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사물은 문지방에서 한 뼘쯤 떨어진 곳까지 퍼져 있었다. 로아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서 우르르 달려온 어른들을 올려다보았다.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애월은 멀거니 서 있는 정훈에게 걸레를 가지고 오라고 일렀다. 세진이 안아 들고 입을 닦아주자 로아가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이심은 로아의 입술을 살피며 로아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만한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세진은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아니라고 말했다. 식사를 준비한 애월
역시 그럴 리가 없다고 단언했다.
“이럴 때는 입술이 부었는지 체크해주셔야 돼요. 입술이 부었으면 기도까지 부어 있기 십상이라서 호흡하는 데 지장이 생길 수 있거든요. 지금은 다행히 호흡이나 심박수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네요.”
“입술이요.” 세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네, 명심할게요.”
이심은 팔꿈치 안쪽과 목 뒤편의 연한 살이 접히는 부분을 살폈는데 붓거나 두드러기가 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간지러운 데가 있느냐고 묻자 로아는 아랫입술을 비죽 내민 채 고개를 저었다.
“소리야, 혹시 로아가
구역질하기 전에 기침을 하지는 않았니?”
소리는 이심의 앞으로 다가와 기침은 딱 한 번 했다고 말했다.
“평소랑 다른 점은 없었어?” 세진이
묻자 소리는 “좀 짜증냈어요. 그런데 엄마 로아는 원래 짜증
잘 내니까……” 하고 이마를 긁적였다.
“맞아, 그렇기는 해.”
세진은 피식 웃더니 이심이 살핀 대로 로아의 몸 곳곳을 한번 더 점검했다. 그러고는
마침표를 찍듯이 로아의 볼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를 했다.
“제가 보기에도 괜찮아요, 선생님. 예민한 애라 긴장하면 종종 배탈도 나고 토하기도 하고 그래요. 로아야, 맞지?”
로아는 창피한 듯 세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세진은 로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고, “우리 큰딸도 놀랐지” 하며 소리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래, 소리도 놀랐을
텐데, 이리와. 이제 괜찮아.” 그때까지 문지방 너머에 서 있던 정훈이 말을 보탰다.
애월은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럼, 여기도 할머니가 싹 닦았잖아” 하고 웃어 보이더니 한번 더 닦아둬야겠다며
새 걸레를 가지러 갔다.
정훈은 이심에게 그만 내려가자고 권했다. 훈민은 맨 먼저 일층으로
돌아간 듯 보이지 않았다. 이심은 그가 이층에 올라오기는 했었는지 의문이 들었고, 어릴 적에 숱하게 겪어온 일이 눈앞의 장면에 겹쳐지고 있었다. 거실로
내려왔을 때, 이심의 눈에는 소파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있는 훈민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정훈이 옆자리에 앉자 눈을 끔뻑거리더니 이제 로아는 괜찮냐고 물었고, 세수라도
해야 기운이 나겠다며 일어났다.
훈민이 일어난 자리에는 애월이 와서 앉았다. 그녀는 이심에게 한 장의
사진을 건네며 선물이라고 했다. 초지와 텅 빈 도로 옆으로 불쑥 솟은 산과 멀리 흐릿한 한라산이 중첩된
사진이었다. 절반은 온통 푸르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별건 아니에요. 그냥
내 고향 사진 중에 제일 마음에 들어서, 우리 가족들한테는 다 한 장씩 줬거든. 좀 거창한 얘기지만, 나중에 내가 먼저 가더라도 이 사진 보고서
내 고향 제주 하늘빛이 원래는 어땠는지 기억해달라고 말이에요.”
“여기가 애월인가요?” 이심이
물었다.
“아니, 거기서 태어나기는
했는데 세 살도 되기 전에 남쪽 마을로 이사를 갔어요.” 애월이 중절모를 엎어놓은 듯한 모양으로 볼록
솟은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산은 산방산이라고 해요. 내가
참 좋아한 산이지. 산이 작아서 조금만 떨어져서 찍으면 이렇게 사진 한 장에 쏙 들어왔답니다. 그런데 가까이 보면 또 느낌이 달랐어요. 꼭대기는 이렇게 푸릇하지만
그 아래는 돌산이었거든. 그래서 강단이 있어 보인달까, 든든하달까.”
제주에서 애월은 마음이 신산스러울 때면 산방산 중턱에 있는 절을 찾았다고 했다.
달리 종교를 가진 것은 아니라 기도를 드리지는 않고 다만 절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그렇게 있다보면 각박한 세상살이로 마음에 고이고 굳어가던 것들이 서서히 묽어지는 것 같았다.
“살면서 그런 장소를 가지는 게 그렇게 항상 오는 행운이 아니더라고.” 애월이 말했다. “제주에서 떠나온 다음에 얼마나 그런 생각을 많이
했게. 어때요, 선생님은 그렇게 느끼는 자기만의 공간을 가지고
있어요?”
“아니요. 저한테도 생기면
좋겠네요.” 이심이 대답했다.
애월이 그러면, 하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이심은 그녀의 말을 부드럽게
자르며 오늘 먹은 식사가 입에 꼭 맞았다고 얘기했다. 그러고는 막 세수를 마치고 와서 턱에 남은 물자국을
소매로 쓱쓱 닦는 훈민을 향해 그가 우린 국물도 일품이었다고 칭찬했다.
“저야 뭐, 애월씨 분부를
따른 건데요.” 훈민이 짐짓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제가 했으면 그 맛이 안 났을 거예요. 저는 직접 국물을 내본 적이 없거든요. 뭐든 한 번도 안 해본 일에는
티가 나는 법이잖아요.” 이심이 말했다. “이 기회에 하나
말씀드리면, 저는 사실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가끔 먹는 계란 요리인데,
혹시 다음에 다 같이 국수를 먹을 때는 국물에 계란도 넣어주실 수 있을까요?”
“아, 그건……” 애월이 끼어들려 하자 훈민이 말허리를 잘랐다. “그러시죠. 넣어드릴게요.”
“정말요?”
“그럼요. 아끼는 것도
좋지만, 가족이 먹는 건데요. 설마 계란 한두 개 넣는다고
가계가 기울지는 않겠죠.” 훈민이 기운다는 말에 맞춰 장난스럽게 한쪽 어깨를 기울이며 웃음 지었다. “선생님이 와주신다면 그깟 계란 한두 알 넣는 게 어렵겠습니까?”
“다 같이 먹는 음식에요? 거기에
계란을 넣으면, 로아가 못 먹게 되는데도요?”
훈민은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정훈을, 다음에는 애월을 바라보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는 애월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제가 받은 설문지에는 로아에게 계란 알레르기가 있다고 적혀 있었거든요. 훈민씨 외의 가족분들은 잘 알고 계신 것 같네요.”
“아, 네. 그렇죠.” 훈민이 얼빠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로아한테 알레르기가 있죠.”
“원래는 훈민씨도 알고 계셨나보군요.”
이심이 말했다.
“물론이죠.” 정훈이 끼어들었다. “저희 형이 철야를 하고 오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렇지, 원래 그렇게까지
엉망은 아니에요, 선생님. 아이들이 저희를 잘 따르는 것도
보셨잖아요.”
“그러시군요.”
“아이고, 당연하지요.” 애월이 재빨리 맞장구쳤다. “훈민이도 집안일을 얼마나 많이 돕는데요.”
“돕는다고요……” 이심은
대신 대답하려는 정훈에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손짓한 뒤에 훈민을 똑바로 바라보고 물었다. “저 오늘 여기
편입 서류에 사인하러 왔잖아요. 제 기준에는 이게 아주 중요한 문제라서 사인하기 전에 정확히 알아야겠어요, 훈민씨. 그래서 하나만 여쭤볼게요.
만약에 말이에요, 그런 일이 없어야겠지만 만약에, 로아가
유치원에 출석한 날에 선생님이 안 보는 사이에 친구들이 먹던 계란빵을 무심결에 같이 먹었다고 쳐요. 그래서
얼굴까지 이곳저곳 부풀어올랐다고 전화를 받으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그러니까, 로아는 저기, 계란에 알레르기가 있다고요.”
“아뇨. 그건 새로 오신
선생님에게 미리 알려야 하는 정보고요. 제가 드린 질문은 로아 한테 이미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나서 붓고
열이 나는 긴박한 상황을 전제하는 거예요. 그럴 때 어떻게 조치하라고 전하실 건지를, 로아의 가족이자 보호자인 성인으로서 파악하고 계신지 여쭤보고 있는 거예요.”
훈민은 이미 물기가 마른 턱을 다시 옷소매로 문지르며 정훈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짓을 보냈다. 결국은 훈민이 문제가 될 줄 알았다는 것처럼 맥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정훈은 정신을 차리려는 듯 오른손으로
자기 이마를 툭툭 치더니 말했다.
“인정할게요, 선생님. 형은 아무래도 세진씨만큼은 로아하고 소리에 대해서 알지 못해요. 저도
어느 정도는 그렇겠죠. 생물학적인 어머니에 비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물론 그게 당연하다는 얘기는 아니고요. 어, 저희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어제 형이 철야를 한 것도 결과적으로는 우리 가족 전체를
위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애월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왜 아니겠어.” 애월이
이심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세무 공무원 일이 얼마나 지독한지 몰라요.
같이 살아서 그걸 아니까,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좀더 해서 그래요. 그냥 그 차이예요.”
이심은 자기 손등을 덮고 있는 애월의 손을 바라보았다. 칠순을 앞둔
사람이 흔히 그렇듯 애월의 설문지에도 몇 가지의 만성질환이 적혀 있었던 게 떠올랐다. 따라서 이심은
두 형제에게 애월에 관해서도 물을 수 있었다. 그녀의 경우 매일 빠짐없이 약을 복용하기만 한다면 문제될
게 없지만, 단 며칠만 걸러도 증세가 악화될 수 있는 약이 한 가지 있는데 혹시 뭔지 알고 있느냐고. 식후에 먹는 약과 자기 전에 먹는 약이 있는데 함께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챙겨준 적이 있느냐고. 작은 기대라도 있다면 물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이심은 더이상 연기를
해가며 테스트할 필요조차 느낄 수 없었다.
“아마 애월씨 말씀이 맞을 거예요.
함께 일해본 적은 없지만 훈민씨는 분명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실 것 같고, 그러면 더 긴
시간을 일해야 하는 것도 잘 알고요. 하지만……” 이심은
애월의 손에서 자기 손을 빼낸 후에 말했다. “죄송해요. 이
사진은 받을 사람은 제가 아닌 것 같아요, 애월씨. 저는
어릴 때 한집에 사는 가족 간에 당연한 짐을 나눠지지 않는 게 어떤 원망을 낳는지, 원망이 쌓이다보면
관계가 어떻게 뒤틀리는지 보면서 자라왔어요. 그래서 가족한테 바라는 최소한의 선이 확실해요. 아픈 아이를 보고 방문 밖에 서서 걱정만 하는 건 가족 아닌 사람도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럼 어떻게, 무릎이라도
꿇고 빌까요?” 훈민이 충혈된 눈으로 이심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 이러지 마.”
만류하는 정훈의 손을 밀치며 훈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남 일인 것처럼
굴지 말고 같이 빌어보자니까. 우리 탓인 거 같은데.”
“아뇨, 제가 너무 성급했어요. 몇 차례나 시간을 뺏어서 죄송합니다. 편입 절차는 없던 일로 해주세요.”
이심이 가방을 챙기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정훈이 앞으로는 달라지겠다고, 자신이
책임지고 형까지 바꾸어놓겠다며 사정했다. 정훈은 진심으로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그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겠지만 그 모습은 역효과를 냈다. 이심으로
하여금 자라면서 숱하게 보아온 아빠의 행동을, 지키지 못할 약속을 다급하게 남발하던 행태를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 이심은 차분한 어투로 그에게 혹시 나중에라도 로아가 일을 그르쳤다고 자책하지 않도록 잘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현관으로 향하며 이심은 열려 있는 욕실 문 쪽으로 흘긋 시선을 던졌다. 문틈은
한 뼘밖에 열려 있지 않아서 샴푸의 요정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 순간,
어쩐지 앞으로도 샴푸의 요정이 설치된 집에서 살 기회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스쳤다. 그러나
이심은 결심을 무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은 드리고 갈게요, 정훈씨. 훈민씨 걸음걸이가 아직도 불편해 보이시던데요, 전에 얘기했던 한쪽 다리의 부종이 그대로 있는 것 같고요.”
“심각한 문제인가요?”
“철야를 할 정도면 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시간도 길었겠죠. 연령대상 가능성이 높지는 않겠지만 단순히 부은 게 아니라 혈전이 생겼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바우처를 써서 제대로 검사를 받아보라고 하세요.”
이심은 정훈 뒤에서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는 애월에게 인사를 건넨 뒤에 그 집을 빠져나왔다. 약간의 가책을 피할 수 없었지만 최소한 소리와 로아 앞에서 언쟁을 하고 등돌리는 모습을 보이는 일은 면했다는
데 안도했다. 몇 걸음을 디뎠을 때였을까. “선생님!” 하고 부르는 소리의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착각일 거라고
여겼지만 조금 더 커진 외침이 한번 더 들렸다. 이심은 몇 시간 전에 이 집에 도착했을 때 로아의 손을
꼭 잡은 채 “기다렸어요” 하고 말하던 소리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뒤를 돌았다가는, 이층 창가에 서서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돌아보았다가는 결정을 마친 일을 원점으로 되돌리게 될 것만 같았으므로 이심은 더 바삐 앞만 바라보고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