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를 감추기 사흘 전에, 최선생은 이심에게 자기 딸 선민을 찍은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금요일 이른 아침이었고, 아직
사무실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얘가 이렇게 컸다니까.” 최선생이
말했다. “이제 키도 나보다 더 커.”
선민은 홀로 자기 방의 의자에 반듯이 앉아 있었으므로 이심의 눈에는 덩치가 것보다 특유의 풍성한 곱슬머리가 더
눈에 띄었다. 어릴 적에는 자기 머리카락을 싫어해서 외출 전에 반드시 머리를 바싹 땋아주어야만 했다고
한다. 중학생이 되자마자 가발을 사달라고 조르곤 했었건만 어느새 태양빛처럼 사방으로 퍼지는 머리칼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고 최선생은 말했다. 사진 속 선민은 머리 모양과 샛노란 빛깔의
잠옷이 발랄한 느낌을 주는 것과 대비되는 지극히 차분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두 눈을 감고 허리를
반듯하게 편 채 허벅지 위로 양팔을 뻗고 있는 선민의 모습이 명상에 익숙한 사람처럼 보인다고 하자 최선생은 왜 아니겠느냐며 한숨을 쉬었다.
“딸이 명상하는 게 그렇게 한숨 쉴 일이에요?” 이심이 웃었다. “고등학생 치고는 좀 튀는 건지는 몰라도, 차분하고 좋은 취미잖아요.”
“원래도 겁이 없는 애가 마음의 평화를 깨치더니 아예 겁을 상실했단
말이야. 어디로 튈지 모른다고.”
“그래도 사고 치고 그럴 애는 아니잖아요.”
“집에 남자애를 데리고 왔는데?”
“세다. 선민이 첫사랑이래요?”
“그런 상큼 발랄한 얘기면 내가 이러겠니.”
이심은 그럼 어떤 맛이 나는 얘기냐며 웃었으나 최선생은 따라 웃지 않았다. 그녀는
지친 얼굴로 “이선생네는 별일 없어? 파트너는 이제 회사
다닐 만하대?” 하고 물었지만 때마침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팀장의 인기척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황급히 두 팔을 뻗어 기지개까지 켜며 딴청을 하는 모습이 최선생답지 않았으므로 이심은 나중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주중이면 아침마다 얼굴을 마주하고 종종 출퇴근을 함께한 지도 여러
해가 지났으므로 시급한 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랬건만 주말을 지나 월요일 조례 시간이 돌아왔을 때
팀장에게서 최선생이 행방불명 상태라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다들 많이 놀랍겠지만, 좀
침착하게 상황을 직면합시다.” 팀장은 말했다. “최혜석씨가
평소에도 업무적으로 지나친 면이 있었다는 사실은 다들 아시죠. 그 점을 제가 항상 염려해왔다는 사실도
모두 잘 아실 테고요. 자, 일단 업무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팀장님, 잠시만요.” 참다못한 이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난주만 해도 멀쩡히
같이 일하던 사람이 도대체 언제부터요, 왜 행방불명인 건데요?”
“제가 함구하는 일은 보통 더 알려줄 수가 없는 일이라는 거, 이제 이선생님도 아실 때가 됐는데 말이에요.”
“결근이 아니라 행방불명이라면서요.
이걸 어떻게 그냥 넘어가요.”
이심의 의견에 동조하는 반응이 나오자 팀장은 기다려달라는 듯 오른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규정집을 확인해보더니 최선생은 현재 수배중이라고 말했다. “갈등
조장 방지법 위반으로요. 제 권한으로 전할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집니다.”
수배라니. 이심은 팀장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으나
달리 확인해볼 도리가 없었다. 수년간 얼굴을 맞대고 일했지만 그녀의 가족 중에 연락처를 아는 사람이
없었고, 집 주소 또한 알지 못했던 것이다. 팀장은 그런
이심의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최선생에게 연락을 취하는 일뿐만 아니라 환자 및 외부인에게 최선생에 대해 언급하는 일은 금지돼 있으며, 혹여 최선생측에서 연락을 해오면 자신에게 알려야만 한다고, 그것은
의무 사항이라고 강조했다.
“가혹한 처사라고 저도 생각합니다만,
규정이 그렇습니다.” 팀장이 말했다. “의심이
가는 분 계시면 규정집에서 방지법 관련 부분을 검색해서 확인해보세요. 자, 그보다 오늘 더 중요한 공지사항이 있어요. 이것도 기밀 사항인데, 복지청 서버에 해킹이 시도되는 바람에……”
이심은 오전 내내 평소보다 신속하게 진료를 보았다. 오후 업무가 시작될
즈음에는 메이드가 ‘두 가지 이상의 잠재적 유발 요인으로 의해 삼십 분 이내에 편두통이 발생할 확률이
구십 퍼센트 이상’으로 예상된다고 알려왔으므로 두통약 한 알을 삼켰다.
네 시간 후, 원래 최선생 몫이었던 환자를 만나러 갈 타이밍에 알림이 한번 더 왔다. 편두통이 발생할 확률은 칠십 퍼센트로 다소 줄었지만 이번에는 세 가지 이상의 잠재적 유발 요인이 감지된다고
메이드는 알려왔다.
이심은 잠재적 유발 요인을 확인하겠느냐는 안내 창을 닫은 채 곧장 약 한 알을 더 복용했다. 수배라든가, 행방불명 같은 단어가 다시금 떠오르며 불길한 긴장감을
더했으므로 유발 요인이야 빤했던 것이다. 상황이 어찌되었든 환자에게는 평소와 같이 충실해야 해. 그 점을 잊으면 안 돼. 이심은 주문을 외듯 자신을 다독이며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촉박해서 마지막 세 집을 남기고는 이동하는 동안에 뛰다시피 했다. 그렇게 업무를 마치고 나자 왕진 가방을 반납하고 오는 일마저 잊었다. 집에
거의 다 와서야 그 사실을 깨닫고 헛웃음을 지었지만, 도저히 센터로 돌아갈 기력이 나지 않아 팀장의
힐난을 각오하고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
이튿날에는 아예 잠에서 깨자마자 두통을 느꼈다. 메이드 위로 돋아난
잔디는 시들어 축축 처진 상태였고, 그 위로 두통뿐만 아니라 동통과 근육통이 예상된다는 알림이 떴다. 진통제를 삼키며 이심은 하루만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현관
앞에 섰을 때에는 오후 출근만 해도 더 바랄 게 없겠다고 여겼다. 아니, 한 시간만 늦게 출근할 방도는 없을까 여기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와중이었다.
기척 없이 다가온 누군가의 손이 이심의 입을 가로막았다. 손은 부드러웠고 열이 나는 듯
체온이 높았다.
‘이제 손 놓을 테니까 비명 지르지 마세요.’
눈앞으로 홀로그램으로 반짝이는 문장이 나타나더니 사라진 자리에 등장한 화살표를 따라 뒤를 돌아보자 큼지막한 티셔츠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얼굴을 절반 이상 가린 두 사람이 보였다. 그중 한 사람이 후드를 벗자 풍성한 곱슬머리가
드러났다.
“듣던 대로네. 선민이
너 정말 많이 컸구나.”
익숙한 일인 양 목소리를 낮춰 말하는 이심을 향해 선민이 씩 웃어 보이더니 검지를 들어 조용히 집안으로 들어가자는
동작을 취했다. 선민의 손 위로 다시 홀로그램 문장이 반짝거렸다. ‘우리
엄마랑 직접 만나는 게 아니니까 규정 위반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현관문이 열리자 선민은 마치 전에도 와본 사람처럼 거침없이 거실 겸 주방의 아일랜드 식탁 앞으로 가서 앉더니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며 깍듯하게 사과했다.
“엄마를 피신시키고 나니까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요.”
도대체 최선생이 무슨 이유로 수배를 당한 것인지 물으면 과연 답을 들을 수 있을까. 이심은 알 수 없었고, 선민이 어째서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집 주소는 어떻게 알았으며 옆에서 잠자코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 또한 짐작이 가지 않았다. 물 한잔을 천천히 마신 후에 이심은 짐짓 심상한 얼굴을 한 채 선민의 손목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네 거는 메이드가 좀 다른가보다? 어떻게 프레임도 없이 홀로그램
메시지를 띄우니?”
“아, 커스텀한 거죠. 희수가 그런 걸 잘해요.” 선민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계산할 거 있으면 네가 다 해주니까 쉬웠어.” 선민 옆에 선 희수가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고는 이심을 응시했다. “그거
아세요? 조금 전에 삼 초만 더 그러고 있었으면 선생님 메이드가 심박수 이상으로 긴급 알람 울리고 신고했을
거라는 거?”
이심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에 그렇게 구체적으로는 몰랐다고 덧붙였다.
그들의 얘기에 집중하고 싶었으나 희수라는 남자애의 얼굴 때문에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창백한
피부, 엷은 쌍꺼풀과 붉은 기운이 거의 드러나지 않을 만큼 가느다란 윗입술, 한쪽만 더 짙게 도드라진 팔자주름까지 몇 해 전에 사망한 어느 기업의 총수와 빼닮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뉴스 화면을 통해 보았던 튼실한 어깨와, 정수리
쪽이 살짝 꺼져 보이는 독특한 머릿결까지 같았다. 총수가 숨겨둔 손자였다고 해도 납득이 갈 만하다고
이심은 생각했다.
“희수 보니까 도시 괴담 생각나서 그러시죠?”
“그래.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얼굴에 바로 티가 안 나서 그렇지 제 처지도 마찬가지였어요. 엄마가 거둬주지 않았으면, 전 여태 살아 있지도 못했을 거예요.”
“난 최선생님이랑 너도 평범한 집합가족으로 만난 줄 알았는데.”
“엄마가 일터에서는 그렇게 둘러댔나보더라고요.”
선민이 싱긋 웃었다. 마치 날씨 얘기를 하는 듯한 어투로 털어놓은
선민의 말에 관해 이심은 일단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출근을 앞두고 구체적인 질문을
던질 만한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자초지종은 도무지 파악이 안 되지만 그래, 최선생님이 누군가를 살렸다는 건 놀랄 일도 아니지. 그런데 선민아, 여기에 무슨 일로 왔는지는 모르겠다만 난 너희 엄마처럼 용감한 사람이 못 돼.”
“당연하죠.” 둘이 거의
동시에 실소했다. 희수는 무미건조한 어투로 “원래 사람들은
자기가 당장 피해를 입는 일이 아니면 금방 잊는대요. 기본 교재에도 그렇게 나왔고, 실제로도 그렇던데요” 하고 덧붙였다.
“복지부가 무너지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욕을 하던 사람들이, 이렇게 금방 조용해진 것 좀 보세요.” 선민이 한숨을 쉬었다. “최혜석씨, 그러니까 우리 엄마가 내린 결론은 이거예요. 뉴스는 다른 뉴스로 금방 희석되니까 어떤 사건 하나에 모든 걸 걸 수는 없다는 거죠. 뭔가 저지르려면 한 번에 가진 걸 전부 걸어야 승산이 있을 거래요. 그러면서도
누구도 해치지 않아야 하고요. 저도 처음에는 말려보려고 했는데, 도와야겠더라고요.”
선민은 마치 자신이 최선생의 보호자인 것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또한
여태까지 일어난 일과 지금 벌어지는 일의 전체를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피신을 시켰다면
최선생은 무사한 거냐고 묻자 선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한번 더 시각을 확인했다.
“저희가 여기 온 이유는 세 가지예요. 우선 그 팀의 다른 사람들은 아마 저희 얘기를 들어보려고 하지도 않을 테니까.”
“공공 의료 센터 내부 사정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쪽 정보라면 엄마가 모아놓은 걸로 충분해요.” 선민이 이심 쪽으로 더욱 바짝 붙어 앉으며 말했다. “선생님 가족, 모영씨한테 전할 말이 있어요. 그분이 다니는 회사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들어보셨어요? ‘백업’에 관해서는요?”
“백업?” 하고 되묻자
팔짱을 껸 희수가 매서운 눈초리를 보였다. 선민은 그를 달래듯 “아직은
그럴 수 있는 시점이니까” 하고 말하더니 살그머니 이심의 오른손을 쥐었다.
“연락처를 하나 두고 갈게요. 만약에 이 집에서 누구에게든 곤란한 일이 생기면 저랑 의논하시면
돼요.”
현관 앞에서 닿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선민의 손끝에서는 후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졌다. 어딘가 앓고 있기라도 한 것일까. 이심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이, 선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니까 네 말은, 도와달라고
온 게 아니라, 언젠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을 하러 왔다는 거구나.”
“서로 돕는 거죠.” 선민이
말했다. “물론 선생님이 도와주실 일도 있어요. 언젠가 그때가
되면 자연히 아시게 될 거예요.”
“내 생각에는 최선생님이 너희가 직접 나서서 위험에 처하는 상황을
원하지는 않을 거 같다. 그래서 본인이 쫓기는 상황을 자처했을 거고.
안 그러니?”
희수는 반박할 말이 없다는 양 한숨을 지었지만, 선민은 달랐다. 결국은 자기한테 협력하게 될 거라는 듯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는 어쨌거나 ‘백업’이라는 말만큼은 기억하라고, 그에 관해서 알릴 말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을 달라고 한 뒤 전철역까지 뛰어가면 간신히 지각을 면할 수 있을 거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민의 계산대로 이심은 출근 시각을 딱 일 분 남기고 사무실에 도착했다. 고개를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인 채 팔짱을 끼고 있던 팀장은 “이선생님” 하며
이심 쪽으로 몸을 틀었다가 이내 신경쓸 것 없다는 듯 왼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그러나 알은척을 했다가 괜한 잔소리만 들을 것 같아서 이심 역시 잠자코 있었다. 오늘의 방문처는 어제보다 세 집 더 많았으므로 다른 일에 신경쓸 여유가 없기도 했다.
밭은 시간 때문에 초콜릿맛 단백질 바 한 개로 점심을 때우고 나선 오후 진료에서는 유달리 실랑이를 벌일 일이
많았다. 기왕 온 김에 자신의 배우자도 한번 봐주고 가면 안 되겠느냐며 고집을 부리는 노인은 왕진 의료
시스템이 여전히 낯설다며 순박함을 가장했고, 증상과 관련 없는 진통제를 처방해달라고 조르는 노인은 몇
분 동안 같은 말을 수십 번 반복하는 집요함을 보였다.
퇴근 시간을 훌쩍 넘겨 그날의 마지막 환자의 집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해질녘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사층에 위치한 집의 현관문이 열리자 좁은 현관에 발 디딜 틈 없이 겹쳐진 신발 무더기가
눈에 들어왔다. 문을 열어준 백발의 남성은 다른 집에 잘못 찾아온 게 아닐까 싶어 주춤거리는 이심을
보고서도 의아해하는 기색 없이 인사를 건넸다. 그의 어깨 너머로 좁은 거실에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열두
명의 사람들이 소파와 바닥에 나뉘어 두 줄로 앉아 있었다. 과거의 병원 복도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이곳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나는 소음이 벽을 타고 넘어가지
않도록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어서 속삭이듯 말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최선생님은 지금껏 이런 식으로 몰래 환자들을 더 돌보았던 것이다. 왕진을
간 곳에서 인정에 이끌려 한 장의 바우처로 두세 명씩 사정을 봐주는 풍경을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모종의 절차까지 마련해서 진료 행위를 펼쳐왔던 것이다. 오랜 의문 하나가 풀렸지만 이심에게는 새로운 질문이 생겼다. 인공지능이
분배한 환자의 목록은 당일 아침에 전달되는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미리 알고 여기에 모여 있는 것일까. 팀장이
겉으로는 최선생을 단속하면서 뒤에서는 돕고 있기라도 했던 것일까.
“서두르셔야죠.”
문을 열어주었던 남자가 채근했지만 이심은 왕진 가방을 그대로 든 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같은 기관에서 나왔지만, 저는
최선생님하고는 입장이 다릅니다. 정식으로 접수되지 않은 진료 행위는 하지 않고 있어요.”
그러자 왼쪽 구석에서 옹송그리고 있던 한 남자가 못 참겠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붙잡아보려 했지만 그를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이심은 언젠가 자신을
자산가들이 거주하는 빌딩에 데려다주었던 제복 입은 운전사를, 살면서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몸집이 커다랬던
사람을 떠올렸는데, 눈앞의 남자의 덩치가 더 컸다. 그는
어깨 너비가 여느 성인 남성의 두 배는 되어 보였고, 발끝을 조금만 들면 머리가 천장에 닿을 듯했다. 다만 그 거대한 몸의 중심을 이루는 축이 왼쪽으로 기울어 절뚝이며 불안정한 걸음걸이를 보였다. 이심은 그가 근육위축증을 앓고 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선생님.” 이심과 마주선
남자가 입을 열자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억누르는 통에 잇새로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제가 비명을 지르거나 심박수가 치솟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게, 모두에게 좋을 거예요.” 이심이 그를 향해 자신의 메이드를 내보이며
말했다.
“알다마다요.”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희는 여기 올 때마다 발소리 기침소리까지 조심하는 사람들이에요. 감히 선생님을 위협할 만큼 사리분별이 안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냥 가시는 건 곤란합니다. 대단히 곤란해요.”
이심은 맹수를 마주하고 선 듯한 위압감을 느꼈지만 그와 동시에 기우뚱하게 서서 이를 악물고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는
남자의 얼굴에 밴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다른 손을 쥐고 있었는데 떨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금단증상에 시달리고 있느냐고 묻자 그의 입에서는 제발 도와달라는 대답이 나왔다.
문을 열어준 백발의 남자는 자신이 과거에 약국에서 보조로 일한 경험이 있고, 지난
몇 해 동안 쭉 최선생을 보좌해왔다고 밝히며 노트 한 권을 펼쳐 보였다. 그간 최선생이 손으로 쓴 차트였다.
“바이오 데이터는 없지만 진료 이력이 있으니 선생님의 시간을 오래
빼앗지는 않을 겁니다. 대체로 길항제 위주로 처방해주셨고요, 항불안제를
같이 주시는 사람도 좀 있습니다. 여기 이 친구는 지난번 오셨을 때부터 주시던 약 용량이 바뀌었으니까
그 점만 좀 살펴봐주시면……”
“도와드리고 싶어도 저는 여러분에게 드릴 약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이심의 입에서 쉰 목소리가 나왔다.
소파 한쪽에 몸을 묻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아니요, 있을 거예요!” 하고 말했다. 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소녀는 달려들듯 이심 앞으로 다가왔으나 뼈마디가 불거져 보일 정도의 마른 몸으로 인해 위협적인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안으로 말린 듯 붉은 기운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가느다란 윗입술, 한쪽만
더 짙게 도드라진 팔자주름을 보면서 이심은 희수를 떠올렸는데 그사이에 소녀는 왕진 가방을 낚아챘다. 이심이
가방의 다른 쪽을 잡아당기자 소녀는 악을 쓰고 싶은 마음을 구겨넣은 듯 험악한 표정을 짓더니 “그럼
직접 꺼내세요. 안주머니 한쪽이 찢어져 있을 테니까” 하고
말했다.
소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왕진 가방의 안주머니는 손가락 두 마디 길이쯤이
찢어진 상태였으며 그 사이로 손가락을 넣자 가방의 내피와 외피 사이의 틈에서 비닐로 칭칭 감싼 알약들이 집혔다.
아침에 잠시 집에 들였던 단 몇 분 동안 선민 혹은 희수가 한 일이 분명했다. 이심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여전히 숨죽인 채 자리를 지켰지만 그들 전부가 언제 돌변한다 해도 놀랍지 않을 만한 긴장감이 거실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언젠가 도움을 줄 때가 오면 자연히 알게 되리라던 선민이 가리킨 그때가 바로 오늘을 말한 것이었다는 사실에
이심은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알겠어요. 그 차트 줘보세요.”
백발의 남자에게 차트를 받고 나서 그 집을 나서기까지는 이십여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이심은 애초에 이 많은 사람이 고가의 마약류 진통제를 어디서 어떻게 구해서 중독에까지 이르렀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으나 더이상 관여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 굳이 묻지 않은 채 그곳을 나섰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왕진의가 된 이래 처음으로 규정을 어겼다는 실감이 밀어닥쳤다. 죄책감은 일지 않았지만 두려운
감정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피로감이 더 짙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 없이 지친 이심의 머릿속에 택시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십 년쯤 전만 하더라도 이렇게
기력이 달릴 때는 스스로에게 선심을 쓰는 기분으로 택시를 호출했을 것이다. 지금은 택시가 눈앞에 와서
선다고 하더라도 손사래를 치기에 바쁠 것이다. 그런 터무니없는 지출을 하는 사람으로 보였나 싶어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이심은 어제와 같은 실수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 제대로 왕진 가방을 돌려놓은 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겨우 겉옷만 벗고 침대 위로 몸을 뻗었을 때 문득 그동안 잊을 만하면 최선생이 모영의 안부를 묻던 일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당연히 가족의 안부를 의례적으로 물었던 것이라고 여겼으나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언젠가 선민과 함께 무도회에서 마주쳤던 일도 기억났다. 그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최소한 최선생의 행동에서 어색함을 느낀 바는 없었다.
어쩌면 최선생은 필요에 따라 감쪽같이 연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안 그래도 조직에서 예의 주시되던 최선생이 짐작하던 것보다 몇 배나 외롭고
막막했을 수 있었겠다 싶기도 했다. 게다가 지금은 수배를 받는 처지라니. 세상에 수배라니.
신산스러운 마음에 그간 최선생과 나눈 메시지를 살펴보고 있던 와중에 모영이 돌아왔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자마자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기운 빠지는 일을 습관처럼 늘어놓는 모영에게 “너희 회사에서 혹시 ‘백업’에
뭔가 특별한 의미라도 있어? 아, 참! 혹시 B센터의 B가 백업을
말하는 거야?” 하고 물었을 때였다. 모영은 입을 꾹 다문
얼굴로 감정의 동요를 숨기려는 듯 재빨리 시선을 피하며 갑자기 그런 질문은 왜 하느냐고 되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 뭐, 그냥 팀장
잔소리 때문에. IT 계열에서 자료 백업하는 걸 좀 보고 배우라길래 한번 물어본 거야.”
이심은 반사적으로 거짓말을 꾸며냈다. 판도라의 상자를 건드렸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판도라의 상자가 어떤 위험 요소를 품고 있을지 짐작되지 않았으므로 빗장을 건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최우선 순위에 둘 수밖에 없다고 여겼고,
그런 생각에 가책이 들지는 않았다. 다만 보름여가 지난 어느 날, 이심은 모영이 급작스러운 위기 상황에 직면했을 때 자신과는 다른 원칙을 가지고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 역시 최선생의 부재를 메우느라 늦은 밤에 퇴근한 자신을 맞이한 모영이 늘어놓는 말을 이심은 단박에 이해할
수 없었다. 모영은 당장이라도 울 듯한 얼굴을 하고 일단 함께 보고 이야기하자며 자기 방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이심이 맞닥뜨린 존재는 막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로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아이는 모영이 낳았다고 해도 믿을 만큼 꼭 닮은 얼굴을 하고 이심을 올려다보았다. 뒷걸음질치는 이심의 어깨를 양손으로 붙잡으며 모영은 말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차근히 설명할게. 일단은, 내 얘기를 좀 들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