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회

착오

모영은 얼마간 이심이 건넨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있잖아. 올 것이 왔다는 느낌. 인사부에서 호출이 왔을 때, 딱 그런 기분이었어.”

물론 오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복귀한 이후에도 변함없이 맥락과 쓰임새를 알 수 없는 업무의 질과 양을 보건대 언제든 조직에서 방출될 법하다는 불안감은 늘 있었다고 모영은 덧붙였다. 후련해질 때까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으나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이럴 때만큼은 어린 시절의 서러운 경험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파트 단지의 입구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사촌들의 따끔거리던 시선을 모영은 여전히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듣던 민폐 덩어리라는 말. “너희 엄마랑 같이 빨리 우리집에서 나가!” 하며 어깨를 밀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던 손길. 어른들의 눈을 피해 이루어지던 귀갓길의 괴롭힘으로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순간에 두 눈을 부릅뜨고 참아 넘기는 일에는 도가 텄다. 다만 그런 긴장 상황을 앞두고 있을 때면 손끝과 발끝이 얼음물에 담그고 있는 것처럼 차가워졌다. 모영은 자신의 오른손으로 왼손을, 왼손으로 오른손을 주무르며 면담실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 위 살구색 조명 아래 놓인 태블릿에는 입사 이래 세번째로 접하는 서약서가 놓여 있었다.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외부는 물론이고 사내에서도 발설하지 않을 것이며 위반시 법률적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는 바이오 사인을 하기 위해 화면 위에 오른손 검지를 가져다댔다. 다음 화면에서는 소송 발생시 예상되는 청구 비용을 확인했다는 의미로 같은 동작을 한번 더 취했다. 그러고 나자 뜨거운 차와 체온보다 조금 더 높은 따스한 온도의 차, 아이스티 중에 어떤 음료수를 원하느냐는 질문이 등장했다. 모영은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두고 아이스와 따스한 것 사이에서 망설이다 따스한 쪽을 택했다. 몇 초에 불과하겠지만 서약서를 작성하는 것보다 차의 온도를 고르는 데 시간이 더 걸렸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곧이어 면담실의 문이 열렸다. 한차장은 먼저 한 뼘가량 열린 문틈으로 빠끔히 고개를 기울여 눈인사를 건네더니 모주임, 우리 오늘 정말 진솔한 얘기 해야 돼요하고 들어와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차장님, 저 전에 여기 왔을 때도 그 말씀 하셨었는데.”

그때 일은 오늘 건하고는 비교도 안 돼. 이게 진짜 얼마나 중요한 문젠지 모른다니까.” 한차장이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는 시늉을 했다. “심지어 오늘 건은 나하고도 관련이 된 거예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내가 진짜, 당사자성을 가지고 얘기하는 거라니까요.”

찻잔을 든 모영은 동작을 멈춘 채 한차장이 내뱉은 당사자성이라는 말을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해고되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라 여럿이고, 그중에 한차장도 포함되는 것일까. 반가운 소식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얼마간 위안이 된다고 인정하면서 모영은 싱거운 차를 한 모금 삼켰다.

사실 이런 건 차 마시면서 할 얘기가 아닌데,” 한차장이 눈웃음을 지었다.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할 얘긴데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모주임은 휴직중에 바텐더였다면서요?”

, 아로마 테라피 연구하는 쪽에도 잠깐 있었어요. 아예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서요.”

이야, 근사한 거 많이 하셨네. 어떻던가요? 확 다른 쪽 일 해보니까.”

재주가 없어서 돌아왔죠, . 그래도 지금 같이 사는 사람은 좋았다던데요.”

왜 아니야. 이게 참, 만사가 그래요.” 한차장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필드에서 아주 이 꼴 저 꼴 보는 사람 따로 있고, 가만 앉아서 노 나는 사람 따로 있다니까. 그 결정체가 뭔 줄 알아요? 여기, B센터. 오늘은 우리 센터의 본질에 관해서도 본격적으로 한번 얘기를 해보자고요.”

차장님, 저는 B센터의 뜻도 모르는데요.”

나는 자기가 이래서 좋더라. 할말은 딱 한다니까, 내빼지 않고. 이제 와서 얘긴데, 그게 언제야. 아이고, 벌써 오 년도 더 됐네. 그때 협조문 받아들자마자 사직서 낸 사람이 우리 회사에 다섯 명도 안 돼. 그중에 한 명이 모주임이라는 거 아닙니까.”

한차장은 모영의 됨됨이와 결단력을 한껏 추켜세웠다. 모영은 겸연쩍은 기분이 들었는데 당시에 휴직계를 내고 재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제도부터 이용해보라던 한차장의 회유에 퇴사로부터 한발 물러선 후에 결국 제 발로 다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사직서를 제출한 이가 다섯 명도 안 되었다는 점은 충격을 주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직원들의 생체 정보를 수집하고 연구에 활용할 수 있다는 방침을 알린 회사와 그런 방침마저 군말 없이 받아들이는 동료들로 구성된 조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받아들이지 못하니 내쳐지는 것일까. 모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차장은 모영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회사를 너무 단정적으로 재단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기실 업계 전체에서 일어났으며 심지어 시기상 조금 늦게 시작한 편이라는 명목이었다.

우리 경쟁사만 해도 그래요. 아니, 솔직히 우리끼리 얘기지만 거기가 뭐 우리랑 경쟁이 돼? 거기 내부에서는 우리 회사에서 메이드 나온 뒤부터는 도저히 게임이 안 된다고 경쟁사가 아니라 우월사라고 부른대. 그러니까 뭐, 우리 쪽에서도 실은 하등사라고 불러주는 게 격이 맞지.” 한차장은 하등사라고 말하며 양손 검지로 따옴표 모양을 만들 때는 싱긋 웃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거기 오너 일가가 선천적으로 호흡기 쪽이 약하다는 얘기는 들어봤죠?” 하고 물었다.

전 국민이 아는 사실 아니냐고 모영은 반문했다. 한차장은 바로 그 지점이 이후에 일어난 숱한 문제의 시작이었다고 덧붙였다. 예의 하등사의 오너가 언제든 갈아끼울 수 있는 장기를 얻기 위해 비밀리에 직속의 바이오 센터를 지었는데, 몇 년 사이에 괄목할 만한 성과가 났다는 소식이 알음알음 퍼져나가자 알 만한 그룹의 오너들 사이에서 유사한 센터를 세우는 게 일종의 붐이 되었다고 했다.

경총도 호흡기 쪽이 시원찮다보니까, 세금까지 팍팍 깎아주면서 밀어주더래요. 그러니 대기업 중에는 비밀리에 센터 하나 안 가진 데가 없었다는 거 아닙니까. 돌아가는 사정도 엇비슷했고.”

그런 일이랑 제가 하는 업무가 어디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 모르겠어요.” 모영이 중얼거렸다.

모주임, 바로 그 점이 우리 회사의 차별점이고, 무명씨가 브릴리언트한 이유라니까요. 우리 회사도 대표님이 헐레벌떡 센터를 만들자고 눈이 돌아갔을 때 무명씨 첫마디가 이랬답디다. 육체는 살아남기 위한 임의적인 수단이고, 임시적인 저장소에 불과한 거다. 거기 집착할 필요가 없다. 자기는 잠깐 쓰는 그릇에는 별 관심이 없고, 중요한 건,” 한차장이 검지로 자기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내용물이다. , 좀 감이 와요?”

모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흘려들었던 도시 괴담이 생각나 소름이 돋았다. 거리에서, 인터넷상에서, 무도회에서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법으로 막고 있다고 하지만 암암리에 인간 복제가 제한 없이 연구되고 있다더라, 이미 탄생한 복제 인간들이 상당하다더라, 평범한 쌍둥이처럼 보이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사실 복제된 인간이라더라…… 무명씨라면 자기 두뇌 안에 든 내용물을 새로운 육체라는 그릇에 담는 일에 거부감이 없었을 법했다. 어릴 적부터 수학 신동이었던 여성이라는 점 외에는 아무것도 공개하지 않아 수많은 억측이 난무하게 두었던 생전의 행태도 육체나 신상 정보 따위는 언제든 갈아끼울 수 있는 그릇에 불과하다고 여겼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모영은 의자 등받이에 걸쳐두었던 카디건을 다시 입으며 이 회사에 돌아온 일을 후회했다. 차디찬 손끝을 주무르며 한차장이 자신에게 왜 갑자기 이런 얘기까지 꺼내는지 추측해보려 했지만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서부터가 정말 중요한 얘기인데,” 한차장은 그렇게 운을 떼고서 모영이 체크한 서약서를 한번 더 확인했다. “회사에서 모주임을 믿으니까 가감 없이 전하는 거예요.”

무명씨는 이른 나이에 돌연사할 본인의 미래를 내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자진해서 자신의 체세포를 제공했으며, 두뇌에 담긴 정보를 데이터화하고 회사의 중앙 서버에 백업해두는 작업에도 열을 올렸다. 공유와 다운로드가 가능해진 그 데이터 덕분에 그녀의 급작스러운 사망 이후에도 부재로 인한 타격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러자 핵심 개발자와 엔지니어 중 인사고과에 민감한 일부가 자발적으로 자기 기억을 데이터화하겠다고 나섰다. 물론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소수도 있었으므로 거부시에 퇴사를 인정하되 한층 첨예해진 비밀 유지 각서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또한 협조하는 경우에는 자산가 그룹 안에서도 화제가 될 만한 파격적인 보상이 주어진 모양이었다.

어차피 인공지능이 행동 패턴을 읽어서 회사가 직원들 알고리즘 다 가지고 있는데 거리낄 게 뭐가 있냐는 식으로 분위기가 바뀌는 데 얼마 안 걸리더라니까.” 한차장이 말했다.

아예 법 없는 세상에 사는 것 같네요.” 모영이 중얼거렸다.

천만에. 정부에서 세금까지 깎아주면서 밀어줬다니까요. 흔히들 잘 모르는데 이런 문제는 총리실이 직속으로 운영하는 생명윤리위원회에서 관장하거든. 경총이 처음 들어섰을 때, 그전까지는 치료 목적으로만 묶어두던 걸 특별법으로 다 처리해줬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번에 재취임하면서는 갑자기 그간 연구 결과 싹 보고하고, 정리할 거 있으면 빨리 정리하라는 거예요. 테크노 비엔날레 앞두고 조심한다는 얘기도 있고, 복지청 해킹 건으로 꼬리가 밟혀서 그렇다는 설도 있는데, 아무튼 난리야. 나도 참 당사자지만 요즘 죽겠어, 정말. 아이고, 이것 좀 봐요.”

한차장은 고개를 기울여 가르마 옆으로 난 손가락 한 마디 길이의 흉터를 내보였다. 데이터 칩을 심으며 생긴 것이라며 만져봐도 된다고 권했지만 모영은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싱긋 웃으며 안 만져볼 줄 알았다고 말했다.

왜 저한테 이런 얘기를 하시는 건지 알고 싶어요, 차장님.”

그래, 말 나온 거 다 까서 얘기합시다. 이유가 뭐 있겠어. 인공지능이 보고한 모주임 패턴 때문에 그렇지. 입사한 이후에 지금까지 축적된 행동 패턴을 보면 맥락이 읽히지 않거나 납득되지 않는 일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크고, 진상을 알아보고자 하는 욕구는 강한 것으로 보고됐어요. 사람이 참 입체적인 게, 그러면서도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뭘 해내거나 규정을 위반할 위험성은 극도로 낮은 안전주의자라고 나왔고, 같은 정보도 인공지능한테 통보받는 것보다는 사람한테 듣는 편을 더 신뢰한다고요. 그러니까 시간을 들여서 사정을 설명해주고, 양해를 구하기로 솔루션이 나온 거지.”

우리 회사는 이제 아예 전 직원이 동원되기라도 하나요?” 모영이 물었다. “그래서 먼저 차장님이 칩을 심으셨고요?”

아니, 칩 방식은 플랜 비 쪽인데, 임원들은 쏙 빠지고 차장급 몇 명 수술시키더니만 기대만큼 효과가 없다고 이제 안 한답디다.” 한차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저기, 회사를 대신해서 이런 말 전하는 게 참 입이 안 떨어지지만 우리 모주임 경우는, 이미 사용이 됐어요.”

사용이라니요?”

미안합니다. 본인 유전 정보를 사용한다는 말은 아무래도 거북하겠네. 뭐라고 하는 게 나을까…… 이런 사안들이 아직 정리가 안 돼서 매뉴얼도 없이 전하라고만 하니, . 아무튼 중요한 건, 회사에서 계획적으로 진행한 일은 아니라는 거예요. 어디까지나 전산상 착오지. 그럼 왜 그런 착오가 생겼느냐, 그건 알고리즘이 워낙 복잡해서 인간한테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하더라고.”

명확하게 말씀을 해주세요.”

모영이 목소리를 높이자 한차장은 직접 보면서 설명하는 게 이해가 빠르겠다며 태블릿으로 손을 뻗었다. 그가 CLASS라는 아이콘을 클릭하자 화면 위로 세 명의 어린이가 앉아 있는 교실이 나타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하면서 오른손으로 자기 왼손 끝을 주무르던 모영은 한차장이 왼쪽 아이의 얼굴을 확대하여 화면 중앙에 드러낸 순간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악몽을 꿀 때처럼 좀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주먹을 쥔 손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한차장은 그러다 호흡곤란이 올 수 있다며 천식 환자들이 쓰는 흡입기를 건넸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당시의 모영과 똑같은 얼굴을 한 아이가 방긋 웃으며 번쩍 손을 들고 있었다. 조바심을 내며 저요! 선생님, 저요!”라고 외치는 어투와 목소리, 선생님에게서 주목을 끌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태도는 지극히 익숙한 것, 바로 모영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그 순간에 받은 충격이 워낙 컸기 때문인지 이후의 기억을 되짚으면 모영은 직접 겪은 게 아니라 한참 전에 전해들은 일을 떠올리는 것처럼 아득한 거리감을 느꼈다. 이를테면 한차장의 입에서 나온 인도주의적 처사라는 말이 그랬다. 그는 정부에서 인간 복제 연구에 대한 지침이 갑작스럽게 변경된 이후에 연구중이었던 개체들을 명목상 재활원이지만 교도소와 다름없는 격리 시설로 일괄 이주시키며 정리한 회사가 대다수라고 전했다. 따라서 다소 뒤늦게나마 당사자에게 직접 진상을 알리고 남은 기간의 양육비를 지원하겠다는 우리 회사의 입장은 엄연히 인도주의적인 처사라고 강조했다. 그 말을 듣고서 모영은 이 회사의 사주 역시 자신을 복제했고, 그 존재와 대면해보았으리라고 짐작했다. 회사에서 때로 평소에는 기대할 수 없던 제도나 지원책이 생기면 대체로 사주가 직접 겪어본 일과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주에 대해 묻자 한차장은 노코멘트라며 웃었다. 겸연쩍은 듯 미소 지었던 것 같기도 하고, 허를 찔린 사람처럼 당황을 감추며 웃었던 것 같기도 하다. 거듭 떠올려 볼수록 기억은 흐릿해졌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모영이 바로 그날, 아이의 책상에 놓인 인쇄물을 보고서 입사 이래 늘 궁금해하던 자기 업무의 실체를 비로소 파악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복제 인간들을 교육하기 위한 교재의 기본 틀은 인공지능이 만든 것으로도 가능하지만, 세상을 직접 접하면서 자라기 곤란한 이들에게 사회적인 맥락이 담긴 해설과 참고 자료를 제시하는 일은 사람이 직접 하는 편이 낫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또한 자신이 업무를 시작한 시점과 아이의 연령대를 가늠해보건대 회사가 직원들의 생체 데이터를 사용하겠다는 협조문을 하달하기 전부터 복제 인간을 만들어왔다는 사실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모영은 한번 더 호흡기를 집어들었다.

모주임, 지금은 우리가 냉정해져야 돼. 인공지능이 착오라고 인정하는 것도 실은 우리 인지의 범위를 넘어서는 결과 값이라고 하잖습니까. 어떻게 이런 착오가 났는지 완벽하게 이해할 방도가 없으니까 괜한 생각 해봤자 속만 문드러진다고.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연구 초반에 도망친 몇 명 때문에 얘들은 여태 바깥세상 구경도 아예 못하고 자랐어. 앞으로 얼마 안 남은 시간이라도, 모주임한테 나온 애가 모주임하고 정 좀 붙이고 지낼 수 있으면 좋지. 인도적인 처사라는 게 근거 없는 소리가 아니에요.” 한차장이 아이를 달래듯 상냥한 어투로 말했다. “모주임, 앞으로 보름 안에 결정을 내려줘야 돼요.”

보름이라는 말을 들은 모영의 눈빛이 매서워지자 한차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차장님, 이러신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요. 일어나세요.”

한차장은 고개를 숙이고서 자기 집에 천식 환자가 둘이나 있다고 말했다. 의료 바우처는 늘 모자라고 약값은 매해 오르니 자신이 여기서 쫓겨나면 당장 길바닥에 나앉을 수밖에 없다고, 모영이 회사의 제안을 받아주기만 하면 한 명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살려주는 셈이라고 읍소했다. 그가 머리를 조아릴 때마다 숱이 적은 머리칼 사이로 붉은 흉터가 들여다보였다. 모영은 그 흉터를 더 보고 싶지 않아서 한차장을 자리에서 일으켰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은 후에도 자기 집안 사정을 한번 더 읊더니 마지막으로 법적인 문제에 관해 일러둬야겠다고 말했다.

회사 상대로 소송을 걸어도 승산이 없어요. 그건 아셔야 돼.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그전에 협조문 돌린 건 재확인 절차였거든요. 우리 회사는 불가피한 경우에, 직원에게 유전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다고 처음부터 명시해뒀었어요. 인공지능 면접 마치고 최종 면접 전에 읽어보라고 사규를 나눠줘도 다들 그때는 정신없어서 그런지 제대로 끝까지 안 살펴보더라고.”

그쯤에는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가 된 모영은 면접 당시를 떠올릴 기력도 나지 않아서 겨우 그랬었느냐고 되물을 뿐이었다. 그러자 한차장은 검지로 자기 정수리 안쪽을 톡톡 두드리며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그럼요. 우리 모주임은 면접 보러 온 날 지원 동기를 대답하면서 긴장해서 목소리가 다 갈라졌었잖아요. 머리는 지금보다 한 삼 센티미터 길었고. 업무 관련해서 내 기억은 틀릴 수가 없어요. 데이터로 관리되니까. 그러자고 내가 열 시간 들여서 뇌수술까지 받았다는 거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