고 넌지시 거취를 묻는 것, 아이가 혼나는 느낌이 들지 않으면서도 양치질의 중요성을 수월하게 받아들이도록 전하는 것, 그리고 오렌지빛 진통제에 관해 알아보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며 잠을 청했다.

이튿날 아침은 평소보다 이르게 찾아왔다. 이심은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이가 복용한 약의 정체가, 십여 년 전에 그 약이 횡행했던 이유와 금지된 이유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테러는 멀리 있지 않았다. 아홉 살 아이에게 그 같은 약을 복용시킨 처방이야말로 테러와 다름없다는 생각에 이심의 몸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