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초입에 최선생은 이심이 아홉 살 난 자기 딸 선민보다 더 열렬하게 어린이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심은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동의하면서도 실상 팀원 모두 마찬가지 아니냐고 반문했다. 갑자기 지급이 늘어난 바우처로 인해 왕진을 예약하는 환자가 폭증했기 때문이었다. 박선생은 금요일인 어린이날부터 이어지는 사흘간의 휴일이 없었다면 진지하게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았을 거라며 투덜거렸다. 월요일 조례 시간에는 팀장의 입에서조차 불만이 나왔다.
“정부가 새출발을 하면서 여든 넘은 노인들한테 선심 한번 쓰는 거야
그렇다 치겠는데, 그걸 칠순으로 내린 건 오버였다고 봐요, 나는.”
“처음에는 차상위 계층 이하만 더 준다더니, 하루아침에 그 말 쏙 들어간 건 괜찮고요?” 최선생이 볼멘소리를
했다. “애당초 취임하자마자 이러는 거 빤하잖아요. 부가지능세
띄우더니만 입 싹 닫고 반대로 가는 거 덮어보려는 거죠. 기업도 기업인데 이제 부자들 상속세랑 증여세는
아예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래요.”
팀장은 충혈된 눈을 비비며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최선생 입에서
나온 ‘부자’라는 말을 제지하지 않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어린이날은 흐렸다. 아침은커녕 점심도 거른 채 침대 안에 널브러져
있다가 오후 네시가 다 되어 겨우 일어난 이심은 여전히 손 하나 까닥할 기운이 없었다. 그러나 라면을
먹고 씻고 나오자 어딘가 나가서 기분 전환을 하고 싶어졌는데, 비용이 들지 않는 방법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칵테일바에는 아마 어린이날 행사 같은 건 없을 거야. 안 그래요?’
별 기대 없이 메시지를 보낸 지 삼십 분쯤 흘렀을까, 모영은 그렇지도
않으니 일단 와보라는 알쏭달쏭한 답을 보내왔다. 혹시 이어지는 말이 있을지 기다려봤지만 따로 소식이
없었으므로 이심은 천천히 외출할 채비를 하며 그달의 남은 생활비를 가늠해보았다.
에르데는 이전에 와본 그곳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왁자한 분위기였다. 실내로
들어서자 이심으로서는 가수나 곡명을 짐작할 수 없는 사이키델릭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어지럼증이 일 정도로 볼륨이 컸다. 그다음에는 오페라가 이어졌다. 밑변이 긴 ㄴ 자 모양의 바의 꼭짓점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다섯 명 중 한 명이 자기가 고른 바그너의 오페라를 들어보라고 으스대며 외쳤으므로, 이심은
그들이 일행이라는 것과 중구난방으로 나오는 곡들이 신청곡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모영은 주문이 밀린
듯 이심에게 눈인사만 건네고 분주하게 움직이다가 음악이 다시 바뀌었을 때 길쭉한 잔에 담긴 투명한 빛깔의 칵테일을 건네며 시그니처 중에 ‘물’이라고 말했다.
“저 사람들이 사는 거예요. 시끄럽게
마시는 대신 내는 거니까 편하게 드세요. 이름은 물이지만 독하니까 천천히요.”
고맙다는 인사조차 필요 없는지 그들은 이심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자기들끼리 잔을 부딪치기 바빴다. 그러다 얇은 칵테일 잔 하나가 깨지자 폭죽이라도 터진 듯 환호성을 질러댔다.
“깨지는 소리 기가 막히네!” 바그너를
논했던 남자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니 이렇게 제대로 된 거 쓰면서 브로큰 차지는 또 왜 이렇게
싼 거야? 아무튼 이 집 오면 정말 거저다 거저야.”
정말 그렇다고, 도대체 이렇게 싼 술을 어디에서 마시겠냐는 말을 반복하며
호탕하게 웃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심은 그제야 그들이 자산가들이리라고 짐작하게 됐다. 이심은 모영의 설명처럼
맑지만 독한 술로 아랫입술을 축이며 그들도 거실 한가운데에 물길이 난 집에서 살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생활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던 그 공간. 실내의 빛을 차단하여 어두운
발코니에서 B타워의 거대한 홀로그램이 내뿜는 빛을 등지고 선 채, 서안은
지난 십 년보다 앞으로의 십 년 동안 세상이 더 많이 바뀔 거라고 단언했다. 선출직 정치인과 관료가, 관료와 기업가들이, 입법부와 사법부가, 공공기관과 이익집단이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던 최소한의 균형마저 기대할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고. 경총이 다시 돌아오면 금이 간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무너질 일만 남았다고 호소했다.
“돌려보낸 서약서를 직장에서 다시 받았을 때, 심이 너도 이미 느꼈을 거야.”
그날 집에 돌아와서 문을 열었을 때, 이심은 그간 더없이 소중한 안식처로
여겨온 자신의 방이 얼마나 좁은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침대에 누워서 낮은 천장을 보자 관 속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서안의 집 또한 터무니없이 느껴졌다.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총이 계획하고 있다는
공포 정치의 밑그림이며, 이심과 엄마의 신분을 바꿀 기회라는 게 도대체 얼마만큼 사실에 입각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고, 서약서를 쓴 탓에 진상을 알아볼 방법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제복을 입은 거구의 기사가 보인 지독하게 비굴한 몸짓이었다. 그
모습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거북해진 이심은 결국 서안의 집에서 먹은 디저트를 몽땅 토해냈다.
그만 독신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느끼면서도 본격적인 절차를 밟는 일은 미루어왔던 이심이 집합가족 편입으로
마음을 굳힌 것은 바로 그날 밤의 일이었다. 실제로 무도회에 참여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서안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더 오래 미적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난해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술잔을 기울이던 이심은 처음으로 참가한 무도회에서 인연을 맺을 가족을 만났다는 행운에
새삼 감사했다. 내일 샴푸의 요정이 있는 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편입 서류에 전자 날인을 하면, 여생을 함께하며 서로를 부양하고 돌보는 의무를 나누어 질 가족이 생기는 것이다. 아마도 그들에게조차 서안에게 들은 것은 말할 수 없겠으나 이제 관처럼 좁은 집에서 지내는 날에는 끝이 보였다.
이심은 반쯤 남은 잔을 들어 그대로 비웠다. 모영의 말대로 평소보다
빨리 취기가 돌았지만 술 자체는 깊은 산의 골짜기에서 떠 온 차디찬 샘물처럼 맑게 느껴졌다. 실내에
평소와 같은 로파이 사운드가 흐른다 싶어 둘러보니 다섯 명의 일행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바그너를
골랐던 남자는 모영에게 새까만 카드를 내민 다음 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칵테일맛에서
초짜 태가 난다고 일렀다. 모영은 조금도 민망해하는 기색 없이 깍듯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그들이 매장에서
빠져나가자 혼이 쑥 빠진 얼굴이 되었다.
“대표 지인들이에요.” 모영이
입모양으로 유추해야 할 만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저 사람들이 한 번씩 이렇게 매상을 올려줘서 에르데라는
랩실이 유지되는 건지, 저 사람들 편하게 마시라고 유지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부자들이란.” 이심은
잠시 자기 입에서 ‘부자’라는 말이 나온 게 얼마만인지 가늠해보았다. “부자면서 맛 볼 줄은 모르네요. 이거 맛있어요. 지금까지 마셔본 것 중에 제일 마음에 들어요.”
“정말요?”
“네. 프로가 만들어준
칵테일 그 자체인데요? 엄청 진한데 맑은 거, 어려운 거
아니에요?”
모영은 헤벌쭉 웃는 얼굴을 보였고, 민망한지 오른 손바닥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 좋냐고 이심이 묻자 그녀는 일하면서 칭찬을 받아본 경험이 워낙 귀했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별로 없을 테니까 지금 이 기분을 잘 기억해둘게요.” 모영이 여전히 미소가 어린 얼굴로 말했다. “여기서는 이번달까지만
일할 것 같거든요.”
“다른 가게로 가려고요? 먼
동네로 가면 서비스 준다고 해도 가기 힘든데.”
“전에 다니던 직장으로 돌아갈 것 같아요.”
“전 직장에서 뭔가 일이 있었다고 했잖아요. 해결이 된 거에요?”
“음, 그 점에 관한 것도
뭐…… 제가 왜 시원하게 말을 못하는지는 아시겠죠?”
“그럼요.” 이심이 허공의
벽을 밀어내는 듯한 손동작을 취하며 말했다. “살살 살아야죠. 저도
찝찝하게 사인해둔 각서가 좀 있어서 잘 알아요.”
모영은 단박에 이해해줘서 고맙다고 하더니 다시금 이심에게 행운을 빈다고 말했다.
“나 결혼하는 거 아니고, 가족만
만드는 거예요. 커플 약정은 안 들어가는데?”
그러자 모영은 사람 일은 모르는 거 아니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알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때마침 입장한 다른 손님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매일 집에 돌아왔을 때 저런 미소를 보는 것도 좋았겠다는 마음이 들었으므로 이심은 물잔을 비우며 소리네와 그들이 사는 집이 가진 장점을
차근차근 꼽아보았다. 그러고 나자 내일의 컨디션을 위해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날 결심이 섰다.
이튿날 오전에 잠에서 깬 이심은 이제 정말 적절한 때가 되었다는 느낌을 감각하며 안도했다. 더 일찍 결정했다면 자칫 메리지 블루와 비슷한 양상을 띤다는 편입 전의 우울감에 시달렸을 것 같았고, 더 늦었다면 무도회에서 맛본 흥미로운 경험의 기회는 없었을 터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를 마친 후에 이심은 지하철에 올랐다. 하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흐릿한 황색이었으며 아직 오월이건만 이미 기나긴 여름이 서둘러 시작된 양 후텁지근한 날씨였다. 이심은 손부채질을 하며 지하철 내의 뉴스 화면에 시선을 던졌다. 혹서기인
칠월부터 전기세가 상향 조정된다고 했고, 커피값 역시 인상을 앞두고 있었다. 복지부에서도 뭔가 또 시끄러운 일이 났는가보군, 하며 선잠이 들었다가
깼을 때였다. 화면에는 위조된 의료 바우처를 사용하는 수법의 경향이 바뀌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심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뉴스의 내용을 곱씹었고, 그러느라
내릴 역을 지나치고 말았다. 다음 역에서 하차한 후에 맞은편의 플랫폼으로 향하지 않고 출구 밖으로 나온
것은 걸으며 어제 있었던 일을 차근히 곱씹어보기 위해서였다.
어제 저녁, 일과가 끝날 즈음 들른 노부부 둘이 사는 집에서 벌어진
상황은 뉴스에서 보도된 수법과 일치했다. 우선 집안이 눈이 침침해질 만큼 어두웠다. 바우처의 QR코드가 읽히는 데 두 차례의 오류가 났으므로 전기세
걱정은 잘 알지만 불을 조금만 더 밝혀달라고 했는데, 마침 노부인이 차가 든 쟁반을 들고 오는 통에
손을 쓸 수 없었다. 할아버지 쪽은 보조기구 없이는 일어나기 힘든 상황이었으므로 이심이 직접 거실 형광등의
조도를 조절하고 왔다. 그사이에 QR코드가 읽힌 듯 리더기
화면은 진찰 가능 모드로 변환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어떤 의심도 없었으므로 이심은 테이블 위에 두었던 리더기의 위치가 바뀌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기억해낼
도리가 없었다. 노부부의 태도가 자연스러웠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 쪽이 자신과 제대로 시선을 맞추지 못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보면 의심을 품는 것 자체가 가혹한 일 같았다.
이심은 잠시 멈춰 서서 재킷을 벗었다. 그러고는 공공 의료 기관 근무자
규정집에서 위조 바우처에 관한 부분을 검색하여 훑어보았다. 바우처가 위조되었거나 중복 사용된 것을 알고도
묵인한 경우에 내려질 징계는 명시되어 있었지만, 부주의에 의해 발견하지 못한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엄중한 주의를 요구한다는 모호한 문구를 보고 이심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밴 땀을 닦았다.
초인종을 누르자 어김없이 들리는 로아와 소리의 상큼한 목소리를 듣고 이심은 한번 더 안도감을 느꼈다. 몇 년쯤 함께 살면서 정말 서로를 깊이 믿을 수 있게 된 이후에는 방금 같은 상황이 닥쳤을 때, 해커들이 파는 위조 바우처를 산 환자를 만난 것인지 아닌지 걱정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의견을 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집안에 들어서자 두 딸을 따라 현관으로 나온 세진이 이심을 향해 컨디션이
괜찮은지부터 물었다.
류머티즘에 우울증까지 앓고 있는 칠십대 환자를 부정 수급자로 의심하면서 걸어오느라 얼굴이 어두워 보일 거라는
말은 할 수 없었으므로 이심은 원래 더위를 탄다고만 답했다. 그러자 로아가 “엄마, 선풍기!” 하며
세진을 올려다보았다. 세진은 알았다며 2층으로 향했다.
“소리야, 잘 있었니?”
“네, 선생님. 동생이랑 같이 오늘 기다렸어요.” 소리는 로아의 손을 꼭 잡고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고 로아는 “기다렸어요!” 하고 소리의 말을
따라하며 이심의 다리에 매달렸다. 로아의 귓가에는 토끼 모양 머리핀이 꽂혀 있었다.
아이들을 따라간 부엌에서는 누긋하고 맛있는 냄새가 났다. 호박을 썰던
정훈이 이심을 보고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지난번 만남에서 그는 자기 형제들이 만든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호언했지만 식사 준비를 지휘하고 있는 사람은 이번 역시 애월이었다. 능숙한 손길로 밀가루
반죽을 매만지던 애월은 “선생님, 칼국수 좋아하세요?” 하고 묻더니, 훈민 쪽은 돌아보지 않고도 안다는 듯 메이드 만지작거리지
말고 국물에서 다시마를 건지라고 주문했다.
소리가 “할머니, 선생님은
더우시대요” 하고 전하자, 애월은 망설이지 않고 “그럼 칼국수를 비빔으로 해드려야겠네. 정훈이는 그거 썰면 고추장 좀
꺼내 오고”라고 말했다.
“괜찮아요.” 이심이 손사래를
쳤다. “괜히 저 때문에 한 종류 더 안 만드셔도 돼요.”
“어머나, 괜히라니요. 선생님이랑 먹으려고 만드는 건데. 나 왕년에 요리 가르쳤던 거 얘기했죠? 비빔국수 양념 같은 거는 금방 뚝딱뚝딱이에요.”
로아는 애월을 따라 ‘뚝딱뚝딱’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점점 더 신이 나는지 쿵쿵 뛰기 시작하자 소리가 양팔로 로아의 어깨를 감싸더니 거실에
가서 놀자며 데리고 갔다. 마침 선풍기를 가지고 온 세진을 향해 로아가 뛰어갔고, 소리는 선풍기 앞으로 오라며 이심을 향해 손짓했다.
소파에 걸터앉아 바람을 쐬는 동안, 이심은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선풍기의 날개가 돌아가는 나직한 소음 너머로 애월이 리드미컬하게 칼질하는 소리와 식기가 부딪치며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로아와 소리가 까르르 웃었고, 이심은 앞으로
두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전보다 더 웃을 일이 많아지리라는 기대감을 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로아가 이심의 어깨에 작은 손을 짚더니 “뚝딱뚝딱 다 됐어요!” 하며 안겼다.
여섯 가족이 사는 집에서 쓰는 냄비와 양푼의 크기는 이심의 집에 있는 것들의 열 배쯤은 되어 보였다. 무럭무럭 김이 오르는 칼국수와 양푼 가득한 비빔 칼국수 사이에 놓인 겉절이는 양배추와 양파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배춧값이 좀 올랐어야지. 그래도
아삭아삭한 맛으로 드셔보세요.” 애월이 맨 먼저 이심의 그릇에 국수를 덜어주며 말했다. “옛날에는 참 이런 데다 바지락이랑 동죽 같은 거 팍팍 넣고 그랬는데.”
“할머니 바지락이 뭐야?” 로아가
물었다.
“로아야 조개는 들어봤어?” 이심이
되묻자 로아가 고개를 저었다. “소리는? 소리도 조개 먹어본
적 없어?”
“책에서는 봤어요.” 소리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바다에 사는 연체동물이고 껍질이 있어요.
지금은 바다에도 조금밖에 안 남았대요.”
“조개류가 연체동물이었어? 실컷
먹고 살 때는 모르다가 못 사먹게 되고 나서 알았네.” 세진이 가볍게 한숨을 쉬자 애월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했다. “그래서 더 정성으로 끓였어요, 선생님 입맛에는
좀 맞으세요?”
“올해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어요.
애월씨 한 분만 계셔도 이 집에 들어와서 살아야겠다 싶은데요.”
“매일 요리하는데 이런 극찬은 또 처음 받아보네. 새 가족이 최고네요.” 애월이 활짝 웃었다.
정훈은 로아에게 꼭꼭 씹어서 천천히 먹어야 한다고 잔소리를 한 다음 팔꿈치로 훈민의 팔을 툭 건드리며 “형은 앞으로 선생님을 보고 많이 배우면 되겠다”라고 했다. 훈민은 멍한 눈으로 동생 쪽을 보더니 대답 대신 연이어 하품을 했다. 그러고는
이심을 바라보더니 감사 준비로 정신이 없어서 어제 새벽까지 야근을 하고 왔다며 양해를 구했다. 훈민은
식사 내내 잠을 쫒으려는 듯 두 눈에 힘을 주며 끔뻑거렸고, 식사를 마치자마자 오랜만에 한잔해야겠다며
싱크대 앞으로 향했다. 한잔한다는 말에 이심은 으레 술을 떠올렸는데 형제가 일컫는 것은 커피였다.
“그거 드시면 오늘밤에도 제대로 못 주무시는 거 아니에요?” 이심이 묻자 훈민은 어떻게 아느냐는 듯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이심을 돌아보았다. “설문지에서 본 거죠. 아무래도 하는 일 때문에 건강이랑 체질 칸은
꼼꼼하게 보니까요. 특이사항에 두 분 다 카페인에 민감하다고 적으셨잖아요.”
훈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늘 같은 날 오랜만에 카페인 하이 좀
느껴보는 거죠, 뭐” 하고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한번 더
하품을 했다.
커피 한 잔을 정훈과 나누어 마신 후에 훈민은 취기가 오른 사람처럼 상기되어 그때까지 본 적 없는 적극적인 태도로
대화에 참여했다. 이심이 “오면서 뉴스를 듣다가 졸았는데
복지부에서 또 뭔가 터졌나보던데요” 하고 지나치듯 언급했을 때에도 그가 맨 먼저 입을 열었다.
“일타 쌍피죠 뭐. 경총네
집안 비리는 그 뉴스로 덮으면서, 복지부 흔들어서 예산도 깎고.”
“도대체 뭘 먹고 그렇게 부지런할까?”
세진이 맞장구쳤다. “이러다가는 아주 복지부랑 기재부까지 다 없애겠어.”
훈민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애월은 둘의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잘은 모르지만, 그렇다고 복지부에 비리가 있는 걸 그냥 둘 수는 없는 거 아니야?”
“비리가 진짜 있다면 그렇죠.” 세진이
대꾸했다. “애월씨. 전에도 얘기했지만, 경총 말은 일단 반대로 들어야 된다니까요. 기업한테 부가지능세를
걷겠습니다! 하면 말만 그렇지 실상은 기업들 법인세 깎아주겠구나, 하고요. 경총 일가야말로 사돈의 팔촌까지 얼마나 화려하게 해먹고 있는데요.”
“민영화로 돌린 회사마다 한 자리씩 싹 차지하고 있다고 하잖아요. 사돈의 팔촌에 팔촌까지.” 훈민이 이어받듯 말했다. “우총이고 신찬석이고 털어보면 먼지 안 날 사람이 어디있냐고들 그러지만, 경총네는
아예 차원이 다르다니까요. 아니, 이번 건만 해도 사실 복지부는……”
“아이고, 알았어. 다 썩었다는 얘기잖아.” 애월이 훈민의 말을 자르며 나섰다. “이제 신찬석이도 흐지부지됐겠다, 어차피 경 아니면 우잖아. 다 썩은 거면 그나마 속 터지는 우보다야 경이 인심이라도 좋지 뭐. 집합가족, 이것도 경이 밀어붙여서 인정된 거 아니야? 왕진 활성화시킨 것도
그렇고.”
세진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의료보험을 박살내는 대신 생색낼 게
필요했으니까요” 하고 운을 뗀 후 더 할 말이 있는 눈치였으나 거실에 있는 로아가 엄마를 부르는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정훈이 화제 전환을 위한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발랄한 어투로 “커피 한잔 더 하실 분 계세요?”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달이면 원둣값도 더 오른다니까, 이번달에 많이 마셔두자고요.”
훈민은 그러는 정훈을 빤히 바라보더니 “아니, 뭐 그렇게 오버를 해. 밖에서도 아니고 가족들끼리 모인 데서 이
정도 얘기도 그렇게 겁이 나냐?” 하고 정훈의 팔을 툭 건드렸다.
“나야 뭐, 원래 중립이잖아.” 정훈이 변명하는 듯한 어투로 대꾸했다.
“이 맥락에서 웬 중립.”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정훈을 바라보던 훈민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정훈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훈민을 등지고 서서 이심에게 커피를 더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눈짓으로 훈민 쪽을 가리키며 우리 형이 또 시작이네요, 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의 흐름을 보면 분명 앞으로 곧잘 정훈과 이런 눈짓을 주고받게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에게 공감할 수 없었다. 정훈의 모습에서 최선생의
한마디 한마디에도 벌벌 떠는 팀장의 모습이 겹쳐 보였던 것이다. 이심은 정훈에게 의례적인 미소를 지으며
빈 커피잔을 건넸다.
훈민이 자기도 더 달라는 듯 빈 잔을 흔들어 보였다. “이번에도 재취임하자마자
경총이 갑자기 바우처 뿌려서 고생은 선생님들이 다 하셨죠?”
“왜 아니에요, 바빠 죽는
줄 알았어요.” 이심이 웃었다. “그걸 빌미로 알래스카 모델을
또 파는데 기가 막혀서 정말.”
“애당초 알래스카 모델이라는 게 말이 안 되죠. 거기에는 이름이 뭐더라?” 훈민이 이마를 긁적이며 기억을 더듬었다. “아무튼 유전이 크게 있었다면서요. 거기서 나온 돈으로 펀드도 만들고
배당금도 주는 거잖아요.”
“그러니까요. 제 동료
중에 최선생님이라고 지금도 부자라는 말을 눈치 안 보고 쓰시는 용자가 계신데, 그분은 그러세요. 알래스카 모델로 이룬 건 알래스카만큼 춥게 사는 것밖에는 없다고요. 그런데
그 유전 이름이 정말 뭐였죠? 네 글자였던 것 같은데.”
“오, 선생님도 아시는군요.” 훈민이 싱긋 웃었다. “사실 제가 세진씨랑 안면을 트게 된 것도, 이 얘기에 마음이 맞아서였거든요.”
“그래, 무도회에서 겉돌던
형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었지.” 커피를 만들던 정훈이 알은체를 하며 애월을 향해 동의를 구하는 눈짓을
보냈다. “명절마다 알래스카 쪽으로 절이라도 올려야겠어요. 우리
가족이 이렇게 모이는 데 큰일을 해줬으니까.”
훈민은 도대체 알래스카 쪽이면 방향이 어떻게 되는 거냐고 거실 쪽과 반대쪽을 두리번거리더니 정훈을 도와서 커피를
날라 왔다. 이심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문득 이 자리에 엄마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떠올려보았다. 엄마는 메이드로 검색해보지 않고도 단박에 유전의 이름을 말해주었을 터였다. 아마도
세진과 척척 죽이 맞아서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정훈이 건넨 커피는 엷고 씁쓸했다. 이심은 엄마가 자기 또래였을 때, 빚에 얽매여 꾸역꾸역 가정을 지켰던 그때에도 무도회가 열리고 집합가족이 흔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그랬다면 엄마는 지금 나보다 더 잘해냈을지도 모르는데. 이심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훈민을 향해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시면 오늘밤에 고생하지 않겠냐고 주의를 주는 애월을
보면서는 지난 시대를 탓하기만 할 수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애월은 엄마와 비슷한 연배이지만 이 자리에
이렇게 함께 있으니까. 타고나는 시대를 고를 수는 없고, 시대의
보편성을 뛰어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러나 엄마도 보편성 안에 갇힌 삶에 균열을 내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잠시 뒤에 로아가 낮잠을 잔다며 세진이 돌아오자 훈민은 세진에게 커피를 건네면서 최대한 음미하라고 말했다.
“이제 커피 아니고 금피가 될 거라잖아. 세진씨, 집에서 일할 때도 커피 참아야 될지도 몰라.”
“아예 나 죽을 때까지 총리는 계속 경총이라고 하지 왜.” 세진이 오만상을 썼다.
정훈은 이심의 눈치를 살피며 둘에게 좀 밝은 화제가 없느냐고 눈치를 주었지만 이심은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다. 정훈을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염세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세진과 훈민의 모습을 보면서 묘한 편안함을 맛보았기 때문이었다. 어색함을 견디며 앞으로 서로에게 적응해야 하는 관계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같은 뉴스를 보며 함께 한숨을 쉬어왔던 사람들처럼 느꼈던 것이다. 세진은 뜨거운 커피를 식혀 마시려는 듯 연신 커피잔에 입김을 불어넣고 있었고, 이심은 식탁 앞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찬찬히 바라보며 한번 더 결심을 다졌다. 그녀가 커피를 마시고 나면, 전자 서류에 서명을 해야겠다고. 편입 절차를 마친 뒤에는 세진과 훈민에게 함께 부담하여 뉴스를 구독하자고 이야기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들은 설령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가족에는 미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 틀림없다. 이심은 그렇게 확신했다. 위층에서 다급히 뛰어내려온 소리가 “엄마, 로아가 이상해요!” 하고 외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