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엄마가 서약서를 내밀었던 그날 새벽에 이심은 종아리에 쥐가
나서 깬 후 한참을 뒤척였다. 종아리를 마사지한 뒤에도 좀처럼 다시 잠들지 못했고, 결국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다. 기상 시각을 알리며 메이드
위로 돋아난 잔디는 누렇다못해 끄트머리에 붉은 기운을 띠며 시들어가는 모습이었다. 곧장 몸을 일으키기는커녕
화살표 게임을 할 기운도 없었으므로 수면의 질을 반영하는 잔디의 상태가 전에 없이 나쁠 만했다. 뉴스
프레임을 띄운 후에는 뉴스 역시 역대급이다 싶어 헛웃음이 났다.
“이 법이 시행되면서 자산가들의 삶에 다양한 제약이 가해졌죠.” 아나운서는 상기된 어조로 말했다. “시행 초반에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와 인플루언서들의 반발도 거셌는데요. 본격적으로 시행된 지 십 년을 맞은 사회 갈등 조장 방지법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 인터뷰 대상은 십 년 전만 해도 소위 ‘카푸어’였다고 밝힌 삼십대 직장인이었다. 신용불량자 신세까지 갔던 자신이
새 인생을 살게 된 데는 방지법 등장 후 바뀐 사회 분위기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그는 고백했다. 어느
자영업자는 동경하던 연예인과 유튜버에 이끌린 모방 소비로 점철된 이십대를 보냈다고 밝혔다. 성형수술까지
감행한 뒤에 부작용으로 인해 재수술을 거듭해야 했다며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은 자연스레 방지법 도입 이후 성형 산업과 명품 시장의 규모가 축소되었음을
나타내는 통계로 이어졌다.
관찰 예능 프로그램의 폐지가 반가웠다는 어느 중학교 교장의 발언에 이심은 의대 재학 시절, 한 내과 교수가 수업중에 비슷한 논지로 열변을 토했던 일을 떠올렸다. 교장은
곧이어 자기 학교의 교훈이 ‘분수에 맞게 살자’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형언할 수 없는 께름칙함을 느껴 뉴스 프레임을 닫을까 망설이다 음성만 줄인 후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출근길 지하철 내부의 화면에서도 엇비슷한 논조의 보도는 계속 이어졌다. SNS 통제에 대한 불만과 과중한 벌금으로 인한 반발에 대해서는 맨 마지막에 삼십 초 남짓 짧게 언급될 뿐이었다. 자막으로 ‘지금까지 여의도 B타워에서
전해드렸습니다’라는 앵커의 멘트가 떠오르며 뉴스가 끝났을 때, 이심은
다시 한번 ‘분수에 맞게 살자’는 교훈을 소개하던 교장의
얼굴이 떠올라서 도리질 쳤다. 출근하자마자 최선생을 따라 탕비실로 향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항복할게요. 최선생님
말이 맞았어요.” 이심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공영 뉴스만
보고 살면 진짜 바보가 될 것 같아요.”
“아이 뭐, 항복까지 하고
그래. 항복은 부담스러워.” 최선생이 웃었다. “어쨌든 좋지, 그래도 뉴스 채널 하나 추가한다고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고.”
최선생이 충혈된 눈을 문지르며 머그잔을 들고 일어나자 이심은 앉아서 쉬라는 손짓을 하고 그녀의 머그잔에 커피를
따라 건넸다.
“전에는 일단 뉴스만 제대로 들어도 사는 게 달라진다면서요.”
“그럼. 집에 바퀴벌레
한 마리만 나와도 사는 게 달라지잖아.” 최선생이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말했다. “잡으면 일단 한숨 돌리지만, 마음이 찝찝하잖아. 바퀴는 한 마리만 봐도 이미 집에 수백 수천 마리가 있다니 말이야. 물론
그냥 바퀴벌레 소굴에서 사는 것보다야 백배 낫지만.”
탕비실로 들어온 팀장이 뒷부분만 듣고 멈칫거렸으므로 이심은 벌레 얘기는 예시일 뿐이라고 안심시켰다.
“팀장님, 나라꼴이 아무리
이 지경이어도 설마 공공 의료 센터 탕비실에서 벌레가 나오게 두겠어요?” 최선생이 웃었다. “제 말은, 부자들이 내 눈앞에 안 보인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닌데, 전 국민한테 눈 가리고 아웅 하라고 만든 법이 웃긴다는 거예요. 이건
뭐 바퀴벌레 득시글거리는 집에서 눈만 꼭 감고 사는 꼴이잖아요.”
팀장은 애매한 미소를 짓더니 자기는 못 들은 걸로 하겠다며 자리를 떴다. 최선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부자와 자산가의 사전적 의미는 다르지 않다고, 그러니 방지법을 핑계로 부자라는
단어를 금기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코미디라고 말했다. 이심은 맞장구를 쳤지만 점잖은 자리에서 욕설을
삼가는 것처럼 직장에서 ‘부자’라는 단어를 말하는 일에 저항감이
든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최선생은 그런 이심의 어깨를 부드럽게 건드렸다.
“긴장할 거 없어. 내가
보는 뉴스도 이름이 게릴라라 그렇지 내용은 뭐, 그냥 상식선이라고.”
탕비실에서 나오는데 마침 엄마가 저녁을 먹고 가라는 연락을 해오자 이심은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본가에 가서는 최선생이 자신에게 그랬듯이 게릴라 뉴스 채널을 홍보했다. 우선은
탐사보도의 질이 좋아 보인다는 점을 피력했다. 또 다양한 국내외 이슈에 관해 '외신 반응'이라며 뭉뚱그려 편집하지 않고, 각 국가마다 신뢰도가 높은 언론 기사의 전문을 한데 모아 비교해볼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것도 다 음성 지원 된대.” 이심은
말을 잇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렇게 반응이 없어? 엄마
무슨 고민 있어?”
엄마는 쓴웃음을 짓더니 “너는 마흔도 안 된 애가 벌써 깜빡깜빡하나보다. 나도 그 채널 한참 구독했었잖아. 전기세 때문에 여유가 없어지면서
끊어서 그렇지” 하고 해동된 피자를 식탁으로 가지고 왔다.
피자는 이탈리아와 미국식의 중간쯤에서 타협을 본 듯한 맛이 났다. 이심의
말에 엄마도 동의하더니 게릴라 뉴스도 그런 식이었다고 말했다.
“어찌됐든 중간은 갔거든. 너희
동료 말대로 그거 하나 본다고 능사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기본 이상은 됐으니까.”
“그러니까, 엄마 계정
살려서 나랑 같이 보면 되잖아. 보안 때문에 싸게 보려면 가족 결합밖에는 방법이 없다면서?”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이번에
관리비가 올라서 아껴야 할 것 같아.”
“그럼 내가 좀더 낼게.”
“이번에 건강 검진 결과 보니까 추가로 당뇨 약도 먹어야 되는 모양이고.”
이심은 먹던 피자 조각을 접시에 내려놓고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다. 입안에
든 것을 꿀꺽 삼킨 뒤에 한번 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엄마 검진 결과를 내가 몇 년째 체크하고 있는데
콜레스테롤이면 모를까, 당수치가 그새 약을 먹을 만큼 올랐다고? 그리고
당뇨 약을 먹을 상황인데 지금 나랑 이런 걸 먹고 있다고?”
“나 말고, 너희 아빠.”
그제야 이심은 엄마가 어째서 자신이 오는 시간에 맞춰서 아빠에게 산책을 시켰는지 짐작했다. 만일 지금 아빠와 마주했더라면 식습관을 고쳐야 한다고 몇 번을 말했느냐고 화를 냈을 것이다. 빤했다. 아빠는 그럼 병들어 죽게 내버려두라고 어깃장을 놓았을 것이다. 이심은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매달 추가될
약값을 계산해보면 뉴스 구독은 불가능하리라는 사실도 자명했다. 두 사람은 조용히 식사를 마쳤다. 엄마는 아빠가 귀가하기 전에 돌아가려던 이심을 붙잡더니 종이 서류를 가지고 왔다.
“심아, 아픈 사람이 한
명 더 있어.”
이심에게 있어 누군가 앓는 것은 매일 접하는 사건이었다. 날마다 겪는
동안 심신의 에너지가 고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정 부분 무뎌져야만 했고,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무뎌져
기계적으로 임하지는 않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 서류를 쥔 엄마의 손이 떨리는 모습을 본 순간, 이심은 평소 유지해왔던 심리적 방어선이 뭉그러지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엄마가 아픈 게 아니라면 그 누가 어떤 병을 앓고 있더라도 관여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든 것이다. 냉정하게 따져본다면 이 세상에서 현재 자신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사람은 엄마 외에는 달리 없지 않은가 싶기도
했다.
“너는 기억을 못할 수 있어.” 엄마가
물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엄마 옛날 동창 중에 서안이라고, 너
어릴 때 몇 번 만났었는데……”
“알아, 그 아저씨.”
“기억하는구나.”
“잊어버릴 수가 없지.”
엄마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한숨을 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어디가
아픈지는 말을 안 하는데 상태가 좀 심각한가봐. 의사 여럿한테 보였다는데 마지막으로 네가 한 번 봐줄
수 없겠느냐고 그러네. 어릴 때부터 지병이 있었고, 성격이
워낙 침착해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겁낼 사람이 아니거든. 아무래도 오래 못 살 병이라도 걸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있어야지. 그런 거라면 아예 모른 체할 수는 없겠다 싶어서 말이야.”
이심은 언젠가 “심이가 우리 딸이었으면 좋겠다” 하고 자기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서안의 얼굴을, 그가 엄마를
바라보던 눈빛을 떠올렸다. 두 사람이 지금까지 만남을 지속해왔는지 이따금 안부만 물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여러 의사를 골라 진단을 받아볼 수 있었다는 것은 자산가 위치라는 방증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라지 못할 혜택을 이미 받고 있었으므로 이심은 엄마의 부탁을 거절하는 데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네가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여기에 서명을 해야 한다고
하던데……”
서약서를 내미는 엄마의 손을 무르며 이심은 자신의 공공의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알잖아. 지금 여기서 엄마가 아프다면 내가 봐줄 수 있어. 우리 둘만 입 닫으면 되니까. 그거 외에 다른 건 다 안 돼. 모르는 사람처럼 왜 그래?”
“그건 그 사람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대, 심아.”
“그럼 먼저 해결하고 나서 연락을 하라고 해.”
확실하게 선을 그었건만 서약서는 이틀 후에 팀장의 손에 들린 채 다시 이심 앞으로 돌아왔다. 최대한 협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심지어 오늘 진료 일정을 조정해두었으니
바로 출발하면 된다는 말까지 덧붙이는 팀장을 보며 이심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우리 일에도 예외라는 게 있군요,
팀장님.”
“그런 거 없어요.” 팀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냥, 가끔 윗선에서 특별한
이유에 한해 허용하는 일이 있으면 신속하게 처리가 되기도 하는 거, 그뿐이에요. 어디 안 그런 조직이 있답니까?”
“보통 그런 걸 가지고 예외라고 할 걸요.”
“이선생, 말뜻을 엄밀하게
따지는 건 나중에 메이드에서 검색을 해보든가 하시고, 일단은 서둘러요.
십오분 후에 건물 앞으로 차를 보낸다고 하니까 미리 서약서도 챙겨두고요.”
서약서의 첫 장에는 만남에 앞서 지참하고 있는 통신 기기 일체를 맡긴다는 항목을 시작으로 촬영 및 녹음을 엄금하며, 오늘 보고 들은 내용을 온라인상에 게시하는 행위를 금지한다는 조항이 적혀 있었다. 그러고도 부족한지 그밖에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을 촉발할 수 있는 편향된 정보를 임의로 유포할 경우 사회 갈등
조장 방지법에 의거하여 혼란 요소의 확산 방지와 봉합을 위한 비용 일체를 부담한다는 내용도 이어졌다. 남에게
전해들었다면 설마 방지법으로 그렇게까지 단속하겠느냐며 웃어넘겼을 일이었다. 이심은 잠시 서류를 바라보고
있다가 최소한의 방비를 위해 메이드의 프로텍트 기능을 최대치로 올렸다.
공공 의료 센터 입구에는 독일제 세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거리에서
십여 년 만에 처음 보는 고급 차종보다 더 생경한 것은 차 안에서 걸어나오는 검은 제복을 입은 기사였다. 기사는
족히 2m가 넘어 보였다. 이심을 발견하자마자 직각에 가깝게
허리를 굽힌 뒤 구부정한 자세로 달려온 그는 한 손에 든 투명한 보관함을 열면서 메이드를 그 안에 넣어달라고 했다. 요청보다는 애걸에 가까운 어투였다.
“차를 타기 전부터 그렇게까지 해야 된다고요?”
“염치없지만,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의 홍채를 스캔해야만 열리니까 누가 건드릴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자신의 체구로 상대가 위압감을 느끼는 일이 없도록 숨소리 하나까지도 통제하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거대한 어깨를 옹송그린 채 차문을 열어주었으며 출발을 알리는 목소리는 간드러진 느낌마저 주었다. 이동하는 동안 불편한 점은 말해달라고 했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진의를
알지 못하는 만남을 앞둔 상황만 아니라면 잠이 들었을 것만 같이 차체는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사십 분가량 후에 어느 건물의 지하 주차장에서 내린 이심은 기사의 안내에 따라 주차장에서 곧장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잡아 T 버튼을 누른 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면
된다고, 내리고 소독을 마치고 나면 물길을 따라 가라고 알렸다.
“소독이요?”
이심의 질문과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기 시작하여 허리 굽혀 인사하는 기사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졌다. 엘리베이터 내부 어디에도 현재 층을 표기하는 패널이 보이지 없었는데 이심은 두 귀가 먹먹해지고서야 그 점을
깨달았다. 어리둥절한 상황을 거듭 접하다보니 놀랄 일은 더 남지 않은 것 같았지만, 문이 열리자마자 정수리부터 빠짐없이 전신에 분사되는 소독제의 세례를 받자 의견을 수정해야 했다. 미스트 타입의 소독제는 차가웠다. 부연 미스트가 걷히고 나자 한
발짝 앞으로 있는 두꺼운 유리문이 좌우로 열렸다.
몇 층인지 알 수 없는 실내는 여느 건물의 두 개 층을 넘을 만큼 층고가 높았고, 텅 비어 있었다. 가구 하나, 오브제
하나 두지 않은 널따란 공간의 바닥 한가운데에 어른의 주먹 정도의 깊이로 파인 홈을 따라 물이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중앙을 가로질러 우측으로 꺾인 물길을 따라 걷자 널따란 방의 문이 열렸다. 얼룩
한 점 없는 새하얀 벽으로 감싸인 공간에 원목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가구의 전부인 그곳도 방금 전에 지나온 공간만큼이나 살풍경했다. 테이블 한가운데에는 한 손에 다 쥐어지지 않을 정도의 생화가 꽂힌 꽃병이 놓여 있었는데, 투명하고 윤기가 도는 꽃부터 안개꽃보다 더 자잘한 꽃까지 오직 새하얀 빛깔의 꽃만 가득했으므로 신경이 곤두섰다. 오지 않는 게 나았을까. 이심이 그런 생각을 하며 가벼이 한숨을
쉬는데 등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이게 얼마 만이야.” 서안이
이심의 손을 잡았다. “네가 이렇게 컸구나. 심아, 잘 왔다. 정말 잘 와줬어.”
“아저씨는 그때랑 달라진 점이 별로 없으신 것 같네요.” 이심이 말했다.
“아무렴 그럴까.” 서안이
직접 이심의 의자를 빼주며 말했다. “립서비스까지 하는 거 보니까 우리 영주 딸이 진짜로 어른이 됐구나.”
이심의 말에는 어느 정도 인사치레가 섞이기는 했지만 립서비스의 비중은 그리 높지 않았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서안의 얼굴에서 보이는 노화의 흔적은 고작 눈가와 콧잔등에 흐릿한 선이 몇 줄 더해진 정도였던
것이다. 새까맣고 윤기가 흐르는 머리칼 하며 곧은 자세까지 그는 엄마와 같은 육십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어떤 특별한 시술이나 메이크업을 받은 것인지 그는 더이상 백반증을 앓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얼굴에도, 목이나 손 어디에도 희게 색소가
빠진 자국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점심에 뭐가 좋을지 몰라서 일단 대기시켰는데 요즘 뭘 즐겨 먹니? 후식은 너 어릴 때 좋아하던 거로 준비했는데.”
“뭐든 되는 건가보죠?” 이심이
웃었다. “식사를 하실 거였으면 엄마를 부르시지 그러셨어요. 저
여기 서약서까지 쓰고 왔어요. 용건부터 얘기하세요.”
“그래, 그러자. 이것 참 어디서부터 얘기하는 게 좋을지……”
“저 그냥 발품 팔아서 왕진 도는 일개미예요. 그건 아시고 부르신 거죠?”
“가정의학과 전문에 내과랑 피부과,
정신의학과까지 어느 정도는 커버한다는 얘기는 들었지.” 서안이 미소 지었다.
“DNA 검토까지 마친 진단명이 뒤집힐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도 아실
테고요.”
“그래. 지금 기술로는
진단한 병명이 뒤집히는 일은 거의 없다지. 사람 인생은 병 때문에 얼마든지 뒤집히기도 하는데 말이야.” 서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 인생은 팬데믹 때문에 뒤집혔거든. 갖은 공을 다 들여서 펜션을 열자마자 그 사달이 났으니.”
그 말을 듣자 이심은 녹색 페인트가 묻은 셔츠를 입고 있던 서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볕이 좋은 오후에 엄마를 따라 글램핑장에 바비큐를 하러 갔을 때의 일이었다.
엄마의 동창 서너 가족이 모인 자리였는데 제일 늦게 나타난 사람이 서안이었다. 그는 이심에게
비눗방울을 총처럼 쏠 수 있는 장난감을 선물했다. 그의 셔츠에 묻은 페인트 자국에 관해 묻자 “아저씨는 요새 집을 짓고 있어. 다 지으면 심이도 엄마랑 놀러올래?” 하던 일도 기억났다. 엄마에게 달려가 언제 갈 수 있느냐고 묻자
분명히 말을 들었음에도 못 들은 척하는 엄마의 모습이, 재차 졸라도 평소와 달리 대답을 미루며 아리송한
미소만 짓는 모습이 무척이나 생경했기 때문이다.
“아저씨도 그때는 여러모로 힘드셨겠네요.”
서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나마 당장 일할 데가 있었어서 다행이었다고 했다. 그의
동생이 당시 배달 대행 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일은 당시에 일손이 달려서 허덕이는 몇 안 되는 분야였으니 당연히
나도 도왔지. 사는 세계가 달라지더구나. 아예 뒤집혔다는
게 맞을 거야. 펜션 시장을 조사하느라 부지런히 여행 다니고 오픈을 준비하던 때는 내가 남들보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사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았어.”
그의 동생이 연 회사는 원동기 면허만 있다면 누구에게나 일을 주었다고 했다. 한창
배달원이 부족하던 시기에는 급한 불을 꺼야 하는 이들에게 몇백만원씩 가불까지 해주면서 인력을 확보했다. 대출도
마이너스 통장도 아니고 가불이라니. 사어로 여기던 단어가 그 세계에서는 흔히 쓰였다. 폭우 속에도 오토바이를 타고 빗길을 달리는 일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위기에 몰린 이들도, 지독하리만큼 성실하게 일하는 가장도 셀 수 없이 보았다. 한편으로는
가불받은 만큼 일하고 나면 더 많은 가불을 해주는 곳으로 옮기며 도박으로 한탕을 노리는 양아치들이 발에 채였다.
일이 끊긴 예체능계 프리랜서와 지망생들, 사업이 망한 자영업자들의 사연도 물릴 만큼 들었다.
어쨌든 그때의 경험으로 사람을 부리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에는 꽤 잔뼈가 굵어졌다고 서안은 말했다. 말을 마친 그가 상체를 기대고 있던 테이블에서 몸을 떼자 꽃병에서 하얀 꽃잎 하나가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여기에 면접을 보러 온 거라는 말씀이세요?”
“그건 식사하면서 마저 얘기했으면 하는데.”
이심은 고개를 저었다. “저 메이드도 뺏기고 강제로 소독까지 당했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밥이 잘 넘어가겠어요?”
“그래, 왜 아니겠니. 면목이 없다. 이 건물 규정이라는 게 참……”
서안은 대신 목이라도 축이고 가라며 테이블을 두드렸고 그러자 아까의 기사보다는 조금 더 밝은 빛의 제복을 입은
남녀가 차와 디저트를 가지고 들어왔다. 서안이 말한 대로 이심이 어릴 적에 즐겨 먹던 것과 꼭 같은
형태의 와플 위에는 크기와 빛깔이 제각각인 베리가 과시적으로 가득 얹혀 있었다.
이심은 잠시 망설이다 가장 큼직한 딸기 한 알을 입에 넣었다. 과육이
입천장과 혀 사이에서 으스러지며 달콤한 즙이 퍼지는 동안 서안이 제안할 만한 일자리를 가늠해보았다. 어느
자산가가 주치의를 구하는 일을 서안에게 의뢰한 것일까? 하지만 그처럼 계층 이동을 가능하게 할 만한
경력을 자신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성적에서 밀려서가 아니라 영리 병원에서 무급 인턴 기간을 버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지만, 그 점을 굳이 피력하며 새로 시작해보고 싶은가 하면 답하기가 애매했다. 이심은 포크를 들어 디저트 한 입을 맛보고 찻잔을 들었다. 제복의
남녀는 그제야 물러났다. 두 사람 모두 무중력 상태에라도 있는 것처럼 발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였다.
방안에 다시 둘이 남자 서안은 차로 몸이 좀 데워졌으면 발코니로 나가서 마저 얘기하자고 권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손끝을 벽에 대자 새하얀 벽이 미닫이문처럼 부드럽게 열렸다.
발코니 공간은 조명을 켜지 않은데다 널찍한 어닝 아래로 커튼처럼 불투명한 막이 바닥까지 내려와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벽으로 된 문이 닫히고 나자 마주선 서안의 표정마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두워졌고, 이심은 두려움보다는 피로감을 더 크게 느꼈다.
“제가 지금 메이드를 착용하고 있었으면 심박수 이상으로 벌써 몇 군데
긴급 알림이 울렸겠네요. 여기 불이라도 좀 켜주세요.”
“심아, 불을 켜기 힘든
이유가……” 서안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시간을 벌더니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자. 방문자가 오면 위치 정보를 숨기는 게 규정이지만 너를 믿으니까.”
서안이 직접 어닝 아래 늘어진 막을 걷기 시작하자 곧장 텁텁한 밤바람이 느껴졌다. 이심은 반짝이는 직육면체를 무수히 배열해놓은 듯 휘황한 도심의 야경을 높은 층에서 내려다보는 게 얼마만의 일인지
기억을 더듬어보았는데 못해도 십 년이 넘었다는 사실만 가늠할 수 있을 뿐이었다. 어찌됐든 얼마 만인지, 몇 층에서 보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숱한 빌딩 사이의 몇몇 건물을 통해 이곳이 여의도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청백색 반구형 지붕은 국회의사당, 그 옆으로
벽면에 뉴스를 띄운 건물은 여의도 B타워인 게 분명했다. 유일한
공영 방송국이 위치한 건물이자 이십층 빌딩의 벽면 양쪽을 홀로그램 프레임으로 사용하여 뉴스를 재생시켜, 마치
거대한 브라운관과도 같다는 B타워. 그 건물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볼 일이 있으리라고 이심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원래도 그랬지만 뉴스를 이렇게 크게 보니까 울렁거리네요.” 이심이 말했다. “저 같아도 밖이 안 보이게 싸둘 것 같아요.”
“심아.” 서안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진지하게 들어줬으면 한다.”
“말씀하세요.”
“나는 이 구역으로 오면서 가족들을 다 버리고 왔어. 후회한다는 건 아니야. 그럴 만했거든. 아쉬운 건 영주도 데려올 수 없었다는 거지.”
“우리 엄마하고 아저씨는 가족이 아니니까요.”
“그래. 하지만 나는 영주를
잊은 적이 없어. 겨우 한 자리가 났을 때가 있었는데 영주가 너까지 데려오지 못하면 움직일 수 없다고
그랬었고. 이번에는 반대야, 네가 결심하고 이 일만 받아들이면
네 엄마까지 데리고 올 수가 있어. 네가 알아서 잘 챙기기는 하겠다만 어쨌든 이리 넘어오면 영주에게
더 나은 약을 줄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오늘 이 법석을 떤 것은 너한테 꼭 직접 해야 하는 말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여겨주렴.”
이 사람은 약을 더 먹어야 하는 게 엄마라고 알고 있구나, 하고 이심은
생각했다. 거기까지밖에 알 수 없었다. 엄마가 아빠를 위해서
거짓말을 한 것인지, 단지 경제적인 도움을 구하며 사정을 대충 얼버무린 것인지, 도움을 받았다면 어느 정도였는지 파악하고 있지 않으므로 그 점에 관해서는 말을 보태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제가 뭘 결심해야 되는데요?”
서안은 이심을 똑바로 바라보며 눈을 맞췄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전하는
것은 비밀의 무게였고 이심은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안은 입을 열기 전에 이심에게
바짝 붙어 섰다.
“내년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총이 돌아올 거야. 그러고 나면 전국에 격리 시설이 계속 늘어날 거고. 그중에는 아무래도
교도소가 많은데, 교도소 특성상 전담 주치의가 필요하다고해. 경력은
지금 너 정도면 충분하고. 지금에 비하면 대우가 좋은 건 말할 것도 없어.”
“경총은 그렇다 치더라도 인구가 계속 줄고 있는데, 교도소가 갑자기 왜 늘어나요? 근거가 있는 말씀이세요?”
“너를 여기까지 불러놓고 내가 괜한 얘기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 서안이 마른세수를 했다.
“경총이 다시 와서 치안을 망칠 만한 사태를 일으키기라도 할 거라는
말씀이세요?”
“치안이 그대로라도 범죄자는 더 만들 수 있다는 거다. 결국 범죄자가 늘면 치안도 나빠지겠지만.”
“잠시만요, 일부러 범죄자를
늘린다고요?”
“반대 의견이 없었던 건 아니야. 지자체장들
중에도 경총이 총리직에서 내려온 사이에 어떻게든 브레이크를 걸어보려던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행정이 마비되도록 특별감사를 해대는데 당해낼 수가 없지. 패가망신했다는 소리를 듣도록 소송을 걸어대는걸. 그 옛날 빨갱이라고 뒤집어씌우던 사람들 솜씨 그대로야. 일단 지목하고서
이유는 갖다붙이기 나름이거든. 방지법을 왜 만들었겠니. 작심하고
들이밀면 아무도 못 빠져나가는 법이 필요했던 거지.”
“지금 하시는 말씀을 제가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거 하나만 확실히 알면 돼.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는데 못 막았다는 거.” 서안이 이심의 어깨를 붙들었다. “심아, 지난 십 년보다 앞으로 십 년 동안 더 많은 게 바뀔 거야. 영주 데리고 이쪽으로 넘어와. 올 수 있을 때 와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