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코끼리

저녁 먹어야지. 깬 거 아니까, 그만 일어나.”

이심은 모영의 말에 움찔거리는 모습을 들킨 후에도 그대로 누워 있었다. 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은데 그사이 꿈에서 장소를 옮겨다니며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났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피곤해 죽겠다고 투정을 부렸더니 모영이 알겠다며 스팀 타올을 만들어왔다. 체온보다 살짝 높은 열기가 두 눈에서 관자놀이까지를 감싸면 따듯한 물이 담긴 욕조 안에 있는 것처럼 순식간에 긴장이 풀렸다. 타올의 열기가 식기 시작하면 모영은 손가락 끝으로 이심의 이마 라인부터 꾹꾹 누르기 시작하여 정수리를 지압하는 것으로 마사지를 마무리지었다. 스팀 타올을 걷어내는 순간에는 개운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아로마 오일 한 방울 떨어뜨려서 하면 훨씬 더 좋은데.” 모영이 말했다.

충분히 좋았어.” 이심이 나른한 음성으로 반박했다. “나 얼마나 잤어?”

한 시간쯤?” 모영이 고개를 들고 벽시계를 확인했다. “내가 볶음밥 해뒀지. 일단 그거부터 먹고서 얘기하자.”

오늘 저녁은 진짜 내가 하려고 했는데.”

어차피 둘이 같이 먹는 건데 누가 하면 어떠냐면서 모영이 이심을 잡아끌었다. 이심은 식탁에 앉아 물잔을 비우며 이번주 저녁은 모두 모영이 준비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음주에 만회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여느 때처럼 볶음밥을 한 술 입에 넣자마자 맛있어?” 하는 질문이 날아왔으므로 입안에 든 것을 얼른 씹어 삼켰다.

그럼! 넌 정말 마사지 천재에 볶음밥 천재라니까. 간도 어쩌면 이렇게 딱 맞아?”

정말?” 수저를 든 모영이 되물었다. “아유, 뭐라도 잘하는 게 있어서 다행이야. 그래도 진짜 김치 있으면 더 맛있게 할 수 있는데.”

이심은 김치 시즈닝만 가지고 이토록 감쪽같이 김치볶음밥의 맛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거라고 모영을 추켜세웠다. 내친김에 지난달에 동결 건조 계란과 파만 넣고 만들었던 계란 볶음밥도 환상적이었다는 수사를 넣어 다시금 칭찬했다. 모영은 뿌듯한 미소를 짓더니 비로소 볶음밥을 떠먹기 시작했다. 그제야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이 집합가족을 이루어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 이심은 한 입을 제대로 맛보기도 전에 음식맛에 관해 묻는 모영의 질문이 부담스러웠다. 한 번은 씹기도 전에 물어보니까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다는 말을 무심결에 내뱉었는데, 모영은 그럴 법하다며 신경쓰지 말라고 해 놓고는 이틀이나 처져 있었다. 몇 해가 지나는 동안 이심은 차츰 사소한 일에도 구체적으로 칭찬을 하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 이런 것까지 말로 해야 하나 싶어서 귀찮음을 꾹꾹 억눌러가며 대답하던 시기가 어느덧 아득하다. 이제는 한 그릇 음식을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는 정도의 품밖에는 들지 않을 만큼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심은 싱긋 웃었고, 그렇게 맛있냐는 모영의 질문에 물론이라고, 마지막 한 입까지 맛있다고 대답한 뒤 빈 그릇을 치웠다.

둘이 쓰는 작은 아일랜드 식탁은 한 달에 한 번씩 협상 테이블이 되었다. 모영은 이심의 입에서 무심결에 나온 그 말이 마음에 든다며 이따금 이심과 의견이 대립되는 사안이 있으면 이건 협상 테이블에 올려야겠는데라고 말하기를 즐겼다. 그 말을 하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는 스트레스가 해소된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매월 마지막 주말 밤에 둘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는 것은 대체로 세금과 각종 공과금, 관리비를 조정하고 협의하는 일에 국한됐다.

짧고 탁한 봄이 끝나가고 있었고, 올해에는 전력 공급 업체를 바꾸어보자며 모영은 메이드의 홀로그램 프레임을 띄워 이심 앞으로 웹 전단지를 들이밀었다. 지금 가입하면 올해 혹서기 넉 달 동안 사용 금액 이십 퍼센트를 할인해준다는 광고 문구가 눈앞에서 반짝였다.

잠깐만, 지금 쓰는 데 해약하면 위약금 있을 거 아냐.”

왜 안 나오나 했네, 일단 잠깐만, 하는 거!” 모영이 웃었다. “해약금 낼 시기 지났지. 이 회사 전기를 삼 년 넘게 썼잖아.”

그렇게 오래 됐어?”

그럼, 이제 곧 사 년 되는데.”

이심은 처음 이 집에 이사 오던 날 얼마 만에 자기만의 방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른다며 싱글거리던 모영의 얼굴을 떠올렸다. 싱글 침대가 전체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되는 좁은 방의 문을 열고 활짝 웃으며 더 바랄게 없다고 모영은 말했다. 독신세의 압박에서 벗어나 드디어 주방이 있는 집에 살게 된 이심 역시 감개무량했었다. 이곳에서 만든 첫 요리가 무엇이었는지는 단박에 떠오르지 않지만, 모영이 공들여 양파를 볶았던 것만큼은 기억하고 있다. “태우는 거랑은 다른 거야하고 강조하던 모영의 목소리, 부엌 겸 주방의 좁은 공간을 매캐하게 채운 달착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저녁을 기다리던 일이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작년 여름에 우리가 전기세로 낸 돈 좀 봐.” 모영이 검지로 고지서를 가리켰다. “여기는 첫 가입에 삼 프로 더 할인해준다니까 올해 한 달쯤은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거지.”

알았어, 알았으니까. 잠깐만. 여기 회사 이름을 최선생님한테 들어본 것 같은데.”

이심이 메시지를 보내자 최선생은 딸 선민과 입씨름중이라 바쁘다고 운을 띄운 뒤 계양구 단전 사태라는 짧은 답을 보내왔다. 이심은 더 설명할 것도 없다는 듯 모영에게 메시지를 보였다. 그러자 모영의 입에서도 아, 하는 탄식이 비어져나왔다.

재수 없으면 우리도 태풍 직격으로 맞고, 한 달씩 두 달씩 단전될 수도 있어.”

설마.” 모영이 말했다. “작년에 그런 일 있었는데 더 정비를 했겠지.”

아직도 소송중인 회사가? 피해 보상하겠다고 말만 하고 지금도 버티고 있다던데.”

모영의 입에서는 망했다는 말이 나왔다. 전기세와 데이터세를 조금 더 아껴서 여름 한철이라도 식재료를 보충하고 아로마 오일도 사려고 했건만 희망이 사라졌다며 모영은 아일랜드 식탁 위로 엎드렸다.

여유 나면 먼저 뉴스에 돈 쓰기로 해놓고는.”

몰라.” 엎드린 채로 모영이 불퉁거렸다. “어차피 다 못하지 뭐.”

협상 테이블에서는 반년에 한 번쯤 이렇게 모영의 정수리를 바라볼 일이 생겼는데 그럴 때마다 이심은 모영의 풍성한 머리숱에 새삼 감탄했다. 기운 내라고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혹여나 고정비를 줄일 만한 구석이 없는지 점검해보기는 했지만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지난달에도, 지지난 달에도 허탕을 쳤기 때문이다.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에도 한계를 맞았으므로 경제 상황이 나아지기 위한 해결책은 하나뿐이었다. 수입이 있는 성인 가족을 더 받아들이는 것. 그런데 과거에 이심이 그랬듯 모영이 무도회에 참가하는 일을 미루고 있었다. 무도회 얘기가 나오면 번번이 배가 살살 아프다거나 편두통이 있다며 자리를 피하는 것이었다. 가족 구성원을 찾는 일에는 시간이 걸리므로 이심은 초조함을 억누르기 위해 애써야 했다.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 빠듯하지만 않다면 가족을 더 늘려야 한다는 부담감을 아예 잊고 살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모영과 둘이 지내는 생활은 가족이라는 관계를 통해 얻고 싶은 온기를 품고 있었으며, 온기가 발현되는 형태 또한 의논하고 조정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서로가 원하는 방식으로 따스함과 쾌적함이 조화를 이룬 일상을 함께 만들어온 것이다.

일단은 현상유지 하는 걸로 하자. 우리 둘이 벌면 버틸 수는 있잖아, 그게 어디야. 여름까지는 무도회 가자는 말도 안 할게. ?”

모영은 상체를 일으켜 세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여전히 시무룩해서 이유를 물으니 미안해서 그런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독신세까지 내면서 살아본 사람이잖아. 이해 못할 것도 없지, . 대신 등 마사지나 자주 해줘. 가족의 사랑을 느끼는 데는 그만한 게 없더라.”

그건 얼마든지 해줄게. 실은 내가 부탁할 것도 하나 있는데 입이 안 떨어져서.” 모영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우리 엄마는 다른 어른들이랑은 다르다는 거야. 진짜야.”

 

집합가족 커뮤니티의 게시판에서 검색해본 결과에 따르면 다른 가족 구성원의 원가족과 교류한 경험은 좋은 기억을 남기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최고의 교류는 교류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언한 글에는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떨어져 살며 신경쓰지 않던 원가족의 민낯을 새삼 접하고 아예 접근 금지 신청을 했다는 사람의 글도 보였다. 그런 경우에 비하면 집수리를 하는 이틀만 신세를 지겠다며 온 모영의 엄마와 지낸 첫날은 기대 이상으로 조용히 지나간 셈이었다.

어제 저녁에 귀가했을 때, 질문 공세를 예상하며 현관 문 앞에서 심호흡까지 한 뒤 문을 열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모영의 어머니는 먼저 모성지라는 자기 이름을 소개하며 성지씨라고 불러달라고 알렸다. 다음에 이어진 말은 질문이 아니라 깍듯한 사과였다.

우리 모영이 사는 집이야 전부터 궁금했지만, 이렇게 염치없는 부탁을 할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요.”

, 들었습니다. 댁에 누수 공사를 하신다고요. 이틀인데요, . 편히 계세요.”

그런 다음 먼저 씻고 자기 방으로 들어오면서 그날의 접촉이 끝난 것이다. 지금 집에 낯선 사람을 들인 것은 처음이라서 잔뜩 긴장했다가 풀린 탓인지 오늘 아침에는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눈떴건만 푹 자고 일어난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아침을 먹어볼까 싶어 방문을 열고 나가자 등받이가 없는 식탁 의자에 앉은 성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마치 누군가 등과 허리의 경계선을 양손으로 받쳐주는 것처럼 등줄기를 곧게 편 자세가 보기 좋았다. 이 모습이 담긴 사진을 왕진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낡은 소파에 구부정하게 앉아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라고 이심은 생각했다. 성지는 이심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침 식사를 하겠느냐고 물었다.

평소에는 시간이 없어서 잘 못 챙기는데 오늘은 먹으려고요. 일찍 일어난 김에요.”

잘됐네요.” 성지가 미소 지었다. “오믈렛을 해드릴게요. 제가 유일하게 잘하는 요리거든요.”

성지는 이것 보라며 계란이 열 개 담긴 종이 상자를 꺼냈다. 종종 두 알, 많으면 세 알씩 사서 먹던 계란이 다섯 개씩 나란히 두 줄로 늘어선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호사스러운 기분이 든다고 이심은 말했다.

딸네 집에 빈손으로 갈 수는 없다면서 지금 사는 가족들이 십시일반 모아준 돈으로 산거예요.”

성지씨도 집합가족을 꾸리셨어요?”

, 아직 법적으로는 안 묶었는데 이제 절차 밟고 있어요. 젊을 때 한솥밥 먹었던 사람들끼리 같이 살기로 했거든요.”

성지는 평소 모영이 입던 앞치마를 두르고 싱크대 하부장에서 양푼을 꺼냈다. 욕실에서 나온 모영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한 손으로 말아쥔 채 그녀 앞으로 달려가더니 나 계란 세 개!” 하며 싱글거렸다. 성지와 이심의 입에서 동시에 아깝다는 말이 나왔지만 모영은 물러서지 않았다. 계란 세 개는 들어가야 모양도 식감도 완벽한 오믈렛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감당 못할 소비가 아니라면 때로는 분명한 형태의 행복을 느껴야 한다는 태도가 자못 비장하기까지 해서 이심은 그만 백기를 들었다.

대신 나도 이따 분명한 행복 한 회 진행해줘.”

좋지, 오늘 퇴근하고 오면 아예 전신 마사지를 해줄게.”

모영이 머리를 말리는 동안, 성지는 계란물을 두른 프라이팬을 기울이고 손목을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순식간에 럭비공 형태를 만들더니 분명히 모영이가 자기 엄마는 요리에 소질이 없다고 했는데 어찌된 일인가 싶죠?” 하고 물었다.

이심은 그런 말은 들은 적 없다고 반사적으로 거짓말을 했지만 성지는 설마, 몇 년을 살았는데 그 얘기를 못 들었을라고. 이건 옛날에 양식 조리사 자격증 따려고 연습한 거예요라며 웃었다.

맞아, 우리 엄마는 딱 오믈렛만 잘 만들어.” 모영이 콧노래를 부르며 맞장구쳤다.

갓 만든 완벽한 형태의 오믈렛은 따끈따끈한데다 촉촉했다. 입안에 넣자마자 뭉그러지는 부드러운 식감 안에 버섯 시즈닝의 감칠맛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맛있는 오믈렛을 먹으면서도 성지와 모영 모녀는 진짜 버섯이 있으면 더 맛있었을 거라는 말을 나누었다. 또한 성지가 요리에 선천적으로 젬병이라는 데, 성지의 전남편이자 모영의 생부가 요리에 소질이 있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프렌치 하던 사람이 솥밥도 잘 짓고, 국밥 같은 것도 다 잘했잖아.” 모영이 말했다.

누가 아니래.” 성지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학로 시절에 그 사람이 말아주던 그 국밥! 내가 거기에 코 꿰였던 건데.”

모영은 이심에게 대학로 시절은 성지가 연극 배우였던 때를 말한다고 일러주었다.

맞아요, 배우셨다는 얘기 들은 기억이 있어요.” 이심이 말했다. “어쩐지, 자세가 남달리 좋으시더라고요.”

성지는 손사래를 치며 어릴 때부터 꿈꾸었던 배우 일은 몇 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돌아보면 자기 인생의 굵직한 사건은 대체로 이십대 중반부터 작은 극단에 몸담았던 그 몇 해의 경험에서 뻗어나온 것 같다며 미소 지었다. 종일 붙어 있다시피 하던 동료에게 신종 플루를 옮아서 말 그대로 죽다 살아났고, 회복기에 지극정성으로 영양식을 해 나르던 남자에게 마음이 약해져 가정을 꾸렸고, 모영을 얻었고(당시에는 남편 성을 따랐으므로 진영이었다), 이혼한 뒤에 드디어 자기 성을 물려줬고, 배우로만 일하던 사람이 싱글 맘으로 버티는 일이 벅차 본가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고(이 시기에 호구지책을 위해 취득한 자격증들 중 하나가 양식조리사 자격증이었다), 지금은 돌고 돌아 다시 그때 동료였던 사람들하고 살게 되었다면서.

엄마까지 다섯 명이 같이 산다고 했지?” 모영이 물었다.

나까지 여섯. 셋은 그럭저럭 연극판에서 오래 버텼고, 나 포함해서 나머지 셋은 일찌감치 접었는데 작년에 선우정심 선생님 장례식에서 다 같이 오랜만에 만났어.”

어머, 그분이랑 아는 사이셨어요?” 이심이 물었다.

나는 그냥 멀리서 존경했고요. 여섯 중에 한 명이 선생님 수양딸처럼 마지막 가시는 길에 병수발도 들고 해서 집을 물려받았는데 끼워준 거예요. 어차피 집도 원체 크니 세금 나눠 낼 사람도 필요하다고 해서요. 그 덕에 샴푸의 요정 있는 집에서 다 살아보게 됐으니 말년에 대박이 난 거죠.”

그거 있는 집이 제일 부러워.” 모영이 빈 그릇을 한데 모으며 말했다.

샴푸의 요정이라는 단어가 화제에 오르자 이심은 두 아이와 쌍둥이 형제가 있던 집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급히 나오면서 울먹이는 아이의 음성에도 뒤돌아보지 않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던 일, 마음을 찌르는 듯한 죄책감을 느꼈던 기억이 어느새 전생의 기억처럼 아득했다.

요즘은 그럼 다시 이십대로 돌아가신 것 같은 기분이시겠어요.”

이심이 말하자 성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둘러앉아서 오늘은 체홉을 읽고, 내일은 뒤렌마트를 읽으며 그간의 한을 다 풀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체홉을 언급하자 모영은 지겨워 못 듣겠다는 듯 장난스럽게 귀를 막더니 늦겠다며 집을 나섰다. 성지는 현관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쟤가 회사에서 겪었다는 일이 도대체 뭔지, 해결은 하고서 돌아갔는지, 혹시 좀 아시는 거 있어요?” 하고 물었다.

아니요. 저도 그 이후에 친해져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밖에는……

난 사실 내 딸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제대로 몰라요. 아니, 듣기야 했지. 그런데 메이드랑 화살표 게임 같은 거 개발하는 회사에서 도대체 무슨 문제집을 만들고 있다는 건지 모르겠어. 옛날 사람이 돼서 못 알아먹는 건지, .”

아니에요. 모영이네 부서 사람들도 다들 무슨 맥락으로 만드는지 모르고 한다던데요.”

이심은 바텐더로 만난 모영과 집합가족 구성 절차를 밟는 동안 모영의 원래 직장에 관해 들었다. 모영이 소속돼 있는 연구센터는 기업의 총수가 직접 독립적으로 만든 곳으로 거기서 만드는 각종 교육 자료는 IT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는 점, 어디에 쓰이는지 알지 못한다는 점도 차차 알게 됐다. 실체를 모르는 업무에 대한 갑갑함을 견디지 못해 뛰쳐나간 모영은 회사에서 소개한 몇 가지 직업 연수를 받았지만, 연구원 자리를 포기할 만한 일을 구하는 데 실패하고 제 발로 복귀했다. 당연하게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던 모영의 얼굴은 씁쓸하게 일그러졌다. 연구원 중에 자료의 쓰임새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다못해 본사에서 그곳을 일컫는 B센터라는 말의 B가 무슨 의미인지조차 알지 못한다고 했다.

아유 참, 뭐가 그렇게 비밀이 많은지.” 성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복귀하면서 모영이가 팀장한테 도대체 B가 뭐의 약자인지라도 좀 알려달라고 물어보니까, 팀장이 그러기를 무명씨의 꿈에 힌트가 있다고 했대요.”

무명씨?”

메이드 최초 개발팀 수석이요. 그 여자는 생전에 어떤 인터뷰에서도 절대 자기 이름을 안 밝혔잖아요.”

스무 고개가 따로 없네. 어쨌든 그 여자 꿈이라면 전 국민이 메이드 없이는 못 살게 만드는 거 아니었을까요? 이루고 갔네요, 그럼.”

모영이가 알아본 바로는 그 사람의 궁극적인 꿈은 영원히 사는 거였대요. 얄궂죠. 이름을 안 밝히고도 이름을 떨칠 만한 불세출의 천재도 진짜 꿈은 못 이루는 건가봐요. 막상 본인은 사십대 중반도 못 넘기고 돌연사로 죽었다고 하니까요.”

성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착잡한 얼굴이었다. 어제 입은 옷을 그대로 입고 나간다면 아직 이십 분쯤은 여유가 있었으므로 이심은 찻물을 올렸다.

제가 괜한 얘기를 했나봐요. 모영이 요즘은 그럭저럭 회사 잘 다녀요. 너무 걱정 마세요.” 이심이 찻잔을 내밀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성지가 입술을 축인 뒤 입을 열었다. “옛날에 경총한테 들었던 얘기가 생각이 나서 그래요.”

경총이요?”

. 영이가 얘기 안 하던가요? 나 극단 있을 때 한동안 경총도 거기 들락거렸었다고요.”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까 경총이 아역 배우 출신이었다는 말을 들은 기억도 있네요. 설마 정말 진지하게 연극을 해보려고 한 건가요? 상상이 안 가는데요.”

아나운서 시험 보기 전에 발성 좀 잡고, 자소서에 쓸 스토리도 만들려고 왔다나 그랬어요. 그때는 연출이 하는 말이 법이었거든. 연출가가 자기 고등학교 후배라면서 잠깐 데려왔었죠. 나는 말이에요,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까지도 살면서 경총처럼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그 옛날에 AI 면접 같은 거 없을 때는 압박 면접이라는 게 있었는데, 들어봤어요?”

아니요.”

말 그대로 압박 수위를 높이는 거예요. 신입 사원을 뽑는다면서 대리급도 당황할 만한 상황에 몰아붙여놓고 이래도 네가 잘 해낸다는 걸 보여봐, 그래야 붙여줄게, 그런 거요. 그때까지만 해도 일반 회사에 취업하는 건 남의 일처럼만 여기던 나는 한 발짝 떨어져 구경하면서 도대체 그런 면접에서도 척척 살아남는 건 어떻게 생긴 사람들일까 했어요.”

경총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군요.”

임기응변에 타고났거든요. 연기력은 꽝이었지만 즉흥극에서는 날아다녔어요. 아마 무슨 면접을 봐도 다 붙었을걸요. 딱 한 번 밥을 같이 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언제였더라, 아마 연출가가 무슨 심부름을 시켜서…… 맞아요, 심부름하느라 극단 선배랑 둘이 경기도 어디 다녀올 일이 생겼을 때였어요. 그 선배한테 관심이 있었던지 자기가 태워다주겠다고 나서더라고요.”

 

저녁식사도 하지 못하고 출발했건만 돌아오는 길이 몹시 막혀서 세 사람은 서로의 꼬르륵 소리를 수없이 들어야 했다. 비로소 심부름을 마친 후에 근처에서 아직 영업하는 감자탕집에 자리를 잡았을 때는 넓은 홀 안에 그들 셋뿐이었다. 케이블 채널에서 흘러나오는 연예 뉴스가 홀 안을 울렸다. 한 아이돌 그룹의 리더가 지방의 행사장에 몰린 인파 사이를 빠져나오면서 어린아이를 밀친 일에 관한 뉴스를 보고 규철이 히죽히죽 웃었다. 그러자 선배가 왜 웃냐며 정색을 했다. 아이가 보도블록 위에 넘어졌고, 자칫 그 위로 사람들이 걸려넘어졌으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는데 웃을 일이냐면서.

제가 경솔했습니다.” 규철이 시선을 내리깔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 아이돌이 광고하는 회사 마케팅팀에 있는 아는 형이 떠오르는 바람에 자제를 못했어요. 저를 갈구던 선배가 당분간은 야근 좀 하겠구나 싶어서 그랬는데, 제 행동이 분별없었습니다. 사과드릴게요.”

나한테 사과할 일은 아니지.” 선배가 규철을 슬쩍 흘겨보더니 어린애들한테 인기 많은 팀이라 수습하려면 한 세월 걸리긴 하겠다하며 수저를 들었다.

규철은 반성의 의미로 식사는 자기가 산다고 하고는 지쳐서 대리를 불러야겠다고, 이 가게를 나서자마자 꼭 부르겠다고 강조했다. “저는 불로장생이 최종 목표니까 위험한 일은 절대로 안 할 거거든요하더니 소주도 주문했다.

식사를 마치고 아직 막차를 탈 수 있었던 선배가 급히 뛰어간 이후에 택시를 기다리며 성지는 별 뜻 없이 정말 불로장생이 꿈이냐고 물었다. 피로와 술기운으로 눈에 핏발이 선 규철은 잠시 두 눈을 껌뻑거리고만 있더니 저러다 턱이 빠지겠다 싶을 만큼 크게 입을 벌려 하품을 하고서 그렇다고 대꾸했다.

그냥 사는 건 시시하잖아요.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가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되지 않겠어요?”

그렇게 열심히 살아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아까 뉴스에서 본 일도 어떻게 보면 아차 하는 순간에 일어난 것 같던데요.”

아차, 한 다음에 어떻게 치고 빠지느냐에 달린 거예요.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 알죠? 냉장고 문을 연다. 코끼리를 넣는다. 냉장고 문을 닫는다. 그러니까 여자애를 밀쳐서 세상이 시끄럽다? 그러면 남자애도 밀치고, 노인도 밀친다.”

뭐래. 그건 자폭이고요.”

한 번 하고 끝이면 그렇겠죠. 펑펑 계속 터지는 건 다르고.”

어떻게요?” 성지가 되물었다.

작년에 자살한 영화감독 있죠. 그 사람이 애초에 뭣 때문에 마포대교에 갔는지 알아요?”

뭐였더라. 빚도 많았던 것 같고……

이렇다니까. 자기 밥그릇 걸린 일 아니면 사람들은 뉴스 터지는 거 끝까지 안 찾아본다고요. 자꾸 뭐가 시끄럽구나 하고 말지. 방어해줄 따가리만 확실하면 뭐, 해볼 만하죠.”

이미지를 버리잖아요.”

그럼 아예 새로 만들어야지. 어릴 때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단칸방에 일곱 가족이 살다보니 옆에서 자던 잠버릇이 나쁜 큰형이 뒤척이면 깔리곤 했다. 그때 호흡곤란까지 온 경험이 있어서 반사적으로 내 앞으로 오는 사람을 미는 습관이 들었다. 습관은 반드시 고치겠다. 불행했던 가족사라 차마 공개하지를 못했는데, 오히려 지금은 가난을 부끄럽게 여겼던 일이 부끄럽다. 한편으로는 지금도 빈곤에 시달릴 아이들을 위해 작은 일이나마 공헌해야겠다는 각성의 기회를 갖게 되어 전화위복으로 여긴다. 그렇게 풀면서 어릴 때 가난하게 보이는 사진도 몇 장 골라서 공개하고, 어디 결식아동 지원 단체에 기부도 좀 때리고, 기사로도 내고.”

잠깐만요, 이게 진짜 그 가수 사연이에요? 아니죠?”

코끼리 얘기죠.” 규철이 피식 웃더니 턱짓으로 반대편을 가리켰다. “저기, 빈 택시 오네요.”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는 규철의 뒷모습을 보며 성지는 그가 선배 앞에서 호언했던 것과 달리 대리 기사를 호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뉴스를 보고 히죽거리다가 선배가 지적하자마자 경솔했다며 굽실거리던 표정의 낙차는 곱씹을수록 연기 같았고, 그 순간 연기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아주 멀고 더없이 차갑게 느껴졌다. 앞으로 그가 극단에 계속 얼굴을 비춘다고 하더라도 되도록 접점을 만들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그즈음 때마침 규철이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행으로 여겼다. 특유의 순발력으로 방송계에서 활약하리라던 극단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주목받는 아나운서가 아니었으므로 몇 해 동안 그에 관해서는 잊고 살았다.

그러다 몇 해 뒤에 아나운서 출신의 예능 피디가 탄생했다며 세간의 주목도가 올라가던 때 성지는 찝찝한 불쾌감을 느꼈다. 결국 저런 사람이 살아남아 사람들의 관심을 얻는구나 싶어서 무명 배우로서 느끼는 질투심도 없지 않았으나 다시 유튜버로, 논객으로 입지를 다지는 모습에는 더이상 질투심도 일지 않았다. 경규철이라는 이름 앞에 붙는 타이틀을 끊임없이 갈아치울 수 있는 추진력과 에너지를 보건대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가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리라던 말은 빈말이 아니었구나, 하며 한편으로는 감탄했다. 다만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이라는 점에는 변화가 없었는데 사는 세계가 달라졌으니 다행히 그럴 일은 없으리라고 여겼다.

딱 한 번, 볼 일이 있기는 했어요.” 성지가 빈 찻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그때 심부름 같이 간 선배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당시에 성지는 배우 일을 포기하고 먹고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와중이었다. 오랜만에 옛 동료들을 만나자 밀려오는 씁쓸한 감정을 깨부수기라도 하듯 연출가가 변함없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요란하게 등장하여 테이블 한가운데 자리를 잡더니 자신은 권태에 관해 할말이 있다고 입을 열었다. 자신을 삿된 세상이 알아보지 못하는 천재인 줄로 믿는 나르시시스트였던 그는 극히 소수의 인간만이 느끼는 고독의 형태가 있다고 강조했다.

옛날에 촌에서 왜 노인을 공경했는지 알아? 언제 씨를 뿌리고, 언제 논에 물을 대는지 아니까, 오래 겪어봐서 아니까. 보통은 그래, 인간은 겪어봐야 알아. 하지만 그걸 안 겪어보고도 아는 사람이 있지. 필부 필녀들의 간장종지만한 사고회로가 빤히 보이는 사람이 있거든. 그런데 자기들아, 세상 이치가 읽히면 편하기만 할 것 같지만, 그거 고독한 거야. 내 속을 까뒤집어 보일 데가 없거든, 알아듣지를 못한다고, 사람들이! 시대가! 그러니까 세상은 빤한데 저 사는 재미는 없지. 그런 때 권태를 느끼는 거야, 인간은.”

연출가는 소주를 병째로 집더니 입안을 헹구듯 들이켠 후에 반쯤 눈을 감은 채로 규철이 곧 도착할거라고, 그도 바로 그런 케이스라고 말했다.

걔는 그래도 이번에 지 살 길 찾았어. 앞으로 TV 토론 재밌어질 테니까 잘 보라고.”

“TV 토론 연출한대요?” 연출가 맞은편에 앉은 이가 관심을 보였다. “유튜버로 잘나가서 피디 일은 관심 없는 줄 알았더니.”

맞아. 아나운서도 피디도 시시하대. 캠프에서 연락 와서 과외 선생으로 들어가는 거야. 과외처럼, 후보를 옆에 딱 앉혀놓고 특훈에 들어갔다 이거지. 그러다 너 이 새끼 공천이라도 받겠다, 그랬더니 웃더라고. 안 그래도 뱃지 한 번 달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갑자기 말을 멈춘 연출가의 시선을 따라가자 언제 도착했는지 규철이 그들이 앉은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한쪽 눈에만 살짝 주었던 힘을 풀며 미소 지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언짢은 기색을 내비친 것이 아니라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여길 법한 찰나의 표정만으로 규철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극존칭을 쓰며 비위를 맞춰주던 연출가의 입을 다물게 했다.

 

언제 눈을 부라렸냐는 듯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이 징그러웠다고 덧붙이며 성지는 다시 한번 자신은 경총이 싫은 게 아니라 두렵다고 말했다. 이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기어코 복지부를 복지청으로 격하시킨 이후에는 이심 또한 공포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성지와 인사를 나눈 뒤 집에서 나서는 길에 편두통이 일었고 퇴근할 즈음 두통이 다시 살아났다. 귀갓길을 서두른 이심은 저녁도 거른 채 모영에게 마사지를 부탁했다. 지그시 양 어깨를 누르는 손길에 한숨을 내쉬자 모영은 오늘 일이 유독 고됐느냐고 물었다. 그저 피로가 쌓인 것 같다는 대답에 모영은 다시 한번 자기 엄마를 재워준 일에 감사를 표했다. 목소리가 침울했다.

너야말로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나도 정말 알고 싶어. 회사에 무슨 일이 있는지.”

오늘은 최선생님까지 안부를 묻더라. 너 하는 일은 여전하냐고.”

나야 뭐 출판사에 다니는 거랑 똑같다고 전해드려. 이번주에는 인류사에서 성공한 혁명하고 실패한 혁명이 뭐가 있고, 왜 일어났는지 정리해서 넘겼으니까.”

모영은 여전히 직장에서 코끼리 다리의 어디쯤을 더듬는 기분으로 일하고 있었고, 그래서 엄마가 회사 일에 관해 물으면 방어적으로 신경질을 내게 된다고 했다. 그러더니 시원하냐고 물어왔으므로 잠이 들락 말락 했던 이심은 겨우 목소리를 짜내 물론이라고 답했다.

알아, 월급쟁이는 그냥 시키는 일 하고 생각을 안 하면 편한데 내가 피드백에 목숨 거는 사람이라 이런다는 거.” 모영의 손길이 다시 어깨까지 올라왔다. “나도 내 성격이 피곤해. 이런 건 타고난 거겠지? 아닌가? 엄마 아빠는 안 그러는 걸 보면 후천적인 문제려나?”

타고난 성향과 자라는 동안 구성된 성격의 구분선 같은 게 있기는 할까. 만일 여태 존재를 모르고 살던 쌍둥이 자매가 나타난다 해도 완벽한 비교군이 되어서 여기까지는 선천적인 거지만 여기서부터는 후천적인 네 탓이야, 하고 선을 그어주지는 못할 텐데. 그런 생각을 했으나 온몸을 덮치는 노곤함에 말로 옮기지는 못했다. 비교군이 될 만한 존재가 곧 두 사람 앞에 나타나리라는 점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로 이심은 거대한 코끼리가 등장하는 꿈속으로 빠져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