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의 첫째 주 월요일 조례에서 팀장은 시립 수목원의 부대시설로 개장했다는 봄 체험관의 모바일 입장권을 전송해주었다. 정부가 공공의에게 특별히 선사하는 복지 혜택이라는 그의 부연 설명에 팀원들은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하다못해 가족 수에 맞춰주는 것도 아니고, 일괄적으로 두 장을 준대요?” 최선생이 나섰다. “경총 전보다도 더 짜게 구는 것 좀 봐. 암튼, 다 같이 들고 일어나야 한다니까요, 정말.”
“참, 우리 최선생님은 대인의 풍모라고 하죠, 왜. 그런 게 있으셔.” 팀장이
진심이라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니, 저
같은 소인배는 이번에 복지부랑 질병청 반토막 난 거 보고 쫄아서, 우리 막내 다 키울 때까지는 그저
나 죽었소, 하고 다니자, 그러고 있는데. 어쩜 저렇게 한결같으신지. 내가 최선생님의 그 스케일, 항상 존경하는 거 아시죠?”
“아유, 존경까지는 됐어요, 팀장님. 부담스러워.”
이심은 최선생의 너스레에 웃음이 새어나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여기에서
편을 들어주면 팀장의 말만 더 길어질 게 빤했다. 게다가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것보다는 무엇이라도 받는
게 낫다 싶기도 했다. 여느 때처럼 적은 값이라도 받고 팔 셈이었는데 고민이라면 두 장을 모두 팔아치울
것인가, 기분 전환 겸 최선생네 모녀를 따라가서 한 장을 써볼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팀장은 이심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올해부터는 공공기관에서 받은 입장권과 상품권을 현금화하는 것도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김이 샌 이심은 며칠간 봄 체험관의 입장권을 완전히 잊고 살았다. 그러다
충동적으로 모영에게 동행을 권하는 메시지를 보낸 것은 토요일 밤에 찾아온 허리 통증 때문이었다. 오후
내내 속으로 십 분만 더, 십 분만 더, 하면서 화살표 게임에
시간을 죽인 것도 모자라 찌릿한 통증마저 느끼자 내일은 집안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다짐이 들었는데, 가볍게
불러낼 사람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최선생은 이미 딸과 다녀온 후였고, 엄마는 확장 현실 기반의 체험관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도회에서 만난 가족들 중에 연락을 하면 자칫 나들이 이상의 의미로 해석할 확률이 높았다.
삼십대 중반이나 되었건만 변변한 친구도 가지지 못한 것인지, 삼십대
중반이나 되었으므로 친구 관계를 유지할 에너지가 남지 않은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가볍게 연락을
해볼 만한 사람이라고는 낭랑한 목소리에 외자 이름을 가진 바텐더 모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한 달 가까이
연락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만나자는 말을 꺼내는 데 무료입장권이라는 핑계거리는 제법 요긴하게 쓰였다.
식물원에서 체험관으로 이어지는 길은 양쪽으로 홀로그램 벚나무가 나란히 늘어선 눈부신 벚꽃 터널이었다. 이심은 터널의 절반쯤 왔을 때 먼저 다녀간 최선생이 전해준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벚나무 가지를 향해 길게 숨을
내쉬어보았다. 그러면서 모영에게도 따라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연분홍
꽃잎으로 가득하던 홀로그램은 두 사람의 입김이 닿은 부분부터 맑은 보랏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통로 전체가 등나무 덩굴로 바뀌는 모습을 보며 모영은 따라오기를 잘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 일에
관한 후회도, 앞으로 벌어질 일에 관한 불안도 침범할 수 없는 순간에 지을 법한 미소를 지었다. 이심은 이제 희미한 흔적으로만 남은 봄을 체험하듯이, 이렇게 웃을
줄 아는 사람과 한집에 사는 일을 체험해볼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등나무 덩굴을 지나 체험관 내부로 들어서자 안내를 맡은 안드로이드가 환영 인사를 건네며 입장권을 확인했다. 이심의 어깨 정도 오는 키에 오동통한 체형, 맑은 상앗빛 피부를
가진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진달래에서 따온 ‘달래’라고 소개했다.
“달래라고 하면 나물이 더 먼저 떠오르는 분도 계실까요? 봄나물이 풍부하던 그때를 생각하면 차오르는 안타까운 마음도 제가 달래드릴게요.”
달래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안내용 안드로이드의 상냥하지만
연령대가 특정되지 않는 목소리라든가, 막연한 반감을 가진 이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건네는 싱거운
농담에는 익숙했지만, 달래는 말투가 유독 리드미컬해서 듣는 것만으로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그 점을 칭찬하자 달래는 “어머,
자꾸 봄바람을 맞아서 그런가봐요!” 하더니 두 사람을 파스텔 톤의 키오스크 앞으로 이끌었다.
“저희 봄 체험관에서는 가상 현실과 증강 현실을 망라한 확장 현실
기술을 바탕으로 생명력으로 넘쳐나던 과거의 봄 풍경 속에서 짧은 소풍과 어트랙션을 즐기실 수 있답니다. 식물원에서
직접 공급되는 꽃과 나무의 에센스를 통해 생생한 향기가 더해져 많은 관람객에게 호평받고 있어요.” 달래가
노래하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어트랙션 한 가지, 소풍
삼십 분으로 구성하면 추가 비용이 없죠?” 이심이 물었다.
“네. 맞아요! 어트랙션은 고르셨나요? 스릴을 즐기시는 분에게는 봄 동산 슬라이드를, 풍경을 차분히 즐기고 싶으시면 열기구를 권해드릴게요.”
열기구 체험은 최선생도 추천한 프로그램이었다. 최선생은 이곳에 다녀온
후에 일괄적으로 입장권 두 장을 지급한 일을 다시 언급하며 국가가 쪼잔하게 군다고 치를 떨었는데, 그만큼이나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는 딸과 어트랙션을 즐기다보니 추가 금액을 내고 빅5를 전부 이용하게 됐는데, 그중에서도 개나리와 진달래로 물든 꽃동산을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경험이 짜릿한 동시에 어딘가 마음을 미어지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고 전했다.
“마음이 미어진다는 건 어떤 감정일까요.”
달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멀티 글래스를 가져오는 동안 어트랙션 예고 영상을 보고 원하는 것을 선택해달라며
화면을 터치했다.
첫번째 영상은 옛 유행가를 배경으로 즐기는 추억의 VR 게임, 비트 세이버였다. 비트에 맞춰 베는 대상이 다면체에서 활짝 핀 색색의
꽃으로 바뀐 모습이었는데 플레이어가 가까이 다가온 꽃을 향해 손끝을 뻗으면 꽃잎이 떨어져나가며 사방으로 흩날렸다.
이심은 어렸을 때 헬멧처럼 묵직하게 머리를 누르던 헤드셋을 착용하고 게임을 했던 경험을 떠올리고, 모영에게
VR 멀미를 겪어본 적 있느냐고 물었다.
“없는 것 같은데요.”
“저는 좀 심했어요.” 이심이
말했다. “컨트롤러를 휘두르면서 신나게 게임할 때는 모르다가 벗고 나면 은근하게 울렁거리는 게 몇 시간씩
가고 그러더라고요.”
“알 것 같네요. 컨디션
별로인 날이면 등굣길 버스에서 항상 머리가 띵했거든요.” 모영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직접 운전하는 사람은 멀미가 안 난다는 얘기 듣고 진짜 그런지 궁금했었는데.”
이심은 자기도 그런 얘기를 들어본 기억이 난다며 드라이브 어트랙션 소개 영상을 클릭했다. 화면 속 커플은 유채꽃밭의 샛노란 물결과 에메랄드빛 바다 사이의 해안도로를 달리는 날렵한 스포츠카 안에서 환호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모영은 운전해본 경험이라고는 오직 게임밖에는 없다고 말했고, 그 점은
이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심이 운전 어트랙션을 체험한다면 보조석에 앉기보다는 운전대를 잡고 싶은 쪽이냐고
묻자 모영은 그렇다고 대답했는데, 자신도 마찬가지이니 양보해줄 수 있겠냐고 한번 더 묻자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좋다고 대꾸했다.
“성격이 너그러운 거예요, 아니면
포기가 빠른 거예요?” 이심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너그러움과 포기라.” 모영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건 둘 다 아닌 것 같아요. 고마워서
그러죠. 가족 말고 누가 저를 이렇게 챙겨준 거 처음이거든요.”
예상 밖의 대답이었지만 이심은 모영에게 연락하기를 잘했다고 여기며 안도했다. 그러고는
어트랙션 선택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역시 다들 추천하는 열기구를 타자고요. 기회는 한 번이니까, 허탕 치지 않게. 향기도 즐길 수 있다니까 벚꽃 동산보다 매화 마을로 가면 어때요?”
“네.” 모영이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저는 다 좋아요.”
어트랙션을 결정하자마자 달래가 기다렸다는 듯 다시 둘 앞으로 다가왔으므로 이심의 입에서는 예측 능력을 탑재하고
있는 거 아니냐는 농담이 나왔다. 달래는 통통한 팔을 우아하게 흔들며 “하아, 그럴 수 있었는데 제가 자꾸 펌웨어 업데이트를 놓치는 바람에……” 하고 받아치며 윙크했다. 그러고는 변함없이 노래하는 듯한 혹은 느리게
랩을 하는 듯한 어투로 사전에 보낸 링크를 통해 전달받은 시력과 얼굴 골격 스캔 정보에 맞춰 멀티 글래스를 준비했다고 전했다. 멀티 글래스도 중요하지만 메이드로 근육 신호를 전달하는 것을 빼놓으면 안 된다며 두 사람의 메이드를 꼼꼼하게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 그럼, 매화 마을에서 만물이 깨어나는 계절을 느껴보세요! 나비를 따라가시면
열기구가 내려올 거예요.”
달래가 열어준 문 안쪽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이심은 절로 깊이 숨을
들이쉬게 되었다. 거대한 솜사탕 속으로 걸어들어온 듯한 달콤한 향기를 온전히 음미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아랫배까지 부풀어오르도록 길게 호흡을 이어가는 동안에도 후각에만 집중할 수는 없었다. 어떠한 오염이나 변질도 침범할 수 없는 낙원의 한 조각을 떼어온 것만 같은 풍경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서였다. 낙원의 이미지를 떠올린 것은 이심만이 아닌 듯 모영은 중세의 명화 속에 복숭앗빛 볼을 가진 아기 천사가 떠다니는
풍경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런 곳에서는 어떤 향기가 날까 궁금했는데 방금 알게 된 것 같다면서.
흐드러지게 핀 매화로 가득한 야트막한 꽃동산은 온통 향기로운 눈송이로 뒤덮인 듯했고, 이심과 모영의 입에서는 번갈아가며 한숨에 가까운 감탄사가 새어나왔다. “나는
어렸을 때 이런 계절을 직접 보면서 자랐는데 우리 딸은 이런 데가 아니면 봄이 얼마나 찬란한지 평생 모르고 지나가는 거잖아. 그러니 마음이 미어졌지”라던 최선생의 말을 이심은 그제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심의 마음속에서도 그간 잊고 살았던 것과 영영 잃어버린 것들이 뒤섞여 빙글빙글
돌며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한 무리의 흰나비를 먼저 발견한 것은 모영이었다. 이심은 매화 사이로
몸을 감춘 나비를 찾지 못하다가 나비가 홍매화 위를 맴돌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알아챘다. 훈훈한 바람이
불자 다시금 달콤한 꽃향기가 진해졌고 나비들은 이윽고 두 사람의 코앞까지 날아왔다. 나풀거리는 움직임이
이끄는 대로 꽃길과 대숲을 지나 모퉁이를 돌자 샛노란 열기구와 그 앞에 선 달래가 보였다. 달래는 양손을
흔들며 “이렇게 또 뵙네요.” 하고 말했다. “둘러보니까 어떠셨나요?”
“코끝이 찡했어요.” 이심이
대답했다.
달래는 손끝으로 자기 얼굴 한가운데를 짚더니, 배운 적 있는 말이라며
기쁜 듯 웃었다.
열기구의 바구니는 셋이 서자 꽉 찼다고 느낄 정도의 너비에 이심의 허리까지 오는 높이였다. 이륙이 시작되자 달래 주변을 맴돌던 흰나비는 어느새 흩어졌다. 이심은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상공에 올랐을 때 누군가 한 명쯤은 뛰어내려보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랬을 때 지금 보이는 이 세계는 멈출까. 아니면 부서져내리거나
구멍이 뚫릴까. 그도 아니면 예상 가능한 변수이므로 신속하게 수용하고 수정될까. 이심이 묻자 달래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종 있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정말요?” 모영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여기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이 있어요?”
“아니, 아니요.” 달래가 급히 양손을 좌우로 흔들며 모영을 안심시켰다. “열기구에서
탈출하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하시는 고객님이 종종 계세요.”
“어떻게 되는데요?” 이심이
다시 물었다.
달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그건 규정상 말씀 드리지 못해요.”
이심은 헛웃음이 나왔지만 규정에 매여 있는 처지는 마찬가지였으므로 더 조르지 않았다. 순식간에 지면에서 멀어지면서 대화를 이어나갈 여유를 잃기도 했다. 달래가
상공 10m 위를 지난다고 알릴 즈음에는 아찔한 높이에 공포를 느끼고 무게중심을 낮추기 위해 자세를
구부정하게 기울이게 되었다.
“오늘은 바람이 아주 잔잔한 편이니까 안심하세요.” 달래가 이번에는 느긋한 어투로 말했다.
다행이라고 대답하는 모영의 말끝이 떨렸다. 그녀 역시 달래의 농담에
장단을 맞출 여유는 없는지 엉거주춤 선 모습이었다. 이 높이는 실제가 아니다. 데이터의 중첩에 불과하다고 되뇌며 이심은 눈을 감았다. 그러자 곧장
긴장감이 사라졌지만 다시 눈을 뜨니 두려움이 되살아났다. 바람이 불어서 열기구의 바구니가 흔들리자 양팔에
소름이 돋았다.
“누가 아주 거대한 붓에다 하얀 물감을 푹 찍어서 이쪽으로 한 번, 저쪽에도 한 번 공들여 흩뿌려놓은 것처럼 보이네요.” 모영이 말했다.
이심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붓이라는 말을 듣자 흩뿌려진
하얀 점 사이사이에 분홍과 녹색의 리듬을 더하는 거대한 파스텔이 떠올랐다. 달래는 아직도 많이 무섭느냐며
이심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조금만 용기를 내서 오른쪽으로 멀리 한번 내다보세요.” 달래가 말했다. “이제 섬진강이 보일 거예요.”
달래의 손에서는 체온을 느낄 수 없었으나 약간의 용기를 내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이심이 몸을 틀자마자 달래는 소풍 장소에 가기 위해서 섬진강을 건널 것이라고 알렸다. 변함없이 흥얼거리는 듯한 어투가 이번에는 다소 얄밉게 들렸는데, 고도가
급격히 높아지며 몸의 중심이 등줄기를 따라 아래로 쑤욱 쏠리는 느낌에 질려 이심은 제대로 대꾸도 하지 못했다.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그럼에도 열기구에서 내릴 때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관람 후에 좋은 후기를
부탁한다는 달래의 당부에는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섬진강변 벚나무 그늘에 펼쳐진 널찍한 시트가 더없이
반가웠고, 강변 산책을 미루고 우선 앉아서 쉬자고 모영을 이끌게 되었다.
시트는 얇아 보였지만 다행히 바닥은 푹신했다. 손깍지를 하고 눕자
은은한 연분홍 빛깔의 벚꽃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꽃에 대해서 별로 아는 건 없지만,
매화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시기는 좀 다를 텐데 말이에요.” 이심이 말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맞아요. 차이가
날 거예요.” 옆에 앉은 모영이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시 뒤에 이심도 몸을 일으켜 앉았다. 강변에는 그들이 앉은 자리와
멀찍이 간격을 두고 드문드문 행락객들이 보였다. 도시락을 먹거나 캐치볼을 하는 그들은 일렬로 늘어선
벚나무처럼 풍경의 일부로 마련된 모양이었다. 모영은 섬진강 표면의 윤슬을 가리키며 다시금 거대한 붓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곳을 매만진 거대한 붓이 강 위에 영롱한 빛 자체를 묻혀서 흩뿌려놓은 것 같지 않느냐면서.
“그러게요.” 이심이 동의했다. “빛이 쏟아지는 밝은 데서 보니까 확실히 좋네요. 전에 혼자 에르데
찾아가면서는 오랜만에 메이드 프로텍트 기능을 최대로 켰었거든요.”
“위치가 좀 그렇죠. 여자
손님들은 둘씩 오는 분들도 가끔 그렇게 얘기하세요. 심박수만 뛰어도 자동으로 알림이 가는 시스템이 없었으면
겁나서 못 왔을 거라고요.”
“저는 혼자 가정을 방문하는 일이라 심박수 정도는 항상 켜둬요. 이제 메이드 없이는 못 살 것 같은데, 데이터세 낼 때는 속이 쓰리죠.”
모영은 세금을 언급하자 윽, 하며 가슴을 푹 찔린 것 같은 포즈를
취했다. 더불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는 모영 뒤편으로 희고 다리가 긴 새가 강의 저편을 향해 날아올랐다. 모영은 새가 사라지는 방향을 바라보다가 오늘 자기를 데려와주어서 고맙다고 한번 더 말했다. 그러면서 고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에 처음으로 확장 현실을 체험했던
일을 얘기했다. 그때 그녀가 선택한 것은 우주선에 탑승한 이의 시점으로 지구 밖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체험이었다고 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처럼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느낌은 아니었어요. 헤드셋이 딱 맞지 않아서 다시 써도 들뜬 느낌이 들었거든요. 시간도
한 삼 분쯤? 짧기도 했고요. 그런데도 아주 강렬했어요. 그런 거 있잖아요. 머리로만 알고 있던 걸 진짜로 받아들이게 되는
느낌이요. 그날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무한한 우주 속에 희미한 푸른빛으로 빛나는 연약한 별, 그 안의 티끌 같은 인간의 존재. 그런 거요?” 이심이 물었다. “어떤 식으로든 지구 밖에서 지구를 보는 것만큼
강렬한 경험도 없다는 얘기는 들은 적 있어요. 그러고 나서 너그러워지셨나보구나.”
“제가 딱히 너그러운 사람인 줄은 잘 모르겠지만,” 모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맞아요,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티끌 같은 존재더라고요. 원래도 알고는 있었죠. 그래도 그걸 온몸으로 느껴본 게 참 좋았어요. 마음이 한결 편해졌거든요. 왜 나는 이렇게 시시할까 괴로워할 필요가
없는 거잖아요. 원래 그런 거니까, 너무 당연한 거니까요.”
“왜 그렇게까지……” 이심은
잠시 말을 멈추고 더 나은 질문을 찾아보려 했지만 빤한 질문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어릴 때 자꾸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일이 있었어요? 아, 참고로 저는
어릴 때 항상 부모님이 싸우는 거를 보면서 자랐어요. 저렇게는 안 살 거라고 생각했고요.”
모영은 잠시 말이 없더니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던 자세를 바꾸어 양쪽 다리를 쭉 뻗었다. 멀리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 갑자기
사촌들이랑 같이 살게 됐어요. 제 성격이 이렇게 쭈글쭈글한 게 다 걔들 탓이라는 건 아니지만, 뭐 영향은 있겠죠. 어쨌든 지금도 같이 살아요.”
“오래됐네요.”
모영은 다시 한번, 이번에는 들릴락 말락 한 조그마한 목소리로 윽,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십 년이 넘어가네요. 우리 어릴 때 처음으로 펜데믹 왔었을 즈음부터니까요. 그때 저희 엄마는 싱글맘에 프리랜서 기획자셨는데, 일이 거의 끊기다시피
했거든요.”
“저런, 저런.”
“버티다 버티다가, 외가에
싹싹 빌면서 컴백하신 거죠. 원래는 엄마가 본가랑 거의 절연에 가까운 상태로 지냈었는데 말이에요.”
당시 외가에는 삼 년 전에 이혼하고 딸과 아들을 데리고 온 삼촌네 세 식구가 먼저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하여 엄마와 단둘이 지내던 모영은 별안간 일곱 명이나 되는 대가족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다고 했다. 외가는 낡았지만 이층 단독주택이었으므로 일곱 명이 살 만한 공간은 충분했다.
그 집에는 모영과 엄마가 함께 쓸 수 있는 방이 있었고, 학원에 다녀와서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으며 늘 그날 새로 지은 밥과 국이 있었다. 상추가 자라는 화단 옆으로 당시에 즐겨
타던 킥보드를 세워둘 공간도 넉넉했다. 그러니 꼭 필요한 것은 거의 갖춰져 있었던 셈이라고 모영은 말했다.
“하나만 없었죠. 제 마음의
평화.” 모영이 웃었다. “그때는 그런 표현은 몰랐지만요. 갑자기 다 낯설고 어색하고 우울해서 킥보드를 탈 마음도 안 들더라고요. 그랬더니
이때다 싶었는지 사촌오빠가 빼앗아갔고요.”
버젓이 할아버지가 보는 앞이었지만 할아버지는 제재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할머니는
늘 세 아이의 식사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매일 장을 보고 나물을 다듬고 밥을 지으면서 할머니는 한탄했다. 남편 복이 없는 여자는 자식 복도 없다더니 두 자식이 다 변변치 못해서 말년에 고생을 뒤집어썼다고, 관절 마디마디가 안 아픈 데가 없다고. 그러나 할아버지가 음식을
배달시켜 먹자고 권하는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모영은 그때 이미 혼자 라면을 끓이고 김밥을 사다 먹을 수 있었지만 할머니 앞에서는 어림없었다. 그리하여 어린 시절 모영에게 집밥이란 곧 한탄과 같은 말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지는 앓는 소리가 그나마 잦아드는 것은 반찬 없이 내는 솥밥을 짓는 날뿐이었다. 할머니는
겨울이면 돼지고기 안심과 콩나물, 묵은지를 썰어넣어 이북식 콩나물밥을 자주 지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밥은 밥그릇이 아닌 국그릇에 가득 담아주었고, 늘
귀가가 늦어서 집에서 저녁을 먹지 않는 엄마도 콩나물밥만큼은 맛을 보곤 했다.
“한번은 엄마가 밤 열시가 넘어서 콩나물밥을 먹는데, 어깨가 너무 굽어 있는 거예요. 전에는 안 그랬는데, 우리 엄마가 정말 아등바등 고생하는구나 싶었어요.”
딱 이삼 년만 버티고 중학교는 원래 살던 동네로 보내주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모영은 그 순간
깨달았다. 전과 달리 구부정해진 어깨가 애처로워서 불평을 입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그날 이후로 모영의 목표는 언제나 한 가지였다. 무신경하고 경계선
없이 내뱉는 말들, 진력이 나는 한탄, 반복되는 충돌이 없는
적은 인원의 가족으로 돌아가는 것. 몇 해가 지나 또다시 찾아온 팬데믹 이후 엄마가 독립을 완전히 단념한
듯 보였을 때도 모영은 언젠가는 이 대가족에서 벗어나리라 굳게 다짐했다고 했다.
“그럼 무도회에 일하러 가는 게 아니라 참석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심이 물었다.
“글쎄요. 저한테는 구조보다
숫자가 중요하거든요.” 모영이 곧장 대답했다. “자기들끼리도
매일 싸우면서 저를 괴롭힐 때만 한마음으로 뭉치던 사촌들이랑 같이 커서 그런가봐요. 구성원을 아무리
열심히 고른다고 해도 여럿이 사는 집에는 평화가 없을 것 같아요. 혼자 사는 일은 능력이 안 될 테니까
둘, 많아도 셋? 그 이상이 되면 매일 집에서 하나쯤은 괴로운
일이 생길걸요.”
이심이 말없이 강 너머에 시선을 던지고 있자 모영은 집합가족 편입을 결정했느냐고 물었고, 그렇다면 자기가 괜한 얘기를 입에 올린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
아직까지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세무 공무원과 요리에 능숙한 구성원이 함께하는, 샴푸의 요정을 갖춘 집에서 방을 혼자 쓰며 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이심은 이미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었다. 정훈 역시 그 점을 예상하고 있을 터였다.
샴푸의 요정을 직접 구경하던 날, 옥상에서 정훈은 자기 팔에 난 상처를
보여주었다. 그의 아버지가 던진 의자에 맞았을 때 생긴 것이었다. 정훈은
어릴 때 남학생 사이에서는 튀는 ‘정음’이라는 이름과 쌍둥이라는
이유로 늘 눈에 띄었는데, 무른 성격 때문에 자주 괴롭힘의 타깃이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팬데믹을 거치는 동안 종일 집안에 있는 일이야말로 지옥과 다름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지금도 이따금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스트레스를 받은 날이면 아버지가 만든 지옥에 여전히 갇혀 있는 꿈을
꾼다고 했다. 스스로 선택한 지금의 가족에 속한 후에야 집안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저희는 생존자라는 겁니다, 선생님. 저도 알아요, 저희
형이 사교성이라고는 없죠. 조금 없는 정도가 아니고, 아주
멍청한 소리만 해대죠.”
“아니 뭐, 그렇게까지
말씀은 안 하셔도……”
“아니요.” 정훈이 이심의
말허리를 자르며 단언했다. “멍청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걸요. 남들은
어릴 때부터 가족 안에서 익혔을 일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지금도 배우고 고치고 있는 단계니까요. 어눌하고
어설플 거예요. 저도 별반 다르지 않고요. 하지만 저희 형제가
우리 가족들에게 품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선생님. 우리 가족 안에서는 물론이고, 외부에서 가족을 위협하는 어떠한 폭력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도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고요. 유진씨한테 물어보세요. 유진씨가 집에 없을 때면 소리를 완전히 방치하면서 게임에만 넋이 팔려 있다가 화상까지 입힌 그 생부가 감히
이 집까지 찾아왔을 때, 그때 저희 형제들이 어떻게 나섰는지는 유진씨와 애월씨에게 한번 물어봐주세요. 그러면 아마 마음을 결정하시는 게 더 쉬워지실 겁니다.”
이심은 빌다시피 하는 정훈을 일으켜세웠다. 그러자 그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다음번에는 자신과 훈민이 만든 식사를 대접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 순간, 이심은 어째서인지 자기가 먹던 컵을 사용하던 훈민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자
아예 무도회에 갈 때처럼 집에서 컵을 챙겨오는 게 마음이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착안이야말로 실마리로 여겨졌다. 집합가족으로 한집에서 생활할 뿐, 약간의
번거로움을 감수하면 형제들과의 접촉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는 점이 명확해졌던 것이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염두에 두고 있는 가족이 있다고 말하자 모영이 이번에는 입 모양으로만 윽, 하는 소리를 내더니 건투를 빌겠다고 말했다.
“집합가족이라는 모델이 저한테는 좀처럼 와닿지 않지만, 선생님에게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을 거예요.”
대화는 거기에서 잘린 듯 끊겼다. 잠시 뒤 이심은 모영에게 할머니의
콩나물밥이 어떠했느냐고 물었다. 몇 분 동안 둘은 강바람에 한들거리는 벚꽃을 바라보며 솥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둘 앞으로 다가온 달래의 안내에 따라 그곳에서 나왔다.
멀티 글래스를 벗자 꽃잎으로 뒤덮인 세계가 사라진 자리에 특별할 것 없는 풍경으로 채워진 세계의 감각 정보가
쏟아져들어왔다. 건물 바닥의 격자무늬, 출구를 향해 뛰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 기념품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 유리창 너머 보이는 하늘빛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또렷했다.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게 평소보다 몇 곱절은 생생해서 몇 초간은 온몸이 얼얼한 기분마저 들었다. 출구 앞의 카페테리아에서
주문한 커피를 받아들었을 때까지도 생생한 오감의 여운은 남아 있었다. 여느 때처럼 커피맛은 싱거웠지만
그 밍숭맹숭한 맛조차 평소보다 명확하게 느껴진다고 이심이 말하자 모영도 동의한다며 웃었다. 그러더니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걸 보면 기술이 더는 발전할 수 없을 것 같아도 아직은 그렇지가 않은가봐요. 혹시 이런 도시 괴담 들어봤어요?” 하는 말을 꺼냈지만 이심이 어떤
얘기냐고 묻자 아니라고, 별 얘기 아니니 잊어달라고 손을 저었다.
모영이 실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고 메시지를 보내온 것은 그날 밤의 일이었다. 그녀는 체험관에서 나왔을 때 전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고 싶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비밀 유지 각서에 서명하고서 겨우 빠져나온 터라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어떠한 점을 발설할 수 없는지조차 적을 수 없지만, 공공장소 안에서는
‘비유각’을 언급하는 일 자체를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고도
밝혔다.
메시지를 읽고 또 읽으면서 이심은 정훈과 훈민이 공유하는 감정이 바로 이런 형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만큼이나 모영이 자신과 닮아 있다고 느꼈다. 이심 역시 떨떠름한 기분으로 비밀 유지 각서에 서명한 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채 함구해야 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일어난 것은 지난해 이맘때였다.